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26일 PM 2:00 과천 경마장 오리집
질문: 신현준, 최지선
정리: 신현준, 최지선, 송창훈, 김성균
특별 게스트: 김민규

들국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다

20030429015523-0506interview_choi01Q: 계속할까요? 다시 들국화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3명이 들국화라는 이름을 짓고 활동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이름과 관련된 에피소드 같은 것도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 서초동의 환타지아에서 일할 무렵이에요. 환타지아는 뮤직 라보를 경영했던 조용호 씨가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서 개업했던 곳이죠. 이주원 형, 강인원, 나동민이 하던 따로또같이가 SM이라는 곳을 빌려서 콘서트를 하겠다고 한 일이 있었어요(주: 잘 알려져있다시피 들국화의 음반이 나오기 이전 1984년에 따로또같이 2집 [그대 미움처럼/별조차 잠든 하늘에] 대성음반(DAS 0116)에서 허성욱 최성원 등은 이영재 이승희 조원익 김광민 등과 세션을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한테 게스트를 해 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어요. 그러니 이름을 만들어야 되는데 택시 안에서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별별 이름이 다 나왔죠. 그때는 택시 타고 다닐 때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들국화가 어떠냐?”고 얘기했고 (전)인권이랑 (허)성욱이가 들국화가 괜찮다고 해서 들국화로 정한 것이죠. 그때 진짜로 들국화 껌을 씹으면서. 그런데 그때 우리가 한참 놀러 다녔던 (조)동진 형에게 ‘밴드 이름을 들국화라고 지었다’고 얘기했더니 “야 무슨 오까마 이름 같은데?”하더군요. 오까마가 뭔지 알아요? 요즘 말로 트랜스젠더라고 하나? 하하. 그 당시에는 남자가 하는 밴드가 꽃 이름을 쓰는 게 이상했던 거예요. 그 말을 듣더니 “어 정말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전)인권이, (허)성욱이가 흔들리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무조건 우겨서 들국화로 하기로 했어요.

Q: 꽃 이름으로 굳이 지으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들국화 껌을 씹고 있었다’는 공식적 견해 이외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은 없는지요?
– 사실은 이제까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인권이가 스카이라크(Skylark)의 “Wild Flower”를 참 잘 불렀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들국화란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죠.

Q: 스카이라크는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가 있던 캐나다 출신의 밴드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면 ‘소프트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을 구사한 밴드로 알고 있는데 이들 외에 당시 들국화가 심취했던 음악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 그 당시에는 우리 모두 핑크 플로이드 같은 음악에 ‘뻑이 간’ 상태였어요. 노란 잠수함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던 (하)덕규도 그랬고, 동서남북을 하고 있던 (김)광민도 그렇고.

Q: 그러면 아까 SM에서의 콘서트로 돌아가겠습니다. 들국화라는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정식 콘서트 무대에 선 자리로 보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는지요.
– 맞아요. 독자 콘서트가 아니라 처음으로 따로또같이의 게스트로 나간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중간에 게스트로 나오고는 공연이 그냥 끝나 버렸어요. 하하. 2부를 못한 거예요. 정말 황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뻑 가게’ 한 결정타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는데 (전)인권이가 이 곡을 이때 처음 불렀어요. 청중들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우리가 연주하는 것 듣고 뒤집어졌어요. 계속 앵콜이 나오니까 공연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은 거예요.

Q: SM에서의 콘서트 외에도 그 무렵 들국화의 콘서트를 보러 온 청중들의 성향은 어땠는지요? 또 당시 콘서트를 하던 곳은 어떤 곳이 있었는지요?
–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음악 깨나 듣는 사람들, 즉, 팝 음악 아니면 음악으로 쳐주지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당시까지 고등학생들은 우리를 알 수가 없었죠. 접할 기회가 없잖아요. 라디오에서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콘서트를 제대로 할 만한 소극장이라는 것도 없었어요. 오죽하면 SM 같은 곳에서 콘서트를 했겠어요. 밥도 먹는 곳이라서 콘서트하려면 테이블을 다 치워야 했어요.

Q: 이때가 대략 1983년으로 보입니다. 그 뒤 (전)인권형과 대판 싸웠다고 했고… 그렇다면 앞에서 [우리노래전시회]를 녹음하면서 전인권 님을 다시 불러와서 노래하게 한 것이 들국화가 재결합된 계기가 되는 셈인가요? 그런데 그때 전인권 님과 허성욱 님은 조덕환 님과 함께 활동을 계속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4인조 들국화가 된 것인가요?
– 그렇죠. [우리노래전시회]를 녹음하는 데 한두 달쯤 걸렸는데 중간에 (전)인권이를 불러와서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르게 하고 다시 들국화가 시작된 것이죠. 나와 조덕환은 오래 전부터 친한 사이였어요. 학교도 같은 학교이고 알파 프로덕션의 CM송 사무실에서 일할 때부터 조덕환, 이영재와는 매우 친했죠. 그래서 (조)덕환이와 같이 하게 된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했어요. (조)덕환이는 독특한 보컬이었는데, 간단히 얘기해서 ‘가장 외국 애들에 가깝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어요. “Carry on till Tomorrow” 같은 것. 단지 기타리스트 출신은 아니기 때문에 밴드에서 리드 기타를 맡기에는 조금 미흡했죠. 1집을 녹음하면서 (조)덕환이의 기타에 대해서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그때 (조)덕환이는 굉장히 술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인권이랑 나랑 (허)성욱이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전)인권이랑 (조)덕환이랑 트러블이 많았죠.

Q: 그 당시 따로또같이나 해바라기 등의 음반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던 이영재 님이 들국화에 합류할 계획은 없으셨던가요?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앞에서 이영재 님이 동방의빛이라는 이름으로 전인권 님이랑 같이 연주한 일이 있다고 말해서 물어보는 말입니다.
– (이)영재는 그때 동방의빛을 하면서 (전)인권이랑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요.

Q: 다음 카페에 최성원 님이 쓴 글을 보면 믿음소망사랑이 연주하는 것을 처음 보셨다고 했는데 그곳은 어디이고 어떻게 그분들이 들국화에서 연주하게 되었는지요?
– 우리가 연주하던 이태원의 업소 ‘라이브’ 옆에 있던 업소에서 처음 봤는데 그때 믿음소망사랑은 5인조였어요. 최구희, 조준형 두 명이 기타를 맡고 있었고(조준형은 나중에 11월이란 그룹을 했죠), 베이스에 이환규, 보컬에 김동환(나중에 “묻어버린 아픔”으로 유명해졌죠), 드럼에 주찬권이었어요. 긴머리를 나풀대며 블랙 사바쓰, 우리가 좋아하던 이글즈의 노래 등 풍부한 레파토리를 자랑하는 정말 신선한 밴드여서 (전)인권이와 (허)성욱이, 나를 모두 감격하게 만들었죠. 그들은 곧 우리가 연주하던 라이브로 오게 되었어요. 당시 라이브에는 하덕규 밴드도 있었는데 기타에는 함춘호가 아니라 손민태가 있던 초창기 시절이었죠(주: 다음 카페의 최성원 님의 글 ‘둘국화가 믿소사를 만났을 때’를 함께 편집했다).

