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2년 10월 7일 2시
장소: KBS 관현악단실
질문 및 참석자: 신현준, 최지선
정리: 신현준, 최지선

정성조라는 이름은 어떤 이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그를 자주 접하고 있다. 한 공영방송 TV의 ‘열린 음악회’나 동요 부르기같은 프로그램에서, 무심히 보고 지나가게 마련인 무대 뒤에서 관현악단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혹은 재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올 댓 재즈(All That Jazz)’같은 재즈 클럽의 무대에서 색서폰을 연주하는 재즈 음악인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그가 1970년대에 포크 혹은 포크 록 음반들, 그것도 ‘명반’이라고 평가받곤 하는 음반들에 ‘손댔다’는 사실들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그가 정성조와 메신저스라는 이름의 ‘그룹 사운드’를 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룹의 이름이든, 정성조 개인의 이름이든 [어제 내린 비], [겨울 여자], [깊고 푸른 밤]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십 편에 달하는 영화 음악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때문에 1970년대의 대중음악에 대해 알아 보는 이 기획에서 그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어야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KBS 관현악단장으로서, 틈틈이 재즈 연주인으로 소임을 다하며 지극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전화 통화조차도 상당히 어려웠는데, 수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우여곡절 끝에 그와 대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인터뷰에 응해 주신 정성조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성조님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는 등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준 사모님께도…

 

성장기, 음악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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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조 | 2002

Q: 먼저 태어나신 곳과 출생년도는?
– 1946년 서울생이예요.

Q: 이른바 명문고인 서울고등학교를 다니셨고 재학시절부터 재즈에 조예가 깊었으며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천재로 통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고 밴드부는 어떤 편성이었는지요? 김치스와 피닉스 등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미국 시애틀에서 블루스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계신 심형섭씨의 경우 배재고 밴드부 출신이라고 하시는데 40인조의 밴드곡을 자신이 편곡한 경험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 굉장히 숫자가 많았어요. 정확히 기억은 없는데, 40인조 이상이었을 거예요. 당시에 서울중학교 이사장이 이기붕씨였는데, 돈이 많은 학교여서 우리가 입학하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악기를 싹 수입해 왔어요. 그래서 악기는 제일 좋은 걸로 연습했죠.

Q: 음악 활동을 시작하실 때 영향을 준 분은 누구셨나요?
– 그때 화양(주: 미 8군 무대를 대상으로 하는 연예기획사)이 원효로에 있었는데, 우연히 밴드가 연습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음악을 직업적으로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말씀드리면, 김형찬씨란 분이 계셨는데,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했고 편곡도 잘하고 ‘샤프’한 분이었어요. 김형찬씨가 당시에 음악부장 같은 거였고, 나중에 그걸 물려받은 분이 정서봉씨죠. 아무튼 김형찬씨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음악을 하려면 필수적인 게 있다고 말씀하시고, 이교숙 선생님을 소개해 줬죠. 당시 우리 음악 환경은 무척 열악했었는데, 다행히 그분이 그런 작업을 해줬죠. 그분에게 1년 정도 음악이론과 작곡을 사사 받았습니다.

Q: 어떤 인터뷰를 보니 미 8군 무대에서 선생님이 색소폰을 부는 것을 보고, 한 흑인이 이런 것도 불 줄 아냐며 놀랐다는 일화가 있던데요.
그때 옆집에 악보도 잘 못 보는 아마추어 흑인 색소폰 주자가 살고 있었죠. 영어도 배울 겸 그 사람 집에 왔다 갔다 했어요. 당시 주간 잡지였던 [다운비트] 뒤에 악보가 있었는데, 내가 그걸 보고 부니까 그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런 일화고. 저에게 결정적인 사람은 데이비드 허드슨이라는 사람이죠. 당시에는 미국이 모병제를 실시해서 군악대에 음악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는 30세 기념으로 심포니를 쓰고 있다고 얘기했어요. 색소폰을 불던 유태계 백인 재즈 연주자였는데, 심포니와 무슨 관계가 있었겠어요. 당시 10대였던 나는 그 사람을 보고 자기가 하는 일 외에 좀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라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되었죠. 그와는 몇십 년 후에 미국에서 만났어요.

Q: 당시 즐겨 연주했던 레퍼토리는 어떤 것이었나요?
– 그건 기억이 없는데요. 하도 오래 된 일이라서. 재즈 계열이었고. 지금 젊은이들이야 많은 곡이 있겠지만, 당시는 레퍼토리가 별로 없었어요.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들을 만한 음악은 없다시피 했어요. 예를 들어 패티 김하고 무슨 시스터가 나와서 노래를 한다고 하면, 외국곡 번안해서 부르거나. 아니면 완전 뽕짝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탠더드한 것을 익히게 되었죠.

