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지난 회에는 그룹 사운드의 본연의 공간인 ‘고고 클럽’에 포커스를 맞춰 1971-3년까지의 시기를 살펴보았다. 이번 회에는 그 전에 한번 살펴 보았다가 잠시 중단한 주제, 즉 ‘그룹 사운드’나 ‘캄보 밴드’ 출신의 음악인들이 포크 가수들의 음반이나 공연에서 작곡, 편곡, 연주를 담당한 활동에 대해서 마무리할까 한다. 한국에서 ‘포크’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시기를 다루는 이번 회에서는 ‘그룹’보다는 ‘캄보’와 연관된 음악인들이 초점이 될 것이다.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므로 미리 두 개의 키워드를 말해두면 ‘애플 레코드(혹은 애플 프로덕션)’와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다. 그리고 주연은 애플 레코드의 경우 연주인이자 편곡자인 김희갑과 안건마, 음반 제작자인 김웅일과 ‘사단장’ 이종환이고,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경우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음반 제작자이자 진정한 의미의 ‘프로듀서’인 나현구 사장이다. 송창식, 김세환, 김정호, 어니언스(임창제·이수영), 이장희, 4월과 5월(백순진·김태풍), 투 코리언스 등의 스타급 포크 가수들은 주연이라기보다는 조연이다. 물론 최고의 주연이 음악 팬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하나의 완결된 글로 정리하려다 보니 지난 번 (상)의 내용과 겹치는 내용도 있는데 그런 부분이 발견되면 ‘복습용’이라고 생각하는 관용을 베풀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강근식님과 나현구님에 대한 이야기는 포크 음악 연구가 김형찬이 자신의 학위논문 [한국 초기 통기타 음악의 사적 연구: 1975년까지 사회사적 흐름과 작가를 중심으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2002.2)에 있는 내용을 많이 참고했다. ‘오리엔트’에 대한 우리의 글은 김형찬의 연구를 기초로 하고 새롭게 발견한 사실을 확대하고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번에 정리한 내용은 김형찬에 의해 완결될 것으로 믿는다.

1973~4년 포크 빅뱅(Big Bang)!

20021125031842-0422kseries_120gayoochart1972MBC [금주의 인기가요]의 방영 모습. MC는 한때 자민련 대변인을 역임한 변웅전이다. 차트에 오른 곡들로 보아 1972년 경으로 추정된다.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신병순 작사·김희갑 작곡), 방주연 “그대 변치 않는다면”(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 등 ‘팝과 가요의 중간 정도인 곡들이 차트에 올라온 것이 보인다. 물론 차트 선정 방식은 ‘자의적’이었다.([문화방송 30년사](1992), p.134)

1973~4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포크'(라고 불리는 음악)가 급부상한 해였다. 1970년대 들어 주류 차트에 한두 곡씩 진입하던 포크는 점차 가요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잠식하기 이르렀고 TV 쇼 프로그램에 단골 손님으로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포크 가수’들은 MBC의 [금주의 인기가요]같은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상위를 차지했고 음악 프로그램 이외의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단순 비교에 지나지 않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포크 가수들이 TV나 라디오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빈도는 1990년대 중반 ‘댄스 가수’들이 텔리비전에 등장하는 빈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포크 가수들은 ‘청년의 우상’을 넘어 ‘대중 스타’가 되었다. 이렇게 ‘판’이 바뀌었으니 ‘빅뱅’이라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이때 히트를 기록한 포크가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한 가수에 하나만 뽑더라도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어니언스의 “편지”,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 주목할 점은 이 곡들이 단지 방송 전파를 많이 탔다는 것 뿐만 아니라 ‘히트 음반’, 요즘 말로 ‘대박 음반’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위 곡들을 담은 이장희의 세 번째 독집(성음 SEL 20-0015, 1973)과 어니언스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85, 1974.3), 김정호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91, 1974.9) 등이 대표적이다. 1972년 이전까지 히트 음반이 대략 1~2만장 안팎의 판매량을 보였다는 통설을 믿는다면, 5만 장을 팔았다는 이장희의 경우는 단기간 내에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다.

이장희 – 그건 너(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이장희 – 자정이 훨씬 넘었네(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어니언스 – 편지(1974) (임창제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 작은 새(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포크 가수의 인기는 음반의 히트에 이어 영화에서도 ‘대박’을 기록했다. 이장희가 부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삽입된 [별들의 고향](1974)이 46만 관객을 동원한 것을 비롯해, 송창식의 “고래 사냥”과 “왜 불러”가 삽입된 [바보들의 행진](1975), 그리고 [영자의 전성시대](1975), [어제 내린 비](1975)가 모두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 음반은 1974년의 베스트셀러로 상종가를 쳤다. 이런 ‘청춘 영화’ 및 ‘호스테스 영화’의 붐도 포크 음악의 상승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장희 – 한 소녀가 울고 있네(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이장희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포크였는가. 즉, 누가 왜 이런 음악을 TV와 라디오에서 보고 듣고 음반까지 구매했을까.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 정세 전반을 살펴보면서 ‘가요평론’ 비슷한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정치적·문화적 상황이다. 1972년 말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안보’가 강조되었고, 그 결과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가요정화운동’이야 이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때부터는 음악의 주제와 내용에까지 ‘미시적’으로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뜻밖인 것은 10월 유신으로 인해 된서리를 맞은 음악이 트로트였다는 점이다. 트로트는 비탄, 퇴폐, 저속, 나아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인해 트로트는 ’10월 유신과 새마을 운동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불건전하다고 인식되기 시작되었다. 때문에 10년 이상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이미자를 비롯해 남진, 나훈아, 김 세레나, 주란, 조미미, 하춘화 등이 장악한 트로트의 철옹성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면을 볼 때 포크는 적어도 처음에는 10월 유신과 가요정화운동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물론 뒤에 가면 사정이 반전되지만.

둘째 음반산업을 비롯한 경제적 상황이다. 사실 1973~4년은 경제적 호황기는 고사하고 ‘경제 위기’의 시기였다. 특히 1973년 말 제 1차 석유 파동은 경제개발계획 이후 ‘다른 건 몰라도 성장만큼은…’을 과시하던 한국경제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 주었다. 경제가 불황에 닥치면 가장 심한 타격을 받는 부문이 바로 ‘문화산업’과 ‘연예계’다. 음반의 경우 레코드(LP)의 재료인 PVC가 품귀 현상을 일으켰고, 이런 ‘PVC 파동’으로 인해 음반 제작은 축소되고 음반 가격은 인상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또한 그 전인 1971년 12월 초 문공부가 ‘비상사태하의 연예시책’을 발표하면서 음반사의 시설 기준이 2배로 강화되면서 공식 등록사가 16개사에서 12개사로 줄어든 상태였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결과는? 경제상황에 민감한 성인층의 음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청소년층의 음반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음반을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지만 젊은 애들은 ‘음반이 아니면 죽음을!’이고 주머니가 텅 비어도 살 건 사야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가 아니라 ‘그때부터’ 이런 패턴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먹고 살 만해진’ 시기가 이 무렵이니까…