Q: 그 글에서 “우리 팀에는 없던 리드 기타, 드럼이 있어서 부러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던데 그러면 이때부터 들국화의 음반을 ‘밴드 형태’로 녹음을 하고 싶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찬권 님과 최구희 님을 음반에 세션으로 참가시켰는데 이런 과정에서 내부의 갈등 같은 것은 없었는지요?
– 음반을 낼 때 밴드 형태로 해야 되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어요. 드럼의 경우 우리 팀에는 원래 드럼이 없었으니까 (주)찬권이가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고, 기타의 경우 조덕환과 최구희가 같이 시작했는데 조덕환이 중간에 빠지게 된 케이스죠. 일단은 (조)덕환이의 기타가 녹음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축복합니다”의 간주 정도를 (조)덕환이가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했고, 나머지는 전기 기타는 최구희, 어쿠스틱 기타는 내가 연주하게 되었죠.

Q: 그렇지만 들국화 1집의 수록곡 가운데 조덕환 님이 작곡한 “세계로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축복합니다” 같은 곡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함께 못할 정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요?
– 녹음은 어쨌든 끝났는데 그러고 나서 언젠가 한번 마찰이 있었고 그 시점에서 (조)덕환이가 탈퇴를 하게 된 것이죠.

동아기획 김영과의 ‘우연한’ 만남

Q: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음반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군요. 음반에 수록된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물어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들국화가 음반을 만들게 된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들국화의 1집 음반은 ‘동아기획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김영 사장이 어떻게 이 음반의 제작자로 선정된 것인지요? [우리노래전시회]의 경우 김영 사장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 그건 간단한 이야기예요. 음반을 내자는 결정은 우리가 내렸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전)인권이가 그 전에 지구 레코드에서 음반을 낸 게 있어서 지구 레코드의 상무로 있던 사람을 잘 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돈을 얼마 주겠다고 하니 거기서 내자면서요. 그때 지구 레코드는 벽제에 있었어요(참고: 지금도 고양시 벽제에 있다). 그래서 (전)인권이네 삼청동 집에 모여 있다가 ‘그래, 음반 계약하러 가자’고 해서 삼청동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서 벽제로 가는 버스를 타러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옆에 ‘박지영 레코드’라는 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요즘 어떤 음반이 새로 나왔나…’하고 잠깐 들러 봤어요. 그랬더니 조그맣고 머리 벗겨진 양반이 튀어나오더니 ‘들국화 아니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이리 들어오라고 그러더니 커피도 사 주고 그러더군요. ‘음반을 어떻게 낼 거냐’고 묻길래 ‘지금 우리 계약하러 가는 중이다’라고 말하니까, ‘그러면 얼마를 주면 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불렀어요. ‘계약금 2천만원에 봉고차 한 대 값이 필요하다’고. 그랬더니 ‘아,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영 사장하고 같이 하게 된 거예요. 벽제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렇게 했죠.

Q: 그렇다면 그 당시 김영 사장은 박지영 레코드라는 소매점을 운영하면서 동아기획도 운영하던 때였나요? 이른바 ‘서소문 사무실’은 그때 없었던 건가요?
– 그때는 동아기획이 없었어요. 김영 사장이 박지영 레코드를 운영하면서 서라벌에서 ‘PD 메이커’로 음반을 몇 장 제작하던 때였죠. 서소문 사무실을 차린 것은 한참 뒤죠. 들국화 음반으로 돈을 번 다음에. 그 양반은 우리가 하려는 음악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이었어요. .

Q: 김영 사장은 다른 제작자와는 달리 이전에 작곡도 한 일이 있는 분이고, 음악을 듣는 귀가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글쎄요. 김영 사장이 작곡한 건 완전 ‘뽕’이에요. ‘사랑의 연주’인가 그런 것들… 들어봤어요? 듣는 귀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그 사람이 거기서 소매상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들국화란 그룹이 음반을 낸 게 있느냐’는 물음을 많이 들은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그 사람한테 가게 된 건 정말 신의 노릇일 겁니다.

Q: 그렇다고는 해도 들국화의 얼굴을 알아봤다면 언더그라운드의 동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일텐데요.
– 우리 얼굴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머리 긴 애들이 와서 음반에 대해 물어보니까 우리가 거기 찾아갔을 때 넘겨짚고 물어본 것이죠. 결정적으로 김영 사장이 우리가 하는 음악을 얼마나 모르냐면, 계약을 한 다음 우리가 녹음하는 과정에서 서울 스튜디오의 최세영 사장과 틀어지니까 ‘자기는 망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Q: 하하, 최세영 씨가 틀어진 이유는 무엇인지요?
– (전)인권이랑 틀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전)인권이의 창법이 녹음 기사들을 굉장히 피곤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전)인권이가 주문이 많았거든요. 완벽하게 하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다시 주문하는 것도 많았고…

Q: 들국화 음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984년에 발표된 따로또같이 2집의 경우 세션 연주자의 이름에 최성원 님과 허성욱 님의 이름이 보입니다. 이영재 님과 김광민 님의 이름도 보이고…. 시점 상 [우리노래전시회]를 제작하고 들국화 음반을 준비하는 황망한 와중일 것 같은데 세션을 맡은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또 이 음반은 대성음반에서 발표되었고 서희덕 씨가 제작한 음반인데 이쪽과 교류가 있었던 것인지요?(참고로 당시 대성음반에는 김창완이 이사로 있었고 서희덕이 문예부장으로 있었다. 서희덕은 뒤에 뮤직 디자인을 운영하고 지금은 음악산업계의 몇몇 협회에서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다. 뮤직 디자인은 델리 스파이스의 음반을 제작, 발매한 곳이기도 하다)
– 이건 기억이 잘 안나네요. 이게 들국화 이전에 나온 건지 다음에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베이스를 쳤는지 통기타를 쳤는지도 헷갈리네(웃음). 내가 레코딩 세션으로 참여한 것은 되게 많아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어요. 김수철 음반에서도 연주한 게 있어요. 따로또같이는 (나)동민 때문에 알게 된 것이고 이 음반에 참여한 것도 (나)동민이의 권유였을 거에요. 그러니 음반사같은 것도 내가 접촉한 것은 아니죠. 나는 (이)장희 형이 운영하던 음반사에 있을 때 뒤로 (김영 사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음반사쪽하고는 전혀 접촉이 없었어요.