미8군 무대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 그리고 신중현, 길옥윤과의 만남

Q: 앞에 말씀드린 심형섭씨에 의하면 “당시 화양에는 재즈 테너 색스폰으로 존경받는 (고) 이정식씨란 밴드마스타가 계셨다. 이분한테 고등학교 교복차림으로 색스폰을 레슨받는 청년을 자주 보았는데 바로 나중에 재즈 메신저스라는 그룹을 하다가 현재 KBS 악단장을 하는 정성조란 친구였다”고 미 8군 시절에 대해 회고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시게 된 건 어떤 계기였는지요?
– 그때가 1964-5년인가 정확히 기억은 없는데, 월남전이 나고 월남 특수가 생겼어요. 그래서 위문단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막 빠져나가니 자리가 비니까 날 보고 그걸 하래요. 학생이고 전혀 경험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하냐고 그랬더니, 안 되면 할 수 없으니까 오디션이라도 보라고 해서, 다행히 다른 선배들이 잘 도와줘서 하게 되었죠. 그 당시 화양에는 쇼가 11단체가 있었어요. 하우스 밴드는 몇백 개 되고. 한 단체가 서른 명 정도 되죠. 악단 멤버가 10명, 11명이었고, 그 당시 우리 단체에 있던 가수가 나영수씨가 있었어요. 그리고 신중현씨도 거기 있었고 김대환씨는 잠깐 있다가 다른 사람으로 바꿨죠. 당시 드럼을 여러 번 바꿨어요. 나는 그곳에 몇 달 있지도 않았지만… 당시에는 음악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게, 당시에는 먹고 연습하는 거 밖에 없었어요, 미 군속 중에서 음악하던 사람들은 3개월에 한 번씩 오디션을 봤으니까. 연주가 안 되면 그냥 드롭(drop)이에요.

Q: 구체적으로 참여하셨던 쇼단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요? 그리고 정성조님이 맡은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 스프링 버라이어티(Spring Variety). 거기서 몇 달 있다가, 신중현씨랑 의기투합해서 유니버살로 가려고 했고 이정식씨가 나 대신 들어왔죠. 그런데 그건 성사되지 않았어요. 그때 악단장은 김영진님이라고 . 김영진이라고 트럼본 연주하는 분인데, KBS에 계셨다가 은퇴하신 지 오래된 분이예요. 그때는 그분들이 다 스타들이었으니까요.

Q: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미 8군 오디션 안 보시고 활동하시다가, 오디션보고 8군 정식 쇼단 들어가신 게 스프링 버라이어티쇼란 말씀이시군요. 그게 언제였는지 다시 여쭤 봐도 될까요?
– 그렇죠. 그게 고등학교 3학년때 말인데 그때 처음 직업 음악인이 된 거죠.

Q: 정성조님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닌데요, 당시 미 8군쇼에는 송민영씨가 이끌었던 토미 아리오 쇼, 베니 김(김영순)씨가 이끈 베니 쇼, 이봉조씨가 이끈 헐리우드 쇼, 강철, 최상용씨가 이끌고 최희준씨가 가수로 있었던 서머 타임 쇼, 김희갑씨가 이끈 A1(에이원) 쇼 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쇼가 정성조님이 하시던 쇼와 비슷한 것인가요?(주: 위 쇼단의 정보는 김희갑님에게서 들은 것이다. 김희갑과의 인터뷰는 11월 중순에 게재될 예정이다)
– 길옥윤 선생님이랑 일하기 전에 썸머 타임쇼의 최상영씨와 한 달 정도 같이 일했어요. 그리고 말씀한 쇼들 역시 제가 한 쇼와 비슷한 것이었죠. 한 단체에 가수도 서너명 되고, 무용수도 너댓명 되고, 악단도 열 몇명 되고, 조명도 있고 했으니까 버스에 꽉 차죠. 8군 쇼라는 게 미군 부대에서 부킹을 하는 건데, 예를 들어 의정부에서 ‘내달 몇 일’이라는 식으로 스케줄이 나와요. 우리는 월급을 받았지만 화양이라는 회사에서는 그 사람들하고 계약해서 하는 거죠. 한 번 쇼할 때는 몇백 달러를 받는 식으로 하죠. 쇼는 보통 한 시간 정도로 길지 않았어요. 그리고 쇼별로 오디션을 봐서 등급을 매기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음악적인 가치보다, 흥행 가치였죠.

