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26일 PM 2:00 과천 경마장 오리집
질문: 신현준, 최지선
정리: 신현준, 최지선, 송창훈, 김성균
특별 게스트: 김민규

 

20030429015523-0506interview_choi01

 

최성원(1954년 2월 9일생)이 들국화를 ‘전설적인 그룹’으로 부상시킨 인물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 들국화와 더불어 ‘우리노래전시회’라는 프로젝트 음반을 발표해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감성의 음악인들을 선보이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후일 몇 장의 솔로 음반을 비롯해 몇몇 가수의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패닉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유명한 인물임에도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들국화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는 생각보다 적다. 그 때문일까. 최근 그가 들국화의 카페(http://cafe.daum.net/march) 에 손수 ‘들국화 스토리’를 연재했다. 본 인터뷰에서도 장장 네 시간 이상을 할애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국화를 포함해 자신이 몸담은 과거의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전달이 선배 음악인의 소임이라고 역설하는 듯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형이 동생들에게 말하듯 그 특유의 반말체로 따뜻하고 친근하게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어법을 경어체로 바꾸었기 때문에 최성원 특유의 맛깔스런 어투를 느낄 수 없다. 다감하고 나긋나긋한 ‘반말’로 바꿔 읽으시길….

또 한 가지. 델리스파이스 김민규의 참석으로 더욱더 값진 자리가 되었다(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김민규 님의 질문은 전재하지 않고 편집했으며, 그의 질문은 따로 표시했다. 3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합동 콘서트 연습 때문에 일찍 일어선 관계로, 내용 흐름상 편집된 내용도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신 최성원, 값진 시간을 할애하신 김민규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평범해 보였지만 비수를 감추고 있던 젊은 시절

 

최근 본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들국화 다음 카페에 연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그곳에 쓰지 않으신 내용들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청운동에 살았고 휘문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동방의 빛의) 강근식 형의 후배이고 (4월과 5월의) 백순진도 동문입니다. 고려대 물리학과 73학번으로 입학했는데 1년 늦게 들어간 이유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몸이 많이 아파서 한 해를 휴학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최영섭 씨(주: 유명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라는 건 많이 알려졌는데 아버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네요. 혹시 아버님이 ‘딴따라’를 한다는 사실에 반대는 안하셨는지요? 아버님으로 인해 음악적 영향을 받으신 것은 있으신지요?
아버지는 나를 자유방임으로 키우셨어요. 내가 하는 일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피아노를 포함하여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아버지가 사 준 기타도 혼자 독학으로 배웠죠. 1980년에 ‘젊음의 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내가 피아노를 쳤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던데 아니에요.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은 김광민이었고, 나는 통기타를 쳤어요. 건반악기 연주실력은 예전에는 코드 누르는 정도였고 2000년 들국화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 정도죠.

 

고등학교 때까지 통기타로 어떤 곡을 주로 연주했나요?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피터 폴 앤 메리, 사이면 앤 가펑클 같은 포크 음악을 즐겨 들었고… 비틀스도 좋아했는데 [Abbey Road] 앨범부터 알았어요. 물론 (김)민기 형의 음악은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어요.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생활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놀면서 지내셨는지요?
1973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유명한 5인방이 있었어요. 나랑 이상훈(가수 이상열 동생. 뒤에 음악 활동 안함), 이승희, 김현식, 정광태가 몰려다니며 음주가무를 하며 ‘날라리’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김현식도 알고 지냈고… ‘김현식 스토리’도 사실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누군가 김현식 스토리를 썼던데 그건 너무 부실해요. 그때 (김)현식이가 머리 기르고 다녀서 우리와 동갑인줄 알았어요. 사실 (김)현식이는 1958년생으로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다녀서 그랬던 건데…

 

김현식 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른바 ‘신촌파’에 속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제에 신촌파에 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훗날 기획하신 음반 우리노래전시회를 두고 이른바 ‘신촌파들의 모임’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나는 신촌파와는 직접 관련이 없죠. 나는 굳이 말하면 ‘명동파’에 속했죠. 그때 명동을 놓아 두고 왜 신촌을 가겠어요? 그런 공식 명칭은 없었어요. 1980년대 초반 우리가 이태원의 밤무대에 서면서 조덕환이나 이영재가 하나둘씩 모이게 된 것이지만 신촌파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네요. 물론 신촌에서 술 마시고 음악 하는 친구들은 있었겠지만… 김현식도 그렇고 엄인호, 박동률 등. 그 선배로는 양병집, 박두영, 유지연 등이 있었죠. 유지연 형은 1973~74년경 내가 양병집 형과 함께 지낼 때 청와대 옆의 유명한 음악다방이었던 사랑방 다방에서 음악 DJ를 하고 있었어요.

 

김민규: 명동과 신촌이 달랐나요? 명동이 지금의 압구정동 같은 곳인가요? 또 명동과 무교동도 달랐나요?
그럼요. 그런데 신촌은 좀 학구적인 면이 있었고 명동은 날나리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압구정동같은 곳이죠. 무교동도 명동과 다르고… 그 당시 무교동에는 라이브를 하는 곳이 많았어요.

 

‘통기타 포크’를 말할 때 언급되는 세시봉이나 디쉐네에도 다니셨는지요? 아울러 그 당시 명동에 들락거리던 공간을 구체적으로 거명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세시봉이나 디쉐네에는 거의 가지 않았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르 시랑스, 내시빌, 오비스 캐빈에 다녔죠. 이런 라이브를 하는 곳 말고 음반을 감상하는 곳으로는 섬씽, 지중해, 예스, 록 등이 있었고, 한참 뒤에 생긴 곳인데 신촌 409(포 오 나인)도 유명했어요. 신촌역 주변에 최신 스타일의 카페 겸 음악 감상하는 곳이 몰려 있었죠.

 

409를 언급하셔서 물어본다면 당시 신촌에서 양병집이 운영하던 OX라는 곳이 있었고, 이곳이 ‘신촌파’의 집결지였다고 들었습니다. 또 박두영 씨도 카페를 하나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옥스’ 말이군요. 그 곳은 양병집 형이 이대생들 좀 꼬셔 보려고 좌대를 하나 만들어놓은 수준이었지요. 열평도 안 되는 ‘하꼬방’ 카페였어요. 박두영 씨는 내시빌파로 기억하는데요. 아무튼 신촌파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거에요.

 

 

녹음 세션과 라이브 연주 활동을 시작하다

 

처음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악 현장에 나서게 된 건 양병집 형이 자기 음반에 기타 세션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음반을 녹음할 때 통기타를 쳤죠. (양)병집이 형은 대학 1년떄부터 동네에서 우연히 봐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거든요. 1973년에 나온 양병집 2집인데(주: 발매연도로 치면 1집 [넋두리]이어야 하는데 본인이 2집이라고 회고했다. 혹시 발표되지 않은 음반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음반인지 확실치 않다). 나현구 사장이 있던 뚝섬 스튜디오에서 이 음반을 녹음했는데, 양병집 형을 따라가서 반주를 하던 나를 나사장이 눈여겨보고 월급제로 세션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세션 활동을 시작한 거죠.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배수연, 이런 분들하고 나하고. 원래 조동진 형이 하던 자리였는데, 그 형이 그만 두자 그 후임자로 제가 들어간 셈이죠. 물론 당시 녹음 세션 활동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이라기보다 아르바이트 차원이었어요.

 

대학시절부터 녹음 활동을 하면서 보내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녹음 활동 외에 다른 음악 활동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또 한 가지 일화는 르 시랑스에 자연스럽게 출연한 일입니다. 양병집 형의 반주를 해 주던 당시 이백천 씨가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해서 한 적도 있어요. 피터 폴 앤 메리의 “Puff”, 사이먼 앤 가펑클의 “Kathy’s Song”, “April Come She Will” 같은 노래를 불렀죠. 그리고 이 때 이장희가 DJ를 맡고 있던 ‘0시의 다이얼’에 반년 정도 매주 고정출연한 일도 있어요. 그 당시 그 유명한 프로그램에 음반도 한 장 내지 않았으면서 매주 고정 출연을 했어요. 이때가 1973년 겨울쯤 되었을 겁니다. 라디오 코리아를 운영했던 PD가 담당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1970년대 중반기까지 녹음 활동과 연주 활동을 하신 건데, 후일 1970년대 후반에 생긴 대학가요제에는 왜 출전하지 않으셨는지요. 같은 학교에 다닌 조덕환 님은 고인돌(코리아 스톤스)이라는 이름으로 197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가곡인 “날개”는 이영재 님의 곡이었고…
대학가요제는 내가 보기에 학예회였지 음악하는 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는 솔직히 (조)덕환이 거기에 출전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코리아 스톤스라는 그룹을 알기는 알았죠. 조덕환과 이영재가 있었고. 하지만 그때 난 그룹 사운드에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활동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죠. 그리고 막상 대학가요제가 열린 기간에 나는 군대에 있었어요. 중간에 휴학, 복학을 좀 하다가 3학년 마치고 입대했어요. 군대에 있을 때 “제발”,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사랑일 뿐이야”를 작곡했죠. 1980년에 발매한 이승희, 이영재와 함께 만든 음반도 내가 병장으로 근무할 때 녹음한 거에요.(웃음).

 

1980년에 음반을 함께 낸 이영재 님과 대학교 동창이고 들국화 1집에 참여한 조덕환 님과 당시는 어떻게 지냈는지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두 분이 듀엣으로 활동했던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덕환과는 오랫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였죠. 그리고 이영재는 같은 나이지만 학교는 고대 출신이 아니에요. 둘이 1980년대 초 조·이라는 이름으로 비원 앞의 한 카페에서 활동했던 일이 있습니다.

 

” 조용히 들어요”가 들어 있는 따로또같이의 2집. 음반에는 나동민 작사·작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성원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또한 1980년에 음반을 함께 내는 이영재, 이승희를 비롯, 훗날 들국화 멤버로 활동하게 되는 허성욱 등이 참여해 들국화로 가는 긴밀한 다리 역할을 하는 음반.

 

차제에 여쭤 보면 초기에 작곡한 곡들 가운데 “조용히 들어요”, “내가 찾는 아이” 두 곡은 ‘나동민 작사 작곡’으로 기록된 곳도 있고 ‘최성원 작사·작곡’으로 적혀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처음 쓴 곡이 “내가 찾는 아이”에요. 1973년이고 그 곡은 양병집 형한테도 보여줬어요. 그런데 내가 워낙 음악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 가기 전에 작곡한 곡들인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 “조용히 들어요”, “내가 찾는 아이”, “어린 왕자” 등을 나동민에게 주고 갔어요. (나)동민이는 내 6촌 동생이에요. 군대 가면서 동민이에게 부르라고 했는데, 그게 ‘나동민 작사·작곡’으로 된 모양입니다. 그후 내가 군대있는 동안 나동민이 강인원, 전인권, 그리고 이주원 형이랑 따로또같이란 그룹을 만들어서 이 노래들을 했다고 들었어요.

 

 

나의 음악은 록이 아니다”

 

국내 음악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악인은 누구인가요?
김민기 형, 그리고 조동진 형. 어떤 면에서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는 김민기 형을 비롯해 조동진, 한대수, 양병집 형 등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언더그라운드를 처음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대수 씨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1974년에 나온 음반이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죠.