들국화 1집 음반을 다시 해부해 보면…

20030429021003-0506interview2_choi02member사진설명: 1집 뒷면에 실린 멤버 사진

Q: 녹음과정에 대해 간략하게만 물어보겠습니다. 당시 몇 트랙 녹음이었는지요? 그리고 멀티트랙 레코딩이었다면 ‘드럼 따로, 베이스 따로, 기타 따로’ 이런 식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합주를 원칙으로 한 것인지요?
– 24트랙 녹음이었어요. 그렇지만 24트랙으로 녹음을 하면서도 우리는 끊어 간 적은 없었고 한꺼번에 합주를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보컬은 ‘가이딩 보컬’로 부르면서 하다가 나중에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자세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좀 파격적이었어요. 그래서 녹음 과정에서 서울 스튜디오의 최세영 씨와 계속 부딪혔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처음에 녹음을 맡다가 중간에 ‘안 하겠다’고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결국 보조기사가 녹음을 마무리했죠.

Q: 당시 들국화의 음반은 다른 음반과는 사운드가 많이 달랐습니다. 저음도 강하면서 헤비한데 그러면서도 또 정밀하고 섬세하다고 할까요… 이런 사운드 프로듀싱에는 제작자나 엔지니어 외에 최성원 님이나 다른 멤버분들이 개입을 한 것인가요? 당시 엔지니어들은 매우 권위적이어서 음악하는 사람이 사운드 프로듀싱에 개입하기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 당연히 우리가 사운드 프로듀싱에 개입했죠. 당시 녹음 기사들이 권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나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녹음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뭔가를 아는 사람이 얘기하면 그쪽에서 할 말이 없죠.

Q: 스튜디오(녹음실)를 얼마 정도 사용한 것인가요? 그리고 앨범 전체를 녹음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것인가요?
– 한 20프로(주: ‘프로’란 3시간 30분의 세션 시간이다) 썼고,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요. 대략 1~2개월 정도 걸렸나…

Q: 들국화 1집 음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음반에는 당시의 ‘가요’ 음반과는 달리 개별 곡마다 편곡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국화의 음반에서 편곡은 일반적인 곡의 편곡하고는 다른 과정을 거쳤나요?
– 일반 가요의 편곡 과정은 없었어요. 밴드니까 그런 것이고 그게 밴드의 특징이죠.

Q(김민규): 기본적인 곡 작업을 어떤 것으로 하셨어요?
– 카세트로 했죠. 코드를 적어놓곤 했는데 멜로디를 까먹으면 곡이 사라지니까. (웃음)

Q(김민규): (웃음) 저도 많이 까먹어요. 코드 적고 좋은 곡이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기억에 안 남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면 편곡을 하실 때는 다른 분에게 작곡된 곡을 카세트로 들려주셨나요?
– 내가 기본적인 편곡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허)성욱이에게 넘겼죠. (허)성욱이는 피아노로 편곡했어요. (허)성욱이의 생명은 그랜드 피아노에 있어요.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들국화 음악은 제대로된 편곡은 없어요. 악보를 그린 것은 아니었고요.

Q(김민규): 솔로 작업에서는 어떻게 했나요? 그룹 때와는 달랐을 것 같은데…
– 내 솔로 음반의 편곡은 어떤날의 (조)동익이한테 맡겼어요. 내가 아이디어만 주었고요.

Q: 그렇다면 작곡과 편곡의 관계에 대해 예를 들어 보면 “행진” 같은 곡은 (전)인권 님의 작사·작곡이지만 저희들의 추론은 (전)인권 형은 멜로디의 골격만 만들고 나머지는 (최)성원 님이나 (허)성욱 님이 편곡을 해준 것으로 들립니다.
– 그래요. 녹음하기 2주전인가 (전)인권이가 “행진”이라는 곡을 들고 와서 ‘이거 어떠냐’라고 했어요. 나는 그때 무조건 (전)인권이가 만든 곡이 음반에 하나 들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허)성욱이 데리고 편곡을 한 것이죠. 그렇다고 멜로디를 바꾼 건 없고 코드는 내가 좀 붙였던 것 같아요.

Q: 예를 들어 “행진”의 인트로에서 D 장조로 시작하다가 D 단조(Dm)로 조가 바뀌는 것이나 멜로디가 시작할 때 Dm 다음에 Gm6가 등장하는 화성 진행 같은 것 등은 누구의 작품인지요?
– 누구 작품인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팀(밴드)라는 건 서로 상의해서 연주하는 것이니까. (전)인권이가 어떤 그림이나 필링을 얘기해주면 그걸 연주로 해석을 할 것 아니겠어요? 즉, 자기가 만든 곡이니까 (전)인권이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면 그것을 실질적으로 연주로 실현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같이 상의해서 했던 것이죠.

Q: “행진”의 가사에 보면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같은 노래의 제목들이 가사로 다시 등장하고 후반부의 코러스에서는 조성과 약간 맞지 않는 톤의 ‘매일 그대와’의 목소리도 들어가는데 그건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 그건 맨 마지막에 집어넣은 것이죠. 이 곡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걸 다 가사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죠. ‘매일 그대와’의 목소리는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죠. (전)인권이가 거기에서 ‘매일 그대와’의 멘트를 해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예요. (전)인권이는 나름의 엉뚱한 연출을 잘 해요. 연출가적 기질이 굉장한 친구예요. 무대 매너도 그렇고 ‘애드립’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전에 연출된 것이에요.

Q: “그것만이 내세상”은 [우리노래전시회]의 버전과 많이 다릅니다. 그때 성에 차지 않아서 편곡을 바꾸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곡은 웅장한 곡이라서, 일반적으로는 관현악 오케스트라 편곡을 넣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 [우리노래전시회] 때는 대충 한 것이에요. 들국화 때는 그래도 잘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오케스트라 편곡같은 것도 물론 생각했죠. 그런데 그걸 실현하려고 하니까 돈 문제나 여러가지로 도저히 힘들겠어서 포기했어요.

Q: 혹시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이 너무 길어서 제작자측으로부터 방송용으로 부적합하다든가 하는 식의 불평을 듣지는 않으셨나요?
–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대부분 무시했어요.

Q: (전)인권 님은 라이브 공연에서 원곡의 멜로디를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바꿔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지요?
– 그건 잘못 본 거예요. (전)인권이처럼 즉흥적인 면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 친구는 모든 걸 연습해서 하는 거죠. 즉흥적으로 하는 듯한 모습도 나름대로 연출해서 하는 것이에요. 오히려 내가 즉흥적이죠. 나는 똑같은 걸 두 번 하지를 못해요.

Q: “세계로 가는 기차”는 조덕환 님의 노래로 알고 있습니다. 공연에서는 (전)인권 님도 종종 부르던데 두 분 사이의 갈등 같은 건 없었나요?
– 솔직히 말하면 (전)인권이가 (조)덕환이의 보컬을 무지하게 싫어했어요. 옆에서 내가 보기에는 뻔한 거예요. 그룹 내부에 노래하는 사람이 둘 있으면 싸우게 되지 않겠어요?

