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6032048-0506review_deulgukhwa_memory전인권·허성욱 – 1979~1987 추억 들국화 – 동아기획/서라벌(VIP 20047), 19870720

 

 

지금 여기의 히피즘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학생과 시민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또 뛰쳐나왔다. 노동자의 함성은 전국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인권과 허성욱의 [1979-1987 추억 들국화]는 이러한 격변의 한 가운데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이 앨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의 정황이 한가롭게 음악이나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 때 상황에서 ‘머리에 꽃을’이라는 메시지는 사치스럽게만 여겨질 뿐이었다. 물론 서양의 히피가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형성했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987년 한국에서 히피가 설만한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앨범 자체만 놓고 봐도 그 실망스러웠던 들국화 2집 이후 공식 해체를 선언한 상태에서 반쪽만 남은 들국화에게 뭔가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들국화의 음악적 핵이었던 최성원도 없지 않은가? ‘머리에 꽃을’이라는 타이틀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1979-1987 추억 들국화’라는 순수하지 못한 타이틀을 병기한 것도 이 앨범에 대한 인상을 결코 좋게 만들지 못했다.

이 앨범에 대한 재발견은 삶이 일상의 평정은 되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롭게 발견한 이 앨범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음반이 다 끝난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앨범을 들국화의 데뷔 앨범에 못지 않은 한국 록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평가한다. 음악의 깊이라는 면에서 보면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 앨범을 능가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이 앨범은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강하고 일관된 자기주장을 담고 있는 앨범이다. 전인권은 여기서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이루는 히피즘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그의 히피즘은 단순히 1960년대 서양의 히피즘을 무작정 답습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한국이라는 상황을 전제한 ‘지금 여기’의 히피즘이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서 이 ‘지금 여기’의 히피즘에 자신의 실존을 접합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점은 앨범의 표지 이미지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앨범의 뒷면에 실린 사진은 허성욱이 전인권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꽂아주고 있는 꽃은 다름아닌 무궁화인 것이다.

20030326053241-0506review_deulgukhwa_memory2전인권의 사상적 지향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유’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는 공허한 바람이나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 이면에 파괴성을 동반한 구체적인 자유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는 체념과 용기 그리고 결단의 결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값비싸고 힘겨운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리하게 직시한다. 그는 들국화 시절의 흥분이 모두 끝났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앞에 그런 좋은 날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예견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런 날들의 도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듯도 하다. 인기라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어떤 해독을 입혔는지를 이미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자유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것, 인기도 얻고 돈도 얻고 자유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바람인지를 그는 충분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앨범이 진정한 명반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생각들을 탁월한 음악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자유의 송가 “북소리”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주찬권이 두드리는 힘있는 비트는 굳은 결단을 상징하고 전인권의 보컬은 의지와 고뇌 사이를 오고 간다. 모험과 난관을 동시에 묘사하는 허성욱의 피아노 솔로는 그가 남긴 최고의 연주로 기억될 만하다. 스캇 매킨지(Scott McKenzie)의 히피 찬가 “San Francisco(Be Sure To Wear Flowers In Your Hair)”를 살짝 가져다 쓴 타이틀 트랙 “머리에 꽃을”은 제목 그대로 한국 식의 히피 예찬이다. 허성욱의 소년 같은 목소리는 순박한 동경을 신빙성 있게 표현하며 장조와 단조를 넘나드는 곡의 흐름은 술자리의 감정 기복을 그럴 듯 하게 전달한다. 히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고조된 감정은 팡파레와 박수 소리로 상징되는 상상의 영역에서 절정에 도달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쓸쓸한 비관은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환희를 교란시킨다. 결국 이 곡은 낙관적인 색조로 끝을 맺지만 술자리에서의 결론이 다 그렇듯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민의 한 토막을 인위적으로 끊어낸 것일 뿐이다.