 

그렇다면 ‘포크’를 좋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혹시 혹시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의 포크와 지금 말씀하신 ‘언더그라운드 포크’를 듣는 층에 따라서 약간의 편가르기같은 것도 있었나요. 예를 들어 한 편은 ‘순수 포크’이고, 다른 한 편은 ‘상업적 포크’라는 식의…
편가르기를 하는 부류들은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죠. 그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고…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민기 형은 밥 딜런과 피터 폴 앤 메리의 영향을 굉장히 받은 분이에요. 그건 양병집 형이나 서유석 씨도 마찬가지고.

 

최성원 님은 포크 계통 음악을 하셨다가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록을 접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포크를 좋아하는 사람은 록을 불편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성원 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난 지금도 록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포크를 ‘힘껏’ 하면 록이 아닐까? 하하.

 

김민기, 조동진 님과 만난 계기는 무엇인지요? 조동진 님은 신촌의 비잔티움이라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셨다고 하던데요.
김민기 형은 고교 시절 음악으로만 접하다가 대학 시절에 만난 적이 있어요. 바하의 악보를 주셔서 (사실은 악보를 잘 못봤지만) 엄숙히 건네 받기도 했죠.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서양 악기인 기타로는 우리의 가락을 결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내게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주: 김민기 님과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march에 술회되어 있다). 조동진 형은 역촌동 녹음실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나서 1975년 대마초 사건 이후로 세션 팀이 와해가 되어 버렸지요. 그후 강근식 형이 1970년대 말에 CM송을 제작하는 알파 프로덕션을 운영했는데(주: 알파 프로덕션은 처음에는 이종명과 강근식이 함께 운영하다가, 1976년 경에는 강근식이 독립해서 강 프로덕션(강 프로)을 경영했다), 조동진 형이 그곳에서 녹음 기사를 했어요. 저도 거기 들어가서 활동했죠 나도 CM 송을 몇 개 썼어요. 한 가지만 말하면 ‘이브껌’이 있어요. 작곡에 최성원, 녹음에 조동진. 하하하. 정말 코믹한 시대였어요.

 

“해태껌은 강근식, 아카시아껌은 김도향, 이브껌은 최성원”이네요(웃음). 그밖에 다른 포크 가수분들은 ‘대마초 파동’ 이후 대략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그 당시 윤형주 형은 김도향 형과 같이 서울 오디오라는 CM송 사무실을 냈어요. 거기서 히트한 CM송이 오란씨같은 것이죠. 지금은 연극배우인 윤석화가 부른 것이죠. 그리고 송창식 형은 마이 하우스같은 나이트클럽 무대에 계속 섰죠. 그리고 이장희 형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네요.

 

 

이승희·이영재·최성원의 ‘옴니버스’ 음반을 내다

 

이승희·이영재·최성원 [노래의 날개/그대 떠난 뒤에는/매일 그대와](서라벌 SRB 0004, 1980), 왼쪽부터 최성원, 이승희, 이영재.

 

이 음반을 기획하신 분은 누구시죠.?
이승희의 형인 이장희 씨입니다. 이때 (이)장희 형이 반도패션을 운영하면서 락컴퍼니라는 프로덕션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당시 거기에 사랑과 평화, 김현식 등이 속해 있었어요. 제가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반도패션 매장에 갔더니 ‘이 노래 어떠냐’며 들려준 곡이 사랑과 평화가 부른 “장미”였어요(“장미”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음반은 광화문의 LAB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어요.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이 스튜디오에서 김영동이나 장끼들이 녹음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 음반을 내놓고 1주일 후 형이 갑자기 얘기도 없이 프로덕션과 반도패션 모두 그만두고 도미했어요. 1980년도에 대마초 사건이 터져서죠 (주: 이때 사랑과 평화 멤버들이 구속되었다). (이)장희 형도 대마초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장미” 등의 작곡자로 되어 있는 이경희 씨는 이장희 님의 본명인가요?
아니죠. 이승희의 본명이에요. 그 당시에 (이)장희 형은 대마초 파동에 묶여 있어서 사랑과 평화의 “장미” 등을 모두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했어요. 예를 들어 김이환, 이경애, 이규형 이런 식으로 발표했죠.

 

이장희 님이 이 음반의 기획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장희 형이 판단하기에 그 당시 우리 또래 중에서 새로운 음악을 하는 이들이 우리 셋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옴니버스 성격의 음반이었는데 세 명 다 음악적으로 친해서 서로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가능했어요. 이거 가발인데 (하하하) 잘 안 보이나요? 말년 병장 때였으니 너무 머리가 짧아서요.

 

(웃음) 설마 가발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면 이 음반의 녹음도 광화문 LAB 스튜디오에서 한 것인가요?
녹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그떄가 처음으로 24 채널로 멀티트랙 녹음 기술을 배운 때였죠.

 

이 음반을 내시고 TV 활동은 하셨나요?
그때 (이)장희 형의 비서 같은 일을 하던 김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장희) 형이 도미할 때 그 사람한테 매니지먼트를 맡겼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젊음의 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죠. KBS의 이남기라는 사람이 PD를 맡았을 때인데, 매니지먼트를 맡은 그분이 그 프로그램에 꼭 나가야 한다고 해서 출연했어요. 그렇지만 TV에는 그 프로그램에 딱 한 번 나갔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이 음반의 연주인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없는데 누가 연주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매일 그대와” 중간에 나오는 솔로같은 일렉트릭 기타는 누구의 솜씨인가요? 이영재 님의 연주로 보입니다만…
그렇죠. 일렉트릭 기타는 (이)영재가 쳤고, (이)영재는 원래 일렉트릭 기타를 쳤었어요. 드럼은 배수연. 베이스는 조원익. 통기타는 우리 셋이 쳤어요. “매일 그대와”의 간주는 (이)승희가 만들었어요. 그리고 클라리넷을 연주한 사람은 이원재. 들국화 음반에서 클라리넷을 분 이원재와는 동명이인으로 이영재의 동생이에요.

 

세 명이 합동음반을 어떻게 작업했는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편곡은 자기 곡을 자기가 알아서 편곡하는 작업하는 식이었는지요? 아니면 밴드는 아니었지만 공작(共作)을 한 편이었는지요?
그룹을 하기에는 다들 각각의 개성이 너무 강했죠. 그렇지만 편곡은 같이 했어요.

 

그런데 앞면의 타이틀 곡은 이영재 님의 것이고, 뒷면의 타이틀 곡은 이승희 님의 것인데 조금 밀린 것인가요?(웃음)
아무래도 내가 그때 군바리라서 밖에 잘 못나오니까 두 사람이 알아서 했겠죠(웃음)

 

이 음반은 별로 홍보를 못하고 묻힌 음반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의하면 이승희의 1집(1980)에 수록된 “전화”와 이 음반에 실린 최성원 님의 “매일 그대와”가 라디오에서 종종 나왔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어땠는지요? 그렇게 조금은 히트했는데 혹시 어떤 제작자가 솔로로 음반을 내보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었나요?
이승희의 1집이 이 음반보다 먼저 나왔어요. 그렇지만 홍보는 거의 못 했고, 솔로로 음반을 내자는 제안도 그땐 없었어요. 그때 그 노래가 뜨긴 뜬 건지 난 전혀 모르겠어요. 라디오에 몇 번 나왔다고 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게다가 ‘방송에 나가서 비실거리지 않으면’ 음반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음반 내고 난 다음 전인권과 허성욱을 만났으니까.

 

이영재 님은 동방의 빛의 옛날 멤버들, 즉,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가 연주하던 스타일로 음악활동을 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지요?
이 음반 후에 활동한 밴드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나이트 클럽, 소위 ‘밤일’하는 밴드였지요. 오장동에 있는 나이트클럽같은 후진 곳에서도 활동했어요(웃음). 멤버는 이영재, 전인권, 허성욱, 그리고 드러머가 있었고, 베이시스트로 이영재의 동생 이원재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김현식이 확실히 밤무대 쪽에서 떴기 때문에 (김)현식이는 그냥 가수로 와서 노래했어요. 그때 이 팀 이름을 동방의 빛이라고 불렀을 거에요.

 

 

들국화가 개화하기까지 전사(前史)들 –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3인조 시절

 

3인의 ‘옴니버스’ 음반을 내신 후, 전인권과 허성욱을 모노(mono)라는 카페에서 만나셨다는 것이 ‘들국화의 정사(正史)입니다. 우선 모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최성원 님이 운영하신 곳이라는 문서도 있는데 부정확해 보입니다.
내가 아니라 양병집 형이 만든 라이브 카페에요. 나는 연예부장, 하하, 이른바 뮤직디렉터였죠. 모노의 위치는 이대 앞 신촌역(기차역) 쪽에 있는 파출소 골목 건너편 2층에 위치했는데, 한 50-60평 정도 되는 큰 규모였어요. 모노를 경영하면서 (양병집) 형은 대단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 라이브의 본산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죠. 그때 고정 밴드가 김광민이 있던 동서남북이었어요. 그때 (양)병집이 형이 ‘국풍 ’81’에 내보낼 생각으로 동서남북 음반을 제작했었지요. 당시 멤버는 김광민, 박호준, 이태열 등이었죠. 앞서 말했듯 김광민이 ‘젊음의 행진’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준 것은 당시 (양)병집 형이 동서남북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 내가 (조)동진이 형네 놀러다니면서 보았던 조동익을 DJ로 썼죠. 이때가 1981년 경쯤 될까요?

 

모노에서 얼마 정도 관여하셨어요?
모든 준비과정을 같이 했지만 양병집 형과 약간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개업 일주일만에 그만 뒀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의견 충돌이 있었겠죠. 그후 양병집 형은 내 후임으로 해바라기 이주호 씨를 앉혔어요. (조)동익이는 계속 있었어요.

 

양병집 님이 여러 개의 카페를 열고 닫기를 반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모노는 한 달에 한번씩 인테리어를 다 고쳤을 정도에요.

 

양병집 님은 자신의 음악 활동 외에도 여러 포크 음악인들을 발굴하신 분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성원 님이 아는 사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죠. 1970년대에 (양)병집이 형이 이연실의 음악을 다 만들어 주던 시절이 있었죠. 그리고 양병집 형이 3집 정도(주: 2집 [아침이 올 때까지](서라벌, 1980)로 보임) 할 때 정태춘을 발굴했어요. (정)태춘이는 진짜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 어떤 연줄도 없이 평택에서 왔어요. 정태춘이 (양)병집 형을 찾아와서 자기가 만든 곡을 보여줬는데 참 괜찮았어요. 그래서 (양)병집이 형이 녹음도 준비해주었는데 이 음반은 아마 발표가 되지 않았을 거에요.