Q: 신중현님을 만난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신중현님은 애드 훠(Add 4)를 결성할 무렵이었나요? 통상적으로 ‘신중현은 록, 정성조는 재즈’라고 알려져 있는데 함께 의기투합하신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 아뇨, 그 전이예요. 그룹 사운드라는 게 없을 때였으니까. 그때 미 8군에서 도너스 판에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 “Love Me Do” 같은 음악이 처음 나올 때죠. 앞에서 말한 스프링 버라이어티라는 팀에서 같이 일하고 있을 때 만난 건데, 그 양반이 당시 화양 앞에서 하숙을 했어요. 거기 맨 날 놀러가서 판도 듣고 했는데, 근데 똑똑한 건지 독한 건지. 연습할 거면 밤새고 해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신중현씨도 재즈를 상당히 좋아하셨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게 당시에도 그 양반이 얼마나 앞선 생각을 했냐면, 동요나 민요같은 것을 재즈로 편곡해서 음반을 내려고 했어요. 그때는 신중현씨를 잘 몰랐을 땐데. 어쨌거나 1960년대 그 당시에 그런 걸 생각했다는 게 대단하죠. 연탄 때는 방에서 살고, 라면도 없었죠. 그런데, 그때 벌써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물론 음반을 낸다는 얘기만 듣고 음반을 본 일은 없지만….

Q: 그럼 신중현씨와 하려던 일이 깨진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길옥윤씨와 함께 연주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건 언제죠?
– 신중현씨와 하려던 일이 깨지는 바람에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죠. 그런데 음악을 하려는 팔잔지, 길옥윤 선생님하고 계속 일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가 (고등학교) 졸업하시기 바로 직전, 대학교 들어가기 직전인데, 길옥윤 선생이 일본에서 막 오신 뒤 그분을 모시고 연주하는 바람에 10대 후반이 정신없이 지나갔죠. 미 8군 활동이 아니라 길 선생하고 아스토리아 호텔에서도 연주했고 ‘불루 룸’이라고, 국제호텔에서 오래 있었죠. 한 6-7년 있었죠.

Q: 그때 어떤 악기를 주로 연주하고 어떤 곡을 주로 연주했는지요?
– 길옥윤 선생이랑 같이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플루트. 피아노도 한동안 했어요. 피아노가 당시만 해도 구하기 힘들었고, 마땅한 사람이 없었죠. 그때는 싱어들이 박형준씨, 최희준씨같은 분들이니까 스탠더드 넘버들 해야 하는데 피아노 연주하는 사람들이 그런 곡들을 잘 못했죠. 색소폰은 거의 독학이고. 플루트도 독학으로 시작했다가 시립교향악단에 있던 테너 박인수씨 부인에게 한 두 달 배운 적이 있죠. TV에서 패티 김 쇼 같은 걸 했어요. 30분짜리 쇼였는데, 거기서 플루트를 불었어요. 솔로 연주도 하고… 그런데 그 분한테 가면 교본 첫 페이지 ‘도~” 이런 (초보적인) 걸 가르쳐 주더군요. 그 분이 처음에는 모르다가 TV를 보니 조금 아까 자기한테 배우러 왔던 사람이 그런 걸 연습하고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이해를 못했다고 그러더군요.

Q: 이후 신중현씨와 활동하신 적이 있는지요. 그때 신중현씨 관련 밴드들은 길어 봐야 일년 정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중에 1971년인가 [신중현 사운드]라는 음반을 냈던 신중현 캄보나, 신중현 오케스트라에서 정성조님이 멤버로 계셨다는 신문기사가 있던데요.
– 그분이 한 밴드에 애착을 갖거나 그러진 않을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 두죠. 신중현씨하고 그 다음에도 잠깐씩 몇 번 일은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저는 신중현 오케스트라는 하지 않은 것 같네요.

정성조와 메신저스, 오비스 캐빈의 왕자

메신저스: 왼쪽부터 최선배(trumpet) 유영수(drum) 조경수(bass & vocal) 정성조(Sax. Flute Wood Ins) 최병걸(singer) 변성용(organ) 장석웅(guitar & vocal)
사진 제공: 윈드버드 www.windbird.pe.kr 여운택 님

Q: 1968년도(2회) 전국 남녀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에 정성조의 밴드가 서울 음대 팀으로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강근식씨의 홍익 캄보가 1등을 했고, 정성조님이 속한 밴드가 2등을 했는데, 2등을 한 이유가 너무 잘해서 아마추어 같지 않다는 것이라고 하던데요. 구성은 트럼본, 색소폰, 피아노, 드럼, 베이스구요. 그때 멤버는 기억하시나요?
– 맞아요. 그때 TBC에서 개최한 대회가 있었어요. 멤버에 대한 정확히 기억은 없네요. 이석원이라고 그 친구는 지금 교장 선생님이죠.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음악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대학은 원래 1964년에 입학해야 하는데, 1966년도에 입학했어요. 아까 말했지만 일본에서 귀국한 길옥윤 선생님과 일하느라고 남들보다 대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갔어요. 한때는 대학을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도 안되겠다 싶어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들어갔죠.