Q: “축복합니다”를 돌아가면서 불렀는데, 부른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연에서는 (주)찬권 님도 노래를 부른 일도 있는데, 당시에도 참여한 것인지요?
– 그때는 (허)성욱, 나, (전)인권이, (조)덕환의 순서로 이렇게 불렀죠. 1집까지만 해도 그 네 명이 멤버였으니까. 나중에 (조)덕환이가 빠지고 (주)찬권이 정식 멤버가 되면서부터는 (주)찬권이도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Q: “매일 그대와”의 경우 이영재, 이승희와 함께 1980년에 녹음한 버전보다 템포가 느립니다. 또한 개방현 주법을 이용한 것 같은데 그건 누구 솜씨인가요? 최성원 님의 연주라면 이 음반에서 다른 멤버들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한 트랙은 없는지요?
– 1980년에는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녹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템포를 좀 빠르게 했죠. 개방현 주법은 A장조로 한 것이고… 아무튼 이 음반의 어쿠스틱 기타는 거의 다 내가 연주한 거예요. (조)덕환 경우는 앞에서 얘기했고 (전)인권이의 경우는 “축복합니다” 딱 한 곡에서만 연주했어요. 솔직히 주위에서 굉장히 걱정했는데 내가 녹음기사에게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Q: 1집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행진”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만들어둔 곡들인가요?.
– “더 이상 내게”는 음반 만들기 전에 만든 곡이죠. 다른 곡들은 이전에 들국화 음반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두었던 곡들이고. “사랑일 뿐이야”같은 경우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장은아라는 여가수가 부른 적이 있어요. 들국화 음반에 실린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노래가 되었지만…

Q: “그것만이 내세상”은 언제의 심정을 노래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많은 사람들에게 ‘실존적 고민’을 담은 곡으로 들렸을 텐데 언제 그런 고민을 한 것인지요?
– 군에 있을 때 아니면 제대 직후일 겁니다.

Q: 자주 듣는 질문이겠지만 마지막 트랙인 이른바 ‘건전가요’를 “우리의 소원”으로 넣자고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요?
– 누가 먼저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모르겠는데 금세 동의가 되었으니 우리가 같이 낸 셈이죠. ‘건전가요’로 다른 사람이 부른 것을 넣는 게 싫었던 것은 사실이고…

주변에 있었던, 그렇지만 중요한 인물들

20030429015523-0506interview2_choi03best12사진설명: 들국화 베스트 12의 커버 사진

Q: 이제 들국화 1집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 중 그룹 외부의 사람들에 대해 간략히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뒤에는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된 (주)찬권 님이나 (최)구희 님은 이 당시에는 그냥 세션 연주자로만 참여한 것인가요? 아니면 멤버로 영입하려는 은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인가요?
– 녹음할 때는 세션으로 참여했어요. 이런 건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사실 믿음소망사랑 멤버를 빼온 게 아니라 (주)찬권이와 (최)구희에게 녹음만 부탁했었어요. 그런데 믿음소망사랑이 어떤 일로 한번 대판 싸웠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나서 우리가 공연을 하는데 공연 세션으로 계속 도와주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믿음소망사랑이 깨지니까 (주)찬권이는 들국화 정식 멤버가 되었고 (최)구희는 괴짜들을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뒤에 들국화 공연에 합류했죠. 1집을 내고 활동할 때 어떤 콘서트의 포스터에서 내가 (최)구희에게 꽃다발을 주는 장면이 있어요. 그게 정식으로 영입하겠다는 싸인이었죠. 이것도 (전)인권이의 연출이었어요. 믿음소망사랑의 2집 앨범이 나온 것은 들국화가 깨진 뒤의 일이고 괴짜들의 음반은 그 전에 나왔죠.

Q: 기존 멤버들(최성원, 전인권, 허성욱)이 두 사람(최구희, 주찬권)을 정식 멤버로 영입한 것인가요, 아니면 두 사람이 먼저 가입 의사를 밝힌 것인가요? 아울러 손진태 님이 영입된 것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 그거야 뭐 이심전심이었죠. 그때 (조)덕환이가 빠진 상태였고 최구희와 주찬권, 이 두 사람도 자기 밴드가 정상적이지는 않은 상태였으니까 두 사람이 영입되기 전에는 손진태가 기타를 쳤죠. 2집 때는 주찬권, 최구희, 손진태가 밴드의 중심 멤버가 되었어요.

Q: 주찬권 님도 노래를 잘 하시는데, 들국화에서는 노래를 부르실 기회가 없으셨던 건지요? 본인이 보컬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신 적도 없는지요?
– 아무래도 드럼이니까 노래를 나서서 부르지는 못했겠죠. 그리고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 많은 가수 중에서 (전)인권이의 노래에 뒤에서 코러스를 넣어야 하는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이죠(좌중 웃음)

Q: 최구희 님은 들국화 2집에도 수록된 “너랑 나랑”에서 느낄 수 있듯 ‘토속적’인 감각이 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점이 혹시 (최)성원님의 ‘팝’ 감성과 충돌하는 일은 없었는지요?
– 그런 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곡을 써야 내 부담이 적어지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죠. (최)구희는 이펙트도 별로 쓰지 않고 거의 생 톤으로만 연주하는데도 한국에서 기타 톤을 제일 잘 잡는 기타 연주자였어요.

Q: 음반에 참여한 ‘외부 인물’ 가운데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작곡한 이병우 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녹음한 경위는 어떤 것인가요?
– [우리노래전시회]를 제작할 때 (조)동익이가 (이)병우를 만나게 됐고, 그래서 둘이 함께 어떤날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랑 (전)인권이는 이 그룹을 키워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병우의 노래 중에 우리가 연주하기에 제일 좋은 걸 하나 녹음하게 된 것이죠.

Q: 어떤날이 1986년에 발표한 음반을 들어보면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1번 현을 개방시킨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국화의 음반에서는 피아노 연주가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요? 녹음된 시점은 들국화의 버전이 먼저이지만…
– 원래 (이)병우가 만들고 어떤날이 연주할 때는 통기타곡이었어요. 그걸 우리가 피아노 연주로 옮긴 것이죠.

Q: 클라리넷을 연주한 (이)원재 님은 어떻게 섭외가 되어서 참여한 것인가요?
– (이)원재는 (조)덕환이랑 (전)인권이랑 (허)성욱이랑 활동할 때부터 틈틈이 와서 도와주던 친구였어요. 한양대 음대를 나온 친구였고 나중에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냈다는 건 알고 있죠?

예기치 않은 성공 그리고 라이브 공연의 행진

사진설명: 대전 공연(시민회관 대극장, 1986년 8월 22-23일) 티켓

Q: 1집 음반을 듣고 나면 ‘우리 여기까지 힘들게 왔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면 음반 녹음 후 ‘대박’이 될 것이다라는 예상은 하셨는지요? 혹은 음악적인 면에서나 대중적인 면에서 녹음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시에는 이게 많이 팔리든 적게 팔리든 별 문제가 안 됐어요. 음반을 내면서 받은 돈이 중요했죠. 그때는 계약 당시의 보수만 받고 끝날 때였거든요. 그러니 대박이든 아니든 중요한 게 아니었죠.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이미 결과가 나온 셈인데 대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댔겠어요? (좌중 웃음)

Q: 역시 (최)성원 님은 그때부터 이미 ‘왕자병’이 있으셨군요(웃음). (최)성원 님이나 들국화 멤버들은 그렇다 치고 김영 사장의 기대치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중간에 ‘망했다’라고 한숨쉬면서 나갔다고. 그러다가 나중에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게 엄청난 거구나’라고 깨달은 것이죠.