 

흔히들 1981~2년경 전인권 님과 허성욱 님이 모노에서 둘이 노래를 하던 것이 들국화 형성의 단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면?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안 나지만, 쌀쌀하던 이른 봄날이었어요. ‘연예부장’을 그만둔 후 모노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전인권과 허성욱이 노래하는 걸 봤죠. (전)인권이는 통기타, (허)성욱이는 피아노를 맡아 “Take It to the Limit”, “My Life”를 노래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앞에서 언급했던 밤무대 밴드(주: 김현식을 비롯해 이영재, 전인권, 허성욱, 이원재 등이 있던 일명 동방의 빛)에 있다가 둘이 모노로 와서 듀엣으로 활동했던가 봅니다.

 

그 당시에 전인권 님과 김현식 님의 목소리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김현식의 초창기 노래들은 나중의 것과는 180도 달랐어요. 노래를 좀 한다고 생각하던 내가 김현식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안 하겠다’고 결심할 정도였죠. 그때 스틱스(Styx)나 앤디 깁(Andy Gibb) 등의 노래들을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맑고 힘이 있었죠. 반면 전인권은 허스키한 힘이 있었어요. 당시에 전인권을 보고 정말 노래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스타일이 전혀 달랐죠.

 

전인권 님은 그 전에 이미 솔로 음반(1980)을 발표한 상태입니다. 또한 이 음반의 앞면은 강근식 편곡. 뒷면은 이정선 편곡이던데 앞서 알파 프로덕션이나 강 프로덕션의 인맥을 고려한다면 최성원 님도 이 음반의 제작 과정에 관여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몰라요. 그때는 내가 전인권을 몰랐을 때였으니까요. 내가 알기로 따로또같이라는 음반을 냈었는데 그 음반을 홍보하는 와중에 (전)인권이가 따로 솔로를 낸 거죠. 결국 신곡으로 (전)인권이의 “맴도는 얼굴”이랑 나의 “매일 그대와”가 라디오에서 같이 나왔었어요. 라이벌이었죠. 하하.

 

그러면 전인권, 허성욱 님에게 최성원 님이 같이 활동하자고 먼저 제의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인가요?
그렇죠. 이때 저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사서 셋이 함께 밤무대에 서게 되었죠. 그 당시에 나는 이미 나름대로 들국화 1집의 밑그림이 되는 노래를 다 만들어 둔 상태였어요. 그때 내 생각으로는 (전)인권이와 (허)성욱이랑 같이 활동하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 그려놓으신 들국화에 대한 컨셉트는 ‘록 밴드’ 형태였나요, 아니면 따로또같이나 ‘이영재 이승희 최성원’처럼 느슨한 프로젝트였나요?
그때까지는 그렇게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 대신 서로 없는 부분에 대해서 보충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죠. 가령 그때까지 전인권과 허성욱은 한국 대중음악보다는 팝송에 심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녹음 과정이나 ‘가요’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 부분은 기존의 내 활동 경험으로 보완이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일 급했던 것은 일당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밤일’을 할 수 있는 포메이션을 만들었지요. 그때 나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거든요.

 

어쿠스틱 기타를 계속 연주했는데 왜 굳이 베이스를 연주하시기로 한 것인지요?
(전)인권이의 노래와 (허)성욱이의 피아노에 사운드에 베이스를 입히면 좋아질 것 같아서였죠. 이전에 한번도 베이스를 친 적이 없으면서 말이에요(웃음). 이때 처음으로 7만원짜리 베이스 기타를 낙원상가에서 샀어요. 하지만 줄이 한 줄 없을 때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이태원에서 일하다가 줄 끊어지면 그걸 사러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한 줄 끊어지면 나머지 3줄로 쳐야 했죠.

 

그때 ‘밤무대’에 설 때 드럼이 없어서 일하기 힘든 면은 없으셨는지요?
드럼이 있으면 오히려 일하기 힘들었어요. 드럼이 있으면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위한 백 밴드밖에 더 되었겠어요? 우리가 연주했던 곳은 춤추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감상하는 라이브 클럽이었기 때문에 드럼이 없는 편이 차라리 나았어요.

 

이때 세 분이 연습은 어떤 곳에서 하셨는지요?
그때 상도동에 있던 (전)인권이네 조그만 방에서 연습했어요. 뒤에 나오겠지만 나중에는 방배동에 있는 카페 건물 하나를 빌려서 연습하게 되었고…

 

 

이태원 라이브 클럽에서 빛을 발하다

 

다른 나이트클럽도 많은데, 왜 이태원으로 진출하셨죠? 또 이곳에서 일할 때 들국화(의 전신)를 발탁하거나 도움을 주신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신지요?
이태원에 간 것은 일자리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그때까지 다른 곳, 특히 밤업소는 잘 몰랐거든요. 그리고 누가 발탁했다기보다는 셋이 뭉쳐서 찾다 보니 그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어요. 제일 먼저 잡은 일자리가 이태원 크라운 호텔 옆에 있던 뮤직 라보(Music Labo)였어요. 유명한 TBC ‘쇼쇼쇼’ PD 조용호 씨가 만든 것이었죠.

 

그렇다면 조용호 님이 TBC가 KBS로 통폐합된 후 KBS의 [빅 쇼]로 자리를 옮겼다가 머잖아 KBS까지 그만 둔 다음 뮤직 라보를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맞는지요?
맞아요. 조용호 씨가 (전)인권이 팬이어서 거기서 일을 하자고 제안하셔서 시작했지요.

 

그 때 밤일을 한 다른 곳이나 연주한 레퍼토리도 좋은 정보가 될 것입니다.
이 무렵 이태원의 자마이카란 술집에서도 섰었어요. 몇십 개의 스탠드바가 합쳐져서 커다란 술집을 이룬 곳으로 각 스탠드바에 여자 바텐더들이 하나씩 상주하는 아주 웃기는 빠였죠. 당시 그 술집 사장이 만들어준 이름인 블루 코멧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전인권(통기타), 허성욱(피아노), 나(베이스), 이렇게 셋이었죠. 우리는 모두 하얀 남방에 멜빵에 청바지 차림으로 7시부터 시작해 새벽 4시까지 총 여덟 스테이지 정도를 했어요.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Midnight Blue”, 빌리 조엘의 “My Life”(이 노래는 정말 성욱이가 죽였죠)과 “Honesty”, 그리고 스틱스의 “Boat on the River”, 그리고 엘튼 존 노래, 그리고 누가 부른지 기억나지 않는 “Free Bird” 등(주: 자마이카에 대한 이상의 진술은 다음 카페 글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그때 심심풀이로 유일한 창작곡을 하나 했는데 “매일 그대와”였어요. 그 당시 웬일인지 (전)인권이는 “맴도는 얼굴”을 아주 싫어했어요. “고향초”나 “희망가” 같은 노래는 가끔 불렀지만(웃음).

 

최성원·전인권·허성욱 3인조로 이태원에서 언제까지 활동하신 건가요? 그 당시에도 이미 그룹의 이름이 들국화였다고 알고 있는데, 1984년에 나온 [우리노래전시회]에는 전인권, 최성원 등 솔로 이름으로 나옵니다.
밤일을 하던 중 어떤 팬, 그러니까 독지가가 800만원을 주겠다고 해서 음반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밤일’을 그만두고 방배동에 있는 망한 카페 하나에 월세로 들어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전)인권이랑 나랑 크게 다퉜어요. (전)인권이 집에도 우환이 있었을 거에요. 그래서 다 뿔뿔이 흩어졌었어요.

 

그때 일단 그룹이 깨진 셈이군요. 들국화의 ‘깨지고 모이는 역사’의 첫 사건으로 보입니다(웃음). 그렇다면 그후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인 상태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그렇죠. 나는 [우리노래전시회]와 내 솔로 음반을 제작하려고 했죠. 그 동안에 (전)인권이는 (조)덕환이를 불러들여 (허)성욱이랑 3인조로 활동을 계속했더라구요.

 

전인권·허성욱·조덕환 님의 3인조 그룹도 ‘밤무대 그룹’이었어요?
그 동안에 용평 페스티발에 출연하기도 하고 방송 출연 같은 것도 하면서 1년 정도 드문드문 활동했을 거에요. 그렇지만 ‘밤일’을 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우리노래전시회]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발굴하다

 

[우리노래전시회 I] 동아기획/서라벌(SRB 0142), 1984

 

전인권, 허성욱 님과 잠시 헤어지시고 혼자 계시던 동안 우리노래전시회를 기획하신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 음반에는 최성원 님이 작곡한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른 경우가 많던데요.
그동안 곡을 많이 써 두었어요. 그리고 가수들을 참여시키기 위에서 내 노래를 다 나눠 줘야 했어요. “그것만이 내세상”의 경우 처음에는 내 목소리로 작업을 했지만 아무래도 전인권에게 부르게 해야겠더라구요.

 

이 음반은 곡은 좋지만 음질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녹음 스튜디오는 어디였고 녹음 방식은 어땠는지요?
음반을 제조해준 서라벌 레코드와 이야기할 때 녹음실을 쓰게 해달라고 했고 세션비 지원을 해달라고 했어요. 녹음은 광화문 LAB 스튜디오에서 했고 8트랙 레코딩이었죠. 당연히 음질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죠. 비용을 아끼기 위해 드럼도, 베이스도 내가 다 연주했어요. 아주 중요한 곡, 도저히 내가 커버할 수 없는 곡들은 한 두명의 세션들에게 연주하게 했어요. 드럼을 연주한 안기승 씨가 그런 경우죠. 이 분은 따로또같이 2집(1984)에도 참여했고…

 

이 음반은 현재 동아기획에서 배급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김영(동아기획 사장) 씨와는 관련이 없나요?
당시에는 전혀 관련이 없었죠. 음반은 어느 정도는 팔렸지만 들국화 활동하면서 관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들국화 1집을 낸 다음 김영 씨가 이 음반을 인수했어요.

 

조동익 님은 양병집 님이 부르신 “이세상 사람이”를 작곡하고 음반에서 기타도 치셨는데 이때 이미 어떤날이라는 그룹이 실재했던 것인가요? “비둘기에게”를 수록한 시인과촌장의 경우도 실제 멤버는 하덕규 님 혼자라고 보이는데…
그때 당시엔 없었어요. (조)동익이도 첫 녹음을 한 거에요. 내 생각에 (조)동익이의 내성적인 성격에 혼자 활동하면 잘 안 될 것 같아서, ‘지금은 혼자이지만 이제부터 넌 그룹이다’라며 ‘어떤날’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하덕규도 그때는 혼자였지만 시인과촌장이라는 이름으로 하라고 했어요. 시인과촌장은 하덕규가 옛날에 하던 듀엣 이름이었거든요.

 

이 음반에서 노래를 부른 박주연 씨는 ‘그 박주연 씨’가 맞나요? 작사가로 유명한…
맞아요. 나중에 유명한 작사가가 되었죠. 하광훈과 콤비를 이루기도 했고. 이 음반의 “그댄 왠지 달라요”로 데뷔를 한 것이고 솔로 음반도 몇 장 발표했어요.