주) 여기에 또 하나의 요인을 추가할 수 있다. 이른바 ‘불법복제음반 단속’의 효과다. “불법 복사판을 인정하지 않고 라이센스판만을 인정키로 하면서 지구, 오아시스 등을 비롯한 중대형 음반사들이 (특히 1973년 말경부터) CBS, EMI 등 국제적인 메이커와 제휴하는 등 라이센스 제작 시장에 뛰어들면서 국내의 ‘오리지널 가요’ 음반의 제작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게다가 영세적인 상태에서 과도한 지출이 이에 뒤따른 반응이 약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방송 등의 미디어와 관련된 조건들이다. 이건 똑같이 ‘젊은이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여타 장르(소울이나 싸이키델릭)를 ‘제치고’ 포크가 주류로 부상했느냐는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주류 언론에서 ‘그룹 사운드 침체’라고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 그룹 사운드는 ‘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그렇지만 TV나 라디오로 음악을 경험하는 보통의 젊은이들에게 원초적 비트를 가진 ‘엘레키’ 사운드가 아직은 버거운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는 가족 전체가 TV 앞에 모여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취향의 문제에 더하여 하나의 이유를 추가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그룹 사운드가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덩치 큰 악기와 장비들을 수고스럽게 운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룹들은 보수도 시원치 않은 방송에 힘들게 출연하는 것보다는 살롱이나 클럽의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통기타 포크’ 가수들은 이런 부담이 작았다.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점은 포크가 여타 장르를 제치고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다.

이상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음악 수용자의 취향이 ‘급격히 변동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팝과 트로트’의 시장점유율 구성비는 1973년에는 “3 대 7 혹은 4 대 6 정도(1973.12.8, 1974.1.11 [일간스포츠])”였다가 1974년에는 “8 대 2 정도”(1974.12.19 [일간 스포츠])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팝’이라고 뭉뚱그린 음악들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포크’ 계열이었다. 여기서 ‘팝’이라는 표기는 영미 대중음악이 아니라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지칭했다는 점은 노파심에서 한번 더 지적해 둔다. 간단히 말하면 팝이란 트로트가 아닌 음악이었고 트로트와 가장 다른 음악은 ‘포크’였다.

수용자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해 두자. 그렇다면 이런 음악이 어떻게 생산되었을까? 당시까지 한국대중음악계에서 히트곡과 대박 음반은 지구와 오아시스라는 두 라이벌 기업으로부터 나왔다.’신중현 사단’의 킹 프로덕션 정도가 이들의 아성에 도전한 정도다. 포크는 어땠을까?

메이저 음반사와 포크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1973년 이후 ‘포크’나 ‘팝’ 계열의 히트 음반을 제작한 음반사는 군소 레코드사들이었다. 1973년 가요계를 요약한 아래 기사를 훑어 보자. 지난 번에 간략하게 언급했던 기사인데 당시의 ‘빅뱅’의 효과를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조금 길지만 거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20021125031842-0422kseries_220weeklyJA“’73년 가요계 결산 – ‘뽕짝’에서 ‘팝’調로”, [주간중앙] 1973.12.16의 헤드라인

“1973년도 가요계 추세는 팝송조(조(調) 가요 특히 포크송조(調)의 대두로 집약된다. 한해 동안 5만장 이상 팔린 곡은 문주란 양의 “공항의 이별”, 패티 김의 “이별”, 장현 군의 “미련”, 이장희 군이 자작 노래한 “그건 너”. (중략) 특히 이 세 곡은 73년도 가요계를 온통 뒤집어 놓은 셈이다. (중략) 그런데 “이별”은 ‘신세계’, “미련”은 ‘킹’, “그건 너”는 ‘성음’ 레코드사 제작. 최대의 히트곡 3곡이 모두 군소 ‘메이커’에서 나와 대 ‘메이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양대 메이커에서 뽕작조(調)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에 군소 메이커에서 포크조(調)에 손을 대어 성공시킨 것이다. 뒤늦게 포크 붐을 깨달은 양대 메이커는 통기타 부대라 불리는 포크 계열의 가수들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 스카우트 열풍을 일으켰다. 이 통에 소문없이 재미보던 군소 메이커들까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싸움에 말려들었다.
우선 눈치 빠르기로 이름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선수를 쳤다. 이수미, 조미미, 방주연 삼총사팀을 급거 장미화, 이성애, 서현진 등 팝팀으로 교체하는 동시에 성음의 이장희에게 손길을 뻗쳤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첫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정보를 미리 안 성음측에서 이장희 군에게 100만원 짜리 오토바이를 사주는 한편, 오아시스의 인기 작곡가인 김영광씨에게 200만원을 주겠으니 오라고 손짓한 것이다. 간판 가수로 내세운 장미화, 이성애, 서현진 팀도 곧 깨졌다. 여군 중위 출신인 서현진은 “가요계가 싫다”고 불러섰고, 이양은 지구에서 100만원을 받고 옮겼다. ‘엎친 데 덮친 격’인 오아시스는 달러 박스인 이용복군 마저 지구에 빼앗기게 되자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애플 레코드에 있던 홍민군을 필두로 템 페스트, 뚜아 에 모아, 라나 에 로스포, 투 코리언즈 등 팝 팁을 대거 스타우트해 진용을 개편했다. 세계적인 팝송 메이커인 영국 EMI 레코드 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것도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작전.
한편 지구는 거액의 스카우트 자금(3000만원설)으로 유망주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150만원을 주고 작곡가 신중현씨를 킹으로 데려오는 한편, 군에서 조영남을 전속시키고 오아시스에서 이용복군과 이성애양을 모셔왔다. 신중현씨의 제자는 김추자, 김정미양과 장현군. 항간에서는 지구에서 이들까지 데려가려는 욕심이 아니냐는 쑥떡공론. 다급해진 킹에서는 장군에게 “미련”에 대한 보너스조로 10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포크 붐을 타고 여러가수가 돈을 번 셈. 그래서 가요계에서는 ‘돈 백은 우습게 본다’는 육담이 유행됐었다. (“’73년 가요계 결산 – ‘뽕짝’에서 ‘팝’調로”, [주간중앙] 1973.12.16)”

이런 스카웃 전쟁은 성공했을까. 적어도 1975년까지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따져 보면 지구와 오아시스 모두 1973년 이전에도 팝 계열의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해 왔다. 하지만 1972년 이전이든 1973년 이후든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지구의 경우 펄 시스터스, 트윈 폴리오, 윤형주, 라나 에 로스포, 은희, 최양숙, 어니언스, 고영수, 원 플러스 원 등의 음반 한두 종을 제작했지만 트윈 폴리오의 첫 독집(1970년)을 제외하고는 음반사와 가수(혹은 그룹) 모두에게 흡족한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오아시스의 경우는? 오아시스는 지구에 비해서도 트로트가 강한 음반사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경우도 히 식스, 템페스트, 에보니스, 4월과 5월, 투 코리언스, 홍민 등 젊은 팝 계열의 가수나 그룹의 한두 종의 음반을 제작한 일이 있다. 또한 1972년에는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로 다섯 장의 시리즈 음반을 연달아 발매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음반들의 경우도 오아시스의 주력 업종은 아니었다.