Q: 어쨌든 이 음반이 ‘대박’을 기록한 이유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나온 음반들과는 질이 달랐기 때문인 듯합니다. ‘음질’ 말입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특히 베이스를 연주한 분이니까 질문 드리면 베이스의 톤이 남달랐던 듯합니다.
– 그건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국산 가요의 사운드를 들으면 통통거리는 베이스 사운드가 없었어요. 그런데 최세영 사장이 나한테 비결을 가르쳐 줬어요. 내가 베이스를 치는데 따로 부르더군요. 왜 그런가 했더니 내가 연주하는 베이스의 소스 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대요. 그러니까 녹음할 때는 겉소리, 즉 배음(倍音)이 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줄을 땡겨서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보고 우리나라에서 베이스 터치가 가장 좋다고 그랬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소스가 좋아야 녹음이 풍부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라이브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들국화 음반이 음의 레인지가 컸어요(이때 성원 님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다: “이것도 왕자병이라고 그러지 마. 이건 테크니컬하게 진짜니까”(좌중 웃음))

Q: 베이스를 오래 연주한 분도 아닌데 그런 터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선천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슨 요인이 있었을까요? 베이스를 그렇게 오래 연주한 분도 아닌데…
–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 베이스 터치도 그렇고, (허)성욱이의 피아노 터치랑 (전)인권이의 터지는 보이스는 그 속에 일종의 ‘분노’가 있었어요. 당시의 다른 음악하는 사람들한테 ‘다 웃기지 말아라’라는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걸 누가 ‘고요 속에서 터지는 파장’이라고 말하던데 그렇다면 그렇고요.

Q: 많이들 하는 말이지만 들국화는 TV 등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공연으로 청중과 접촉하는 ‘라이브 문화’를 선도한 주역으로 꼽히는데, 이러한 활동 방식은 멤버들 사이의 합의에서 나온 것인가요? 1집 음반 발매할 때 음반에 (무료) 공연 티켓을 넣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입니다만…
– 그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송국에 가서 비실거리면서 비벼대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걸 하겠어요? 그리고 무료 공연 티켓을 넣은 건 김영 사장의 아이디어였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피를 봤죠. 공연 수입이 있어야 되는 건데….(웃음)

Q: 당시 소극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뿐더러 공연장에 대한 정보도 없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앞서 말씀하신 대로, 첫 공연장소였던 SM처럼 들국화의 공연장이 정식 공연장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사운드를 잡거나 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혹은 이러한 사운드를 잡는데 공헌을 해 준 스탭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 그 당시에 우리를 도와주었던 정필영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나마 서울 같은 곳에서는 괜찮았는데, 지방에서 공연할 때는 모니터가 전혀 안 됐어요. 수없이 라이브 공연을 하다 보니 감으로 맞춰서 (사운드가) 나왔던 것이죠.

Q: 들국화 1집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다음에는 ‘업소’에서 일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연으로 충분한 수입이 되셨는지요?
–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들국화의 수입은 음반으로 받은 게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들국화는 계속 돈을 못 벌었어요. 나같은 경우 들국화를 2~3년 하면서 번 돈의 3배를 솔로 활동을 하면서 벌었으니까요. 그게 우리나라 그룹의 진짜 문제죠. 그룹으로서 우리가 정상급이었다고 해도 들국화 멤버는 당시 인기가수들, 예를 들어 김범룡 개런티의 절반도 못 받았어요.

Q: 당시의 청중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요. 그 당시 헤비 메탈을 하던 스쿨 밴드 출신들도 대다수가 들국화 팬이더라고요.
– 음반을 내기 전까지 들국화의 팬들은 한국에서 음악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음반을 낸 다음에는 갑자기 연령층이 고등학생까지 내려가더군요. 그 멋진 팬들이 다 없어져 버렸죠. 여고생도 많았지만 남고생도 많았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우리같이 남자 팬들이 많았던 밴드도 없었을 거에요. 여자 팬이 좀 더 많아야 되는 건데….(좌중 웃음)

Q: 당시의 들국화 공연들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하면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이나 저니의 “Who’s Crying Now”같은 곡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기억이 나시나요? 한편 라이브 콘서트 음반에는 “Come Sail Away” 등 스틱스(Styx)의 곡을 두 곡이나 연주했습니다.
– 맞아요. “Stairway To Heaven”은 믿음소망사랑이 잘 하던 곡이었어요. 그러니 (주)찬권의와 (최)구희가 하던 것에 나머지 셋이 들어가서 한 거죠., “Who’s Crying Now”는 대전 공연에서도 했고 크리스탈 백화점 공연에서도 했어요. “Fool’s Overture”를 인트로로 연주했었죠. 스틱스는 (전)인권이가 좋아하던 그룹이에요. 아무래도 외국곡이야 싱어를 따라가야 하죠. 싱어가 잘 하는 걸 연주해야 하니까요.

Q: 그러면 [들국화 Live Concert] 음반에 대해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 음반은 실제 공연장이 아니라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밴드가) 잘 나가니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기획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멤버들은 이러한 기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 그 음반은 철저히 김영 사장이 기획한 겁니다. 우리는 돈을 얼마씩 더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그 당시가 라이브 공연을 제대로 녹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을 때 아니겠어요? 우리가 공연할 때 녹음기재를 들고 와서 라이브 음반을 만들면 될 텐데 그게 힘들었나 봅니다.

Q: 박수소리를 들어보니까 한 50명 정도이고 여성 청중이 많아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지만 스튜디오가 꽉 차기는 했어요. 이 음반만 해도 박수소리에 신경 안 쓴 음반이에요. 어쨌든 모든 연주가 실연인 것만은 사실이죠. 그리고 이 무렵부터 우리 팬들이 다 여고생으로 되어 버렸어요(좌중 웃음). 음악을 들으려 했던 대학생들은 감히 끼지 못하게 됐고… 공연이 좌석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극성스럽게 아침부터 기다리지 않으면 들어오질 못했던 게 이유였던 것 같아요.

Q: 공연 중간에 전인권 님이 최성원 님를 “나의 음악 선생님이고….” 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비꼬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 아니에요. 다 (전인권의) 농담이에요. (전)인권이가 농담을 얼마나 잘 하는데…

Q: 사소한 질문이지만 이 음반에서 노래를 한 박진영 님은 어떤 분이죠? [우리노래전시회 4]에 참여한 박인영 씨를 잘못 부른 건 아닌가요?
– 게스트로 참여한 여가수에요. 그 뒤로 뚜렷한 활동은 없었죠.