 

그러면 이제 문제의 들국화가 등장할 차례이군요?
좀 쉬었다 하기로 하죠. 이 집 오리 진흙구이 맛있죠? (웃음)

 

 

들국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다

 

계속할까요? 다시 들국화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3명이 들국화라는 이름을 짓고 활동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이름과 관련된 에피소드 같은 것도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서초동의 환타지아에서 일할 무렵이에요. 환타지아는 뮤직 라보를 경영했던 조용호 씨가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서 개업했던 곳이죠. 이주원 형, 강인원, 나동민이 하던 따로또같이가 SM이라는 곳을 빌려서 콘서트를 하겠다고 한 일이 있었어요(주: 잘 알려져있다시피 들국화의 음반이 나오기 이전 1984년에 따로또같이 2집 [그대 미움처럼/별조차 잠든 하늘에] 대성음반(DAS 0116)에서 허성욱 최성원 등은 이영재 이승희 조원익 김광민 등과 세션을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한테 게스트를 해 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어요. 그러니 이름을 만들어야 되는데 택시 안에서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별별 이름이 다 나왔죠. 그때는 택시 타고 다닐 때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들국화가 어떠냐?”고 얘기했고 (전)인권이랑 (허)성욱이가 들국화가 괜찮다고 해서 들국화로 정한 것이죠. 그때 진짜로 들국화 껌을 씹으면서. 그런데 그때 우리가 한참 놀러 다녔던 (조)동진 형에게 ‘밴드 이름을 들국화라고 지었다’고 얘기했더니 “야 무슨 오까마 이름 같은데?”하더군요. 오까마가 뭔지 알아요? 요즘 말로 트랜스젠더라고 하나? 하하. 그 당시에는 남자가 하는 밴드가 꽃 이름을 쓰는 게 이상했던 거예요. 그 말을 듣더니 “어 정말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전)인권이, (허)성욱이가 흔들리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무조건 우겨서 들국화로 하기로 했어요.

 

꽃 이름으로 굳이 지으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들국화 껌을 씹고 있었다’는 공식적 견해 이외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은 없는지요?
사실은 이제까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인권이가 스카이라크(Skylark)의 “Wild Flower”를 참 잘 불렀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들국화란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죠.

 

스카이라크는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가 있던 캐나다 출신의 밴드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면 ‘소프트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을 구사한 밴드로 알고 있는데 이들 외에 당시 들국화가 심취했던 음악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그 당시에는 우리 모두 핑크 플로이드 같은 음악에 ‘뻑이 간’ 상태였어요. 노란 잠수함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던 (하)덕규도 그랬고, 동서남북을 하고 있던 (김)광민도 그렇고.

 

그러면 아까 SM에서의 콘서트로 돌아가겠습니다. 들국화라는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정식 콘서트 무대에 선 자리로 보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는지요.
맞아요. 독자 콘서트가 아니라 처음으로 따로또같이의 게스트로 나간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중간에 게스트로 나오고는 공연이 그냥 끝나 버렸어요. 하하. 2부를 못한 거예요. 정말 황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뻑 가게’ 한 결정타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는데 (전)인권이가 이 곡을 이때 처음 불렀어요. 청중들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우리가 연주하는 것 듣고 뒤집어졌어요. 계속 앵콜이 나오니까 공연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은 거예요.

 

SM에서의 콘서트 외에도 그 무렵 들국화의 콘서트를 보러 온 청중들의 성향은 어땠는지요? 또 당시 콘서트를 하던 곳은 어떤 곳이 있었는지요?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음악 깨나 듣는 사람들, 즉, 팝 음악 아니면 음악으로 쳐주지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당시까지 고등학생들은 우리를 알 수가 없었죠. 접할 기회가 없잖아요. 라디오에서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콘서트를 제대로 할 만한 소극장이라는 것도 없었어요. 오죽하면 SM 같은 곳에서 콘서트를 했겠어요. 밥도 먹는 곳이라서 콘서트하려면 테이블을 다 치워야 했어요.

 

이때가 대략 1983년으로 보입니다. 그 뒤 (전)인권형과 대판 싸웠다고 했고… 그렇다면 앞에서 [우리노래전시회]를 녹음하면서 전인권 님을 다시 불러와서 노래하게 한 것이 들국화가 재결합된 계기가 되는 셈인가요? 그런데 그때 전인권 님과 허성욱 님은 조덕환 님과 함께 활동을 계속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4인조 들국화가 된 것인가요?
그렇죠. [우리노래전시회]를 녹음하는 데 한두 달쯤 걸렸는데 중간에 (전)인권이를 불러와서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르게 하고 다시 들국화가 시작된 것이죠. 나와 조덕환은 오래 전부터 친한 사이였어요. 학교도 같은 학교이고 알파 프로덕션의 CM송 사무실에서 일할 때부터 조덕환, 이영재와는 매우 친했죠. 그래서 (조)덕환이와 같이 하게 된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했어요. (조)덕환이는 독특한 보컬이었는데, 간단히 얘기해서 ‘가장 외국 애들에 가깝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어요. “Carry on till Tomorrow” 같은 것. 단지 기타리스트 출신은 아니기 때문에 밴드에서 리드 기타를 맡기에는 조금 미흡했죠. 1집을 녹음하면서 (조)덕환이의 기타에 대해서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그때 (조)덕환이는 굉장히 술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인권이랑 나랑 (허)성욱이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전)인권이랑 (조)덕환이랑 트러블이 많았죠.

 

그 당시 따로또같이나 해바라기 등의 음반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던 이영재 님이 들국화에 합류할 계획은 없으셨던가요?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앞에서 이영재 님이 동방의빛이라는 이름으로 전인권 님이랑 같이 연주한 일이 있다고 말해서 물어보는 말입니다.
– (이)영재는 그때 동방의빛을 하면서 (전)인권이랑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요.

 

다음 카페에 최성원 님이 쓴 글을 보면 믿음소망사랑이 연주하는 것을 처음 보셨다고 했는데 그곳은 어디이고 어떻게 그분들이 들국화에서 연주하게 되었는지요?
우리가 연주하던 이태원의 업소 ‘라이브’ 옆에 있던 업소에서 처음 봤는데 그때 믿음소망사랑은 5인조였어요. 최구희, 조준형 두 명이 기타를 맡고 있었고(조준형은 나중에 11월이란 그룹을 했죠), 베이스에 이환규, 보컬에 김동환(나중에 “묻어버린 아픔”으로 유명해졌죠), 드럼에 주찬권이었어요. 긴머리를 나풀대며 블랙 사바쓰, 우리가 좋아하던 이글즈의 노래 등 풍부한 레파토리를 자랑하는 정말 신선한 밴드여서 (전)인권이와 (허)성욱이, 나를 모두 감격하게 만들었죠. 그들은 곧 우리가 연주하던 라이브로 오게 되었어요. 당시 라이브에는 하덕규 밴드도 있었는데 기타에는 함춘호가 아니라 손민태가 있던 초창기 시절이었죠(주: 다음 카페의 최성원 님의 글 ‘둘국화가 믿소사를 만났을 때’를 함께 편집했다).

 

그 글에서 “우리 팀에는 없던 리드 기타, 드럼이 있어서 부러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던데 그러면 이때부터 들국화의 음반을 ‘밴드 형태’로 녹음을 하고 싶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찬권 님과 최구희 님을 음반에 세션으로 참가시켰는데 이런 과정에서 내부의 갈등 같은 것은 없었는지요?
음반을 낼 때 밴드 형태로 해야 되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어요. 드럼의 경우 우리 팀에는 원래 드럼이 없었으니까 (주)찬권이가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고, 기타의 경우 조덕환과 최구희가 같이 시작했는데 조덕환이 중간에 빠지게 된 케이스죠. 일단은 (조)덕환이의 기타가 녹음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축복합니다”의 간주 정도를 (조)덕환이가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했고, 나머지는 전기 기타는 최구희, 어쿠스틱 기타는 내가 연주하게 되었죠.

 

그렇지만 들국화 1집의 수록곡 가운데 조덕환 님이 작곡한 “세계로 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축복합니다” 같은 곡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함께 못할 정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요?
녹음은 어쨌든 끝났는데 그러고 나서 언젠가 한번 마찰이 있었고 그 시점에서 (조)덕환이가 탈퇴를 하게 된 것이죠.

 

 

동아기획 김영과의 ‘우연한’ 만남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음반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군요. 음반에 수록된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물어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들국화가 음반을 만들게 된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들국화의 1집 음반은 ‘동아기획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김영 사장이 어떻게 이 음반의 제작자로 선정된 것인지요? [우리노래전시회]의 경우 김영 사장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그건 간단한 이야기예요. 음반을 내자는 결정은 우리가 내렸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전)인권이가 그 전에 지구 레코드에서 음반을 낸 게 있어서 지구 레코드의 상무로 있던 사람을 잘 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돈을 얼마 주겠다고 하니 거기서 내자면서요. 그때 지구 레코드는 벽제에 있었어요(참고: 지금도 고양시 벽제에 있다). 그래서 (전)인권이네 삼청동 집에 모여 있다가 ‘그래, 음반 계약하러 가자’고 해서 삼청동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서 벽제로 가는 버스를 타러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옆에 ‘박지영 레코드’라는 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요즘 어떤 음반이 새로 나왔나…’하고 잠깐 들러 봤어요. 그랬더니 조그맣고 머리 벗겨진 양반이 튀어나오더니 ‘들국화 아니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이리 들어오라고 그러더니 커피도 사 주고 그러더군요. ‘음반을 어떻게 낼 거냐’고 묻길래 ‘지금 우리 계약하러 가는 중이다’라고 말하니까, ‘그러면 얼마를 주면 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불렀어요. ‘계약금 2천만원에 봉고차 한 대 값이 필요하다’고. 그랬더니 ‘아,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영 사장하고 같이 하게 된 거예요. 벽제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렇게 했죠.

 

그렇다면 그 당시 김영 사장은 박지영 레코드라는 소매점을 운영하면서 동아기획도 운영하던 때였나요? 이른바 ‘서소문 사무실’은 그때 없었던 건가요?
그때는 동아기획이 없었어요. 김영 사장이 박지영 레코드를 운영하면서 서라벌에서 ‘PD 메이커’로 음반을 몇 장 제작하던 때였죠. 서소문 사무실을 차린 것은 한참 뒤죠. 들국화 음반으로 돈을 번 다음에. 그 양반은 우리가 하려는 음악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이었어요.