메이저 음반사들이 팝이나 포크에 개입한 결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포크와 트로트가 결합된 묘한 양식의 탄생이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김영광이다. 그는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김중순 작사·김영광 작곡)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남국인 작사·김영광 작곡) 등 트로트곡으로 이른바 ‘히트 제조기’ 대열에 오른 인물인데, 1972년에는 작곡 스타일을 바꾸어서 포크송 스타일을 차용한 곡을 만들어 취입했다. 대표적인 곡은 이수미의 “여고시절”(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과 방주연의 “그대 변치 않는다면”(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이었다. 물론 1972년은 남진의 “목화 아가씨”(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나 님과 함께”(고향 작사·남국인 작곡)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와 “머나먼 고향”(박정웅 작사·작곡) 등 트로트 계열의 곡들이 안방극장과 진짜 극장을 점령한 해였다. 그렇지만 이런 인기곡들이 ‘눈물과 한숨조’라는 식의 평을 받았던 반면 김영광이 만든 곡은 이런 평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72년을 결산하는 한 기사에서 “내놓는 가요마다 포크송풍의 건전가요라는 격려 속에 안타(히트)를 계속”([일간스포츠],1972.12.29) 했다는 평을 받았다. ‘가요정화운동’과 ’10월 유신’이 대중음악계에 미친 효과는 이런 해괴한 미학적 기준의 성립이었다.

포크와 트로트가 결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여기서 1972년 대중음악계의 트렌드가 “가요 정화 운동 탓과 취향의 변화로 인해 트로트 가수들이 비(非)트로트 가요에 열 올리는 추세”([일간스포츠], 1972.2.16)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즉, 지금 언급하고 있는 양식은 포크가 트로트를 능동적으로 도입한 결과가 아니라 트로트가 포크를 흡수한 결과다. 그러니 ‘포크 트로트’ 혹은 ‘트로트 포크'(이 용어들은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서 트로트가 포크를 흡수하던 현상에 대해 일절하며 보도하던 용어들이다. 예를 들어 위의 기사에서는 이수미의 “여고시절”을 ‘포크송을 도입한 트로트 가요’라고 소개하고 있다)라는 변태적 양식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흐름을 기성의 시스템과 절충시키고 중성화시킨 것 이상은 아니었다.

결국 1970~1년에 절정을 이루었던 포크는 1972년에는 다소 주춤거리면서 기성 시스템에 의해 굴절되는 시기를 보낸다. 물론 1972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후 메이저 음반사에서 나오는 ‘포크 음반들’의 대다수는 이런 ‘굴절’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뒷이야기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음반을 직접 들어보면 이 점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포크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연주하는’ 관행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을뿐더러 편곡과 기악편성 면에서는 ‘기성의 느낌’이 많이 묻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전속 작곡가’들이 통기타를 들고 작곡된 곡을 편곡하고 프로듀싱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으리라… 또한 음악적 훈련이 충분치 않은 포크 가수(통기타 가수)들은 자신의 곡에 어떤 악기를 사용하여 어떻게 편곡할지 잘 몰랐다. 어쿠스틱 기타의 연주만으로 편곡을 마치자니 썰렁하고 그렇다고 전속관현악단을 가동하자니 오히려 어색하고…. 그래서 메이저에서 나온 포크 음반들의 사운드는 이 둘 중 하나다. 썰렁하거나 어색하다는 뜻이다.

메이저 음반사의 레이블을 달고 나온 음반 중에서 들을 만한 음반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두 종의 음반을 ‘샘플’로 뽑는다면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vol.1’로 발매된 [4월과 5월 작품집](오아시스 OL 1077, 1972.4.25)과 어니언스와 고영수의 합동 음반 [어니언스·고영수](지구 JLS-120691, 1973.5.5)다. 이 음반들의 사운드는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반주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드럼-베이스-기타-오르간 등 이른바 4 리듬을 가진 ‘그룹’의 사운드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그룹이 각각 1년쯤 뒤에 발표한 음반들은 ‘사운드’가 확 다르다. 4월과 5월의 경우 위 음반에서는 ‘그룹’이 연주하는 사운드는 10곡 가운데 “화”와 “푸른 하늘” 두 곡이지만 1년쯤 뒤에 발표한 [4월과 5월 Vol.2](K-Apple 787. 1973(추정))에서는 훨씬 더 많은 곡들로 확장된다. 한편 어니언스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85, 1974.3)의 경우는 위 음반과 기악편성은 비슷하다 해도 느낌이 확 다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진실”의 경우 두 버전 모두 드럼과 베이스 등이 연주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트럼펫의 취주와 통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어색하게 동거하던 편곡으로부터 현악기와 오르간이 가미된 세련된 편곡으로 바뀌어 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지구에서 나온 어니언스와 고영수의 합동 음반, 원플러스원 음반은 김진성이, 애플에서 나온 4월과 5월은 이종환이 각각 기획했다. 여기서 두 음반 모두 K-Apple이라는 일련번호를 달고 나왔음에 주목하자. 이제 드디어 ‘군소 레코드사가 제작한 포크 음반’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4월과 5월 – 사랑의 의지(백순진 작사·작곡·편곡)

주) 물론 이 시기의 포크가 모두 ‘전문화’와 ‘대중화’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애플과 오리엔트 등 대중적인 포크 음악을 위한 전문 레이블이 탄생하는 현상 이면에는 포크 본연의 아마추어적 성격과 ‘통기타 순수성’을 견지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한 예로 명동 소재의 음악감상실 내쉬빌은 대학생을 위주로 한 비상업적 공간으로 이들이 1972년에 제작한 [우리들](유니버어살, UL-726)은 이들 아마추어 포크 가수들의 비상업적 음반이었다. 한편 1973년 8월에 개최된 제 3회 청평 팝 페스티발이 프로페셔널 음악인 중심이 아니라 대학 재학생을 위한 아마추어 팝 콘테스트로 바뀐 현상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양극화’라는 현상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김광희 – 가난한 마음/나는 돌아가리라(1972) (김광희 작사·작곡)
방의경 – 불나무(1972) (방의경 작사·작곡)

애플 프로덕션 그리고 ‘이종환 사단’의 편곡자(1): 김희갑의 경우

주) 원래 ‘애플 레코드’고 불러야하지만, 이곳이 유니버어살 레코드사를 통해 대명제작하는 주체, 즉 지금의 프로덕션이나 음반기획사에 해당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프로덕션으로 칭하기로 한다.

앞의 글에서 포크가 ‘통기타 반주’를 넘어서 분열증식하는 단계에서 싸이키델릭(신중현의 경우)이나 재즈(정성조의 경우)와 같은 상이한 음악 스타일과 만났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대략 1971-2년 경의 일이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이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 바 있다. 고로 이런 다른 장르와의 이종교배를 통해 포크를 풍성하게 만들고 나아가 지속성과 전문성이 담지되기 위해서는 ‘전문 프로덕션’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물론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도 필요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20021125031842-0422kseries_shellbure_ad_01사진: 종로 시절의 셸부르 – 1972년 초 잡지에 실린 광고. 당시 종로 낙원상가에 있었으며 고고 음악도 함께 연주되었고, 더불어 ‘포크 콘테스트’가 열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출처: www.windbird.pe.kr 김병완 님)

그 첫 타자가 킹 프로덕션이었음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렇지만 킹은 아무래도 ‘소울·싸이키’가 주력 업종이었고 양희은, 서유석 등은 ‘덤으로’ 음반을 제작한 측면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크 음반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은 애플 레코드라는 곳이었다. 애플의 대표는 따로 있었지만 이곳은 이종환과 그의 처남인 김웅일이 운영을 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종환은 최근까지 MBC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 MC를 맡았던 그 인물이고, 당시에는 MBC 라디오의 PD로 재직하면서 인기 심야방송이었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기도 교외 도처에 경기도 교외 도처에 지점을 가진 라이브 카페 ‘이종환의 셸부르’도 그의 비즈니스의 하나로 보인다. 물론 셸부르는 1972년경에는 종로에, 1975년경에는 명동에 있었다.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 음반들을 훑어 볼 때 ‘애플’은 시리얼 번호 외에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의 [주간중앙]의 기사에서도 애플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눈썰미 좋은 사람만이 “홍민이 오아시스로 이적하기 이전 애플 레코드 소속이었다”는 정보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에서 제작한 음반들은 ‘유니버어살 레코드’라는 상호를 빌려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니버어살이라… 유니버어살은 방금 말한 킹 프로덕션과 ‘신중현 사단’의 음반을 주로 제작한 스튜디오이자 공장의 이름 아닌가. 헷갈린다.