Q: 메신저스를 대학교를 중퇴하고 결성하셨다고 하던데?
– 졸업은 못 했어요. 다닐 수가 없었죠. 적응이 안 되어서죠. 당시 ‘수요 연주’라는, 학생이 연주하는 학내 연주가 있었는데 거기에 반드시 참석을 해야 되었어요. 한 번만 결석을 해도 학점이 나오지 않고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었죠. 나중에 담당 교수님이 ‘왜 그때 형편을 봐 달라’고 얘기를 안 했냐고 하시던데, 그때는 얘기를 해 봤자 통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그때 철 없던 생각에 그런 건 우스웠죠. 그때 나는 돈을 잘 벌어서 당시 전임강사라도 내 수입의 5분의 1도 안 되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때 일(대학 중퇴한 것)에 대해 아쉬운 면이 있죠.

Q: 메신저스를 결성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였나요? 그 외에 미 8군 무대에서 나와서 연주인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 메신저스는 미 8군 무대에서 나와서 한참 있다가 만들었죠. 미 8군에는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한 8개월, 9개월? 아무튼 1년도 못 있었던 건 확실하고. 한동안 김용세씨하고 연주를 같이 했었죠.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지금은 이민가셨지만, 이 분이 피아노를 아주 독보적으로 잘 하셨어요. 당시 다른 팀들과는 비교가 안 됐어요. 그리고 길옥윤 선생하고 연주를 하면서 KBS가 남산에 있을 때 거기 악단원으로 몇 달 정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TBC에 이봉조씨가 계실 때 TBC 악단원으로 갔어요. 그때는 TBC에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이 많았었죠. 그러다가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있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메신저스를 만들었으니까 1972-3년경이 되겠군요.

Q: [일간스포츠] 1972년 11월 5일자 ‘새 그룹’ 기사에 메신저스가 소개되었는데 그 기사에는 ‘최선배, 신관웅 등’이라고만 되어 있고 나머지 멤버가 안나왔더라구요.
– 아, 그래요? 그때 멤버에는 트럼본이 없었어요. 최병걸, 조경수도 없었고. 베이스 기타는 조원익이었는데 (조)원익이는 이장희와 (서울고) 동기고 내 후배들이죠. 내 동기 중에는 최인호, 이장호가 있고. 이장희와 조원익은 우리보다 조금 아래죠. 초기에 기타는 장석웅이었고, 이범희도 잠깐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네요. 최병걸과 조경수는 얼마 있다가 금방 들어오게 됐어요. 최병걸이 아깝게 일찍 죽었지만 노래를 정말 잘 했어요. 그때만 해도 인기가 있는 그룹은 보통 두 군데에서 연주했어요. 그러면 수입이 두 배가 되니까… 그래서 쉬는 시간에 다른 데 가서 또 연주하고 그랬는데, 예를 들어 오비스 캐빈하고 그 바로 옆 로얄 호텔에서 연주하고 그랬죠. 그런데 보통 싱어들은 밤새워 4시까지 일하면 하루에 한 50곡, 아니 70-80곡씩 불렀죠. 그런데 최병걸은 목 쉬는 걸 못 봤어요. 비지스 노래같은 팝송같은 걸 몇십 곡씩, 아니 한 백 곡까지도 불렀는데… 요즘 가수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Q: 당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시도한 경우는 (차영수가 이끈) 파이오니아스나 (최이철이 이끈) 서울 나그네(뒤의 사랑과 평화), (신병하가 이끈) 사계절 등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렇지만 메신저스와는 약간 다른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브래스 록이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 시카고, 산타나 등과 비슷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는데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요. 아울러 언제부터 전기 기타를 도입하셨는지요.
– 처음부터 기타, 키보드 같은 전기 악기가 있었죠. 주로 시카고나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를 연주했구요. 말씀하신 대로 메신저스는 재즈 캄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일렉트릭 밴드였던 거죠. 브라스가 많이 나오지만 말씀하신 파이오니아스, 트리퍼스와는 조금 다른 것 같네요. 사계절은 우리 인터미션 팀이었는데, 우리가 그만둘 무렵에 들어 왔던 것 같네요.

