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2년 10월 31일 11시, 2001년 10월 19일
장소: 예술의 전당 커피숍
질문 및 참석자: 신현준, 최지선(2002. 10. 31), 김형찬(2001.10.19)
정리: 최지선, 신현준

* 필자 주: 이 인터뷰는 [한국 초기 통기타 음악의 사적 연구: 1975년까지 사회사적 흐름과 작가를 중심으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2002.2)라는 학위논문을 쓴 포크 음악 연구가 김형찬이 2001년 10월 19일에 한 인터뷰를 기초로 하고 최근에 우리가 강근식님을 만나서 했던 인터뷰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때문에 본 글은 우리의 인터뷰와 김형찬님의 인터뷰를 한 데 취합해서 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강근식님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좋은 자료를 기꺼이 전달해 주신 김형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깊어가던 가을이 서둘러 겨울로 향해가던 어느 날 1970년대의 중요한 포크 록 (이라고 간주되는) 음반들을 ‘뒤에서’ 매만졌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을 만났다. 그를 만난다는 것은 가슴 설레이는 일이었는데, 게다가 전화가 계속 붙통이라서 못 만나 뵙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한 끝이었던지라 더욱 애틋한 만남이었다. ‘한동안 뜸했던’ 이유를 여쭤보니 그의 절친한 친우 이장희가 있는 미국에 여행을 한 달간 다녀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얀 머리가 잘 어울렸던 그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것저것 캐묻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강근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타 신동부터 ‘홍익 캄보’까지

20021123074507-0422int_KGSQ: 일단 개인적인 인적사항부터 여쭙겠습니다. 출생년도와 형제관계, 어린 시절 성장과정은 어떠하셨는지요.
– 1946년생입니다. 집안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나중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형제는 10남매였는데 누이가 성악을 전공, 줄리어드 음대를 나왔고, 형님들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죠. 국민학교 5, 6학년때 “Too Young” 같은 팝송과 영화음악을 듣고 자랐어요. 형님이 쓰던 기타로 찬송가와 팝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기타 교본이 없어서 누이가 치던 피아노 악보책으로도 기타 공부를 했어요. 중학교때 서울로 와서 AFKN을 통해 음악을 듣게 되었죠. 전축이야 대학교 때 와서야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이때도 주로 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을 감상했지요. 그때는 전축이 없어서 정말 애먹었어요. 판도 없고 전축도 없고. 음반은 당연히 이태원에서 백판을 사서 들었는데, 다방에 가서 DJ한테 틀어달라고 하곤 했죠. 나중에 라이센스 음반 나오니까 그건 정말 판(음반) 같더라고요.

Q: 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혹시 이때 밴드부 활동같은 것을 하셨는지요.
– 저는 휘문 중고등학교 출신인데, 밴드부 활동은 하지 않았어요. 한번 해볼까 하고 가봤지만 분위기가 좀 험악하더군요(웃음).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중학교 때 친구가 기타 배우러 가자고 그러더니 제것까지 한달치 수강증을 끊어와서 학원에 같이 간 적이 있었어요. 학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 그 학원에서는 벤처스의 연주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치라는 것을 다 치니까 학원 선생이 놀랐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가서 한번 쳐보고 그 다음부터는 안나갔어요.

Q: 대학 시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그때 홍익 캄보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홍익 캄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캠퍼스 그룹’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캄보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 당시 멤버는 어떤 분들이셨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연주하시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 홍익대학교 도예과에 65학번으로 입학하고 졸업은 1968년에 했어요. 1966년 2학년에 재학 당시, ‘홍익 캄보’ 라는 5인조(기타 둘, 드럼, 베이스, 피아노)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했는데, 만 2년 정도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멤버로는 세컨드 기타에 최봉주(후일 바른손 회사에서 근무), 드럼에 국대현(지금은 캐나다에 거주), 베이스에 김명수(소식 모름), 피아노에 정계옥(화가이자 교사)였어요. 홍익 캄보는 학교 당국의 지원과 배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구 치고 술먹는 것보다 밴드를 조직해서 마음껏 즐기고 젊음을 발산하는 것이 더 ‘건전하다’고 생각하신 당시 학생과장 홍순민 교수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지요. 학부모들의 기부금으로 피아노 같은 악기와 앰프를 지원받았죠. 앰프는 (청계천) 조립품이었고, 100W짜리 진공관 앰프였어요. 앰프는 그땐 리버브랑 트레몰로 정도만 됐어요. 기타 모델은 펜더 재즈마스터(Fender Jazzmaster)였고 이펙트같은 건 없었죠. 와와나 퍼즈 같은 이펙트는 뒤에 동방의 빛에서 연주할 때쯤 되어서야 쓸 수 있었죠.