음반 시리얼 번호를 뒤져보면 K-Apple로 시작하는 음반들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다름 아니라 키 보이스, 히 화이브, 트리퍼스 등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이다. 문제는 이 음반들 중 몇몇은 ‘킹박이 제작한 음반’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킹 프로덕션의 경우 주로 KLS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헷갈린다. 그래서 그저 음반사들이 청계천 일대에 몰려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군소 레코드사들 사이에 이런저런 교류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때문에 K-Apple로 시작한다고 해서 다 애플에서 나온 음반이 아니며, KLS라고 시작한다고 해서 다 킹에서 나온 음반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넘어 가자.

분명한 것은 1971년 이후 애플 레코드는 ‘통기타 가수들’의 음반에 주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 개의 예만 들어 보면 [송창식 애창곡 모음](K-Apple 36, 1971), [윤형주 골든 앨범](K-Apple ?, 1971), [윤형주 즐거운 노래모음](K-Apple 48, 1972.7.18), [김세환 노래모음](K-Apple 52, 1972.5.23.),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K-Apple 56, 1972)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트윈 폴리오의 후예들, 그리고 요즘 ‘포크 빅 3’로 불리는 솔로 가수들이 ‘이종환 사단’의 핵심을 형성한 것이다. 한 예로 [송창식 애창곡 모음]은 ‘별밤에 부치는 노래 시리즈 1’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표지 뒷면에는 이종환의 긴 소개글이 적혀 있다. 원곡이 외국 곡인 경우 ‘이종환 개사’라고 표기된 경우도 꽤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위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은 물론이고 이들 포크 음반들 대다수도 ‘김희갑 작편곡집’이라는 사실이다(단, 팝송을 번안해 부른 [송창식 애창곡 모음]은 작편곡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윤형주 즐거운 노래모음]은 김희갑의 작품이 아니다). 김희갑이 뛰어난 작곡가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작곡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기타리스트였으며 캄보 밴드를 이끌던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 8군 무대에서 수년 동안 항상 더블 A를 받았다는 최고의 쇼였던 A1 쇼(에이원 쇼), 일반무대에서는 UN 클럽과 경동호텔 나이트클럽 등 시내의 고급스러운 클럽을 평정한 악단에서 연주했던 ‘김희갑 악단’의 리더다. 또한 미 8군 무대 출신으로는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이교숙(당시 이화여대 교수)에게 사사받고 1967년부터는 히트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주) ‘김희갑 작편곡집’으로 최초의 음반이자 히트를 기록한 음반은 태원의 “사랑아 내 사랑아”, 김상희의 “진정 난 몰랐었네”, 남진의 “불타는 연가”, 이정자의 “모래 위를 맨발로” 등이 수록된 ‘옴니버스 음반’으로 1967년 오아시스에서 발매되었다. 즉, 김희갑은 1968년까지는 오아시스와 전속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한편 이 곡들 가운데 “진정 난 몰랐었네”는 송창식이, “모래 위를 맨발로”는 김세환이 각각 리메이크했다. 위에서 소개한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

김희갑이 이들 주류 가수들의 음반에 이어 앞서 언급한 1세대 그룹 사운드의 음반의 실질적 디렉터였다는 사실은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실이다. 대략 1969~70년 경의 일이다. 이 음반들이 K-Apple이라는 일련번호를 달고 나온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때 김희갑은 여러 음반사에서 이런저런 음반을 레코딩하느라고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승재의 “눈동자”, 이용복의 “달맞이꽃” 등이 1970년대 초 김희갑이 작곡하여 히트시킨 곡들이다. 이 가운데 이승재와 이용복은 ‘범(凡)포크 진영’에 속하는 가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통기타 부대의 주력군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1970-1년 경 김희갑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의 음반의 디렉팅을 맡은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송창식 – 나는 너(1972) (김희갑 작사·작곡·편곡)
김정호 – 눈동자(1975) (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편곡)

여기서 잠시 당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던 방식을 떠올려 보자. 그룹 사운드의 음반의 디렉팅(요즘 말로 하면 프로듀싱)은 그룹이 ‘한번에’ 노래와 연주를 함께 하는 것을 녹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룹이 아닌 솔로 가수의 경우는 녹음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세션 연주자를 동원한 악단이 먼저 연주하는 것을 녹음하고 가수는 뒤에 노래만 덧입히는 녹음 방식이 당시의 지배적 관행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한 차례 오버더빙을 하는 방식이고, 당시의 업계 용어로는 ‘오도아와세(おどあわせ, 音合)’라고 부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포크 음반의 레코딩은 트로트 등 기성 음반의 레코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문제는 트로트의 ‘낡은’ 사운드가 아니라 포크에 걸맞는 ‘젊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느냐였다. 김희갑이 디렉팅한 포크 음반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중용적이다. 그의 작곡과 편곡 스타일은 젊은 취향과 성인 취향, 간단히 말하면 팝과 가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했다. 그래서 몇몇 곡의 경우 세대와 취향을 가로지르는 대중적 히트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 김세환의 “옛 친구” 등이 그렇다. 그렇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김희갑의 편곡을 거친 포크송에서 통기타 음악의 젊고 ‘모던’한 감성이 다소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김희갑이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 즉 포크 가수를 기성 가수와 구분시키는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음악적 사운드는 김희갑의 지휘 하에 편곡되고 녹음되었고, 포크 가수들은 녹음된 반주에 맞추어 노래만 불렀기 때문이다(송창식은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을 녹음할 때 자신은 “노래만 불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다른 음반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김희갑의 경우에도 포크 가수들과의 만남은 하나의 시도라는 의미는 충분하지만 일관된 색깔을 만들어서 어떤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한 결과를 낳았다(개인적 견해로는 김희갑이 포크 가수와 작업하여 최상의 결과를 낳은 것은 양희은의 “하얀 목련”(1983)으로 보인다).