Q: 그럼 오비스 캐빈 무대에 굉장히 오래 선 셈이네요. 그 당시는 전속계약 같은 그런 관계였나요?
– 그런 거라기보다는, 옛날에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오래 같이 연주를 했기 때문이예요. 본인이 싫다고 하기 전엔 계속하죠. 그래서 음악생활을 오래했어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없어요. 오비스 캐빈이라는 데는 당시 젊은이들의 총집합소였죠. 요즘이야 서울이 너무 커졌고 대학가 앞에 가면 대단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서 그저 ‘명동 가자’니까. 그저 거기서도 호프 한잔 먹는 게 전부지. TV를 봐도 흑백 화면이었고 [여로](당시의 인기 드라마)나 나오지 뭐 볼 게 있습니까. 그때만 해도 다들 기타 하나씩 메고 다녔고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고 그랬고… 그런데 난 기타를 못 칩니다. 간첩이죠(일동 웃음)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Q: 저희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메신저스라는 이름의 독집 앨범은 본 일이 없습니다(혹시 메신저스 독집 앨범이 있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 [월간팝송] 같은 잡지에서 매달 게재하던 인기 그룹 순위에서 메신저스는 5위권 안에 들었던 걸 본 일이 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록 밴드 앞에서 정성조가 플룻을 부는 사진도 함께 실렸던 것 같습니다.
– 오비스 캐빈 때는 아주 수입이 좋았어요. 그룹 활동 외에도 영화음악을 많이 했었고. 빅 밴드나 라지 앙상블(large ensemble) 편곡에 관심이 많았죠. 메신저스 하면서 내 개인 활동에 바빴기 때문에, 이 그룹으로 음반을 발표한다든가, 가요를 발표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우스운 일화가 하나 있어요.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할 때 별표 전축인가 독수리표 전축인가하는 곳에서 CF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제일 처음이나 마찬가지네요 1970년대 초니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메신저스가) 연주하는게 멋있는데, 내일 사진 좀 찍게 일찍 좀 나올 수 없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그런데 사진을 찍어서 그 전축 선전을 [일간 스포츠] 하단 전체에, 한 6개월인가 1년을 매일 냈어요. 그 당시에는 그런 걸 해서 돈을 받는다든가 무슨 계약을 한다던가 초상권이라든가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말하자면 연주는 (생계를 위한) 직업이었는데, 그때 하루 일과는 당시는 낮에는 낮대로 영화음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고, 밤에는 현충일 빼고는 매일 일했죠. 그래서 연습은 뭐 거의 못했죠. 그런 게 참 아쉬워요. 사실 그런 세월을 잘 보냈어야 하는데, 낭비라고 할까. 당시에는 내 딴엔 열심히 살라고 살았는데… 직장이 몇 갭니까. 낮에도 일하고 밤에 한 두 군데 일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걸 좀 줄이고 다른 일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Q: 메신저스는 언제까지 하신 건가요? 신문 기사에 1975년 8월 29일에 해체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더라구요.
– 중간에 멤버 몇 명과 좀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해산을 한 적이 있는데 한 6개월 후 다시 했죠. 요즘은 사고 방식이 달라졌겠지만 옛날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몇 년씩 같이 하는 거니까. 메신저스는 1980년 1월경에 내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 계속 했죠. 그 다음에도 계속 메신저스라 그랬나 모르겠지만.

Q: 그때 오비스 캐빈 말고 춤추는 나이트클럽에서도 연주하셨나요? 그리고 당시 친하게 지내셨던 밴드는 누구였나요?
– 아까 말한 것처럼 로얄 호텔이라고 오비스 캐빈 앞에 길 건너에 있는 곳에서 했죠. 그때는 고고 클럽이라고 했죠. 그 당시에는 오비스 캐빈에 같이 있던 히 식스하고 친했는데, 그 외에는 별로 친한 그룹이 없었네요. 맨날 일해야 하니까, 친해질 시간도 없었죠.

