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208065547-deli델리 스파이스 – Espresso – Dreambeat, 2003

 

 

약간 식은 에스프레소

비록 사람들이 델리 스파이스의 음반이 갈수록 실망스러워진다는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좋은 밴드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넉 장의 음반은 전형적이면서도 독특한 정서를 담은 기타 팝-록 음반이다. 델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아마도 그들의 음악이 데뷔 음반의 (당시로서는) 신선한 감각을 커다란 변화 없이 유지함으로써 역으로 점차 신선미를 잃어간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거기에 ‘언더/오버’와 ‘대중성/음악성’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과 정서가 겹친다. 물론 델리가 이전의 음반들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오긴 했지만, 그것은 듣기 좋은 멜로디를 지닌 기타 팝-록이라는 대전제의 소주제 같은 것이었다. 이번 음반에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으나, 다른 면에서의 변화가 보인다. 그건 나중에 말하자. 아무튼 델리의 이번 음반은 좋게 말하면 뚝심과 관록이고, 나쁘게 보자면 정체이다. 나는 (안티 델리들의 비난을 각오하며) 전자를 택하겠다. 이번의 소주제는 하드 록이다.

긴박한 아르페지오와 더불어 귀가 얼얼할 만큼 노이즈를 먹인 퍼즈 톤의 기타음이 분위기를 압도하는 “노인구국결사대”는 그러한 특징을 잘 드러낸다. 김종필(같은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언급(“권총을 찬 색안경 야망의 청년장교/그땐 구국의 결단 하지만 이젠 탐욕”)에 어울리는 톤이자, 공연장의 팬들을 홱 돌게 만들 오프닝으로도 환영받을 만한 곡이다. 변조된 보컬로 시작하는 “날개달린 소년”은 첫곡이 보낸 서브를 안정적인 리시브로 받아치며 매끈한 진행을 선보이고, 겹겹이 쌓인 기타 이펙트 소리들은 알딸딸한 효과를 이끌어낸다.

이번 음반에서는 피아노와 로즈(rhodes) 오르간의 활용이 두드러지는데, 피아노의 비장한 아르페지오와 그 뒤를 잇는 거친 리프가 언뜻 뮤즈(Muse)를 연상시키는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는 곡 중간의 쓸쓸한 플룻 연주와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마이너 코드의 진행이 고양이에 대한 아픈 추억과 맞물린다. 처음 ‘제대로’ 해보는 사랑 노래라는(“차우차우”는, 어쨌든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소통에 관한 노래였다) “고백”은 라디오 친화적인(radio-friendly) 발라드이며, 김민규의 여린 목소리는 엇나간 사랑을 밉지 않게 표현한다. 여기까지 듣다 보면 델리의 새 요리가 먹을 만하고, 주문 배달이 아니라 식당에서 맛본다면 더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장식이 많고 메이저스럽다’는 느낌은 나중엔 떠오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Billie Jean”을 닮은 디스코풍의 베이스 라인과 프로그래밍된 비트로 시작하는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에서부터 음반은 초기 델리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그 변화는 급격하고, 두 장의 음반을 연이어 듣는 것 같다. 딜레이를 건 기타와 반짝거리는 오르간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숨겨진 보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델리 스파이스이며, 비슷한 전개의 “환상특급”과 “처음으로 우산을 잃어버렸어요”는 뉴웨이브-펑크 팝 스타일의 경쾌한 소리와 곡조를 선보인다. 그러다가 한층 어두워진 “사수자리” 같은 7분짜리 “Quicksand”로 마무리를 짓는다. 요약하면 후반부의 곡 배치는 불안정하다. 조금 전의 생각은 (서태지처럼 짧은) 정규 음반 한 장과 (열혈 팬들을 위한) 보너스 EP 한 장이 같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니 이제 처음에 말했던 다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D]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지만, 김민규와 윤준호의 개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연해지고 있다. 신보는 그 간극이 더욱 벌어진 듯 하다. 달리 말해 전반부는 김민규, 후반부는 윤준호의 색깔이 불안할만큼 뚜렷하다. 다음 음반의 과제는 이처럼 드러난 두 개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이어야 할 듯 하다.

결론은? 약간 식은 에스프레소를 마신 것 같다. 조금 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온도이다. 하지만 향은 감미롭고 뒷맛은 강하다. 난 커피집이 문닫기 전에 한모금 더 마실 생각이다. 설탕은 충분하니 필요없겠다. 20020207 | 최민우 [email protected]

6/10

수록곡
1. 노인구국결사대
2. 날개달린 소년
3. 어린 나의 왕자에게
4.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
5. 별빛속에
6. 고백
7.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
8. 숨겨진 보석
9. 환상특급
10. 저도 어른이거든요
11. 처음으로 우산을 잃어버렸어요
12. Quicks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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