20030430060602-0508lovepeace_eurasiamorning유라시아의 아침 – 유라시아의 아침 – 유라시아의 아침, 2002

 

 

현재 진행형의 실험

‘유라시아의 아침’이라는 제목은 ‘어떤 명상음악가의 작품일까’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여기에는 웅장한 일출 풍광을 담은 음반 표지도 한몫하고 있다. 티벳에서 건너왔을 법한 정적이고 명상적인 음악들이 담긴 음반일까. 첫 곡 “유라시아의 아침”을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건반이 주도해 만들어 가는 고급스런 분위기,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몰라도 카랑카랑한 기타 연주. 오히려 ‘퓨전’에 가깝게 들리는 음악인데, 굳이 걸리는 게 있다면 묘한 심상을 자아내는 ‘공간감’ 정도랄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힘드니 한 곡 더 보자. 이어지는 “천년의 기다림”이야말로 ‘유라시아’ 운운하는 음반 제목에 어울리는 곡이다. 구슬픈 피리 소리, 따각거리는 퍼커션, 그리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여성 보컬은 분명 동양적이고 명상적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동양적인 음악들로 가득한 음반인가. 그렇게 단정하자니 기타의 세련된 리듬 워크, 자연스럽고 풍성한 리듬감, 건반의 반주에서 느껴지는 재지한 느낌이 판단을 가로막는다. 대체 누구의 작품이길래.

놀랍게도 음반의 주인공은 사랑과 평화를 거치며 훵키 기타의 선구자로 불리던 최이철이다. 그간 최이철의 음악 이력은 훵크나 퓨전 재즈와 같은 ‘미국 음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아이들(Idols) 시절에도 그랬고,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에도 그러했으며, 심지어 밤무대에서 연주할 때조차도 변함없었다. 그런 그가 왜 새삼스럽게 ‘유라시아’를 이야기하고 나선 것일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도 가 보았고 일본도 가 보았고 거기서 훵키한 스타일의 공연을 했는데 그런 무대에서는 차라리 뽕짝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 사람들은 워낙 연주를 잘 하니까 아예 우리 색깔을 확 가지고… 이 말은 뽕짝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닌 음악을 앞으로 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유라시아의 아침’은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에요. ‘동양 음악’ 분위기가 나는 음악이에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면 어디 가서 혹시 연주를 잘 못하더라도 이상하다는 반응은 듣지 않을 것 같아요. ‘동양 사람들이니까 동양 음악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죠.” – [weiv] ‘훵키 록의 혁신자 최이철과 그의 동료들과 나눈 ‘옛 이야기” 중에서

최이철의 이런 발언을 두고, “오리엔탈리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서두에서도 보았듯이, 최이철의 이 프로젝트는 자신의 근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간 선보인 최이철 음악에 동양적인 향취를 가미한 형태에 가까운데, 그것도 물리적인 접합이 아닌 자연스런 용해다. 최이철이 오랜 기간 펼쳐온 고유의 음악 세계가 이채로운 선법, 타악기, 에스닉한 피리 연주 등과 맞물려 독특한 흥취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최이철 음악과 동양풍 음악은 서로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음반의 정서가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일을 경계한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과 같은 연주곡은 최이철의 나일론 기타가 중심을 이루는데, 예의 훵키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신 고급스러움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 한편 민중가요 가수로 알려진 김가영이 노래한 “실크로드”와 “별 나그네”는 정갈하다싶은 키보드 반주만으로 하고픈 말을 다하고 있다. 이런 노래들은 정적이기는 하되 동양적인 면모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반면 ‘동양음악’이 승리를 거둔 트랙들은 한두 가지 음악적 소스를 무기로 ‘동양색’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역시) 김가영이 부른 “바람이 부르는 노래”는 자벌레 기어가듯 꺾이는 멜로디와 수금처럼 쳐낸 전주부의 기타가, 김정욱이 노래한 “길 위에서”는 처연한 피리 소리에 민요조의 보컬 파트가 ‘동양의 내음’을 물씬 풍긴다. 신촌블루스 출신의 김동환이 부른”유라시아의 전설”이나 “대지의 노래”도 ‘민요조 발라드’에 포함될 곡들이다. 또 “오 마이야”는 음반 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순간일텐데, 마치 GRP에서 만든 월드뮤직 같다면 설명이 될까? 기타가 리드하는 오밀조밀한 리듬 섹션에, ‘오 마이야’하는 기괴한 배킹 보컬과 피리, 타악기의 즉흥 연주가 더해지는 별스런 곡이다. 이런 곡들을 보면, 최이철이 동양 음악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 애썼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색적인 요소는 곡 내에서 한두 가지만 도입하고, 대신 자신의 장기인 ‘리듬’과 ‘고급스러움’은 온존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결과를 성공적이라 말해야 할까. 일단 판단은 유보해야 할 듯하다. 정작 최이철 본인은 이 음반이 ‘가요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본작이 갖는 의미가 감퇴하는 것은 아니다. 최이철은 자신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음악을 낯선 요소들과 무리없이 버무려냈다. 이질적인 음악을 결합함에 있어 누구나 ‘배율’ 조정에 애를 먹는 법일진대, 최이철의 결과물은 수준급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잡아먹지도, 잡혀 먹히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여담이지만 명상음악 애호가에게도, 그리고 퓨전 음악 감상자에게도 고루 만족스러울 만한 음악이란 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호의적인 평가는 “동양인이 동양적인 음악을 추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최이철의 이 실험은 ‘현재 진행 중’이며, 그렇기에 제대로 된 평가 역시 ‘차후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근데 다음 음반이 나올 수 있기는 한 걸까?) 20030520 | 배상록 [email protected]

8/10

수록곡
1. 유라시아의 아침
2. 천년의 기다림 – 노래: 김가영
3. 축복
4. 바람이 부르는 노래 – 노래: 김가영
5. 길 위에서 – 노래: 김정욱
6. 어디로 가는지
7. 별, 나그네 – 노래: 김가영
8. 꿈 – 노래: 엄인호
9. 오 마이야
10. 유라시아의 전설 – 노래: 김동환
11. 실크로드 – 노래: 김가영
12. 잃어버린 시간
13. 대지의 노래 – 노래: 김동환
14. 바람이 부르는 노래(연주)
15.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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