Q: 다른 학교에서도 홍익 캄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요? 아니면 홍익대학교가 특이했던 것인가요? 또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연습은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사정은 홍대만 특수했고, 다른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다른 학교에서는 전부 다 자비로 자발적으로 했죠. 하지만 역으로 저희가 학교 행사에도 도움을 주었죠. 신입생 환영회, 졸업생 환송회, 사은회, 등의 학교행사 연주를 저희가 다 했습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이상벽이나 이창림씨가 전속 MC를 맡았고, ROTC 위문공연도 나갔었죠. 그때 우리가 가서 연주하면 막 울고 그랬어요. 이때 장비는 군대에서 지원해 준 트럭으로 싣고 다녔죠. 행사장에서 연주는 역시 벤처스 음악을 주로 연주했어요. 노래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애니멀스(The Animals)이 노래를 나와서 부르면 우리가 연주해주고 그랬었죠. 그리고 연습은 강당에 있는 분장실에서 숙식하면서 했어요. 음악은 AFKN을 듣거나 이태원에서 백판을 사서 채보했습니다. 학교에서 레슨비 지원을 해줘서 선생님이 와서 레슨도 하고 그랬어요. KBS 악단의 목우영 기타리스트에게 재즈 음악 레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죠지 쉐링 퀸테트(George Shearing Quintet)의 음악을 주로 배웠습니다.

Q: 홍익 캄보는 블랙 테트라 같은 홍익대학교의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는 관련이 없는 건가요? 아울러 홍대 출신 음악인들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 홍익 캄보는 그룹 사운드와는 관계 없어요. 제가 나가고 나서 한두 기 정도 더 하다가 (홍익 캄보가) 끝난 걸로 알고 있어요. 학교에서 지원도 끊겼고… 제가 4학년때 후배 한 팀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죠. 홍대 출신 뮤지션들로는 장계현이 있죠. 장계현은 잘 알고 지내요. 홍익 캄보의 후배였으니까.

Q: 홍익 캄보가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발’에서 1회(1967)와 2회(1968) 모두 참가해서 수상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팀들이 참가했는지, 참가곡은 어떤 곡이었는지, 심사위원은 어떤 분들이셨는지요.
– TBC에서 개최한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 페스티발’에서는 1회, 2회 연속으로 저희가 1등을 했습니다. 장소는 예선은 방송국에서 하고 본선은 시민회관에서 했지요. 3,000석 규모라고 하던데 객석이 꽉 찼어요. 아마 두 시간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선곡, 출전자 지정곡 같은 게 있었고, 자유곡도 있었구요. 이렇게 두 곡 정도 연주했을 겁니다. 지정곡은 (벤처스의) “Pipe Line” 등이 있었어요. 대회의 타이틀이 ‘재즈 페스티발’이어서 저희 출전곡은 재즈곡이었어요. 조지 쉐링 퀸텟이 연주한 걸 그대로 모방한 곡이었죠.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고 하니 참가한 그룹이 많이 있었어요. 각 대학에선 거의 다 나왔지요. 서울공대와 치대, 연대의 밴드 등이 참가했는데, 통기타를 든 개인도 있었어요. 윤형주, 김세환 등이 “Scarborough Fair” 등으로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Q: 지금 KBS 악단장으로 있는 정성조님도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시는지요?
– 피아노, 드럼, 베이스, 트럼본, 색서폰으로 구성된 정성조 악단이 2회에 참가했는데, 곡은 기억이 안 나지만 너무 연주를 잘 하셔서 저희는 떨어질 거라 생각했죠. 나중에 들으니 정성조 악단은 ‘학생의 수준을 넘어선 프로’라는 인식을 주어서 2등으로 밀렸다고 하더라구요. 심사위원은 이백천, 길옥윤, 이봉조씨 그리고 김강섭씨 등이었습니다. 예선은 방송국에서 하고 본선은 시민회관에서 했지요. 삼천석 규모라고 하던가요, 객석 역시 꽉 찼어요. 시간은 아마 두 시간 이상 했죠.

Q: 저희가 만나뵈었던 기타 연주인들은 주로 미8군 무대 출신인데 강근식님은 미8군 무대와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학교 행사 외에 다른 곳에서 연주하신 일은 없나요? 있다면 그곳의 보수는 어떠했는지, 또 그 당시 그곳에서 함께 연주하던 그룹들은 누구였는지요.
– 이태원에 있는 미군 클럽인 007 클럽에 한 두어달인가 나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홍익 캄보의 장비는 다 학교 소유라서 개인적으로 밖에 나가서 연주하는 건 금지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몰래 나간 것이었죠. 한 두 달 정도… 그때가 1회 재즈 페스티벌(1966)에 그랑프리 타고 난 다음이니까 겨울방학 때였을 거에요. 홍익 캄보 멤버 그대로 나갔고 당시 연주한 곡들은 “Pipe Line” 등 벤처스의 곡을 주로 연주했어요. 싱어가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당시 연주하는 그룹으로서는 벤처스가 모델이었죠. “Pipe Line”은 그 당시 최동욱 씨가 진행하는 방송에 쓰여서 유명해진 곡입니다. 그곳에서 같이 어울렸던 팀은 잘 모르겠어요. 그때는 한팀이 저녁부터 밤까지 했으니까 보수는 학생으로서는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1, 2회 그랑프리 타고 졸업한 뒤 군대를 갔죠. 그 사이에 사회적으로도 불안하고 복잡해서 (홍익 캄보도) 유명무실하게 되었죠. 1969년부터던가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때 저는 군대에 있었어요.