애플 프로덕션 그리고 ‘이종환 사단’의 편곡자(2): 안건마의 경우

1974년에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어니언스의 “작은 새”에서 기타 멜로디에 이어 나오는 피아노의 우아한 타건,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에서 두터운 현악과 오르간의 떨리는 소리(이건 야마하 오르간에 레슬리 스피커를 연결하여 만든 소리다)를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소리들은 이전의 ‘통기타 포크’와는 무언가 달랐다. 전주뿐만 아니라 이후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프로페셔널 음악인이 치밀하게 악보를 그려서 편곡을 하고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능숙하게 합주를 한 음악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프로페셔널하면 구태의연하다’는 통념과는 달리 젊고 모던한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한 신중현이나 정성조가 개입한 ‘실험적’ 음악과는 다르게 ‘대중적’ 감각을 겸비하고 있다. 이런 특징이 포크를 ‘통속화’시킨 것이냐 아니냐는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어니언스 – 작은 새(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 외기러기(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안건마 악단 – 이름 모를 소녀(연주곡) (1975)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음반 [작은 새/초저녁별(안건마 편곡집)](애플/유니버살 K APPLE 785, 1974) 뒷면에 나와 있는 연주인 이름

그 주인공은 안건마, 그리고 그가 이끈 ‘안건마 악단’이다. 이때 ‘악단’은 김희갑 악단과 마찬가지로 풀 멤버의 밴드가 아니라 소규모의 캄보 밴드다. 특이하게도 어니언스와 김정호의 음반에는 ‘연주인’의 이름이 나와 있다. 안건마(피아노), 김윤덕(기타), 함형진(오르간), 김호식(드럼), 김기진(베이스)가 라인업이다. 뒤에 볼 동방의 빛과 더불어 음반 표지에 연주인의 이름이 상세히 적혀있는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름이 있다면 김호식이라는 이름이다. 신중현이 1968~9년 이끌던 덩키스의 드러머이자 엽전들 초기에도 드럼 스틱을 잡았던 바로 그 인물이다. 전설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의 ‘초판’ 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악단의 ‘마스터’인 안건마다. 안건마는 가수 배호의 인척으로 그의 가계는 김광수, 김광빈, 안마미 등 한국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풍미한 음악인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이건 그와의 인터뷰를 참고하기 바란다. 아무튼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인지 안건마는 남산국민학교와 휘문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부 생활을 했고, 서울 을지로의 미군부대인 EDFE의 클럽에서 ‘민들레 악단’ 혹은 ‘나이츠 오브 멜로디(Knights of Melody)’라는 이름의 빅 밴드에서 테너 색서폰 주자로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중학교 3학년때의 일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이 빅 밴드에서 앨토 색서폰을 불던 인물이 ‘이자 백자 천자’ 쓰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여 뉴 코리아 호텔, 국제호텔, 로얄 호텔 등에서 캄보 밴드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경력은 음악을 미치도록 좋아하면서 196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다.

그런데 캄보 밴드와 그룹 사운드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캄보는 ‘재즈’이고 그룹은 ‘록’일까. 음악인의 취향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음악을 직업으로 하면서 자신들의 ‘직장’인 업소에서 요구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그룹이 자신의 취향대로 연주할 수는 없다. 한국의 음악인들이 한 가지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고 그래서 자신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 음악도 연주하면서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캄보 밴드라고 하더라도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나 ‘경음악’을 연주했다. 그 결과 캄보 밴드와 그룹 사운드의 리듬 파트의 편성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혹은 오르간)이라는 이른바 ‘4 리듬(four rhythm)’ 말이다.

그런데 ‘마스터’의 삶은 더 바쁘고 힘들었다. 특히 밤에는 멤버들과 함께 나이트클럽, 카바레, 살롱 등에서 분위기에 맞는 ‘경음악’을 연주하고, 낮에는 스튜디오에서 가수들의 녹음을 지휘하거나 영화음악이나 광고음악같은 실용음악을 작곡·편곡하는 것이 음악 신동의 삶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음악은 관객 없이 멤버들끼리 자유롭게 잼을 할 때나 연주했을 것이다. 아마도 안건마는 정성조와 더불어 ‘제대로 음악을 공부해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대표적인 젊은 음악인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김인배 악단, 최석재 악단, 이봉조 악단, 최상룡 악단, 이인표 악단, 이인성 악단, 여대영 악단같은 이름이 그리워진다. 오랜만에 다음 곡이나 들어 보자.

최석재 악단 – Scarborough Fair
김인배 악단과 히 화이브(He 5)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안건마가 애플 프로덕션과 관계를 맺고 ‘대중가요의 편곡자’가 된 계기도 영화음악을 맡은 것이 계기를 이루었다. 당대의 청춘 스타 하명중이 주연을 맡은 [마음은 푸른 하늘](1973)이라는 영화였는데 여기서 송창식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솔로 가수 송창식의 세 번째 독집인 [Brand New Song: Song Chang Sik(안건마 편곡집)](K-Apple 786, 1973.11.29)은 ‘안건마 편곡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이 음반 역시 김희갑 작편곡집에 비한다면 ‘모던’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송창식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존중하면서 절제되게 편곡된 사운드를 담고 있다. 그래서 “밤눈”이나 “철지난 바닷가”같은 숨겨진 명곡들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박 히트를 하기에는 무언가 미흡하다.

송창식 – 밤눈(1973) (최인호 작사, 김정호 작곡, 안건마 편곡)

그 다음 스토리는 앞에서 여러 번 운을 띄웠다. 송창식의 세 번째 독집보다 음반 시리얼 번호가 하나 앞인 어니언스의 첫 독집(K-Apple 785)이 1974년 3월에 나왔고 6개월 뒤에는 김정호의 첫 독집(K-Apple 791)이 나오면서 ‘안건마가 누구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니언스의 음반들에 ‘임창제 작사·작곡’이라고 표기된 곡들 가운데 다섯 곡(“작은 새”, “외길”,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은”, “사랑의 진실”)이 ‘사실은 김정호가 만든 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해프닝은 가수나 음반사의 신뢰성에 손상을 가했을지는 몰라도 편곡자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안건마는 애플과 관련된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을 담당하면서 1970년대 중반을 화려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종환 사단’의 영광과 굴욕

‘이종환 사단’은 이른바 ‘옴니버스 음반을 시리즈로 발매하는 전략’에도 능했다. 애플 레코드를 통해서는 [별밤에 부치는 노래 시리즈], [Young Festival], [Young Family] 등의 이름을 단 음반을 연달아 발매했다. 타이틀이 식상해지는 듯한 감이 오면 바꾼 이름들이다. 이 음반들은 싱글 음반이 없는 한국에서 일종의 히트 싱글 모음집같은 기능을 했다. 이종환 사단의 영향력은 군소 레코드사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한 예로 1972년 메이저 음반사인 오아시스를 통해 [Oasis Folk Festival]이라는 음반들을 시리즈로 발매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또하나의 메이저 음반사인 지구 레코드를 통해 ‘음악실 셸부르 기획작품집’이라는 타이틀로 쉐그린, 권태수, 김세화 등의 독집을 발매했다.

주) 포크와 관련되어 시리즈로 발매된 ‘옴니버스 음반'(컴필레이션 음반)으로는 이들 외에도 그랜드에서 제작한 [국내 6대 포크 싱어들의 대향연] 시리즈,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Golden Folk Album] 등이 있다. 한편 컴필레이션 음반처럼 보이는 독집의 형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Young Festival Vol. 1]은 이장희의 독집 앨범이고 [Oasis Folk Festival Vol. 4]은 이수미의 독집 앨범이다.