Q: 메신저가 연주하던 음악은 ‘재즈에 영향을 받은 록 음악’이라고 볼 수 있나요? 스틸리 댄(Steely Dan) 같은 음악도 연주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 네, 그렇죠. 그 친구들도 아주 음악성 있죠. 내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록이라는 것도 하나의 완성된 장르지만, 그 뿌리는 재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룹 사운드 할 때는 내가 별로 할 일이 없었죠. 그저 편곡이나 하고 연습이나 시키는 거였지, 악기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메신저스가 그런 거(재즈 록)를 하려고 하면서도, 직장이니까 거기에 맞게 해야 했죠. 또 사람들을 춤추게 할 때는 춤에 맞게끔 연주해야 했죠. 그러니 록 음악을 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죠. 누구 말마따나 어떤 음악을 하든 음악을 해서 생활할 수 있다는 건 신에게 선택된 복이죠.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죠.

포크 록의 산파
20021029120711-0420interview03_kimMinkiQ: 레코딩에 참여하거나 편곡했던 음반, 주로 포크나 포크 록 관련 음반들에 대해 좀 여쭤 보겠습니다. 이 음반에 참여하신 게 재즈적인 편곡하고 통기타하고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하신 건가요?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재즈라는 게 그런 거하고 관계 없어요. 그냥 음악이죠. 내가 포크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포크가 굉장히 유행이었잖아요. 당시에는 거의 포크가 중심이었죠. 포크 가수들 음반 녹음할 때 가수들하고 부딪친다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왜냐면 포크라도 음악적으로 현악기나, 플루트라든가 그런 반주는 마찬가지니까. 대신 (통기타 포크 뮤지션은) 기타 아마추어라고 할까. 그러니까 자신들의 음악에는 자기 기타가 잘 맞는데, 우리같은 제3자랑 같이 할 때는 안 맞는 면이 있었죠.

Q: 그러면 김민기, 양희은, 한 대수, 쉐그린 등의 음반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요즘 말로 음반 제작자가 누구였는지요?
– 그때 CBS 라디오에 김진성씨라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왕초였죠. 최경식씨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그 양반하고 많은 교류가 있었어요. 그래서 김민기 등과 녹음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최경식씨, 김진성씨랑은 방송 왔다갔다 하면서 알게 되었죠. 굉장히 가까웠어요. 그리고 또 그분들이 (오비스 캐빈에) 자주 오시고. 최경식씨는 우리보다 한참 위이시지만 사람이 상당히 앞서간 사람이죠.

Q: 구체적으로 김민기, 양희은 음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거기 참여한 강근식씨나 다른 연주자분들과의 친분은 어떠셨나요?
– 그 음반들은 김민기씨나 양희은씨 측에서 해 달라고 요청한 거죠. 최경식씨가 기획했는데 그 양반이 나중에 정보부 가서 혼도 나고 그랬다고 그러대요. 그리고 그때 드럼은 유영수씨가 했고. 강근식과도 친했죠.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나는 내 자신의 음악을 상업적으로 음반을 내서 팔아먹거나 아니면 히트되게끔 하는 건 생각을 못 했어요.

Q: 쉐그린 음반을 보면 관현악 사운드가 들어가는데, 연주했던 분들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 예, 그 분들은 세션맨들이었으니까.

Q: 한대수씨의 1974년 음반에는 메신저스 멤버들이 참여하신 것 같습니다. 음반 표지 뒷면에 조경수씨의 이름이 보이는데요.
– 네. 그때 아마 조경수가 있었을 거예요. 세 명이 참여한 것 같습니다.

Q: 아도니스(호와 섭)의 음반에는 ‘정성조 제1 작곡집’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 그건 작곡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노래 쓴다고 맨날 술먹고 합숙도 하고 그랬는데, 잘은 기억 안나는데요.

Q: 그럼 편곡은 미리 해 가지고 가서 하신 건가요? 아니면 플루트가 들어가는 곡이다 그러면 즉석에서 연주만 하신 건가요? 또 그럴 경우 가수랑 그때 그때 협의를 하셔서 하신 건가요? 아니면…
– 아, 편곡은 미리 해 가야죠. 전체를 다 해야 되겠구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전문적이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들의 바램대로 협의하고 자꾸 들어주기는 어려웠죠.

Q: 플루트 연주의 경우 김민기씨의 음반에서는 전면에 부상되어 있는데, 같은 곡인데 한대수씨 음반에서는 뒤에 물러나 있고 아스라하게 들리거든요. 이런 것도 녹음과 관련되서 본인이 직접 개입하신 건가요.
–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그건 가수의 취향 문제겠죠. A라는 가수는 이런 걸 좋아한다든가, B라는 가수는 그런 건 관계없다든가 이런 식이니까 그것에 맞추어서 한 것이죠.