Q: 군대는 언제 다녀오셨는지, 어느 곳에서 복무하셨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음악활동은 어떻게 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 1969년 4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복무했습니다. 30사단 문선대 1기였구요. 문선대는 군악대와 달라요. ‘반공 각본’이 육본(육군 본부)에서 분기마다 내려오고 그걸 기초로 해서 쇼를 꾸며서 분기별로 순회공연을 하는 형식이었어요. 연주단은 5인조로 기타 2, 베이스, 드럼, 색소폰이었을 거예요.

평생의 知音, 이장희와를 비롯한 포크 가수들과의 첫 만남

20021126040137-0422int_kanggs_2Q: 이장희 선생님과는 각별하신 사이라고 하는데 언제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멕시코라는 살롱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비스 캐빈이나 쎄시봉과는 언제 어떻게 관련을 맺으셨는지요. 그리고 미도파 살롱 무대에도 선 적이 있는지요.
– 소공동의 ‘멕시코’라는 고급 살롱에서 1968년 말경에 만났어요. 당시 멕시코에는 코코장(장영규, 박상규), 황병갑(클래식 기타) 등이 출연했어요. 그때는 멕시코가 가장 고급 살롱이었고 살롱이 몇 개 없었어요. 우연히 그곳에 들렸다가 만나게 되 음악 이야기를 하며 바로 친해졌죠. 그러다가 오비스 캐빈에 둘이 정기 출연을 하면서 음악생활의 첫발을 내디뎠어요. 오비스 캐빈에서 “Oh Lonesome Me”, “I Walk the Line”을 불렀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했죠. 미도파 살롱에는 나간 적이 없어요. 지금도 이장희와는 서로 만나곤 해요. 얼마 전 미국에 한 달 있으면서 같이 여행도 다녀왔어요. 그 친구는 서로 음악으로 마음을 주고받던 잊을 수 없는 친구죠.

Q: 군대 계실 때 탈영(?)한 이야기 좀 부탁드릴께요. 1972년이라면 군 복무기간인데 이장희의 첫 리사이틀때도 ‘공연 직전에 나타나 결국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일화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2] 음반 뒷면을 보면 “기타를 연주해 주신 군인 아저씨 강근식 형”이라는 문구도 나옵니다.
– 탈영은 아니고(웃음), 문선대가 좀 ‘특과’라서 쉽게 나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장희 리싸이틀이나 양희은의 녹음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겁니다. 양희은 음반에서는 “백구” 한 곡만 연주했어요.

Q: “백구’의 연주를 들어 보면 C 장조에서 화성이 C7인데 B음이 등장하고, 화성이 C일 때 레# 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반음으로 충돌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던데 특별히 어떤 효과를 의도하신 건가요? 또 이 곡이 첫 번째 녹음으로 보이는데 녹음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부탁드립니다.
– “백구”에서는 나일론 기타(거트 기타 혹은 클래식 기타)를 사용했는데, 녹음 전날 밤에 곡을 받아서 기타 라인을 만들었어요. 기억은 안나지만 코드 안에서 유치하지 않게 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메이저 세븐(C Major7)도 넣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재즈 스케일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요. 녹음한 곳이 뚝섬의 성음 스튜디오였는데 (김)민기도, 나(현구) 사장도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런 식으로도 포크 가수들을 알게 되었고, 또 청개구리에 다니면서도 알게 되었죠. 조영남씨랑은 쎄시봉 있을 때 알게 됐고, 김진성씨 같은 분들은 나현구 사장 때문에 알게 됐죠.

양희은 – 백구(기타: 김민기, 강근식)

Q: 미리 여쭤 보는 것인데 선생님은 조용한 성격이신 듯한데 자신을 어떤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향받은 뮤지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입니까? 재즈나 컨트리 영향도 느껴지던데요.
– 사실 전 록 음악을 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재즈나 컨트리 같은데서 영향을 받았죠. 영향받은 뮤지션은…옛날 분이라 잘은 모르실지 모르지만 조지 쉐링 퀸텟이나 웨스 몽고메리, 찰리 버드, 찰리 크리스찬 같은 재즈 뮤지션의 영향이 컸죠. 또 컨트리 기타리스트 쳇 앳킨스(Chet Atkins)의 음반을 청계천에서 구해 들었는데 클린 톤의 기타가 너무 좋았죠. 그 기타 톤은 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죠. 이분이 쓰던 건 그렛치(Gretsch)라고 유명한 회사제품인데 이번에 미국에 가서 실물을 처음 봤어요.