송창식 – 딩동댕 지난 여름(1972) (임진수 작사, 송창식 작곡·편곡, 정성조 악단 연주) ([Young Festival Vol. 2](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78) 수록)

셸부르(혹은 쉘브루)란 무엇인가? 이종환이 경영한 ‘음악실’이다. 신진백화점 건너편 2층의 ‘복다방’에서 출발하여 ‘금수강산’을 거쳐 최종적으로 종로의 셸부르로 안착해 1975년에는 다운타운의 중심인 명동으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셸부르는 세시봉과 르 실랑스를 잇는 포크 음악의 산실의 지위를 차지했다. ‘음악실’ 셸부르는 ‘음반 프로덕션’ 애플과 더불어 이종환이 MBC PD 자리를 그만둔 뒤 이종환 사단을 지탱해준 두 개의 축이었다. 셸부르는 ‘경연대회’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등 이종환 사단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어니언스, 김정호, 홍민 등 간판급 스타에 이어 석찬, 이영식, 이수만, 채은옥, 김인순, 김세화, 현혜미 등이 뒤를 이었고, 사단은 1970년대 후반 이후에도 인맥을 연장했다. 남궁옥분, 임지훈, 유익종, 김승덕, 강은철, 강승모, 이문세 등등.

사진: 명동 시절의 셸부르 광고 – 종로에서 명동으로 ‘겁없이’ 이사했다는 사실로부터 명동이라는 곳의 지명도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이곳을 거쳐간 상당수의 포크 가수들도 확인할 수 있다(출처: www.windbird.pe.kr 이성길 님)

그런데 이종환 사단에는 이른바 ‘연예계형 스캔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1973년 ‘이수미의 피습’과 ‘박성원의 자살’이라는 끔찍한 사건도 포함된다. 박성원 사건으로 인해 이종환 본인도 1975년 법의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기서 뭐라고 논평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은 애플과 셸부르를 통해 ‘포크’가 전성기를 구가함과 동시에 이제 이전의 ‘순수한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음을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종환 사단’도 1975년의 대마초 파동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간판급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중단당하면서 특히 타격을 받은 것은 음반의 판매였다. 결국 애플은 서울음반에게 판권을 양도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김웅일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안건마도 1980년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복잡하고 아리송한 연예계에서의 복마전같은 삶은 그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많은 내적 갈등을 안겨준 모양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찾았고 지금은 뉴욕의 새노래교회에서 음악목사로 재직 중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의 선택에 시비를 걸 수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의 하나인 그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안건마의 편곡이 포크를 대중화시키고 통속화시켜서 ‘가요’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이럴 때는 “Both Sides Now”같은 곡의 가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또하나의 전문 프로덕션인 오리엔트를 살펴본 뒤 함께 결론을 내리기로 하자.

‘동방 박사’ 나현구 사장

사진: 오른쪽 부분에 보면 ‘오리엔트’라고 적힌 글귀가 보인다. 물론 이런 레이블은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음반들이라고 하더라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 레이블은 송창식 [송창식 골든 앨범](신세계, 1978)에 등장하는 것을 스캔한 것이다.

애플의 경우 포크 가수들이 노래를, 캄보나 그룹 출신의 연주인은 편곡을, 그리고 연주인이 지휘하는 악단이 연주를 담당했다. 그렇다면 이제 직업적 작곡가의 손길이 없이 자체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포크 음반을 제작할 수는 없었을까. 이제 이렇게 운영되었던 전문 프로덕션을 살펴볼 차례다.

다름 아니라 이장희의 음반을 제작한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라는 곳이다. 그 전에 몇 가지 의문부터 해소해 보자. 앞에서 인용한 [주간중앙]의 기사에는 이장희의 음반을 발매한 곳이 ‘성음’이라고 나와 있고 성음을 ‘군소 음반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성음이야말로 한국에서 ‘클래식 음반’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했던 메이저 음반사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은 비슷한 시기 한 일간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면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메이커별 세력양상은 톱 메이커 지구와 오아시스가 트로트에만 신경을 써왔던 입장….(중략)…팝 계열 음악은 양희은, 장현, 서유석, 김희갑 등을 포용한 킹 레코드와 이장희, 김세환, 장미리 등을 앞세운 신흥 오리엔트가 용호상박하는 4파전.”([일간스포츠], 1973.12.8)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기사인데, 이걸 보면 ‘성음’이란 상호(label)을 빌려준 제작사일 뿐이고 ‘프로덕션’은 오리엔트임을 알 수 있다. 킹 레코드야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고…

오리엔트라는 프로덕션은 성음레코드의 기술부장으로 근무하던 나현구가 1973년경 설립한 것이다. 나현구라는 인물은 킹박과 더불어 한국 음반산업의 역사를 거론할 때 한 장을 장식할 만한 인물이다. 작곡가 나운영의 후손이자 가수 김세환의 이모부이기도 한 그는 대마초 파동 이후 오리엔트가 부도로 사라지기까지 약 3년 동안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다. 불행히도 그는 현재 칩거 중이라 그의 소식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어서 아직도 그에 관해서는 미스테리가 많다.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에는 힛트 레코드를 설립하여 혜은이(“제 3 한강교”!), 와일드 캣츠(“마음 약해서”!), 장계현(“너 너 너”!), 조동진(“제비꽃”!) 등 극히 다양한 장르에 걸친 음반들을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그후 소리소문이 없다.

주) 킹박(박성배)과 나현구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다. 킹박이 ‘빽판장사’로 시작하여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인 반면, 나현구는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의 엘리트에 변리사를 비롯한 각종 자격증을 보유한 엔지니어였다. 히트곡에 대한 감각의 경우 킹박이 ‘동물적’이었던 반면, 나현구의 경우는 ‘합리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인에 대한 태도에서도 킹박이 방임형이었던 반면, 나현구는 개입형이었다. 후문에 의하면 두 라이벌이 뚝섬 스튜디오 앞의 한강 백사장에서 ‘맞짱’을 뜬 적도 있다고 한다. 나현구가 원래 뚝섬의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1973년 이전부터 포크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양희은의 자서전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나 음반의 해설에 보면 양희은의 [고운노래 모음 1집]과 [고운노래 모음 2집] 뚝섬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면 음반 시리얼은 KLS로 시작한다. 고로 킹박과 나현구 사이에는 모종의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맞짱’ 사건도 역시 그와 관련된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추측일 뿐이며 앞으로 해명해야 할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오리엔트 역시 애플 프로덕션이 유니버어살 레코드를 통해 대명제작한 것처럼 다른 음반사를 통해 대명제작했다. 오리엔트가 차명(借名)한 음반사들의 변천은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시리즈인 [Golden Folk Album]을 훑어보면 파악할 수 있다. 모두 14종이 발매된 이 음반의 뒷면 표지를 훑어보면 성음, 대도, 신세계의 상호를 달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순서대로) 뚝섬, 동대문, 역촌동에 있던 스튜디오를 말하며, 이 스튜디오들은 나현구 사장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음반사들은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마스터 테이프를 가지고 공장에서 음반을 프레스했을 뿐이다.

그런데 ‘골든 포크’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여기 수록된 곡들의 사운드는 ‘어쿠스틱 포크’도 아니고 ‘일렉트릭 록’도 아닌 특이한 사운드다. 이런 사운드를 ‘프로듀싱’한 사람은 나현구 사장이라고 쳐도 이런 음악을 연주해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옴니버스 음반’이란 것이 여러 가수나 그룹의 곡을 모은 것이라서 일관성이 없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Golden Folk Album]의 경우 노래를 부른 가수는 달라도 연주와 사운드는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무언가 ‘팀웍’이 탄탄한 그룹이 연주하지 않고 세션맨을 그때그때 불러서는 만들어내기 힘든 연주다.

동방의 빛, 오리엔트 스튜디오의 ‘하우스 밴드’?