 

김영 사장은 다른 제작자와는 달리 이전에 작곡도 한 일이 있는 분이고, 음악을 듣는 귀가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글쎄요. 김영 사장이 작곡한 건 완전 ‘뽕’이에요. ‘사랑의 연주’인가 그런 것들… 들어봤어요? 듣는 귀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그 사람이 거기서 소매상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들국화란 그룹이 음반을 낸 게 있느냐’는 물음을 많이 들은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그 사람한테 가게 된 건 정말 신의 노릇일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들국화의 얼굴을 알아봤다면 언더그라운드의 동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일텐데요.
우리 얼굴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머리 긴 애들이 와서 음반에 대해 물어보니까 우리가 거기 찾아갔을 때 넘겨짚고 물어본 것이죠. 결정적으로 김영 사장이 우리가 하는 음악을 얼마나 모르냐면, 계약을 한 다음 우리가 녹음하는 과정에서 서울 스튜디오의 최세영 사장과 틀어지니까 ‘자기는 망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하하, 최세영 씨가 틀어진 이유는 무엇인지요?
(전)인권이랑 틀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전)인권이의 창법이 녹음 기사들을 굉장히 피곤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전)인권이가 주문이 많았거든요. 완벽하게 하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다시 주문하는 것도 많았고…

 

들국화 음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984년에 발표된 따로또같이 2집의 경우 세션 연주자의 이름에 최성원 님과 허성욱 님의 이름이 보입니다. 이영재 님과 김광민 님의 이름도 보이고…. 시점 상 [우리노래전시회]를 제작하고 들국화 음반을 준비하는 황망한 와중일 것 같은데 세션을 맡은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또 이 음반은 대성음반에서 발표되었고 서희덕 씨가 제작한 음반인데 이쪽과 교류가 있었던 것인지요?(참고로 당시 대성음반에는 김창완이 이사로 있었고 서희덕이 문예부장으로 있었다. 서희덕은 뒤에 뮤직 디자인을 운영하고 지금은 음악산업계의 몇몇 협회에서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다. 뮤직 디자인은 델리 스파이스의 음반을 제작, 발매한 곳이기도 하다)
이건 기억이 잘 안나네요. 이게 들국화 이전에 나온 건지 다음에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베이스를 쳤는지 통기타를 쳤는지도 헷갈리네(웃음). 내가 레코딩 세션으로 참여한 것은 되게 많아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어요. 김수철 음반에서도 연주한 게 있어요. 따로또같이는 (나)동민 때문에 알게 된 것이고 이 음반에 참여한 것도 (나)동민이의 권유였을 거에요. 그러니 음반사같은 것도 내가 접촉한 것은 아니죠. 나는 (이)장희 형이 운영하던 음반사에 있을 때 뒤로 (김영 사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음반사쪽하고는 전혀 접촉이 없었어요.

 

 

들국화 1집 음반을 다시 해부해 보면…

 

20030429021003-0506interview2_choi02member1집 뒷면에 실린 멤버 사진

 

녹음과정에 대해 간략하게만 물어보겠습니다. 당시 몇 트랙 녹음이었는지요? 그리고 멀티트랙 레코딩이었다면 ‘드럼 따로, 베이스 따로, 기타 따로’ 이런 식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합주를 원칙으로 한 것인지요?
24트랙 녹음이었어요. 그렇지만 24트랙으로 녹음을 하면서도 우리는 끊어 간 적은 없었고 한꺼번에 합주를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보컬은 ‘가이딩 보컬’로 부르면서 하다가 나중에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자세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좀 파격적이었어요. 그래서 녹음 과정에서 서울 스튜디오의 최세영 씨와 계속 부딪혔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처음에 녹음을 맡다가 중간에 ‘안 하겠다’고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결국 보조기사가 녹음을 마무리했죠.

 

당시 들국화의 음반은 다른 음반과는 사운드가 많이 달랐습니다. 저음도 강하면서 헤비한데 그러면서도 또 정밀하고 섬세하다고 할까요… 이런 사운드 프로듀싱에는 제작자나 엔지니어 외에 최성원 님이나 다른 멤버분들이 개입을 한 것인가요? 당시 엔지니어들은 매우 권위적이어서 음악하는 사람이 사운드 프로듀싱에 개입하기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당연히 우리가 사운드 프로듀싱에 개입했죠. 당시 녹음 기사들이 권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나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녹음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뭔가를 아는 사람이 얘기하면 그쪽에서 할 말이 없죠.

 

스튜디오(녹음실)를 얼마 정도 사용한 것인가요? 그리고 앨범 전체를 녹음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것인가요?
한 20프로(주: ‘프로’란 3시간 30분의 세션 시간이다) 썼고,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요. 대략 1~2개월 정도 걸렸나…

 

들국화 1집 음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음반에는 당시의 ‘가요’ 음반과는 달리 개별 곡마다 편곡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국화의 음반에서 편곡은 일반적인 곡의 편곡하고는 다른 과정을 거쳤나요?
일반 가요의 편곡 과정은 없었어요. 밴드니까 그런 것이고 그게 밴드의 특징이죠.

 

김민규: 기본적인 곡 작업을 어떤 것으로 하셨어요?
카세트로 했죠. 코드를 적어놓곤 했는데 멜로디를 까먹으면 곡이 사라지니까. (웃음)

 

김민규: (웃음) 저도 많이 까먹어요. 코드 적고 좋은 곡이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기억에 안 남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면 편곡을 하실 때는 다른 분에게 작곡된 곡을 카세트로 들려주셨나요?
내가 기본적인 편곡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허)성욱이에게 넘겼죠. (허)성욱이는 피아노로 편곡했어요. (허)성욱이의 생명은 그랜드 피아노에 있어요.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들국화 음악은 제대로된 편곡은 없어요. 악보를 그린 것은 아니었고요.

 

김민규: 솔로 작업에서는 어떻게 했나요? 그룹 때와는 달랐을 것 같은데…
내 솔로 음반의 편곡은 어떤날의 (조)동익이한테 맡겼어요. 내가 아이디어만 주었고요.

 

그렇다면 작곡과 편곡의 관계에 대해 예를 들어 보면 “행진” 같은 곡은 (전)인권 님의 작사·작곡이지만 저희들의 추론은 (전)인권 형은 멜로디의 골격만 만들고 나머지는 (최)성원 님이나 (허)성욱 님이 편곡을 해준 것으로 들립니다.
그래요. 녹음하기 2주전인가 (전)인권이가 “행진”이라는 곡을 들고 와서 ‘이거 어떠냐’라고 했어요. 나는 그때 무조건 (전)인권이가 만든 곡이 음반에 하나 들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허)성욱이 데리고 편곡을 한 것이죠. 그렇다고 멜로디를 바꾼 건 없고 코드는 내가 좀 붙였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행진”의 인트로에서 D 장조로 시작하다가 D 단조(Dm)로 조가 바뀌는 것이나 멜로디가 시작할 때 Dm 다음에 Gm6가 등장하는 화성 진행 같은 것 등은 누구의 작품인지요?
누구 작품인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팀(밴드)라는 건 서로 상의해서 연주하는 것이니까. (전)인권이가 어떤 그림이나 필링을 얘기해주면 그걸 연주로 해석을 할 것 아니겠어요? 즉, 자기가 만든 곡이니까 (전)인권이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면 그것을 실질적으로 연주로 실현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같이 상의해서 했던 것이죠.

 

“행진”의 가사에 보면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같은 노래의 제목들이 가사로 다시 등장하고 후반부의 코러스에서는 조성과 약간 맞지 않는 톤의 ‘매일 그대와’의 목소리도 들어가는데 그건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그건 맨 마지막에 집어넣은 것이죠. 이 곡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걸 다 가사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죠. ‘매일 그대와’의 목소리는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죠. (전)인권이가 거기에서 ‘매일 그대와’의 멘트를 해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예요. (전)인권이는 나름의 엉뚱한 연출을 잘 해요. 연출가적 기질이 굉장한 친구예요. 무대 매너도 그렇고 ‘애드립’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전에 연출된 것이에요.

 

“그것만이 내세상”은 [우리노래전시회]의 버전과 많이 다릅니다. 그때 성에 차지 않아서 편곡을 바꾸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곡은 웅장한 곡이라서, 일반적으로는 관현악 오케스트라 편곡을 넣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우리노래전시회] 때는 대충 한 것이에요. 들국화 때는 그래도 잘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오케스트라 편곡같은 것도 물론 생각했죠. 그런데 그걸 실현하려고 하니까 돈 문제나 여러가지로 도저히 힘들겠어서 포기했어요.

 

혹시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이 너무 길어서 제작자측으로부터 방송용으로 부적합하다든가 하는 식의 불평을 듣지는 않으셨나요?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대부분 무시했어요.

 

(전)인권 님은 라이브 공연에서 원곡의 멜로디를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바꿔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지요?
그건 잘못 본 거예요. (전)인권이처럼 즉흥적인 면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 친구는 모든 걸 연습해서 하는 거죠. 즉흥적으로 하는 듯한 모습도 나름대로 연출해서 하는 것이에요. 오히려 내가 즉흥적이죠. 나는 똑같은 걸 두 번 하지를 못해요.

 

“세계로 가는 기차”는 조덕환 님의 노래로 알고 있습니다. 공연에서는 (전)인권 님도 종종 부르던데 두 분 사이의 갈등 같은 건 없었나요?
솔직히 말하면 (전)인권이가 (조)덕환이의 보컬을 무지하게 싫어했어요. 옆에서 내가 보기에는 뻔한 거예요. 그룹 내부에 노래하는 사람이 둘 있으면 싸우게 되지 않겠어요?

 

“축복합니다”를 돌아가면서 불렀는데, 부른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연에서는 (주)찬권 님도 노래를 부른 일도 있는데, 당시에도 참여한 것인지요?
그때는 (허)성욱, 나, (전)인권이, (조)덕환의 순서로 이렇게 불렀죠. 1집까지만 해도 그 네 명이 멤버였으니까. 나중에 (조)덕환이가 빠지고 (주)찬권이 정식 멤버가 되면서부터는 (주)찬권이도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매일 그대와”의 경우 이영재, 이승희와 함께 1980년에 녹음한 버전보다 템포가 느립니다. 또한 개방현 주법을 이용한 것 같은데 그건 누구 솜씨인가요? 최성원 님의 연주라면 이 음반에서 다른 멤버들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한 트랙은 없는지요?
1980년에는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녹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템포를 좀 빠르게 했죠. 개방현 주법은 A장조로 한 것이고… 아무튼 이 음반의 어쿠스틱 기타는 거의 다 내가 연주한 거예요. (조)덕환 경우는 앞에서 얘기했고 (전)인권이의 경우는 “축복합니다” 딱 한 곡에서만 연주했어요. 솔직히 주위에서 굉장히 걱정했는데 내가 녹음기사에게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1집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행진”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만들어둔 곡들인가요?
“더 이상 내게”는 음반 만들기 전에 만든 곡이죠. 다른 곡들은 이전에 들국화 음반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두었던 곡들이고. “사랑일 뿐이야”같은 경우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장은아라는 여가수가 부른 적이 있어요. 들국화 음반에 실린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노래가 되었지만…

 

“그것만이 내세상”은 언제의 심정을 노래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많은 사람들에게 ‘실존적 고민’을 담은 곡으로 들렸을 텐데 언제 그런 고민을 한 것인지요?
군에 있을 때 아니면 제대 직후일 겁니다.

