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222110319-cp10정태춘. 박은옥 –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 삶의문화/유니버설, 2002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란 의미인가?*

정태춘 박은옥 듀오가 지난 연말 열 번째 앨범을 냈다. IMF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리던 1998년, ‘환멸의 90년대’에 보내는 만가로 한 세기를 ‘건너가는’ 통과의례를 치른 후 정규 앨범으로는 4년 반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21세기 첫 정규 음반이라는 것을 다분히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전해 출반한 [20년 골든 앨범]으로 비로소 짧지 않은 음악 생활의 반환점을 돌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타이틀이 주는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앨범의 마지막에 배치한 타이틀 곡에 ‘절망과 희망 사이를 넘나드는 시사적 서정성’이라는 자평을 붙여놓았다. 이 말은 그들 부부의 음악을 관심있게 들어왔던 이들에게는 그다지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그야말로 그다운 혹은 그들다운 촌평이라 할 수 있다. 딱 그만큼, 이 앨범은 세기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깊어진 혼돈과 회의와 아이러니,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노래한 곡들로 채워져있다. 수록곡들은 “봉숭아”의 청아한 서정과 “북한강에서”의 성찰과 “서해에서”의 토속적 허무와 “아 대한민국”의 지독한 냉소와 이면의 치열함을 떠올리게 한다. 앨범을 여는 “봄밤”의 애틋함, “빈산”에서 그려내는 여윈 내면 풍경, 질펀한 사설과 북소리의 원초적 선동성은 분명 익숙함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이 ‘역시나’라는 안도감이든, ‘그게 그것’이라는 심드렁함이든 간에…

그러나 음반의 각편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다보면 이번 앨범을 내며 굳이 ‘처음’을 이야기한 저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가 바뀌는 듯 하더니 어느새 세상은 바뀌어 갔고, 누구보다 시대를 격정적으로 호흡했던 가객도 변했고,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성급한 이들은 ‘현실에서 내면으로’ 돌아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새장 속 홀로 남은 새를 통해 내면을 비춰보는 “아치의 노래”는 물론 그런 징후를 보인다. 그러나 더 의미있는 변화는 이를 들려주는 음악 그 안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풍자의 날은 여전히 매서웠고, 상황과 내면을 번갈아 비추는 사설은 여전히 장황했지만 이를 감싸는 사운드는 매우 절제되었고, 여유롭게 들릴 뿐 아니라 어느덧 풍부한 공간감마저 자아내고 있다. 그 여유는 아마도 동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다운 음악적 문법을 찾은 안도감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굿거리 장단과 베이스의 비트가 어우러지며 재즈의 스윙감을 자아내고 다시 그 위에 동시대에 대한 성찰을 풀어낸 “압구정은 어디”와 “정동진 3″은 집요할 정도로 음악적 모국어를 탐색해왔던 중년 가객이 거둔 의미있는 성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는 베테랑 세션맨과 편곡자가 개입하지 않은, 전적으로 그들 밴드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세월에 지쳐 현명해진 만큼 의심이 부쩍 많아진 그들의 팬들은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가 향하는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 의 청명함에서, 정동진 철교 위에 뜬 쌍무지개에서 섣불리 희망을 찾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들의 신작을 ‘환멸을 넘어선 희망에 대한 보고서’로 볼 수 있다면 그 공의 상당 부분은 정태춘. 박은옥과 밴드의 미덕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이 앨범으로 우리는 기억할 만한 베테랑 음악인들의 면면에 또 하나를 추가하는 기쁨을 얻었기 때문이다. 베테랑이란 칭호는 늘 한결같은 듯 보이지만, 그 순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시도와 실험을 기꺼이 수용하는 자들의 몫이라 한다면, 이 앨범은 색다른 포크 가수로 출발하여 어느덧 베테랑의 반열에 오른 가객의 노작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데뷔하고 사반세기가 흘쩍 지난 후에도 긴장감과 치열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런 베테랑이 있기에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20030220 | 박애경 [email protected]

9/10

* 제목은 동물원 4집 수록곡명에서 따왔습니다.

수록곡
1. 봄밤
2. 동방명주 배를 타고
3. 압구정은 어디
4.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길래
5. 오토바이 김씨
6. 빈산
7. 아치의 노래
8. 리철진 동무에게
9. 정동진 3
10.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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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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