이 앨범이 배출한 최고의 히트곡은 알 스튜워트(Al Stewart)의 “The Palace Of Versailles”를 번안한 “사랑한 후에”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감은 좀 없지 않지만 그래도 평범한 팝송을 희대의 명곡으로 뒤바꿔놓은 전인권과 허성욱의 재능은 어떠한 칭찬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 곡은 이별노래다. 그러나 통상적인 이별노래의 ‘돌아와 줘’라든가 ‘행복을 빌어 줄께’ 따위의 신파는 다행히 배제되어 있다. 노래는 이별 후 사랑의 기억을 잊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한 남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질 무렵 시작된 방황은 밤을 지나 새벽녘까지 이어지지만 기억은 혹독할 정도로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곡에서 들려주는 전인권의 보컬은 영원히 기억될만한 절창이다. 가끔 감정과잉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그가 이 곡에서만큼은 놀라울 만큼 절제된 보컬을 들려준다. 그의 보컬로 인해 이 곡은 통상적인 대중가요의 차원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상승한다. 허성욱의 신서사이저도 특유의 촌티를 벗고 깊은 상심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주찬권의 드럼과 최구희의 기타는 자칫 단조롭게 흐를 수 있는 이 곡에 박력을 불어넣어 곡의 전개에 극적인 긴박감을 부여한다.

이들의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수록된 “사노라면”이다. 음반에는 연극 [칠수와 만수] 삽입곡으로 소개되었지만 이 곡은 원래 1980년대 대학가에서 “소심가”라는 별칭으로 널리 불려지던 운동권 가요다. 이 곡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는 솔직히 별로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이 노래는 원곡의 특성상 직업 가수의 노래로서보다는 술자리 등에서 집단적으로 불려질 때 그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 앨범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곡이 불려진 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삽입된 위치다. B면 마지막 곡! 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건전가요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던 바로 그 자리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건전가요 수록 의무제가 폐지된 것을 기회로 이들은 건전가요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운동권 가요를 집어 넣는 통렬한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이들은 들국화 시절에도 “시장에 가면”이나 “아! 대한민국” 같은 전형적인 건전가요 대신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우리의 소원”을 삽입함으로써 제도에 대한 암묵적 저항을 펼친 적이 있다. 이들의 이러한 반골 기질은 이 앨범에 와서 드디어 이와 같은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이 앨범에는 앞서 언급한 곡들 외에도 다소 절박한 톤으로 자유를 노래한 “이유”(‘넓은 하늘을 나는 새도/뜨거운 태양에도/이유가 있는데/나를 그냥 내 버려 둬’로 진행하는 가사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솔직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좀 부담스러운 “여자”, 나른한 일상의 풍경화 “어떤…(가을)” 등 향기 짙은 곡들이 촘촘히 포진해있다. 촌티 물씬 나는 짧은 연주곡 “시작곡”을 제외한다면 이 앨범의 수록곡들은 거의 전부가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만큼 멋진 노래들이다. 단지 1970년대 포크의 명곡을 다시 부른 “날이 갈수록”이 다소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좀 아쉽다. 이들의 실수는 이 곡을 잘못 부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이 곡을 부르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 동안 여러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지만 1970년대 중반에 김정호가 발표한 버전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능가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능가하기 어려운 이 노래의 결정판이다. 이들의 버전도 그렇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곡에 관한 한 이들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승부를 벌인 것이다.

[1979-1987 추억 들국화]는 지금까지 들국화의 멤버 전원이 함께 연주한 마지막 앨범으로 기록된다. 이러한 기록은 몇 년 전 허성욱의 돌연한 사망으로 말미암아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고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나머지 멤버들이 세션으로 참가한 탓에 명목상으로는 전인권과 허성욱이 전적인 음악적 통제권을 행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음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의심할 바 없는 들국화의 사운드다. 이 점에서 이 앨범은 들국화의 이름으로 발표되지 않은 들국화의 세번째 앨범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앨범은 송라이터로서 전인권의 재능이 만개한 개인적 기념비로도 평가되어야 한다. 비록 이 앨범 이후 다시는 이에 필적할만한 음반을 만들지 못했지만 이 앨범 하나만으로도 그의 송라이팅은 특별한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창조력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그가 들국화의 오랜 친구들과 호흡을 맞춘 이 앨범은 이제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추억 들국화]는 이제 ‘추억’이 아니라 역사가 된 것이다. 20030228 | 이기웅 [email protected]

10/10

수록곡
Side A
1. 시작곡
2. 북소리
3. 사랑한 후에
4. 머리에 꽃을
5. 여자
Side B
1. 이유
2. 날이 갈수록
3. 어떤…(가을)
4. 사노라면(연극 [칠수와 만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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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도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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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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