강근식의 연주 음반 [Rain Rain Rain](대도, 1974.8.10)에 실린 사진: 좌로부터 강근식(기타), 유영수(드럼), 이호준(위, 키보드), 조원익(아래, 베이스)

오리엔트에 ‘전속’되어 있던 이 밴드의 이름은 ‘동방의 빛’이다. 동방의 빛의 탄생은 가수이자 작곡가인 이장희와 그의 ‘그림자’인 기타리스트 강근식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관계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성어까지 떠올리게 하는데, 이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장희 전기’를 읽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밴드의 완성은 성음 레코드의 소유의 뚝섬 스튜디오 세션 뮤지션이었던 유영수(드럼),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등이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조원익이 이전에 재즈 캄보인 정성조 쿼르텟에서 활동했고(따라서 김민기 1집과 양희은 2집에서 베이스는 그가 연주한 것이다) 뒤에는 검은 나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영수가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활동했고 유영수와 이호준이 뒤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등은 훨씬 더 많은 정보 중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이들의 공식 공연은 1974년 4월 이대강당에서 개최된 이장희의 두 번째 리사이틀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그룹 사운드’는 이장희의 정식 공연 외에는 미 8군 무대든 일반 무대든 일상적으로 연주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그룹 사운드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이다. 실제로 그룹의 리더인 강근식은 ‘그룹 사운드’ 출신이 아니다. 물론 그 역시 대학생 시절 이태원의 007 클럽에서 연주한 일이 있지만 그건 ‘겨울방학에 몰래 아르바이트한’ 수준이었으므로 그들의 ‘출신성분’을 좌우할 만한 이력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강근식 역시 김희갑, 정성조, 안건마처럼 ‘캄보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가 거친 캄보는 다른 인물들과는 경로가 많이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강근식은 미 8군 무대나 일반 무대에서 배출된 직업적 연주인이 아니라 대학생 아마추어 캄보 출신이었다. 이름은 ‘홍익 캄보’인데 문자 그대로 홍익대학교에 소속된 캄보 밴드였다. 이 대학생 캄보 밴드는 ‘건전한 청년문화 선도’ 차원에서 대학 당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기타 둘, 베이스, 드럼, 피아노로 구성된 5인조로 학내의 각종 행사에 참여했고, 1967년부터 개최된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 페스티발]에서 1회와 2회 모두 대상을 차지하는 성과도 이룩했다. 이들로부터 1970년대 캠퍼스 그룹 사운드 의 맹아를 발견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홍익 캄보는 ‘일렉트릭 그룹’의 사운드가 대학생 문화의 결합한 드문 사례인 것은 분명하다.

김세환 – 비(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4월과 5월 – 옛사랑(1974) (백순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그건 너(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동방의 빛은 강근식이 군대를 졸업하고 이장희와 다시 해후한 1973년 경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장희의 세 번째 독집이 대박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음반의 레코딩 세션을 담당했다. 이장희를 필두로 김의철, 원 플러스 원, 윤지영 등이 레코딩 데뷔를 했을 뿐만 아니라 4월과 5월, 송창식, 김세환, 투 코리언스 등 거물급 음악인들이 이적해 오면서 ‘한국 포크의 명반’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이 ‘골든 포크 앨범’ 시리즈의 하나로 발매된 것도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송창식 – 왜 불러(1975) (송창식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송창식 – 날이 갈수록(1975) (김상배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
송창식 – 고래사냥(1975) (김상배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

동방의 빛은 이 모든 음반들에서 세션을 담당했다. 그렇지만 동방의 빛은 클래식의 오케스트라나 재즈의 빅 밴드와 비슷한 형태였던 메이저 음반사의 ‘전속관현악단’과는 달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연주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면 ‘포크 록’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을 전문적으로 연주했던 동방의 빛은 일종의 하우스 밴드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주) 하우스 밴드는 이제까지 ‘미군 클럽’에 전속된 밴드라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그렇지만 하우스 밴드라는 용어가 ‘상주(常住)하는 악단’이라는 뜻이라면 ‘스튜디오에 상주하는 밴드’라는 의미로도 이 용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등에서는 한 클럽이나 스튜디오에서 ‘상주’하면서 연주하는 백 밴드를 하우스 밴드라고 지칭하는데, 1960년대 소울 음악의 한 산실이었던 멤피스의 스택스/볼트(Stax/Volt)의 하우스 밴드 부커 티 앤 디 엠지스(Booker T. & The MG’s)를 기억할 것이다. 모타운 레이블의 경우에도 역시 이런 하우스 밴드인 훵크 브라더스(The Funk Brothers)가 있었다. 그런데 대개 일반인들은 스택스/볼트의 경우와는 다르게 하우스 밴드의 이름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타운 신화의 주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음반 커버에서 이들의 이름을 빼버린 베리 고디 주니어의 마케팅 전략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대입해보면 프로듀서였던 나현구의 역할은 모타운의 베리 고디 주니어의 역할과도 비슷하겠지만, 연주인의 이름을 제명했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연주인들이 표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식적인 전략이었는지 아닌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물론 이를 두고 신경쓸 만한 일이 아니었을 공산이 크지만. 어쨌거나 동방의 빛 연주자들의 요구로 후일에는 멤버들의 이름이 음반에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어떤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는지 상상해 보자. 오리엔트는 전문화된 분업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장희(작사와 작곡), 동방의 빛(편곡과 연주), 나현구(프로듀싱과 비즈니스)의 삼위일체라고 할까. 먼저 나현구 사장이 오디션 등을 통해 가수를 선정하고 음반에 수록될 곡을 선정하는 등 우선적인 디렉팅 작업을 한다. 그 뒤 이 곡들을 강근식이 편곡하고 동방의 빛이 연습하여 반주를 녹음한다. 이때 드럼과 베이스는 대체로 한번에 끝나지만 기타와 키보드는 몇 차례 더빙을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녹음된 트랙들은 이른바 핑퐁 녹음에 방식으로 계속 오버더빙된다. 이때 나현구는 복잡한 무그의 매뉴얼을 함께 해석하고 조작하는 등 악기와 장비 운영부터 전체 사운드 메이킹에까지 관여했고, 심지어는 심지어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 심지어 배킹 보컬 등에도 참여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음된 반주에 맞춰 보컬들의 노래가 덧입혀진다. 이때 가수의 역할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사람마다 편차가 존재했다고 한다. 송창식 같은 간판급 스타의 경우는 자신이 직접 기타 연주를 하기도 했지만(거의 유일할 것이다), 대부분은 미리 연주된 사운드에 맞추어 단지 노래만을 불렀다.

이처럼 편곡과 세션을 동방의 빛이 맡고 전체 프로듀싱을 나현구가 담당하는 형태였으므로 당시 음반에 기재되던 ‘아무개 작편곡집’이라는 글귀는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음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곡만 스튜디오 외부에서 이루어질 뿐 모든 과정은 스튜디오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시스템이 일관되고 체계적인 전문 레이블을 탄생시켰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런 이득은 단지 음악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미학과 경제학

모두 Vol.14까지 발매된 [Golden Folk Album] 편집 음반은 성음, 대도, 신세계의 음반사 상호를 달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나현구 사장의 휘하에서 작업된 음반들이다. 사진은 [Golden Folk Album] Vol. 5이다.