균열, 불화 그 배후의 이야기들

사진설명: [들국화 II(제발/내가 찾는 아이)] 서라벌레코드/동아기획(VIP 20030), 1986-09-25

Q: 1집이 워낙 대성공을 해서 2집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았던 탓인지, 2집은 ‘1집만 못하다’는 평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평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추측컨대 이러한 평가를 받은 이유가 공연에 바빠서 음반 녹음에 소홀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2집을 발표하기 이전까지 공연 등등으로 상당히 바쁘셨을 것 같은데요. 그러한 과정에서 누적된 피로가 밴드 해체의 원인들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 그런 점도 있겠죠. 공연을 그렇게 많이 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돼 있어요. 1집 같은 경우는 참 오랫 동안 준비한 것이었죠. 반면 2집에서는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모든 포커스를 맞출 시간도 충분치 않았어요. 공연을 줄이고 음반에 집중하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이미 멤버간에 균열이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2집 앨범을 좋아하는데…

Q: 2집의 음악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단지 수록곡 중 “내가 찾는 아이”나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 같은 곡은 만든 지 꽤 오래된 곡입니다. 다른 분들의 곡 대부분도 그런 것 같습니다.
– 내 곡들은 만들어 놓은 지 꽤 된 곡들이죠. 새로 만든 곡은 없어요.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도 역시 “내가 찾는 아이” 만들 무렵 대학교 시절에 만든 노래이고. (주)찬권이나 (최)구희 곡도 믿음소망사랑 시절에 만들어 둔 곡이었을 거에요. (전)인권이가 새 곡을 만들어 왔는데 충분히 맞춰 보지 못하고 녹음을 하게 된 것이죠. 내가 새 곡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일종의 패인이었던 것 같아요.

Q: 스튜디오를 서울 스튜디오에서 한국음반 스튜디오로 옮기고 엔지니어도 바뀌었는데 이 점이 영향을 주지 않았던가요?
– 녹음을 하는 기술적 문제는 아닐 거에요. 오히려 (1집을 녹음했던) 서울 스튜디오가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한국음반 스튜디오로 옮긴 것이었어요.

Q: 2집을 녹음하면서 생겼다는 ‘균열’은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에 의해 나온 것인가요?
– 음악적인 견해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실 당연한 거예요. 멤버들이 계속 같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하물며 ‘나는 삼겹살 먹고 싶은데 왜 넌 저걸 먹냐’는 것부터, 곡에 넣는 현의 대선 같은 것까지 견해차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요. 문제는 그런 견해 차이를 통합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없다는데 있었죠. 그런데 그러한 것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프로듀서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물론 매니저를 두긴 했어요. 1집 이후에 (김)진성 형을 매니저로 썼어요. 이유는 내가 존경하는 김민기 형의 음반을 제작했다는 점이 가장 컸어요. 하지만 김진성 형도 소극적인 프로듀싱에 머물렀죠. 김영 사장이 음악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고…

Q: 들국화의 균열에 대한 통속적 견해는 ‘(전)인권 님과 (최)성원 님 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종종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와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선 두 분의 관계를 레논/매카트니의 파트너쉽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즉, 전인권 님을 ‘visionary’로, 최성원 님을 ‘craftsman’ 식으로…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1998년의 학전 소극장 공연에서 (최) 성원 님이 존 레논의 “Imagine”을 부르면서 “내가 음악을 듣다가 형님 같은 분을 만났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 겉으로 보이는 진짜 속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 레논과 매카트니와의 비교도 그저 비교일 뿐이겠죠. 그런데 원래 존 레논은 (전)인권이가 좋아했었고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에요. 1집의 커버들 비틀스의 [Let It Be]처럼 만든 것도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입니다.

Q: 두 분과의 불화에 대해 뾰족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겠군요(웃음). 아무튼 들국화의 해체 이후에도 [추억 들국화] 등의 음반에는 세션으로 참여하고, 다른 멤버들 사이에도 원만한 관계는 유지된 것인가요?
– 그렇죠. 들국화 활동을 안 하는 것일 뿐이지, 녹음을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줬어요. 물론 서로 음악적인 입장은 (서로) 다르겠죠. 워낙 개성이 다른 인간들이고, 자기 주장도 강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마찰이 있는 거고. 그건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리고 나와 (전)인권이의 불화에 대해서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만 해줄께요.. 처음에 나랑 ‘밤일’할 때 의견충돌이 있었어요. (전)인권이는 당시만 해도 멋있는 음악은 외국곡이라도 그대로 카피를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내 머릿속에 (김)민기 형이랑 (조)동진이 형이 들어 있어서 ‘빨리 우리 걸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카피를) 하겠어요. (전)인권이와는 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번은 (전)인권이가 밤무대에서 기타를 치는 유명한 형을 따라서 6개월 정도 지방 나이트클럽에 가 있자고 제의한 일도 있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랬다가는 진짜 밤무대 밴드로 끝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러마…”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노”했어요. 그래서 (전)인권이가 무척 섭섭해 한 일이 있어요.

Q: 전인권 씨는 최성원 씨에 비해 ‘밤무대에서 외국 곡을 카피하는 것’을 그렇게 터부시하지는 않았다는 말인가요?
– (나도) 무조건 터부시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당장 필요하니까요. 다른 무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창작곡이 많았던 것도 것도 아니니 자연히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이미테이션은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도 않았아요. 이건 품위 차원이 아니라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죠(웃음).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이 해 온 걸 그대로 따라 해야 하죠? 나는 밤일을 할 때도 한번도 외국곡을 똑같이 따서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내 스타일대로 했지요.

Q: 지금 회고하건대 당시의 들국화 활동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 아까도 말했지만 확실한 매니지먼트가 없었다는 부분이겠죠. 많은 멤버들의 의견차이를 통합하고 결정할 결정기구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들국화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쉽게 이야기해서, 리더가 없었어요. 리더가 없는 게 처음에는 장점인 면도 있었는데 뒤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음반을 만들다 보면 결정할 사항이 무수히 생기잖아요. 하다못해 커버 자켓부터 그렇죠. 그런데 멤버는 여럿이고 리더가 없으니 모든 것에 대해 결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김)진성이 형이나 김영 씨가 해 주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분들도 역시 역부족이었죠.

들국화의 문화적·사상적 뿌리

Q: 그러면 이제 ‘당시의 들국화’에 국한하지 않고 멤버분들의 그뒤의 활동까지 고려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들국화의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의 지위라고나 할까요? 우선 들국화와 비슷한 연배로 구성된 그룹들 가운데 산울림과 송골매 등은 들국화보다 먼저 주류에 등극했는데 이들의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 언급을 회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출발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산울림이나 송골매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당시 텔레비전에 출연하려면 ‘PD 선생님’이라는 말을 써야 했어요.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Q: 그렇다면 산울림이나 송골매는 물론이고 들국화와도 ‘출발’이 다른 사랑과평화의 음악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일단 연주력의 탁월함은 대다수가 인정하는 부분인데요. 이와 관련해서 2000년 들국화의 재결합 공연에는 최이철 씨를 비롯한 사랑과평화의 멤버들과 세션으로 참여했습니다. 사랑과평화는 속칭 ‘밤무대’에서 오래 연주한 그룹인데 함께 교류할 기회가 있었던 것인지요?
– 다들 알겠지만 사랑과평화는 나이트클럽을 주무대로 훵키한 쪽으로 연주를 잘 하는 밴드죠. (이)장희 형이 곡도 주고 제작도 했던 팀이니까 그때부터 알기는 했죠. 우리가 이태원에서 밤일을 할 때 기타리스트를 물색하면서 나름대로 ‘어떤 기타 연주자가 좋을까’ 의논하면서 최이철 형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도 있었죠. 쉼이라는 그룹의 김양일이라는 엄청난 기타리스트도 영입해 보려는 생각도 한 적도 있어요. 2000년 공연에 (최)이철 형이 우리를 도와 준 것은 미사리에서 연주할 때 자주 봤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쨌든 우리는 ‘연주력’이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어요.