동방의 빛과 오리엔트 프로덕션, 그 전설을 찾아

Q: 그 뒤 제대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나현구 사장님과 함께 일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현구 사장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 나현구 사장님은 한국 레코드계나 가요계에서 한 획을 그으신 분이예요. 그분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신 분이었죠. 한국에서는 최초로 신디사이저도 구입해 주는 등 악기에도 투자하셨을 뿐 아니라 저희에게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셨어요. 다른 음반 제작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점을 갖고 계신 분이었죠.

Q: 이장희님의 3집 음반 이전에 나현구 사장이 제작한 음반은 어떤 것이 있나요?
– 그건 잘 모르겠어요. 초기엔 정성조씨와도 작업했고, 킹박(박성배)의 회사와 같이 음반을 냈던 것으로 아는데… 그랬기 때문에 문제도 있었을 거예요. 정성조씨가 아실 텐데요.(그러나 불행히도 정성조님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그리 소상하지 않았다).

Q: 저희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양희은씨 [고운노래 모음 2집] 음반은 ‘킹박의 음반’으로 알고 있는데 스튜디오는 뚝섬이더라구요. 킹이나 유니버설은 마장동 스튜디오를 사용했고 나현구 사장님은 뚝섬 스튜디오를 사용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점이 조금 이상합니다.
– 나현구 사장님이 성음 직원으로, 기술부장으로 있었다고 그러던데요? 뚝섬 스튜디오 에선 나현구 사장으로 통했습니다.

Q: 나 사장님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더 여쭤보고 우선 동방의 빛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동방의 빛은 나현구 사장님이 개입해서 결성된 것인지 아니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건지요. 또 멤버들 스카웃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요. 그리고 조동진 씨와도 활동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 그때 원래 이장희와 나현구 사장님 사이에 개인적 계약관계가 있었어요. 성음은 라벨(레이블, 상호)만 빌려준 것이었죠. 그런데 제작자에게도 밴드가 필요하고 이장희에게도 밴드가 필요하게 되었죠. 그래서 동방의 빛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나머지 멤버들은 스카웃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나현구 사장의 스튜디오에 세션맨으로 오던 친구들이예요. 유영수(드럼, 정성조와 메신저스 활동)나 이호준(키보드, 이후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 조원익(베이스, 이전에 정성조와 활동, 이후 검은 나비에서 활동)씨가 왔어요. 저는 월급을 받았고 그 친구들은 녹음할 때만 나왔죠. 이호준은 밥 제임스(Bob James)를 좋아했고. 유영수는 정통 세션맨이었죠. 이호준만 나이가 어리네요. 히 화이브(He 5)에도 있던 배수연이 드럼을 치기도 했습니다(참고로 이때 히 화이브는 히 식스 이전의 히 화이브가 아니라 김홍탁이 탈퇴하고 그의 뒤를 이은 정희택도 탈퇴한 뒤 5인조로 축소된 히 화이브를 말한다).

Q: 이장희님의 세션 밴드를 조직한 게 동방의 빛이고, 그게 동방의 빛 최초의 활동이었던 것인가요?
– 그렇죠. 그게 최초였죠. 그런데 매일 녹음실에서 세션 같이 하다가 그대로 만들어진 밴드라서 그렇게 새롭진 않아요. 조동진은 군대를 간다고 하면서 빠졌구요.

Q: 차제에 조동진님에 대해서도 여쭤 보겠습니다. 조동진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요. 나중에 조동진님의 앨범 1집(1979), 2집(1980)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아, 그건 성음 스튜디오 시절이에요. 조동진씨는 뚝섬 스튜디오에서 잠시 세션 활동을 했었어요. 원래는 조동진의 형을 먼저 알았어요. 조동완이라고. 그 분이 이장희, 조용남 등을 알고 있어서, 저와도 이어지게 된 거죠. 그때 음악 얘기 많이 했어요. 조동진의 1, 2집에 참여한 사람은 배수연. 조원익 등, 다 그대로예요. 아마 1집엔 제가 드럼 친 것도 하나 있을 걸요.

