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 소울·싸이키에 ‘도전’하여 ‘각축’을 벌이다?

20021019102943-folk01_cestsibon1세시봉. 한국 포크 혹은 통기타 음악의 요람(사진제공: www.windbird.pe.kr 여운택님)

1970년대 전반기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청년의 취향을 대변한 음악이 대체로 ‘포크’라고 불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단 ‘음반’의 측면에서 살펴 보자. 1970년 송창식과 윤형주로 구성된 트윈 폴리오의 독집 음반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이들은 아쉽게도 음반 발표 직후 해산되었지만, 1971-3년 경에는 김세환, 김민기, 서유석, 이장희 등의 남성 솔로 가수, 양희은, 은희, 이연실 등의 여성 솔로 가수,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 원 플러스 원 등의 혼성 듀엣, 쉐그린, 4월과 5월, 어니언스 같은 남성 듀엣의 음반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물론 송창식과 윤형주도 솔로 가수의 경력을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포크는 소리 소문 없이 대중음악계에서 자신의 지분을 넓혀갔다. 급기야 1973년 말 – 1974년 초 이장희의 3집 음반(“그건 너” 등 수록)과 어니언스의 첫 독집 음반(“편지” 등 수록) 등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포크는 단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 즉 ‘잘 팔리기도 하는 음악’이 되었다. 주)

이장희 – 그건 너(1973)
어니언스 – 편지(1974)

주) 여기서 ‘한국 포크’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은 깊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포크라는 용어의 ‘한국식 전용’에 대해서는 최근 송창식이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적확하게 진단한 것을 인용하면서 설명을 대신한다. 간단히 말해서 ‘포크’란 ‘folk’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번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포크의 본격적 출발이 ‘번안곡’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다소 과도한 비유일지 몰라도 ‘가든’이 ‘garden’과 다르고, ‘빌라’가 ‘villa’가 다른 것처럼 ‘포크’는 ‘folk’와 다르다. 따라서 ‘포크’라는 말이 혼동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반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도 당분간은 이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노파심에서 첨언하면 우리도 ‘한국 포크’는 ‘영미 (모던) 포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설명은 너무 소략할 뿐더러 ‘현장’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충분하다. 1963년 이래 무교동과 명동에 소재한 세시봉, 디쉐네, 심지다방(오비스 캐빈의 전신), 금수강산 같은 ‘음악감상실’의 간이 무대에서 연주되던 시기를 빼놓는다면 ‘알맹이’도 없는 설명이다. 이들 음악감상실에서 어쿠스틱 기타 한두 대와 함께 연주하는 노래 소리는 당시로서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고 기록된다. 화음을 맞추어 듀엣으로 청아한 노래를 부른 트윈 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 장발을 휘날리면서 자유분방하게 자작곡을 불렀던 한대수, ‘음치’에 가까운 목소리지만 진실된 감정을 외쳐대던 이장희, 털털한 목소리로 사회풍자의 메시지를 전달한 서유석, 구전민요를 발굴하고 ‘프로테스트 포크’를 번안해서 부른 양병집(누락한 분들게 사죄를 표한다) 등이 당시 ‘청년문화의 주역’이었고, 이들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공동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임을 만들어 나갔다는 사실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책으로 한 권 정도는 써야 조금이나마 만족스러울 것이다. 1970년부터 1971년 여기저기서 열렸던 ‘포크 페스티벌’들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1973년 이후의 현상은 더 복잡하고 광범해서 개별 인물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포크 음반은 봇물처럼 쏟아졌고, 개중에는 독집 음반뿐만 아니라 ‘영 패밀리’, ‘영 페스티벌’,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골든 포크 앨범’, ‘국내 6대 포크 싱어들의 대향연’ 등의 이름을 단 컴필레이션 시리즈도 소장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대중음악으로서의 포크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은 솔로 경력을 걸어 가던 가던 송창식이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왜 불러”를 통해 1975년 MBC TV의 ‘가수왕’으로 선정되면서 ‘국민가수’급으로 부상한 사건일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는 ‘진짜 포크냐 아니냐’라는 식의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통기타 포크’로 출발한 음악과 음악인이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비슷한 시점인 1975년 12월 이른바 ‘대마초 사건’으로 이상의 모든 과정이 무효화되었다는 또하나의 사실도 있다.

송창식 – 한번쯤(1974)
송창식 – 왜 불러(1975)

그건 그렇고…그룹 사운드를 중심으로 1960-70년대 록 음악의 전개를 다루는 이 시리즈에서 왜 ‘포크’를 다루는 것인지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한국에서 포크는 록이 아니고, 록은 포크가 아니다. 그러니 ‘포크 따로, 록 따로’ 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한국의 포크와 무관하지 않은 스타일의 음악이 ‘록 음악’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내고 항의해 보았자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관행을 거스르기는 힘들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 위에서 ‘아니다’라는 표현을 ‘다르다’로 바꿔 보기로 하자. 한국에서 포크와 록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다른 것일까.

