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6032628-0506review_deulgukhwa1들국화 – 들국화 I(행진/사랑일 뿐이야) – 동아기획/서라벌(VIP 20017), 19850910

 

 

한국 포크/록의 들국화, 만개하다

이 음반 커버는 비틀스의 마지막(으로 발표된) 정규 스튜디오 음반 [Let It Be](1970)에서 포맷을 따온 것이다. 이들의 음악적 뿌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인권(보컬, 기타), 조덕환(기타, 보컬), 최성원(베이스, 보컬), 허성욱(피아노, 신서사이저, 보컬)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록 밴드가 주류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구가한 경우는 많지 않다. 단지 특정 시기에 돌출적으로 등장한 소수의 록 밴드가 일부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그리고 사라진) 경우가 다수다. 하지만 록 밴드로서 주류로 ‘돌파’한 경우도 있는데, 1980년대의 들국화가 그렇다. 정식 음반 발매 전 이미 라이브 카페와 소극장 공연을 통해 일부에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던 이들은 데뷔 앨범 [들국화 I(행진/사랑일 뿐이야)](1985)를 수십만 장 판매하며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들국화의 주류 돌파가 각별했던 것은 단지 ‘1980년대 조용필 일인천하’에 균열을 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이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방송 매체와 거리를 두고 음반과 공연만으로 승부했다는 점에서 조용필의 다른 강력한 경쟁자들(예를 들어 이용, 전영록, 그리고 뒤에는 이선희 등등)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는 다른 록 밴드들(예를 들어 송골매, 벗님들, 다섯 손가락)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그 점에서 데뷔 앨범에 공연 할인권을 삽입했던 것은 상징적이다.

들국화의 성공을 이끈 [들국화 I(행진/사랑일 뿐이야)]에 담긴 음악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며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행진”하고 싶던 당시 청(소)년들의 송가였다. 고단한 세상살이의 경험에서 나온 리얼리티와 낙관적 의지가 살아 있는 히트곡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은 굳이 억압적인 5공화국 군사정권과 화려하면서 공허한 컬러 TV의 시대 맥락에 맞물리지 않더라도 보편적 공감대를 가진다. 시대가 바뀌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꿈을 찾아 헤매며 걸어가는 길은 여전히 퍽퍽하기 때문이다. 찰기 없이 투박한 전인권의 보컬이 질박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사자후(獅子吼)로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이 음반에는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 못지 않은 뛰어난 곡들이 많으며 각각 다양한 면모를 띠고 있다. 조덕환의 곡인 “세계로 가는 기차”는 흥겨운 로커빌리 스타일로,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기차놀이를 하면서 합창하면 제격이다. 조덕환은 불운하게도 음반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도중하차했지만 이 곡과 함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축복합니다”에서 탁월한 작곡능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최성원의 곡 “더 이상 내게”는 두왑 스타일의 배킹 코러스 하모니와 최구희의 민요적인 기타 간주가 인상적이다. 또한 이채로운 곡들도 있다. 다른 곡들이 비트가 있는 반면, “축복합니다”와 이병우의 곡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모두 잔잔한 피아노 반주가 중심적이다. 물론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노래하는 “축복합니다”는 차분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반면,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고적하다 못해 밑바닥에 극도로 우울한 톤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트랙에 따라 여러 명이 ‘따로 또 같이’ 노래하고 음악 스타일도 다양하지만,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세심한 편곡과 배치 이상의 ‘상이한 요소의 변증법적 결합’에 있다. 예컨대 “행진”에서 어두운 과거, 불안한 미래, 현재의 다짐을 다룬 가사는 장조와 단조, 발랄한 피아노와 낮고 둔탁하게 울리는 전기 기타 및 드럼, 전인권의 허스키한 리드 보컬과 가성의 부드러운 배킹 코러스 하모니를 오가며 설득력을 갖게 된다. 단지 대비되는 요소들이 오갈 뿐 아니라 하나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다른 각도에서 이 음반을 들으면 전인권과 최성원(으로 대표되는 성향)이 자아내는 대립적이면서 묘한 상보 관계가 특징적이다. 보헤미안 혹은 히피적인 전인권의 음색이 원초적인 남성성의 이미지를 띤다면, 최성원의 로맨틱한 미성(美聲)과 낮고 긴 여운을 끄는 베이스는 전자를 감싸는 여성적인 이미지를 띤다(주찬권의 드럼과 허성욱의 건반 역시 전인권과 최성원과 같은 선상에서 양립한다). 전자를 대표하는 곡이 “행진”이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곡은 “매일 그대와”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사랑일 뿐이야”는 모두 최성원이 만든 곡이지만 양자의 절충적 결합을 보여준다. 음악 스타일에 있어서, 분출하는 록과 내밀하게 되새기는 포크가 절묘하게 만나는 점은 흔한 평가라 지나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명반이란 평가에 걸맞게, 이 음반은 작곡, 편곡, 연주, 녹음 등 스튜디오 음반이 가질 수 있는 예술성을 두루 갖춘 걸작이다. 전인권, 최성원(베이스), 조덕환(기타), 허성욱(건반) 네 멤버 모두 보컬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룹 이름처럼 질박한 하모니를 들려줄 수 있었고, 록과 포크와 클래식이란 상이한 음악적 뿌리를 자양분으로 지니고 있어 이를 한데 아우를 수 있었다. 가사, 작·편곡, 연주에 있어서 성숙한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무명 생활로 다져진 멤버들의 나이가 막 30대 초반에 접어든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선곡, 편곡, 연주(스튜디오 적응)에 있어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밴드로서 데뷔작임에도 (따로 또 같이) 이미 몇 번의 레코딩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포크, 캠퍼스 그룹 사운드, 프로페셔널 그룹 사운드 등의 상이한 음악적 배경이 하나로 만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들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정규 드러머가 없었다는 점을 오히려 잊게 만든 주찬권, 독특한 톤과 다채로운 주법을 구사한 기타리스트 최구희, 그리고 이원재(클라리넷)의 세션 연주의 공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특히 주찬권과 최구희가 직업적 세션맨이 아니라 그룹 사운드(출신) 뮤지션이란 점은 중요하다. 세션이지만 정규 멤버에 못지 않게 이 음반의 사운드를 록 밴드의 그것(‘그룹 사운드’!)으로 화룡점정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들머리에서 언급했듯이 들국화는 이 데뷔작 발표 이후 전국 순회공연, 소극장 장기 공연, 학교 강당과 체육관 공연 등 수많은 라이브 무대를 통해 만개했다. 방송의 매개 없이도 이들은 음반과 공연이란 ‘고전적’ 방식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고 어우러지며 함께 ‘행진’할 수 있다는 것을 ‘거짓말처럼’ 증명했다. 그 와중에 이 음반이 시대성과 상업성이란 열매를 맺어 영글게 된 것은 당연하다. 들국화 주위로 시인과 촌장, 김현식, 신촌 블루스, 어떤 날, 봄여름가을겨울 등 이른바 ‘언더그라운드’로 불린 일련의 새로운 음악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났다. 어느새 20여 년이 흘렀지만, 들국화의 이 첫 번째 꽃부리(花冠)는 여전히 투박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다. 그런데 들국화의 꽃말이 ‘장애물’ 또는 ‘모질게 견뎌 주십시오’라던가?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만개해서였을까. 1980년대 중후반의 새로운 꽃다지를 알린 들국화는 몇 년 가지 않아 시들고 말았다. 세월을 견뎌 살아남은 건 그때를 추억할 만한 좋은 ‘가요’들 뿐이다. 그 정도면 족하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노래방에서 체면을 차리면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그리고 음반과 공연만으로 예술(혹은 저항)도 하고 돈도 버는 ‘록의 시대’를 가질만한 기회를 상실한 점에 무관심하다면.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낸 ‘메인스트림 록’에 대해서도 한번 의심을 품어보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할 기회가 오지 않는 데 대해 불만 없다면… 20030310 | 이용우 [email protected]