Q: 그렇다면 들국화 멤버 본인들은 자신들의 연주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아까 말씀하신 ‘연주력이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다’는 관점에서라든가….
– (허)성욱이는 가장 묵직하게 연주를 잘 했어요. 모든 반주의 핵심을 알죠. 그리고 나는 기타를 치든 베이스를 치든 작곡자의 입장에서 연주를 해요. 그래서 같은 곡을 똑같이 두 번 못 쳐요. 그 다음 (최)구희는 그만의 톤이 있어. 찬권이는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 하고…. 이건 단지 연주를 ‘잘 한다 못 한다’ 차원의 문제는 아니에요.

Q: ‘연주를 잘 한다 못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들국화가 대변한 문화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검토할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 당시 한국에서 한쪽에는 소위 나이트클럽의 ‘노는’ 문화가 있었죠. 이 세계의 특징은,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나라가 미국의 52번째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의(主義)가 아니겠어요? ‘그대로 베끼자, 그 문화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근본이란 말이죠. 다른 쪽에는, (김)민기 형, 나아가 (조)동진 형의 줄기가 있어요. 여기에는 ‘내 것을, 우리 것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죠. 이렇게 엄청나게 다른 음악세계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들국화는 딱 그 중간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게 된 이유는, 각 멤버의 특성 때문에 생긴 것이었죠.

Q: 신중현 씨나 사랑과 평화 등의 음악은 나이트클럽의 ‘노는’ 문화와 깊게 연관되면서도 ‘내 것을, 우리 것을 만들어 보자’는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최성원이 님 생각은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음악과는 거리가 있죠. 일단 나는 ‘록 음악’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사실 들국화가 록인가요? 내가 물어보고 싶네요.

Q: 다른 사람들이 ‘한국적 록’이라고 하던데요.
– 난 그게 진짜 의문이에요(웃음).

Q: 들국화를 히피 문화와 연관짓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들국화는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는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 히피 문화는 오히려 아까 이야기했듯 ’52번째주’라고 말한 쪽이 더 강합니다. 나는 오히려 (김)민기 형 쪽이었죠. 묘하게 그 중간에서 다른 데로 빠져서 자기 세계를 만든 분이 (조)동진 형입니다. 다들 알죠. (조)동진 형이 예전에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스 등의 음악을 연주한 거. (조)동진 형이 실토한 적이 있어요(웃음). 그때 황규현, 전언수, 이태원 등과 함께 쉐그린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을 했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퍼스트 기타’를 쳤대요(웃음).

Q: 1980년대 ‘운동권’에서도 들국화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묘한 정서적 유대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전혀 없어요. 우리가 이태원에서 일할 때 (정)태춘이가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정)태춘이가 “너희들이 지금 우리나라 민중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나는 들국화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의 생각에 동의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겠죠. (정)태춘이는 친구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하는 사이고, 그의 음악도 물론 좋아해요.

Q: 협의의 운동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인권 씨는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시고, 김정환 시인과 친하시기도 하시던데요.
– 개인적으로 (전)인권의 철학은 잘 모르겠어요. 내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사실 노찾사나 꽃다지 같은 운동권 출신들의 노래와 (김)민기 형의 노래들은 다르잖아요.

들국화 이후의 홀로서기 그리고 다시 뭉치기

사진설명: 최성원의 솔로 1집

Q: 다시 ‘딴따라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까지 대충 여쭤 보겠습니다. 들국화의 성공 이후 동아기획 소속 음악인들이 거대한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 그 시스템은 내가 관여한 우리노래전시회 2집을 내면서 만들어진 것이었죠. 그때 참여한 가수들이 동아기획으로 오게 되었어요. 한영애는 이 음반보다 약간 뒤에 동아기획으로 왔고 그 뒤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Q: 역으로 들국화의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동아기획 소속의 다른 아티스트들이 위화감을 느꼈다는 말도 있습니다. 김현식 씨가 살아 있을 때 ‘동아기획이 들국화 중심으로 편성되면서 나는 좀 찬밥신세였다’는 식의 말을 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글쎄요. (김)현식이 경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수들은 들국화의 성공으로 인해 동아기획으로 모였던 것이죠.

Q: [우리노래 전시회 2집]에는 들국화의 정규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은 곡인 “너의 작은 두손에”라는 곡이 실려있습니다. 이 곡을 녹음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가사는 어떤 여자팬(안현이)이 보내준 것이라던데요.
– 이건 그때 삼성 마이마이가 협찬해서 가사를 공모해서 나온 가사였어요. 그래서 그 가사에 곡을 붙였죠. 이벤트에 관련된 노래니까 정규 앨범에는 수록하지 않았어요. 그 이벤트는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공연과 연계된 것으로 송창식, 한영애 등과 함께 공연했죠. 이 무렵이 들국화가 해체되기 직전이었어요.

Q: 최성원 님도 동아기획에서 두 장의 솔로 음반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이 음반들의 경우 ‘제작’과 ‘프로듀싱’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나요?
– ‘프로듀서’는 내가 맡은 것이고 김영 씨는 제작비를 댄 것이죠. 그렇다고 ‘PD 메이커’같은 것은 아니고 동아기획에 ‘전속’되는 개념으로 제작한 것이죠.

Q: 앞서 ‘들국화 활동을 한 것의 3배의 수입을 솔로 활동을 하면서 벌었다’고 말하셨는데, 실례지만 솔로 앨범의 판매량은 어느 정도였나요?
– 1집은 괜찮았는데 2집은 별 볼 일 없었던 것 같아요. 2집을 발표할 때 쯤에는 동아기획도 전성기를 지났을 때이죠.

Q: 솔로 음반은 들국화의 음반과는 다른 최성원 님 특유의 감성이 발휘된 음반으로 들립니다. 여기에는 당시 여기저기 편곡을 맡았던 조동익 님의 편곡도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 아까 말했지만 편곡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주고 실제 편곡 작업은 (조)동익이에게 맡겼어요. (조)동익이랑은 1, 2집에서 모두 같이 작업했어요. 그런데 (조)동익이는 그 뒤 (조)동진 형과 함께 하나음악이라는 걸 만들어서 동아기획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같이 작업한 일은 없죠.