Q: 또한 당시 한 잡지 자료에 의하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나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곡을 같이 연주했다고 나옵니다. 핑크 플로이드나 킹 크림슨의 음악을 연주하려면 신시사이저나 멜로트론같은 당시로는 첨단 악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음악 특성 상 이상한 담배도 필요하셨을 것 같구요(웃음)
– 성음 시절에 조동진과 같이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에 심취해서 흉내내 연주하곤 했어요. 킹 크림슨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했죠. 멤버요? 그때도 사실은 한 그룹이었어요. 정식 이름은 없었지만. 저와 조동진, 이호준, 조원익과 더불어 이영림도 같이 했어요. 조동진이 노래도 했죠. 핑크 플로이드에 빠져서 “Money”같은 노래를 과감하게도 시도했지요. 1973년경이었겠네요. 특별히 다른 용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The Dark Side of the Moon] 전체를 다 녹음한 게 있어요. 나 사장도 허락했지요. 그때 녹음한 자료를 혹시 나 사장님이 가지고 계시려나… 멜로트론이요? 당연히 못 구했죠. 나중에 이야기 들어 보니 비싸더라구요. ‘이상한’ 담배도 피웠는데 그때는 그게 죄인지도 몰랐어요. 군대에서도 피고 그러던 시절이었는데요.

Q: 송창식의 “새는”을 들어보니 핑크 플로이드 영향이 느껴집니다. 또 나중이지만 조동진 2집(1980)에 수록된 “어둠 속에서”는 킹 크림슨처럼 들립니다.
– 그런 셈이죠. 그런 부분은 저희에게 그냥 맡겨주었어요. 일률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는 자유를 주셨는데 일부는 간섭을 하신 거죠. 판매를 생각 안할 수 없으니까. 엔딩 코드나 길이 같은 건 조절해야했죠.

송창식 – 새는(1974) (연주: 동방의 빛)
조동진 – 어둠 속에서(1980) (연주: 강근식·조동진 외)
투 코리언스 – 들리지 않네(1974) (작사·작곡: 조동진, 연주: 동방의 빛)

Q: 이장희님 음반이 ‘대박’ 터진 게 1973년 말인데, 그후 얼마간 성음에 있다가 그 다음 대도, 신세계, 이렇게 음반사를 옮기시던데 각각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대도는 동대문의 서울 운동장 옆에 있었는데 그게 음반 프레스실이었어요. 웅웅거리고, 열 나고… 제 기억으로는 정말 열악한 스튜디오였어요. 그래서 거기에는 잠시만 있었어요. 거기서 녹음한 건 뽕짝 메들리였을 거고, 그 외에는 별로 기억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역촌동의 신세계 스튜디오로 이사했죠. 규모는 오십평 정도였을 겁니다. 신세계는 음반회사고, 오리엔트는 프로덕션(이른바 ‘PD 메이커’였죠)… 성음에서도 스튜디오를 나 사장이 갖고 있었듯이 이 스튜디오도 나 사장이 가지고 있고 레코드 회사는 따로 있던 것이죠. 레코드 회사까지 다 하기가 벅찼는지, 아니면 관심이 스튜디오에만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신세계 레코드의 윤상호 사장님은 레코드 회사를 운영하신 것이고 스튜디오는 나 사장님 소관이었어요. 거긴 냉난방도 안되는 곳이었어요. 그때 선풍기 앞에 얼음 놓고 악기 식히고… 역촌동 스튜디오는 대마초 파동을 기점으로 문을 닫았죠. 그리고 얼마 뒤에 나사장님도 부도를 냈고 오리엔트는 끝이 났어요. 그 다음에 그분은 창경원쪽, 원남동쪽으로 이사갔다고 알고 있어요.

이장희 – 그건 너(1973) (연주: 동방의 빛)
이장희 – 자정이 훨씬 넘었네(1973) (연주: 동방의 빛)

Q: 처음 나오던 음반에는 오리엔트라는 이름이 적힌 음반도 별로 없습니다. 1985년에 나온 조동진님 3집에 보면 ‘오리엔트 스튜디오’라고 나와있습니다. 이 음반이 거기(원남동)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나요?
– 사실 저희는 음악만 했거든요. 우리는 그냥 녹음만 했으니까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오리엔트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그리고 3집 음반의 오리엔트가 원남동 스튜디오를 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는 저도 독립한 다음이니까요.

‘東方不敗’ 시절의 ‘역촌동 사운드’의 시스템

Q: 가수 선정은 누가, 어떻게 했나요? 듣기론 나 사장님이 하셨다던데요, 연배가 조금 많으신 분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젊은 감각이 있으셨는지 놀랍습니다. 또 오디션은 따로 있었는지, 그렇다면 어떤 가수가 오디션을 통해 선정되었는지요. 많은 가수들이 ‘나현구 사단’이 되었고 애플 프로덕션으로부터 오리엔트 프로덕션으로 이적하는 흐름도 좀 보이구요.
– 그때는 나 사장이 ‘히트 메이커’라고 되어 있어서 다들 그리로 오고 싶어한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가수 선정은 나사장님이 했죠. 오디션이랄 것까진 없지만, 제작자니까 판매가 될 만한 가수를 골랐겠죠. 당시 물레방아도 있었고, 현경과 영애 도 있었죠. 양희은은 처음 들었을 때 매우 신선했죠. 나 사장님 개인적으로는 포크 쪽을 선호하셨어요. 저도 그분의 감각을 높이 평가합니다. 음악을 좋아하셔서 나사장님이 녹음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녹음할 때는 나사장이 직접 지휘하고. 때로는 코러스도 같이 하고, 플루트도 부셨습니다.