오리엔트 역시 애플처럼 독집 앨범과 ‘옴니버스 음반’의 판매를 병행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기존 히트곡의 되팔기라는 측면도 있지만 일종의 ‘샘플러’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이 수록된 [Golden Folk Album Vol. 11]에는 송창식의 “왜 불러” 등이 실렸는데, 이 곡은 송창식의 ‘정규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또한 이때까지 공식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조동진의 곡들도 이런 컴필레이션 음반 시리즈를 통해 들을 수 있다.

김세환 – 그림자 따라(1973) (조동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들리지 않네(1974) (조동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주)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동아기획 사단의 헤드쿼터가 되는 조동진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72년 12월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첫 번째 이장희 리사이틀에서 이후 동방의 빛이 되는 멤버들과 함께 참여, 리듬 기타 연주 및 노래를 하기도 했다. 성음 스튜디오 시절 잠시 세션 활동을 한 조동진은 강근식과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배수연, 이영림, 조원익 등과 더불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Dark Side Of The Moon], 킹 크림슨(King Crimson)을 커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동진이 작곡한 곡들과 수록된 앨범의 리스트다.
윤형주 – “작은 불 밝히고” [Golden Folk Album Vol. 4] (대도, 1974)
김세환 – “그림자 따라” [Golden Folk Album Vol. 5](대도 DSO 0031, 1974)
조동진 – “작은 배” [Golden Folk Album Vol. 5](대도 DSO 0031, 1974)
투 코리언스 – “들리지 않네”([Two Koreans] 대도, DSO 0033, 1974)
김세환 – “마지막 노래”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Vol.2](1973)

오리엔트 스튜디오는 연주자들이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또한 거액을 투자해야 하는 콘솔 같은 레코딩 장비보다는 악기 및 이펙트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통제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은 조성되었다. 물론 여러 차례에 걸친 오버더빙으로 인해 음질의 손실은 감수해야 했지만… 이렇게 작은 인원으로 거의 모든 제작과정을 통합한 이 시스템은 김정호나 어니언스가 속했던 애플의 경우보다도 비용을 절감시켰다. 단적으로 말해 관악기나 현악기 등이 사용되지 않았고(많은 수의 악단을 부르지 않았고), 기성의 작편곡가도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히려 직업적 작편곡자가 디렉팅한 음악에 비해 색다른 사운드의 질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경제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을 동시에 충족되었거나 할까.

동방의 빛은 포크뿐만 아니라 클래식, 재즈, 컨트리, ‘경음악’ 등으로부터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했다. 이런 자양분들과 더불어 무대 공연이 아닌 스튜디오 세션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음향적 실험을 단행할 수 있었다. 선구적으로 수입된 악기 및 이펙트들도 이런 실험에 공헌했다. 동방의 빛의 사운드는 드럼-베이스-기타-오르간의 기본 편성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타가 여러 번 더빙되어 다양한 톤의 소리를 낸다. 물론 기본적인 기타 톤은 ‘클린 톤’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악기나 현악기가 담당하는 주요 선율을 담당할 때는 톤이 변화된다. 이를 위해 퍼즈, 와와, 뮤트론 등 다양한 이펙트들이 동반되었는데, 이를 통해 현악기나 관악기의 생음과는 다른 독특한 질감이 형성된다. 한편 기타와 더불어 무그 신시사이저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금 들으면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소리였다. 물론 당시의 신시사이저는 매뉴얼이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단선율만 연주된다는 치명적 한계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를 여러 대 사용하여 두터운 소리를 만들어 냄을 알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이들이 심취했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사운드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아 있는 음원 중에서는 송창식이 부른 “새는”의 종반부에서 그 단초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만.

여기서 잠시 애플과 오리엔트의 차이를 부연하면 애플의 경우는 ‘업소(셸부르)-방송(별이 빛나는 밤에)-음반제작’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소유했다면, 오리엔트의 경우는 업소나 방송과 같은 시스템은 가지지 않았고 다만 스튜디오라는 음반제작 환경을 철저하고 전문적으로 통제한다. 다른 레코드사들이 청계천에 근거지를 삼고 있었던데 반해 오리엔트의 스튜디오는 이와는 거리가 먼 역촌동에 최종적으로 정착한다. 이런 두 지역 간의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이자 상징적인 거리가 아닐까. 나현구가 왜 스튜디오 이외의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포크의 훼절? 아니 ‘포크 록’의 유산(流産)

포크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비전(秘傳)을 다룬다는 우리의 생각을 이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포크가 ‘아마추어적이고 공동체적 실천’을 넘어서 대중음악의 하나의 양식으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다른 음악들과의 조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실천’이 공연이나 음반을 통해 대중과 만나면서부터 록의 비트나 재즈의 화성 나아가 클래식의 멜로디가 도입되는 사례는 점차 증가했다. 그리고 1973~5년의 시기는 이런 간헐적 시도들이 몇 개의 양식을 낳은 시기였다.

이런 결과에 대해 포크 공동체가 가졌던 순수성의 정신이 퇴색되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다. 단적인 예로 1973~4년 애플과 오리엔트에서 제작된 음반들을 포크 록으로 부를지 포크 팝으로 부를지 새로운 용어를 개발해야할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들 음반들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통기타 포크’를 고수하는 흐름보다는 포크와 다른 장르의 융합을 시도하는 흐름이 더욱 활발했다. 먼저 백순진, 김태풍의 4월과 5월은 이수만 및 민영진, 김찬 등 서울대, 연세대의 아마추어 출신 뮤지션을 규합해 5인조 그룹인 ‘들개’를 결성했다. 또한 신중현의 디렉팅 하에 싸이키델릭 음반을 발표한 경험이 있는 서유석의 경우에도 서울대의 스푸키스 멤버 일부와 함께 포크 록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 사운드 가운데서도 영 사운드나 템페스트같은 경우는 ‘포크 록’을 추구하면서 ‘대학가’를 다루는 곡을 발표한 케이스였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맹아는 이때부터 출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금 시점에서 들개들이나 서유석이 시도했다는 포크 록은 들을 수 없다. 물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못했다. 포크는 본의 아니게 한때 가요정화운동의 수혜자였지만 점차 퇴폐적이고 불온한 문화라는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된다. 그리고 결국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라는 철퇴가 내려졌다. 물론 라이센스 음반 제작으로 국내 음반 제작의 위축이라든가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 등의 요소도 이런 철퇴 중의 하나였다. 마침내 오리엔트가 1억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부채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돌더니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오리엔트의 몰락은 대마초 파동만큼이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애플의 몰락에 대해서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로써 한국에서 포크와 록의 만남(그걸 ‘포크 록’이라고 부르든 ‘포크 팝’이라고 부르든)이라는 프로젝트는 유산(流産)되고 말았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포크와 록의 만남에 주목하는 것은 단지 장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진솔하고 진지한 가사를 담아 자작자연(自作自演)하는 아마추어적인 실천 양식으로서의 포크가, 제대로 음악공부를 한 전문적인 직업 연주인과 만나면서 불러일으킨 화학 반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음악양식에 영향을 받아 1970년대 후반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진 음악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음악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정말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음악을 사람들이 계속 ‘포크’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1973~1975년에도 이미 포크가 아니었던 음악을 그 뒤에도 계속 ‘포크’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크가 아닌 음악, 그렇지만 포크가 아닌 것도 아닌 그 음악은 지금 경기도 교외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방 반주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그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20021122 | 최지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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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 음반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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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윈드버드
http://www.windbird.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