먼저 ‘씬(scene)’이 다르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그룹 사운드’는 미 8군 무대의 ‘쇼단’과 기지촌 클럽의 ‘하우스 밴드’에 젖줄을 대고 있었던 반면, ‘포크송'(당시의 표기법으로는 ‘폭송’ 혹은 ‘훡송’)은 서울의 도심, 이른바 ‘다운타운’의 음악감상실의 간이 무대가 자신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그룹 사운드와 포크송 가수는 ‘출신 성분’이나 인맥이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조금 더 경직되게 사고한다면, 포크송은 한국 문화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인 반면, 그룹 사운드는 미국 문화(심지어 ‘미군 문화’)로부터 간접적으로 파생된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악기’와 ‘편곡’이 다르다. 주지하듯 포크송은 어쿠스틱 기타와 불가분하고, 그룹 사운드는 전기 기타(통 없는 기타)와 불가분하다. 실제로 이런 차이는 두 장르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는 ‘통을 울리는 맑은 소리’인 반면, 전기 기타의 소리는 ‘전기증폭을 통한 찌그러진 울림…. 인위적이고 금속적인 느낌’이라는 대비가 그것이다(이영미(1998), [한국 대중가요사], p. 264).

세 번째로 포크송 가수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의 지향이 강했던 반면, 그룹 사운드는 외국 곡을 커버(혹은 카피)하고 모방하고 자작곡을 만드려는 의지가 상대적으로 희박했다는 차이도 종종 거론된다. 일부의 편견이겠지만 그룹 사운드 멤버들은 ‘양아치’인 반면, 포크송 가수는 ‘지성인’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을 가진 경우도 있고, 거기에 학벌주의까지 가세하여 이분법을 강화하기도 한다. ‘명문고, 명문대…’ 운운하는 견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들은 ‘팩트’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방금 지적한 점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팩트’를 확인해 보자. 1970년대 초까지는 포크송도 그룹 사운드도 팝송을 번안한 것 중심이었고, 창작곡이라고 하더라도 자작곡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또한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모두 기타 연주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관현악과 ‘전자 올갠’ 중심의 ‘경음악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달랐다. 즉,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사이의 차이는, 양자들 더한 음악과 다른 음악(대체로 트로트와 신민요) 사이의 차이에 비한다면 훨씬 작았다. 한국의 포크송 가수들이 일렉트릭 기타를 의도적으로 터부시하여 음반과 공연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룹 사운드가 어쿠스틱 기타를 ‘시시하다’고 생각하여 손 대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출신성분과 인맥은? 이 점도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광의의’ 포크 계열로 간주되는 인물들 중 조영남, 이필원, 김도향, 조동진, 임창제, 전언수, 이태원, 오세은 등은 미 8군 무대와 연관된 씬에서 그룹의 멤버로 음악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들의 그룹 사운드 경력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들이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이필원은 미 8군 무대 등지에서 코멧츠, 타이거스, 미도파스 등의 멤버로 활동했고 1969년 ‘플레이보이배 쟁탈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타이거스를 이끌고 “미련”으로 출전해 가수상을 수상했고(참고로 1970년에는 연석원, 1971년에는 조용필(!)이 각각 가수왕을 수상했다), 전언수와 이태원은 ‘소울 가수’로 불리던 황규현 그리고 조동진 등과 함께 5인조 그룹 더 셰그린에서 활동하다가 뒤에는 미도파스에서 이필원과 함께 있었고, 오세은 역시 메가톤스와 영 바이블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이태원의 미군 클럽에서 그룹 사운드 경력을 쌓았고 등등…. 이들이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했던 사실을 숨기거나 그때 일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차중광 – 내 사랑아(이필원 작곡 및 기타 연주)(1969)
메가톤스 – 징글벨(1971)