Q: 당시 음반 녹음은 2채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스튜디오가 어디였는지 녹음 기간은 얼마였는지 기억나시는대로 부탁드립니다. 보통 하루에 녹음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 그땐 다 2채널 녹음이었죠. 그땐 스튜디오가 몇 개 되지 않았죠. 장충동 스튜디오나 서울 스튜디오…마장동 스튜디오에서도 가끔 했죠. 그리고 나는 비교적 녹음을 빨리 하는 편이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 스튜디오 한 달씩 잡아 놓고 그러는데, 우린 그렇게 못 했죠. 또 그렇게 비용을 많이 지출할 수도 없고.

Q: 그러면 예를 들어 가수는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 등이지만 음악감독은 정성조님이 담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요? 당시 프로듀서 개념은 별로 없었지만 엔지니어가 ‘기사’에 지나지 않았다면 정성조님이 ‘뮤직 프로듀서’였던 셈이신가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김민기는 기타를 참 잘 쳤어요. 클래식 기타를… 사실 그 당시에 기타로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걸 못 느꼈거든요? 근데 그런 걸 하더라구요. 기타 소리가 아주 아름다웠죠.

Q: 방금 말씀드린 김민기, 양희은, 한 대수의 음반들은 혹자에 따라서는 ‘시대의 명반’이다는 말을 하는데, 정성조님의 지금 말씀은 “난 그냥 했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데요(웃음).
– 아, 그건 내가 그렇게 신중하거나 심각하거나 역사의 한 획을 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노래 쓰는데 소질도 없고, 사람이 음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남이 만든 걸 재창조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고, 또 내가 만들기 이전에 너무나 훌륭한 음악이 많으니까. 그것까지는 내가 양보해야죠.

Q: 그렇다면 발표하신 음반들의 성과에 대해서는 얼마나 만족하시는 편이신가요?
– 글쎄요. 만족이라기보다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노래 쓰는 걸 중요하게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하게 되면 하고. 예를 들어 영화에서 노래를 집어 넣어달라고 몸살을 떨면 할 수 없이 쓰는 거고… 그래서 영화음악 경우는 가급적이면 인스트루멘탈로 갔죠.

영화음악, 유학생활 그리고 그 후
Q: (영화음악 작품 리스트를 보여주며) 정성조님이 참여한 게 굉장히 많은데요, 한 80편 되는 것 같습니다
– (리스트를 보며) 무지하게 많네요.(웃음)
[어제 내린 비] 사운드트랙 음반
Q: [어제 내린 비]가 영화음악으로 첫 작품인가요?
– 그 전에 뭘 하나 했는데… 지금 잘 기억나지 않네요.

Q: 영화음악 작업을 이렇게 많이 하신 건, 아까 말씀한 ‘모던’한 사운드를 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나요?
– 난 이렇게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그러잖아요? 사후 100년 후에라도 자기가 쓴 음악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사후 100년이 아니라 사후 100시간 후에 내가 쓴 음악이 아무리 각광을 받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내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 내가 쓴 음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게 오히려 더 가치가 있는 것이죠. 대가 차원이 아니라… 노래 반주 아니면 녹음할 게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어떤 음악을 만들고 내 취향대로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게 영화음악이었죠.

Q: 정성조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진짜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어떨 때는 새로운 거 듣고 싶어서 연주회에 종종 가요. 예를 들어 오늘 KBS에서 연주회 있다고 그러면 공짜니까 가보죠. 그런데 그래서 가 보면 맨날 레퍼토리가 그게 그거에요. 첼로 콘체르토 연주하면 하이든 작품은 어쩌다 한번 하고, 드보르작 A 마이너 아니면… 정말 레퍼토리가 몇 개 안 되요. 여태까지 첼로란 악기가 수백 년은 되었고 역사에 남는 작곡가들이 작곡한 것도 많을 텐데 도대체 왜 그것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새로운 것, 어려운 것, 남이 안하는 것, 이런 신기한 것을 하고 싶어도, 소위 말해서 청중이나, 대중이나, 아니면 그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은 또 그걸 하라고 그래서 결국은 그걸 하게 되요. 그게 참 아쉬운 점이죠. 그래서. ‘다른 레퍼토리를 좀 하지, 멋 있는게 있는데 말야’하면 열 명이면 아홉 명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거든요.