10/10

<부연>
1. 2003년 말 들국화의 신보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결실을 맺을지, 계획에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성원이 신곡을 만드느라고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2. 이 음반이 준 신선한 충격 중 하나는 음반(LP)의 B면 마지막에 있다. 당시 모든 음반은 ‘건전 가요’란 명목으로 군가나 관제 가요를 의무적으로(!) 하나씩 수록해야 했는데, 들국화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의 소원”을 녹음해 삽입했던 것이다. 들국화의 “우리의 소원”은 하모니가 아름다운 아카펠라 그리고 간결한 피아노 후주로 되어 있는데(러닝 타임마저 건전 가요로 안성맞춤이다), 짧고 단순한 구성이지만 그 울림은 강렬하다. 단 이 곡은 1991년에 나온 CD에는 누락되었다.
3. “그것만이 내 세상”과 “매일 그대와”는 이 음반이 나오기 1년 전에 컴필레이션 [우리 노래 전시회 I](서라벌, 1984)에 각각 전인권, 강인원의 노래로 실린 바 있다(물론 “매일 그대와”는 최성원이 1980년에 이미 녹음한 바 있다). 참고로 이 컴필레이션 음반에는 들국화 2집에 나중에 실리게 되는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 이광조의 목소리로, “제발”이 최성원의 목소리로 담겨 있다. 한편, “사랑일 뿐이야” 역시 우순실의 데뷔 앨범 [잊혀지지 않아요/커텐을 젖히면](태광음반, 1984)을 통해 발표된 바 있는 곡이다. 더 많은 조사는 더 많은 사실을 발굴할 것이다.

수록곡
Side A
1. 행진
2. 그것만이 내 세상
3. 세계로 가는 기차
4. 더 이상 내게
5. 축복합니다
Side B
1. 사랑일 뿐이야
2. 매일 그대와
3. 오후만 있던 일요일
4.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5. 우리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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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도 회원으로 있다.
http://cafe.daum.net/march
들국화 팬 사이트
http://my.dreamwiz.com/ap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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