한편 1970년대 초 결성된 신예 그룹 사운드의 경우는 미 8군 무대를 거치기는 했어도 1960년대부터 경력을 시작한 선배들에 비하면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았고 ‘고생’한 정도도 작았다. 한 예로 장계현은 [주간경향]이 주최한 ‘전국 아마추어 포크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뒤(2등은 홍민, 3등은 유승엽이었다고 한다) 그룹 사운드 템페스트의 보컬로 가담한 경우다. 한편 1970년대 중반 대표적인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이자 동방의 빛을 이끈 강근식의 경우는 미 8군 무대와 연관된 그룹 사운드를 거치지 않았지만 ‘한두 다리만 건너면’ 미 8군 출신의 음악인들과 연결된다(이때 ‘한두 다리’는 그의 대학교 후배들인 히 식스의 조용남 그리고 방금 언급한 템페스트의 장계현이다. ‘홍익 캄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초 포크로 분류되는 음악인들과 그룹 사운드로 분류되는 음악인들 사이에 이렇게 칼로 무 자르는 식의 구분은 미약하다. 방금 언급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는 현재 우리가 포크로 분류하는 음악인들과 그룹 사운드로 분류하는 음악인들이 같은 무대에 섰다. 1971년의 청평 페스티벌이나 그 뒤의 남이섬 송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들 모두 음악 동료였어요”라는 김홍탁의 언급이나,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의 구분은 “그게 잘못이죠. 그건 참 잘못이에요”라는 신중현의 언급을 ‘유도심문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려 볼 수 있다. 포크와 록(그때 용어로 ‘사이키’)은 서로 다른 씬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라도 양자 사이에 ‘대립’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음악을 직접 만들고 연주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포크와 록 사이의 이분법은 미디어에서 표상된 모습이나 수용자의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크와 록의 두 진영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한데 어우러져 지냈다는 증언과는 달리 미디어의 보도는 두 진영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려는 모습이 관찰된다. 지난 호에도 이와 관련된 몇 개의 기사를 언급했지만 하나만 더 언급해 보자. 1970년 9월 4일부터 서울 시민회관에서 4일간 열리는 ‘후트네니 고고고’라는 페스티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주간경향]의 그해 9월 9일자 기사다. 기사의 내용은 편향되어 있지 않다.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이 행사는 포크 음악을 주된 초점으로 하고 있고, 기사는 ‘포크 뮤직의 토착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포크 제전”이라는 이 행사에는 신중현과 퀘스쳔스와 박인수, 김추자, 히 식스, 쥰 시스터즈, 데블스, 연석원, 라스트 챤스 등 그룹 사운드 계열도 참가한다고 보도하고 있고 이들은 “전자 사운드로 이지 리스닝 계열과 각축을 벌일 것이다”라고 써 있다. 이지 리스닝이란 무엇일까? 기사 말미에는 포크를 “시정 있으며 미국 대학가에서도 가장 격 높은 유행 음악 형태로 알려진 포크 뮤직을 중심으로 한 이지 리스닝 계열”이라고 밝혀져 있다. 포크를 ‘이지 리스닝’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나 (포크와 소울·싸이키의) “각축”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점도 기사의 제목에 비하면 완곡한 편이다. 커다란 글씨로 쓰인 기사 제목이 “소울·싸이키에 도전하는 포크 뮤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데스크에서 정한 제목이리라…

20021019102943-folk02_weeklykyounghyang_700909[주간경향] 1970. 9. 9. 기사. 한국 최초의 포크 제전이라는 ‘후트네니 고고고’에 대한 기사

이제 이 글의 의도를 밝혀야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생적이고 공동체적인 음악적·문화적 실천으로서의 포크가 아니라 ‘직업적 대중음악의 하나로서 포크’다. 포크가 ‘대중음악’으로 부상하면서 방송 출연이나 음반 제작 같은 직업적 음악인의 실천과 만나는 양상이 우리의 관심이다. 즉, 음반을 제작하고 공연을 하면서 보다 많은 ‘대중’과 만나면서 아마추어로 출발한 ‘포크 싱어'(혹은 포크송 가수)와 그룹 사운드 출신의 직업적 음악인과의 만남은 불가피했고 그 과정에서 복잡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이 글을 쓰기 직전 내린 우리의 잠정적 결론이다.

여기서 ‘그룹 사운드 출신’이란 대체로 미 8군 무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씬에서 연주인으로 경력을 다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하의 글들은 ‘가수’가 아니라 작곡자, 편곡자, 연주인에 촛점을 둘 것이고, 노래를 부른 사람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거나 배치(arrangement)한 사람에 촛점을 둘 것이다. 물론 포크 씬이나 포크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즉, 이 글은 포크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하나의 비전(秘典)이다. 주)

주) ‘포크’의 전개에 대해서는 김형찬의 학위논문 [한국 초기 통기타 음악의 사적 연구: 1975년까지 사회사적 흐름과 작가를 중심으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2002.2)를 참고하라. 이 논문은 한마디로 ‘놀랍다’. 이 논문의 완본(完本)은 내년 중 발표될 예정이라고 한다. 단, 여기서 그는 ‘포크’라는 용어의 모호성을 지적하면서 ‘통기타 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직업적 작편곡가, 아마추어 포크 가수들과 만나다: 김인배, 홍현걸 그리고 또…