Q: 그런 아쉬운 점이 유학 같은 데 다녀오시면서 좀 해소가 되셨나요?
– 내가 다녀온 유학은 지금 생각하는 유학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보스톤 버클리의 프로페셔널 뮤직을 공부했죠. 요번 구정에 가보니까, 한국 애들이 150명, 200명이 있더라구. 사립학교라 등록금이 엄청 비싸요. 나도 일말의 책임은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때는 [다운비트]란 잡지와 AFKN에서 듣는 음악이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였어요. 판(음반) 하나 구하려면 남대문 뒷골목을 몇 시간, 몇 일 뒤져야 겨우 하나 찾고…. [다운비트]란 잡지가 당시 우리나라에 왜 그렇게 통용되었느냐하면…미군들 장병 휴게소 같은 거 있죠? 거기에는 요즘 은행처럼 심심풀이로 보라고 잡지들을 쌓아 둬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휴지로 팔죠. 그럼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별 거 다 있었죠. 그런 게 남대문이나 명동까지 흘러 들어온 거죠. 그때 책값이 3백원인가. 추운 데 길에 서서 몇 날 몇 시간이고 뒤져보는 거죠. 그런데 거기 학교 선전이 나와요. 스타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인지 그 학교가 장사를 잘 해요. 10대 때부터 내가 꼭 이 학교를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었요. 그런데 1979년 1월인가…길옥윤 선생하고 이미자씨, 후라이 보이 곽규석씨 등과 교포 위문차 미국 일주를 했어요. 그때 한 달 동안 미국을 쫙 돌다가, ‘아 내가 여기 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힌거죠. 그래서 메신저스를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1년 동안 준비해서 끝내고 유학을 갔죠.

Q: 저희가 과문한 탓에 유학 생활을 다녀온 뒤 어떻게 지내셨는지 간단히 여쭤보고 싶습니다.
– 1979년에 유학 갔다가 1983년에 귀국했고 1988년부터 서울예전에 나갔죠. 그 사이에는 영화음악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내 직업이 영화음악, 뮤지컬 등 편곡자였죠.

Q: KBS 관현악단장을 맡으신 건 어떤 곳에는 1993년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곳에는 1995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또 악단장으로 계시는 게 좋은 점은 어떤 점이 있으신가요?
– 지금 8년째인데 그러면 1994년인가요? 그 전에는 김강섭씨가 했죠. 여기 올 때 친구 한 명이 제발 서울예전에 그냥 있으라고, 왜 65세까지 보장된 직장을 버리냐고(좌중 웃음), 거기는 정치 바람이 세서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 하면 사장도 막 바뀌는 덴데 여길 왜 오냐고, 정신 차리라고들 했죠. 그것도 그렇고 처음 왔을 때는 (출장이) 너무 많아서 진짜 쓰러지는 줄 알았죠. 요즘은 지방에 별로 안 가는 편이예요. 좋은 점이요? 많죠. 우선 내가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는데 그게 단 1분짜리가 되더라도 그걸 내가 사람들 돈 줘가면서 하려면 그건 불가능하죠. 즉, 음악적 실험이 가능하죠. 그러니까 가수들이 내가 편곡하는 걸 싫어하죠. 새로운 게 가끔 나오니까. 그러면 판(음반)대로 해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Q: ‘코리아 슈퍼 세션’을 하셨다던데 그것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 아.. 그건 한번 녹음해달라 그래서 녹음해준 적 있어요. 말 그대로 1회성 프로젝트, 여러 사람들이 한 곡씩 하는 것이라서 했었죠.

Q: 후배 음악인들에게 말씀해 주실 게 많을 것 같습니다
– 아, OK죠. 후배 음악인들은 지금 너무 여건이 좋죠. 지금 mp3, 인터넷 등에 교재도 없는 게 없죠. 그런데 노력을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들(정중화)도 음악을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어디 그런가요? 노인들은 다 그렇게 말하겠지만(웃음). 컴퓨터는 발전하는데 사람이 발전을 안 해요. 사람이 발전해야지.

Q: 요즘은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세요?
– 비밥이죠.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거 외에는 음악이 아니죠(웃음).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음악적 방향이나, 하시는 작업 같은 것 좀 말씀해주시죠.
– 제일 원하는 건 연주인이예요. 연주인으로서 만족하고 싶어요. 또 내가 하다 못해 지금의 위치로 온 것도 연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일을 해도 역시 연주를 포기하지 않고 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딴 사람들은 다른 일 좀 하다 보면 연주를 포기해 버리더라고. 그래서 나는 내가 굉장히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난 미련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도 연습하고 싶고, 연주인이고 싶고 그래요. 지금도 1주일에 한번씩 ‘올 댓 재즈’에서 연주합니다. 18년쯤 됐나? 아마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이 18년 동안 한다는 게 기네스북 감이 아닐까(웃음). 기네스북에 올라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Q: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연주인이자 지휘자로서 계속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 예, 언제 한번 올 댓 재즈에 음악 들으러 오시죠. 200201023 | 최지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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