현경과 영애 – 아름다운 사람(1974) (작사·작곡: 김민기, 연주: 동방의 빛)
현경과 영애 – 나 돌아가리라(1974) (작사·작곡: 김광희, 연주: 동방의 빛)

Q: 선곡이나 곡 배치는 나사장님이 하신 것인가요? 그렇게 개입이 많으면 가수들뿐 아니라 동방의 빛 멤버들도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을까요?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은 거의 대부분 동방의 빛이 연주했겠지만 포크 가수가 직접 기타 같은 악기를 연주한 적은 없나요? 4월과 5월도 기타를 연주하려 했을 것 같은데…
– 선곡, 곡 배치, 사진 모두 다 (나 사장님이) 하셨어요. 저희가 간섭한 건 연주자, 엔지니어 이름만 넣어달라고 한 것밖엔 없어요. 가수 본인들이 불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나 사장이 어떤 방향으로 가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어요. 그분은 ‘이지 리스닝’을 추구해서 어려운 음악은 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악기 연주는 (송)창식이 정도만 했을 거예요. 4월과 5월까지도 녹음할 때는 기타 연주를 안 했으니까요.

Q: 동방의 빛의 편곡은 강근식님이 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을 드리는 건 당시 음반에는 작사, 작곡, 편곡이 나와 있는데 강근식님이 관여한 음반에는 편곡에 대한 정보는 없고 연주자 이름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편곡자 이름은 없어서 불이익을 받고 계실지도 몰라서…
– 연주자 이름을 넣어 달라고 제안한 건데, 결국 편곡자 이름은 빠졌죠. (편곡자 이름이 없던 데에는) 나 사장님의 고도의 계산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편곡은 다 같이 했다고 봐야죠.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땐 다 포 리듬(주: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으로 처리했거든요. 기타 네 번씩 입히고 드럼, 베이스는 한번 치고 끝나는 식으로 녹음이 진행됐으니까 편곡은 같이 한 것이지만 제가 조금 많이 했다고 볼 수는 있죠.

Q: 그때 보면 대부분의 곡들은 악보를 그려서 어레인지했다고 하는데, 동방의 빛은 달라 보입니다.
– 그게 나사장님이 노리는 바였어요. 자유로운 음악적 발상을 할 수 있게 멜로디만 놓아 두고 각자 맡은 파트를 편곡하게 했어요. 즉흥적으로 한 것도 많았어요. 앞에 물어본 송창식 음반의 “새는” 같은 노래의 키보드 라인도 즉흥이었죠.

Q: 애플 프로덕션에서 나온 음반들을 보면 생악기(관악기, 현악기)의 비중이 높은 데 비해 오리엔트 프로덕션 쪽은 전기·전자 악기 중심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이 오리엔트 특유의 미학인가요?
– 제 생각엔 경제적인 측면도 상당히 작용했을 겁니다. 적은 인원으로 녹음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죠. 악단을 많이 부르면 비용이 많이 들고, 거기다 편곡 문제도 있고, 그렇다고 편곡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또 하나는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자는 생각도 많이 작용했을 겁니다. 틀에 박힌 악단에 비해 색다르니까…

Q: 그렇다면 안건마씨가 편곡한 어니언스, 김정호 등의 음반들보다는 비용이 덜 들었겠네요?
– 그렇죠 역시.

Q: 동방의 빛은 녹음만 하고 라이브는 안했나요? 무대에서 동방의 빛이 연주를 한 건 이장희 리사이틀 말고는 없었는지요. 공연은 어디에서 하셨는지요.
– 이장희 없는 동방의 빛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까. 초기에는 이대에서 공연했고, 이장희가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공연한 거죠. 밤무대 같은 곳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고. 사실 동방의 빛이 유명무실한 밴드죠(웃음). 활동도 별로 안하고. 이장희의 개인적인 그룹으로서는 좋았죠. 나 사장 입장에서도 그런 팀이 있으니 판매에도 기여하고 녹음도 마음껏 하니 일석이조죠.