 

자주 듣는 질문이겠지만 마지막 트랙인 이른바 ‘건전가요’를 “우리의 소원”으로 넣자고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요?
누가 먼저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모르겠는데 금세 동의가 되었으니 우리가 같이 낸 셈이죠. ‘건전가요’로 다른 사람이 부른 것을 넣는 게 싫었던 것은 사실이고…

 

 

주변에 있었던, 그렇지만 중요한 인물들

20030429015523-0506interview2_choi03best12사진설명: 들국화 베스트 12의 커버 사진

 

이제 들국화 1집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 중 그룹 외부의 사람들에 대해 간략히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뒤에는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된 (주)찬권 님이나 (최)구희 님은 이 당시에는 그냥 세션 연주자로만 참여한 것인가요? 아니면 멤버로 영입하려는 은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인가요?
녹음할 때는 세션으로 참여했어요. 이런 건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사실 믿음소망사랑 멤버를 빼온 게 아니라 (주)찬권이와 (최)구희에게 녹음만 부탁했었어요. 그런데 믿음소망사랑이 어떤 일로 한번 대판 싸웠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나서 우리가 공연을 하는데 공연 세션으로 계속 도와주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믿음소망사랑이 깨지니까 (주)찬권이는 들국화 정식 멤버가 되었고 (최)구희는 괴짜들을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뒤에 들국화 공연에 합류했죠. 1집을 내고 활동할 때 어떤 콘서트의 포스터에서 내가 (최)구희에게 꽃다발을 주는 장면이 있어요. 그게 정식으로 영입하겠다는 싸인이었죠. 이것도 (전)인권이의 연출이었어요. 믿음소망사랑의 2집 앨범이 나온 것은 들국화가 깨진 뒤의 일이고 괴짜들의 음반은 그 전에 나왔죠.

 

기존 멤버들(최성원, 전인권, 허성욱)이 두 사람(최구희, 주찬권)을 정식 멤버로 영입한 것인가요, 아니면 두 사람이 먼저 가입 의사를 밝힌 것인가요? 아울러 손진태 님이 영입된 것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거야 뭐 이심전심이었죠. 그때 (조)덕환이가 빠진 상태였고 최구희와 주찬권, 이 두 사람도 자기 밴드가 정상적이지는 않은 상태였으니까 두 사람이 영입되기 전에는 손진태가 기타를 쳤죠. 2집 때는 주찬권, 최구희, 손진태가 밴드의 중심 멤버가 되었어요.

 

주찬권 님도 노래를 잘 하시는데, 들국화에서는 노래를 부르실 기회가 없으셨던 건지요? 본인이 보컬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신 적도 없는지요?
아무래도 드럼이니까 노래를 나서서 부르지는 못했겠죠. 그리고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 많은 가수 중에서 (전)인권이의 노래에 뒤에서 코러스를 넣어야 하는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이죠(좌중 웃음)

 

최구희 님은 들국화 2집에도 수록된 “너랑 나랑”에서 느낄 수 있듯 ‘토속적’인 감각이 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점이 혹시 (최)성원님의 ‘팝’ 감성과 충돌하는 일은 없었는지요?
그런 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곡을 써야 내 부담이 적어지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죠. (최)구희는 이펙트도 별로 쓰지 않고 거의 생 톤으로만 연주하는데도 한국에서 기타 톤을 제일 잘 잡는 기타 연주자였어요.

 

음반에 참여한 ‘외부 인물’ 가운데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작곡한 이병우 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녹음한 경위는 어떤 것인가요?
[우리노래전시회]를 제작할 때 (조)동익이가 (이)병우를 만나게 됐고, 그래서 둘이 함께 어떤날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랑 (전)인권이는 이 그룹을 키워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병우의 노래 중에 우리가 연주하기에 제일 좋은 걸 하나 녹음하게 된 것이죠.

 

어떤날이 1986년에 발표한 음반을 들어보면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1번 현을 개방시킨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국화의 음반에서는 피아노 연주가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요? 녹음된 시점은 들국화의 버전이 먼저이지만…
원래 (이)병우가 만들고 어떤날이 연주할 때는 통기타곡이었어요. 그걸 우리가 피아노 연주로 옮긴 것이죠.

 

클라리넷을 연주한 (이)원재 님은 어떻게 섭외가 되어서 참여한 것인가요?
(이)원재는 (조)덕환이랑 (전)인권이랑 (허)성욱이랑 활동할 때부터 틈틈이 와서 도와주던 친구였어요. 한양대 음대를 나온 친구였고 나중에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냈다는 건 알고 있죠?

 

 

 

예기치 않은 성공 그리고 라이브 공연의 행진

 

1집 음반을 듣고 나면 ‘우리 여기까지 힘들게 왔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면 음반 녹음 후 ‘대박’이 될 것이다라는 예상은 하셨는지요? 혹은 음악적인 면에서나 대중적인 면에서 녹음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시에는 이게 많이 팔리든 적게 팔리든 별 문제가 안 됐어요. 음반을 내면서 받은 돈이 중요했죠. 그때는 계약 당시의 보수만 받고 끝날 때였거든요. 그러니 대박이든 아니든 중요한 게 아니었죠.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이미 결과가 나온 셈인데 대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댔겠어요? (좌중 웃음)

 

역시 (최)성원 님은 그때부터 이미 ‘왕자병’이 있으셨군요(웃음). (최)성원 님이나 들국화 멤버들은 그렇다 치고 김영 사장의 기대치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중간에 ‘망했다’라고 한숨쉬면서 나갔다고. 그러다가 나중에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게 엄청난 거구나’라고 깨달은 것이죠.

 

어쨌든 이 음반이 ‘대박’을 기록한 이유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나온 음반들과는 질이 달랐기 때문인 듯합니다. ‘음질’ 말입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특히 베이스를 연주한 분이니까 질문 드리면 베이스의 톤이 남달랐던 듯합니다.
그건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국산 가요의 사운드를 들으면 통통거리는 베이스 사운드가 없었어요. 그런데 최세영 사장이 나한테 비결을 가르쳐 줬어요. 내가 베이스를 치는데 따로 부르더군요. 왜 그런가 했더니 내가 연주하는 베이스의 소스 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대요. 그러니까 녹음할 때는 겉소리, 즉 배음(倍音)이 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줄을 땡겨서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보고 우리나라에서 베이스 터치가 가장 좋다고 그랬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소스가 좋아야 녹음이 풍부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라이브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들국화 음반이 음의 레인지가 컸어요(이때 성원 님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다: “이것도 왕자병이라고 그러지 마. 이건 테크니컬하게 진짜니까”(좌중 웃음)

 

베이스를 오래 연주한 분도 아닌데 그런 터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선천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슨 요인이 있었을까요? 베이스를 그렇게 오래 연주한 분도 아닌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 베이스 터치도 그렇고, (허)성욱이의 피아노 터치랑 (전)인권이의 터지는 보이스는 그 속에 일종의 ‘분노’가 있었어요. 당시의 다른 음악하는 사람들한테 ‘다 웃기지 말아라’라는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걸 누가 ‘고요 속에서 터지는 파장’이라고 말하던데 그렇다면 그렇고요.

 

많이들 하는 말이지만 들국화는 TV 등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공연으로 청중과 접촉하는 ‘라이브 문화’를 선도한 주역으로 꼽히는데, 이러한 활동 방식은 멤버들 사이의 합의에서 나온 것인가요? 1집 음반 발매할 때 음반에 (무료) 공연 티켓을 넣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입니다만…
그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송국에 가서 비실거리면서 비벼대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걸 하겠어요? 그리고 무료 공연 티켓을 넣은 건 김영 사장의 아이디어였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피를 봤죠. 공연 수입이 있어야 되는 건데….(웃음)

 

당시 소극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뿐더러 공연장에 대한 정보도 없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앞서 말씀하신 대로, 첫 공연장소였던 SM처럼 들국화의 공연장이 정식 공연장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사운드를 잡거나 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혹은 이러한 사운드를 잡는데 공헌을 해 준 스탭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그 당시에 우리를 도와주었던 정필영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나마 서울 같은 곳에서는 괜찮았는데, 지방에서 공연할 때는 모니터가 전혀 안 됐어요. 수없이 라이브 공연을 하다 보니 감으로 맞춰서 (사운드가) 나왔던 것이죠.

 

들국화 1집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다음에는 ‘업소’에서 일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연으로 충분한 수입이 되셨는지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들국화의 수입은 음반으로 받은 게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들국화는 계속 돈을 못 벌었어요. 나같은 경우 들국화를 2~3년 하면서 번 돈의 3배를 솔로 활동을 하면서 벌었으니까요. 그게 우리나라 그룹의 진짜 문제죠. 그룹으로서 우리가 정상급이었다고 해도 들국화 멤버는 당시 인기가수들, 예를 들어 김범룡 개런티의 절반도 못 받았어요.

 

당시의 청중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요. 그 당시 헤비 메탈을 하던 스쿨 밴드 출신들도 대다수가 들국화 팬이더라고요.
음반을 내기 전까지 들국화의 팬들은 한국에서 음악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음반을 낸 다음에는 갑자기 연령층이 고등학생까지 내려가더군요. 그 멋진 팬들이 다 없어져 버렸죠. 여고생도 많았지만 남고생도 많았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우리같이 남자 팬들이 많았던 밴드도 없었을 거에요. 여자 팬이 좀 더 많아야 되는 건데….(좌중 웃음)

 

당시의 들국화 공연들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하면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이나 저니의 “Who’s Crying Now”같은 곡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기억이 나시나요? 한편 라이브 콘서트 음반에는 “Come Sail Away” 등 스틱스(Styx)의 곡을 두 곡이나 연주했습니다.
맞아요. “Stairway To Heaven”은 믿음소망사랑이 잘 하던 곡이었어요. 그러니 (주)찬권의와 (최)구희가 하던 것에 나머지 셋이 들어가서 한 거죠., “Who’s Crying Now”는 대전 공연에서도 했고 크리스탈 백화점 공연에서도 했어요. “Fool’s Overture”를 인트로로 연주했었죠. 스틱스는 (전)인권이가 좋아하던 그룹이에요. 아무래도 외국곡이야 싱어를 따라가야 하죠. 싱어가 잘 하는 걸 연주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들국화 Live Concert] 음반에 대해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 음반은 실제 공연장이 아니라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밴드가) 잘 나가니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기획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멤버들은 이러한 기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그 음반은 철저히 김영 사장이 기획한 겁니다. 우리는 돈을 얼마씩 더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그 당시가 라이브 공연을 제대로 녹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을 때 아니겠어요? 우리가 공연할 때 녹음기재를 들고 와서 라이브 음반을 만들면 될 텐데 그게 힘들었나 봅니다.

 

박수소리를 들어보니까 한 50명 정도이고 여성 청중이 많아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지만 스튜디오가 꽉 차기는 했어요. 이 음반만 해도 박수소리에 신경 안 쓴 음반이에요. 어쨌든 모든 연주가 실연인 것만은 사실이죠. 그리고 이 무렵부터 우리 팬들이 다 여고생으로 되어 버렸어요(좌중 웃음). 음악을 들으려 했던 대학생들은 감히 끼지 못하게 됐고… 공연이 좌석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극성스럽게 아침부터 기다리지 않으면 들어오질 못했던 게 이유였던 것 같아요.

 

공연 중간에 전인권 님이 최성원 님를 “나의 음악 선생님이고….” 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비꼬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아니에요. 다 (전인권의) 농담이에요. (전)인권이가 농담을 얼마나 잘 하는데…

 

사소한 질문이지만 이 음반에서 노래를 한 박진영 님은 어떤 분이죠? [우리노래전시회 4]에 참여한 박인영 씨를 잘못 부른 건 아닌가요?
게스트로 참여한 여가수에요. 그 뒤로 뚜렷한 활동은 없었죠.