Q: 조동익 님은 최성원 님을 비롯하여 동아기획 소속 음악인들의 음반에 편곡과 세션 연주를 많이 해주었고 [우리노래전시회 1]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어떤날의 음반들은 동아기획과는 무관하게 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요?
– 내가 신태성이라는 사람한테 어떤날의 제작을 해 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제작을 끝내 놓고 갑자기 자신이 없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내 후배 중에 최윤식한테 인수해라고 추천을 했어요. 더 자세한 것은 (조)동익이나 (이)병우가 알겠죠.

Q: 시간이 많이 지나서 1990년대 이후의 일들에 대해 많이 질문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굵직한 것에 대해서만 물어보겠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음악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패닉의 데뷔작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이적이 데모 테입을 가지고 직접 찾아왔어요. 그놈은 글을 아주 잘 써요. 어린 놈이 뭘 알고 글을 쓰는 건지 모르겠는데, 글 쓸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더라고요.

Q: 그 무렵 들국화의 오리지널 멤버 없이 전인권 님 혼자서 들국화 3집 음반을 발표했고 반응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 맞아요. 패닉의 1집 음반을 녹음하고 있을 때였어요. “달팽이”에서 보컬이 높게 올라가는 부분의 녹음이 잘못되어서 재녹음을 하려고 이적을 불렀는데, 이적이 씩씩거리더면서 달려오더니 “사부님, 그거 아세요? 전인권씨가 들국화 이름으로 다른 멤버들이랑 새 앨범을 냈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때 내가 한마디로 일축했죠. “들국화라는 이름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야”라고. (좌중 웃음) 그 당시에 나는 들국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나는 오직 패닉을 잘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었죠.

사진설명: 2000년 9월 2일~3일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안녕하세요 들국화’ 공연을 위한 사진

Q: 그러다가 1998년에 들국화가 ‘드디어’ 재결합합니다. 그리고 (전)인권 님이 불운한 사건을 맞고 2000년에 다시 재결합 공연을 합니다. 그 사이에 트리뷰트 음반도 나오고… 하지만 그 뒤는 다시 소식이 잠잠합니다. 1998년부터 들국화의 새 음반을 낸다는 (전)인권 님의 발언이 있었지만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 전인권 님의 솔로 음반이 나왔고…
– 들국화 공연은 솔직하게 말해서 ‘팬 서비스’ 성격이 강한 것이에요. 사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최근까지는 조금 쉬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나름대로 바빴어요. 히데오 사이토라는 친구와 한일합작 프로덕션을 하나 만들어서 그 일도 했고… 그 친구는 일본의 모리타카 시사토라는 여가수의 프로듀서로 한/일을 아우르는, 말하자면 보아 같은 프로젝트를 하자고 만든 파트너였어요. 2000년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들국화의 새 앨범에 대해서는 이제 곡을 써야죠. 요즘은 명목상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Q: 그쪽 판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1990년대 중반 동아기획의 후예들 일부는 하나음악을 만들어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활동했습니다. 혹시 거기에 합류하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 거기는 (조)동진이 형이랑 (조)원익이 형이 주도한 것이었죠. 거기에서 [우리노래전시회] 같은 걸 계속 해 나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려면 내가 이 나이에 (조)동진이 형 밑에 있어야 되잖아요(웃음). 거기엔 아주 든든한 (조)동익이가 버팀목 노릇을 하니까 내가 들어갈 이유는 별로 없었죠.

Q: 하긴 요즘 하나음악의 사정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 내가 보기에 조동진 형은 시인이에요. 시인이 부자라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업은 어떨까요. 내가 보기에 우리 나라에서 (조)동진이 형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1000명은 될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정액제로 1만원 정도씩 회비를 내고 이용할 수 있는 (조)동진 형의 유로 홈페이지를 만들면 어떨까요. (조)동진 형은 그 홈페이지에서 활동하는 거죠. 신곡도 거기에다만 풀고, 자기 글이나 사진 같은 것도 올리고, 팬들과 채팅도 하고… 그런 것은 즉시 반응이 오죠. 그 회비로 생활고도 해결이 될 거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만약 내 팬이 한 300명만 된다면 300만원만 들어와도 평생 음악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미사리 같은 데서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데 그런 유료회원을 만드는 게 좀 힘든 일일까요? 내 주위의 친구들한테 협박해도 300명은 될텐데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Q: 아이디어는 좋지만 현실은 아직 시기상조로 보입니다. 아직은 메이저 언론사들도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 어쨌거나 지금의 음반산업으로는 안돼요. 일단 말이 안 되죠. 음반을 오늘 풀면 내일 소리바다같은 곳에 mp3가 다 떠요. 그러니 음반을 어떻게 팔겠어요. 패닉 제작할 때까지가 딱 좋았어요. 그때까지 mp3가 안 나왔으니까요. (사실은 이때 최성원은 “야 니네들도 음반 안 사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지”라는 말을 꺼냈다. ‘혹시 음반제작 비즈니스를 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 싫어하는 건가…’라고 잠시 긴장하고 있었는데 성원형 왈 “사실은 나도 그래”였다 –;) 그리고 돈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게 소매상들이 다 문을 닫아버리니 어디 가서 음반을 사겠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다운받아야 되는 거고, 그러니까 더 좋은 음악들이 없어지는 거고. 게다가 우리 나라 음악산업 시스템에서는 조동진 형 같은 분을 그냥 방치하고 있잖아요.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사실 대중가요가 아니라 ‘매니아 가요’로 가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그런 시스템은 매니아들한테도 사실 필요한 거거든요. 나는 일단 (조)동진이 형부터 그걸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조동진 후원회. 난 그 형이 우리 나라에서 살 길이 막막하다는 건 정말 우리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해요.

Q: 그건 이 자리에서 끝낼 이야기는 아니고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문제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즐겨 들으시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후배 뮤지션은 없으신지요?
– 이젠 다 들어요. 옛날에는 굉장히 기호가 뚜렷했는데 이제는 어떤 음악도 다 이해가 되네요. 요새는 디즈니 영화 사운드트랙들도 좋아요. 후배 뮤지션들 중에는 자우림이 제일 재밌던데 솔직히 젊은 애들 음악을 자세히 들어보지는 못했어요. 이제 좀 들어봐야죠.

Q: 시간이 벌써 많이 지났군요. 까다롭다고 유명하시던데 (웃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정보를 주신 듯합니다.
– 옛날 같으면 이런 건 귀찮아서라도 안 했을 거에요. 하지만 나이가 드니까, 잘 모르는 후배들한테 이야기해주는 게 선배로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오늘 감사합니다. 들국화 새 음반 빨리 나오기 바라겠습니다
– 그런데 누가 들국화 앨범을 기다리기는 하나요?

Q: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릴 걸요…
– 그럼 해야겠네(웃음). (인터뷰 초반에서 최성원은 “야, 만약 우리가 음반 내서 성공한다면 우리 후배들도 50살까지는 밴드로, 그룹으로 음악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치? 알았어…”라면서 호기를 부렸다. 부디 그 호기가 실현되기를….) 20030426 | 최지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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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도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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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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