Q: 미국에서는 동방의 빛 같은 스튜디오 밴드를 ‘하우스 밴드’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스택스 레이블의 부커티 앤 엠지 같은… 혹시 나 사장님이 그런 모델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닌가요?
– 그렇다기 보다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아요. 그리고 기존의 밴드 구성에 의한 편곡에 식상해해서 그걸 탈피하려다보니 나온 결과인 듯합니다.

Q: 녹음을 할 때 몇 트랙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어떤 식으로 녹음이 진행되었는가 등에 대한 ‘표준 공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나 사장님 외에 엔지니어는 따로 있었나요? 아니면 엔지니어도 직접 하신 건가요?
– 역촌동 시절도 2트랙으로 끝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일종의 ‘애프터 레코딩’인데 우선 기본 4 리듬을 먼저 녹음합니다. 그 다음에 녹음된 것을 들으면서 다른 쪽 채널로 ‘핑퐁 녹음’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기타로 간주를 넣는다거나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핑퐁 녹음을 하면서 계속 덧붙입니다. 그러면서 음질은 나빠지고 밸런스 조정도 힘들어지죠. 다시 말해 처음 녹음할 때는 합주하고, 그걸 들으면서 기타를 계속 입히는 겁니다. 그럴수록 음질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요. 그러지 않아도 기본 노이즈 때문에 신경이 쓰이던 시절이었거든요. 가수들의 최종 노래는 반주를 틀면서 녹음했죠. 그러니 중간에 악기별 볼륨 등을 조작할 수가 없었죠. 믹싱은 없는 거죠. 당시 엔지니어는 원 기사였습니다.

Q: 녹음 장비나 악기 등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건반악기가 오르간인지, 신시사이저인지 궁금합니다.
– 나 사장님은 좋은 콘솔보다는 악기를 사주고 편곡자을 독려하는 식으로 운영했어요. 깨끗한 사운드 와 히트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오르간의 경우 처음에는 YC 45라는 야마하 오르간을 썼죠. 당시로서는 ‘꿈의 오르간’으로 키보드 주자의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그걸로도 모자라니까 로디스(Rhodes)라는 일렉트릭 피아노도 샀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신시사이저를 사오시더라구요. 그게 미니 무그였습니다. 그걸 한번 움직이려면 몇 시간씩 걸렸어요. 매뉴얼을 번역하려고 여관에 방 잡았을 정도였죠. 어떤 건 나 사장님이 (연주)하셨을지도 몰라요. 나중에는 소닉 6까지 해서 무그가 네다섯 정도가 됐습니다. 초기 제품은 폴리가 안 되니까 여러 대 있어야 했죠. 엘카(Elka)는 스트링 소리 내는 건반악기예요. 무그 신서사이저를 최초로 도입한 것은 [별들의 고향] 음반이었구요.

이장희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4) (연주: 동방의 빛)
이장희 – 한 소녀가 울고 있네(1974) (연주: 동방의 빛)

Q: 기타의 경우 어떤 제품이었는지, 또 울림이 많은 소리가 나는데 그런 것들은 어떻게 내신 소리인지도 궁금하네요.
– 마틴 통기타나 깁슨 기타는 제 것이 아니었고 저는 펜더밖에 없었어요. 깁슨은 재즈 분위기가 나는 것에 쓰고, 가벼운 분위기에는 펜더를 썼죠. 기타 이펙트는 퍼즈와 와와를 쓰다가 뮤트론이란 것도 썼어요. 뮤트론은 와와하고 비슷하지만 좀 다른 이펙트예요. 김세환의 노래인 해태껌 CM송에 처음 썼어요. (이때 디스크맨으로 몇 곡을 들려드렸다) 지금 들려주신 4월과 5월의 “어둠 속에서”나 “미운 사람”이 바로 뮤트론을 사용한 곡입니다. 모두 나 사장님이 사오셨어요. 코러스나 페이저 같은 이펙트는 초기엔 없었구요.

4월과 5월 – 어둠 속에서(1974) (연주: 동방의 빛)

Q: 김형찬님이 정리한 것에 의하면 스프링 에코나 테입 에코라는 것도 등장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직접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스프링 에코는 말 그대로 관 안에 스프링만 있는 거에요. 스프링을 건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그것이 관을 통과하면 에코가 되는 거죠. 피셔라는 회사에서 나온 거였는데 그거 하나로 다 했어죠. 테입 에코란 건 아실 거예요. 이것도 재생하면 에코 혹은 딜레이 효과가 나죠(주: 하나의 녹음헤드와 여러 개의 재생헤드가 있어 한번 녹음된 소리를 재생 헤드들이 차례로 시간차(거리차)를 두고 재생하는 것). 딜레이는 기타에 사용했고 스프링 에코는 전체에 걸었죠.