 

 

균열, 불화 그 배후의 이야기들

 

[들국화 II(제발/내가 찾는 아이)] 서라벌레코드/동아기획(VIP 20030), 1986-09-25

 

1집이 워낙 대성공을 해서 2집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았던 탓인지, 2집은 ‘1집만 못하다’는 평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평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추측컨대 이러한 평가를 받은 이유가 공연에 바빠서 음반 녹음에 소홀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2집을 발표하기 이전까지 공연 등등으로 상당히 바쁘셨을 것 같은데요. 그러한 과정에서 누적된 피로가 밴드 해체의 원인들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점도 있겠죠. 공연을 그렇게 많이 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돼 있어요. 1집 같은 경우는 참 오랫 동안 준비한 것이었죠. 반면 2집에서는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모든 포커스를 맞출 시간도 충분치 않았어요. 공연을 줄이고 음반에 집중하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이미 멤버간에 균열이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2집 앨범을 좋아하는데…

 

2집의 음악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단지 수록곡 중 “내가 찾는 아이”나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 같은 곡은 만든 지 꽤 오래된 곡입니다. 다른 분들의 곡 대부분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 곡들은 만들어 놓은 지 꽤 된 곡들이죠. 새로 만든 곡은 없어요.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도 역시 “내가 찾는 아이” 만들 무렵 대학교 시절에 만든 노래이고. (주)찬권이나 (최)구희 곡도 믿음소망사랑 시절에 만들어 둔 곡이었을 거에요. (전)인권이가 새 곡을 만들어 왔는데 충분히 맞춰 보지 못하고 녹음을 하게 된 것이죠. 내가 새 곡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일종의 패인이었던 것 같아요.

 

스튜디오를 서울 스튜디오에서 한국음반 스튜디오로 옮기고 엔지니어도 바뀌었는데 이 점이 영향을 주지 않았던가요?
녹음을 하는 기술적 문제는 아닐 거에요. 오히려 (1집을 녹음했던) 서울 스튜디오가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한국음반 스튜디오로 옮긴 것이었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생겼다는 ‘균열’은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에 의해 나온 것인가요?
음악적인 견해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실 당연한 거예요. 멤버들이 계속 같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하물며 ‘나는 삼겹살 먹고 싶은데 왜 넌 저걸 먹냐’는 것부터, 곡에 넣는 현의 대선 같은 것까지 견해차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요. 문제는 그런 견해 차이를 통합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없다는데 있었죠. 그런데 그러한 것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프로듀서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물론 매니저를 두긴 했어요. 1집 이후에 (김)진성 형을 매니저로 썼어요. 이유는 내가 존경하는 김민기 형의 음반을 제작했다는 점이 가장 컸어요. 하지만 김진성 형도 소극적인 프로듀싱에 머물렀죠. 김영 사장이 음악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고…

 

들국화의 균열에 대한 통속적 견해는 ‘(전)인권 님과 (최)성원 님 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종종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와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선 두 분의 관계를 레논/매카트니의 파트너쉽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즉, 전인권 님을 ‘visionary’로, 최성원 님을 ‘craftsman’ 식으로…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1998년의 학전 소극장 공연에서 (최) 성원 님이 존 레논의 “Imagine”을 부르면서 “내가 음악을 듣다가 형님 같은 분을 만났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겉으로 보이는 진짜 속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 레논과 매카트니와의 비교도 그저 비교일 뿐이겠죠. 그런데 원래 존 레논은 (전)인권이가 좋아했었고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에요. 1집의 커버들 비틀스의 [Let It Be]처럼 만든 것도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입니다.

 

두 분과의 불화에 대해 뾰족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겠군요(웃음). 아무튼 들국화의 해체 이후에도 [추억 들국화] 등의 음반에는 세션으로 참여하고, 다른 멤버들 사이에도 원만한 관계는 유지된 것인가요?
그렇죠. 들국화 활동을 안 하는 것일 뿐이지, 녹음을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줬어요. 물론 서로 음악적인 입장은 (서로) 다르겠죠. 워낙 개성이 다른 인간들이고, 자기 주장도 강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마찰이 있는 거고. 그건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리고 나와 (전)인권이의 불화에 대해서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만 해줄께요.. 처음에 나랑 ‘밤일’할 때 의견충돌이 있었어요. (전)인권이는 당시만 해도 멋있는 음악은 외국곡이라도 그대로 카피를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내 머릿속에 (김)민기 형이랑 (조)동진이 형이 들어 있어서 ‘빨리 우리 걸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카피를) 하겠어요. (전)인권이와는 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번은 (전)인권이가 밤무대에서 기타를 치는 유명한 형을 따라서 6개월 정도 지방 나이트클럽에 가 있자고 제의한 일도 있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랬다가는 진짜 밤무대 밴드로 끝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러마…”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노”했어요. 그래서 (전)인권이가 무척 섭섭해 한 일이 있어요.

 

전인권 씨는 최성원 씨에 비해 ‘밤무대에서 외국 곡을 카피하는 것’을 그렇게 터부시하지는 않았다는 말인가요?
(나도) 무조건 터부시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당장 필요하니까요. 다른 무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창작곡이 많았던 것도 것도 아니니 자연히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이미테이션은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도 않았아요. 이건 품위 차원이 아니라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죠(웃음).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이 해 온 걸 그대로 따라 해야 하죠? 나는 밤일을 할 때도 한번도 외국곡을 똑같이 따서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내 스타일대로 했지요.

 

지금 회고하건대 당시의 들국화 활동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확실한 매니지먼트가 없었다는 부분이겠죠. 많은 멤버들의 의견차이를 통합하고 결정할 결정기구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들국화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쉽게 이야기해서, 리더가 없었어요. 리더가 없는 게 처음에는 장점인 면도 있었는데 뒤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음반을 만들다 보면 결정할 사항이 무수히 생기잖아요. 하다못해 커버 자켓부터 그렇죠. 그런데 멤버는 여럿이고 리더가 없으니 모든 것에 대해 결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김)진성이 형이나 김영 씨가 해 주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분들도 역시 역부족이었죠.

 

 

들국화의 문화적·사상적 뿌리

 

그러면 이제 ‘당시의 들국화’에 국한하지 않고 멤버분들의 그뒤의 활동까지 고려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들국화의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의 지위라고나 할까요? 우선 들국화와 비슷한 연배로 구성된 그룹들 가운데 산울림과 송골매 등은 들국화보다 먼저 주류에 등극했는데 이들의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언급을 회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출발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산울림이나 송골매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당시 텔레비전에 출연하려면 ‘PD 선생님’이라는 말을 써야 했어요.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산울림이나 송골매는 물론이고 들국화와도 ‘출발’이 다른 사랑과평화의 음악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일단 연주력의 탁월함은 대다수가 인정하는 부분인데요. 이와 관련해서 2000년 들국화의 재결합 공연에는 최이철 씨를 비롯한 사랑과평화의 멤버들과 세션으로 참여했습니다. 사랑과평화는 속칭 ‘밤무대’에서 오래 연주한 그룹인데 함께 교류할 기회가 있었던 것인지요?
다들 알겠지만 사랑과평화는 나이트클럽을 주무대로 훵키한 쪽으로 연주를 잘 하는 밴드죠. (이)장희 형이 곡도 주고 제작도 했던 팀이니까 그때부터 알기는 했죠. 우리가 이태원에서 밤일을 할 때 기타리스트를 물색하면서 나름대로 ‘어떤 기타 연주자가 좋을까’ 의논하면서 최이철 형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도 있었죠. 쉼이라는 그룹의 김양일이라는 엄청난 기타리스트도 영입해 보려는 생각도 한 적도 있어요. 2000년 공연에 (최)이철 형이 우리를 도와 준 것은 미사리에서 연주할 때 자주 봤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쨌든 우리는 ‘연주력’이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들국화 멤버 본인들은 자신들의 연주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아까 말씀하신 ‘연주력이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다’는 관점에서라든가….
(허)성욱이는 가장 묵직하게 연주를 잘 했어요. 모든 반주의 핵심을 알죠. 그리고 나는 기타를 치든 베이스를 치든 작곡자의 입장에서 연주를 해요. 그래서 같은 곡을 똑같이 두 번 못 쳐요. 그 다음 (최)구희는 그만의 톤이 있어. 찬권이는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 하고…. 이건 단지 연주를 ‘잘 한다 못 한다’ 차원의 문제는 아니에요.

 

‘연주를 잘 한다 못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들국화가 대변한 문화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검토할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한쪽에는 소위 나이트클럽의 ‘노는’ 문화가 있었죠. 이 세계의 특징은,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나라가 미국의 52번째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의(主義)가 아니겠어요? ‘그대로 베끼자, 그 문화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근본이란 말이죠. 다른 쪽에는, (김)민기 형, 나아가 (조)동진 형의 줄기가 있어요. 여기에는 ‘내 것을, 우리 것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죠. 이렇게 엄청나게 다른 음악세계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들국화는 딱 그 중간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게 된 이유는, 각 멤버의 특성 때문에 생긴 것이었죠.

 

신중현 씨나 사랑과 평화 등의 음악은 나이트클럽의 ‘노는’ 문화와 깊게 연관되면서도 ‘내 것을, 우리 것을 만들어 보자’는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최성원이 님 생각은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음악과는 거리가 있죠. 일단 나는 ‘록 음악’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사실 들국화가 록인가요? 내가 물어보고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한국적 록’이라고 하던데요.
난 그게 진짜 의문이에요(웃음).

 

들국화를 히피 문화와 연관짓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들국화는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는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히피 문화는 오히려 아까 이야기했듯 ’52번째주’라고 말한 쪽이 더 강합니다. 나는 오히려 (김)민기 형 쪽이었죠. 묘하게 그 중간에서 다른 데로 빠져서 자기 세계를 만든 분이 (조)동진 형입니다. 다들 알죠. (조)동진 형이 예전에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스 등의 음악을 연주한 거. (조)동진 형이 실토한 적이 있어요(웃음). 그때 황규현, 전언수, 이태원 등과 함께 쉐그린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을 했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퍼스트 기타’를 쳤대요(웃음).

 

1980년대 ‘운동권’에서도 들국화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묘한 정서적 유대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혀 없어요. 우리가 이태원에서 일할 때 (정)태춘이가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정)태춘이가 “너희들이 지금 우리나라 민중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나는 들국화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의 생각에 동의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겠죠. (정)태춘이는 친구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하는 사이고, 그의 음악도 물론 좋아해요.

 

협의의 운동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인권 씨는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시고, 김정환 시인과 친하시기도 하시던데요.
개인적으로 (전)인권의 철학은 잘 모르겠어요. 내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사실 노찾사나 꽃다지 같은 운동권 출신들의 노래와 (김)민기 형의 노래들은 다르잖아요.