Q: 제가 듣기에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초기(1974년 전반기까지)에 나온 음반들과 후기(1974년 후반 이후)에 나온 음반들은 음의 질감이 달라 보입니다. 뭐랄까요 뒤에 나온 음반들은 사운드가 좀 벙벙한 거 같고, 이전 음반들은 생음에 가깝게 들립니다. 이건 악기 변화때문인지요.
– 그런 변화는 악기 변화 때문은 아닙니다. 아마 그건 스튜디오를 옮겨서 생긴 변화일 겁니다.

몇 가지 후일담

Q: 오리엔트와 ‘라이벌’로 간주되었던 애플의 이종환씨나 김웅일씨와 작업하신 일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사운드 외에 애플과 오리엔트의 차이점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아울러 킹박에 대한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 이장희씨가 처음 판낼 때가 이종환씨랑 어울릴 때입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우리 쪽만 말한다면 나 사장은 저희랑 생활을 같이 했어요. 음악 얘기하면서 밤새기도 했구요. 음악 외에 인간적으로도 많이 친했죠. 킹박 역시 대단했던 분인데 나 사장님과는 스타일이 좀 다르죠. 나 사장님과 싸웠다더라고요. 맞장 뜨러 뚝섬으로 나갔다는 말이 있었구요.

Q: 히트 음반을 많이 냈으면서도 나 사장님이 부도를 낸 이유가 궁금합니다. 뒤에 들고양이(와일드 캣츠), 혜은이로 유명한 힛트 레코드로 재기하기도 했는데…
– 모르겠어요. 그때 대마초 파동이 터지면서 바로 부도났어요. 저도 같이 조사 받았지만 큰 타격은 없었어요. 역촌동의 정신병원에 한 달 동안 수용되었는데 갔더니 이장호 감독이며 온갖 ‘딴따라’들이 다 모여 있더라구요. 이진씨 같은 사람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이던지 한 달 동안 재미있게 있다 왔어요. 부도의 정확한 사연은 모르겠어요. 판매가 부진했겠죠. 그후 힛트 레코드 시절 이야기는 제가 떠난 뒤였으니 저는 잘 모르죠.

Q: 이때 외에 관여하신 음반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이필원 선생님 음반에도 참여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977년 경 송창식님의 원효로 스튜디오에서 석기시대라는 이름으로 조원익, 배수연, 이호준씨가 함께 관여했더군요. 또 나중에 이장희님이 만든 라코 프로덕션과는 관련이 없으셨는지요.
– 이필원의 경우도 뚝섬 스튜디오에서 한 번, 김의철 같은 친구들도 한 번 녹음하고 끝났어요. 말씀하신 원효료 스튜디오에는 딱 한번 정도 관여했던 것 같네요. 제가 참여한 것은 이수영의 [숙녀]가 마지막이었어요. 이장희씨가 나중에 만든 프로덕션과도 관계하지 않았고. 저는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계를 떠난 거죠. CM송 관련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Q: 광고음악 외에도 영화음악에도 많이 참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음악이니 대표작이나 애착을 갖는 작품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광고 음악은 1974년부터 시작했는데, 1976년 나현구 사단의 와해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부라보콘, 바밤바, 칠성사이다, 조이너스, 해태껌 등이 제가 한 음악입니다. 영화음악은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아 고생을 했죠.

Q: 그때 오리엔트에서 강근식님이 시도했던 음악을 어떤 장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막연히 ‘포크 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 설명하는 사람 나름이죠. 어쨌든 제가 한 음악은 시끄러운 건 아니었어요. 4월과 5월의 “옛사랑” 같은 노래나 김세환씨 “비” 같은 경우도 퍼즈 톤의 기타를 썼지만 제가 쓰면서도 퍼즈 소리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밤무대도 생리에 안 맞았구요.

Q: 그렇지만 그 음악을 포크라고 불렀는데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포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포크 대신 어떤 음악이라 부르면 좋을지요. 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골든 포크 앨범]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궁금합니다.
– 그렇게 붙이시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건 전적으로 나사장 아이디어였으니까. 김형찬씨하고도 많이 얘기했었는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하나 새롭게 불러야 할 것 같아요.

Q: 요즘 근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 광고 회사는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을 구상 중입니다. 지금 진척된 것이 많지 않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새로운 음악을 구상 중입니다. 조금만 밝혀 드리면 예전에는 전기 기타의 클린 톤을 참 좋아 했는데 요즘은 나일론 기타 소리가 더 좋아요. 작업도 그쪽으로 하려고 합니다.

Q: 음악활동 오랫 동안 해 오신 지금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시대적 감각이 달라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조언이 될 수 없겠지만 음악을 좀 다양하게 많이 듣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충분한 음악적 바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자기것을 이루어 간다면 후회없는 음악 인생이 될 것입니다.

Q: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과거의 업적의 재조명과 더불어 앞으로는 현재 구상하는 음악에 대한 관심도 기울이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특이한 인터뷰였던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0021124 | 최지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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