 

 

들국화 이후의 홀로서기 그리고 다시 뭉치기

 

최성원의 솔로 1집

 

다시 ‘딴따라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까지 대충 여쭤 보겠습니다. 들국화의 성공 이후 동아기획 소속 음악인들이 거대한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시스템은 내가 관여한 우리노래전시회 2집을 내면서 만들어진 것이었죠. 그때 참여한 가수들이 동아기획으로 오게 되었어요. 한영애는 이 음반보다 약간 뒤에 동아기획으로 왔고 그 뒤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역으로 들국화의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동아기획 소속의 다른 아티스트들이 위화감을 느꼈다는 말도 있습니다. 김현식 씨가 살아 있을 때 ‘동아기획이 들국화 중심으로 편성되면서 나는 좀 찬밥신세였다’는 식의 말을 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김)현식이 경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수들은 들국화의 성공으로 인해 동아기획으로 모였던 것이죠.

 

[우리노래 전시회 2집]에는 들국화의 정규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은 곡인 “너의 작은 두손에”라는 곡이 실려있습니다. 이 곡을 녹음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가사는 어떤 여자팬(안현이)이 보내준 것이라던데요.
이건 그때 삼성 마이마이가 협찬해서 가사를 공모해서 나온 가사였어요. 그래서 그 가사에 곡을 붙였죠. 이벤트에 관련된 노래니까 정규 앨범에는 수록하지 않았어요. 그 이벤트는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공연과 연계된 것으로 송창식, 한영애 등과 함께 공연했죠. 이 무렵이 들국화가 해체되기 직전이었어요.

 

최성원 님도 동아기획에서 두 장의 솔로 음반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이 음반들의 경우 ‘제작’과 ‘프로듀싱’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나요?
‘프로듀서’는 내가 맡은 것이고 김영 씨는 제작비를 댄 것이죠. 그렇다고 ‘PD 메이커’같은 것은 아니고 동아기획에 ‘전속’되는 개념으로 제작한 것이죠.

 

앞서 ‘들국화 활동을 한 것의 3배의 수입을 솔로 활동을 하면서 벌었다’고 말하셨는데, 실례지만 솔로 앨범의 판매량은 어느 정도였나요?
1집은 괜찮았는데 2집은 별 볼 일 없었던 것 같아요. 2집을 발표할 때 쯤에는 동아기획도 전성기를 지났을 때이죠.

 

솔로 음반은 들국화의 음반과는 다른 최성원 님 특유의 감성이 발휘된 음반으로 들립니다. 여기에는 당시 여기저기 편곡을 맡았던 조동익 님의 편곡도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아까 말했지만 편곡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주고 실제 편곡 작업은 (조)동익이에게 맡겼어요. (조)동익이랑은 1, 2집에서 모두 같이 작업했어요. 그런데 (조)동익이는 그 뒤 (조)동진 형과 함께 하나음악이라는 걸 만들어서 동아기획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같이 작업한 일은 없죠.

 

조동익 님은 최성원 님을 비롯하여 동아기획 소속 음악인들의 음반에 편곡과 세션 연주를 많이 해주었고 [우리노래전시회 1]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어떤날의 음반들은 동아기획과는 무관하게 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요?
내가 신태성이라는 사람한테 어떤날의 제작을 해 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제작을 끝내 놓고 갑자기 자신이 없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내 후배 중에 최윤식한테 인수해라고 추천을 했어요. 더 자세한 것은 (조)동익이나 (이)병우가 알겠죠.

 

시간이 많이 지나서 1990년대 이후의 일들에 대해 많이 질문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굵직한 것에 대해서만 물어보겠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음악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패닉의 데뷔작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이적이 데모 테입을 가지고 직접 찾아왔어요. 그놈은 글을 아주 잘 써요. 어린 놈이 뭘 알고 글을 쓰는 건지 모르겠는데, 글 쓸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더라고요.

 

그 무렵 들국화의 오리지널 멤버 없이 전인권 님 혼자서 들국화 3집 음반을 발표했고 반응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맞아요. 패닉의 1집 음반을 녹음하고 있을 때였어요. “달팽이”에서 보컬이 높게 올라가는 부분의 녹음이 잘못되어서 재녹음을 하려고 이적을 불렀는데, 이적이 씩씩거리더면서 달려오더니 “사부님, 그거 아세요? 전인권씨가 들국화 이름으로 다른 멤버들이랑 새 앨범을 냈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때 내가 한마디로 일축했죠. “들국화라는 이름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야”라고. (좌중 웃음) 그 당시에 나는 들국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나는 오직 패닉을 잘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었죠.

 

그러다가 1998년에 들국화가 ‘드디어’ 재결합합니다. 그리고 (전)인권 님이 불운한 사건을 맞고 2000년에 다시 재결합 공연을 합니다. 그 사이에 트리뷰트 음반도 나오고… 하지만 그 뒤는 다시 소식이 잠잠합니다. 1998년부터 들국화의 새 음반을 낸다는 (전)인권 님의 발언이 있었지만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 전인권 님의 솔로 음반이 나왔고…
들국화 공연은 솔직하게 말해서 ‘팬 서비스’ 성격이 강한 것이에요. 사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최근까지는 조금 쉬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나름대로 바빴어요. 히데오 사이토라는 친구와 한일합작 프로덕션을 하나 만들어서 그 일도 했고… 그 친구는 일본의 모리타카 시사토라는 여가수의 프로듀서로 한/일을 아우르는, 말하자면 보아 같은 프로젝트를 하자고 만든 파트너였어요. 2000년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들국화의 새 앨범에 대해서는 이제 곡을 써야죠. 요즘은 명목상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쪽 판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1990년대 중반 동아기획의 후예들 일부는 하나음악을 만들어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활동했습니다. 혹시 거기에 합류하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거기는 (조)동진이 형이랑 (조)원익이 형이 주도한 것이었죠. 거기에서 [우리노래전시회] 같은 걸 계속 해 나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려면 내가 이 나이에 (조)동진이 형 밑에 있어야 되잖아요(웃음). 거기엔 아주 든든한 (조)동익이가 버팀목 노릇을 하니까 내가 들어갈 이유는 별로 없었죠.

 

하긴 요즘 하나음악의 사정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조동진 형은 시인이에요. 시인이 부자라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업은 어떨까요. 내가 보기에 우리 나라에서 (조)동진이 형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1000명은 될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정액제로 1만원 정도씩 회비를 내고 이용할 수 있는 (조)동진 형의 유로 홈페이지를 만들면 어떨까요. (조)동진 형은 그 홈페이지에서 활동하는 거죠. 신곡도 거기에다만 풀고, 자기 글이나 사진 같은 것도 올리고, 팬들과 채팅도 하고… 그런 것은 즉시 반응이 오죠. 그 회비로 생활고도 해결이 될 거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만약 내 팬이 한 300명만 된다면 300만원만 들어와도 평생 음악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미사리 같은 데서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데 그런 유료회원을 만드는 게 좀 힘든 일일까요? 내 주위의 친구들한테 협박해도 300명은 될텐데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아이디어는 좋지만 현실은 아직 시기상조로 보입니다. 아직은 메이저 언론사들도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어쨌거나 지금의 음반산업으로는 안돼요. 일단 말이 안 되죠. 음반을 오늘 풀면 내일 소리바다같은 곳에 mp3가 다 떠요. 그러니 음반을 어떻게 팔겠어요. 패닉 제작할 때까지가 딱 좋았어요. 그때까지 mp3가 안 나왔으니까요. (사실은 이때 최성원은 “야 니네들도 음반 안 사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지”라는 말을 꺼냈다. ‘혹시 음반제작 비즈니스를 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 싫어하는 건가…’라고 잠시 긴장하고 있었는데 성원형 왈 “사실은 나도 그래”였다 –;) 그리고 돈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게 소매상들이 다 문을 닫아버리니 어디 가서 음반을 사겠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다운받아야 되는 거고, 그러니까 더 좋은 음악들이 없어지는 거고. 게다가 우리 나라 음악산업 시스템에서는 조동진 형 같은 분을 그냥 방치하고 있잖아요.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사실 대중가요가 아니라 ‘매니아 가요’로 가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그런 시스템은 매니아들한테도 사실 필요한 거거든요. 나는 일단 (조)동진이 형부터 그걸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조동진 후원회. 난 그 형이 우리 나라에서 살 길이 막막하다는 건 정말 우리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해요.

 

그건 이 자리에서 끝낼 이야기는 아니고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문제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즐겨 들으시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후배 뮤지션은 없으신지요?
이젠 다 들어요. 옛날에는 굉장히 기호가 뚜렷했는데 이제는 어떤 음악도 다 이해가 되네요. 요새는 디즈니 영화 사운드트랙들도 좋아요. 후배 뮤지션들 중에는 자우림이 제일 재밌던데 솔직히 젊은 애들 음악을 자세히 들어보지는 못했어요. 이제 좀 들어봐야죠.

 

시간이 벌써 많이 지났군요. 까다롭다고 유명하시던데 (웃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정보를 주신 듯합니다.
옛날 같으면 이런 건 귀찮아서라도 안 했을 거에요. 하지만 나이가 드니까, 잘 모르는 후배들한테 이야기해주는 게 선배로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감사합니다. 들국화 새 음반 빨리 나오기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들국화 앨범을 기다리기는 하나요?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릴 걸요…
그럼 해야겠네(웃음). (인터뷰 초반에서 최성원은 “야, 만약 우리가 음반 내서 성공한다면 우리 후배들도 50살까지는 밴드로, 그룹으로 음악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치? 알았어…”라면서 호기를 부렸다. 부디 그 호기가 실현되기를….) 20030426 | 최지선 [email protected]

 

 

관련 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를 잇는 열개의 다리들: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며 – vol.5/no.6 [20030316]
들국화, 신화와 콤플렉스: 1978~1987 – vol.5/no.6 [20030316]
테러리스트(?) 전인권 – vol.5/no.6 [20030316]
전인권 공연 리뷰 – vol.5/no.6 [20030316]
들국화의 고수(鼓手), 40년의 북 치는 인생을 회고하다: 주찬권과의 인터뷰 – vol.5/no.6 [20030316]
전인권 [맴도는 얼굴/꽃분이] 리뷰 – vol.5/no.6 [20030316]
따로 또 같이 [맴도는 얼굴/이 한밤을] 리뷰 – vol.5/no.6 [20030316]
이승희·이영재·최성원 [노래의 날개/그대 떠난 뒤에는/매일 그대와] 리뷰 – vol.5/no.6 [20030316]
따로 또 같이 [그대 미움처럼/별조차 잠든 하늘에] 리뷰 – vol.5/no.6 [20030316]
믿음 소망 사랑 [믿음 소망 사랑 신곡집(화랑/뛰어/만남)] 리뷰 – vol.5/no.6 [20030316]
배리어스 아티스트 [우리 노래 전시회 I] 리뷰 – vol.5/no.6 [20030316]
들국화 [들국화 I(행진/사랑일 뿐이야)] 리뷰 – vol.5/no.6 [20030316]
들국화 [들국화 Live Concert] 리뷰 – vol.5/no.6 [20030316]
들국화 [들국화 II(제발/내가 찾는 아이)] 리뷰 – vol.5/no.6 [20030316]
전인권·허성욱 [1979~1987 추억 들국화] 리뷰 – vol.5/no.6 [20030316]
들국화 공연 리뷰 – vol.2/no.18 [20000916]

관련 사이트
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도 회원으로 있다.
http://cafe.daum.net/march
들국화 팬 사이트
http://my.dreamwiz.com/aproman
http://www.hangji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