먼저 1969년부터 1971년 사이에 발표된 대표적 포크 음반을 들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는 이 기간 동안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골라 본 네 종의 음반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는 ‘샘플’로 골라본 것일 뿐이며 정확한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1) 트윈 폴리오·펄 시스터즈 외 [아이 러브 유(I Love You)](지구, JL 120329, 1969. 6.)
2) 트윈 폴리오 [축제의 밤/고별: 트윈 폴리오 리싸이틀](지구, JLS 120372, 1970.1)
3) 뚜아 에 무아 [뚜아 에 무아 히트 앨범 제 1집] (그랜드, GH-00004, 1970.7)
(및 뚜아 에 무아 [뚜아 에 무아 히트 앨범 제 2집] (그랜드, GH-00014, 1971.8))
4) 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유니버어살, KLS-26, 1971.9)
5) 김민기 [아하 누가 그렇게/길] (대도, EU-716, 1971.10)

20021019102943-folk03_kiminbae트윈 폴리오·펄 시스터즈 외 [아이 러브 유(I Love You)]에 실린 김인배의 사진

1)의 음반은 트윈 폴리오의 독집이 아니라 펄 시스터즈 등과 함께 섞인 ‘옴니버스 음반’이다. 그런데 트윈 폴리오와 펄 시스터즈는 지금 생각으로는 짝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그룹의 구성으로는 동성(同性)으로 이루어진 듀엣이라는 점이 공통적일 뿐 음악 스타일이나 가창 방법 등의 차이는 음반을 함께 낼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눈에 띄는 글귀는 ‘김인배 작편곡집’이라는 음반의 부제다. 김인배는 트럼펫 연주자로서 미 8군 무대에서의 경력을 거쳐 KBS 악단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렇게 직업적 연주인이자 작편곡가가 음반 제작을 총괄하는 시스템(당시의 작편곡가는 요즘의 ‘제작자’와 비슷한 역할을 겸했다)은 초기 포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트윈 폴리오가 연주한 곡은 번안곡 다섯 곡과 김인배의 곡 하나이고, 편곡은 어쿠스틱 기타 두 개의 합주 외에 별달리 추가한 악기는 없다.

펄 시스터즈 – I Love You(1969)
트윈 폴리오 – 떠나야 할 그 사람(1969)
트윈 폴리오 – 축제의 노래(1970)

2)의 음반은 트윈 폴리오의 독집으로 ‘홍현걸 편곡’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수록곡은 위 음반과 비슷하게 모두 번안곡이다(실제로는 송창식이 세 곡의 번안에 참여했지만 음반 표지 뒷면에는 ‘조영호’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는 송창식이 ‘작사가 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영호라는 표기도 ‘조용호’의 오기다. 그는 TBC 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 PD였다). 편곡의 경우 “축제의 노래”의 경우는 글로켄스필, 현악, 드럼 등 어쿠스틱 기타 이외의 악기가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어쿠스틱 기타 두 개의 합주 중심이다. 말하자면 이 음반은 1)의 음반을 통해 트윈 폴리오라는 이름이 유명해지자 독집 앨범이라는 포맷으로 음반의 일관성을 부여해 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1)과 2)의 음반이 지구 레코드라는 ‘메이저’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저에서 제작한 음반이라는 특징과 ‘아무개 작편곡집(혹은 작품집)’이라는 특징은 불가분해 보인다. 실제로 이들 음반에서 김인배와 홍현걸이 실질적으로 수행한 역할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두 작곡가는 이 음반들 외에도 포크 가수들의 음반에 관여하지만 이런 특징은 비슷하다. 지구 레코드와 더불어 1970년대 한국 음반산업을 양분하다시피 한 오아시스 레코드가 관여한 것도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한편 1년 반 정도 시간이 경과한 뒤에 발표된 3)의 음반은 새로운 단계를 보여준다. 이필원과 박인희의 혼성 듀엣인 뚜아 에 무아는 1970년 여름 독집 음반 [스카브로우의 추억/약속](GH-00004, 1970.7.4.)을 발매하고 여기서 “약속”이 히트하면서 일약 대중 스타로 도약한다. 그리고 위에 적은 앨범은 이 앨범의 후속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음반들을 발매한 곳이 그랜드 레코드라는 ‘군소’ 프로덕션이고, 이곳의 실력자가 황우루라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지난 번 글에서 히 식스에 관한 리뷰를 상세히 읽었다면 히 식스의 음반이 ‘그랜드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즉, 그랜드는 그룹 사운드 쪽으로는 히 식스(He 6), 통기타 포크 계열로는 뚜아 에 무아를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렇듯 이 음반은 ‘메이저’가 아닌 곳에서 청년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음반으로 제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작곡들인 “약속”, “그리운 사람끼리”, “발자욱”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1971년 말 뚜아 에 무아가 해산되고, 히 식스도 1972년에 오아시스로 이적하면서 그랜드 레코드는 그 뒤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뚜아 에 무아 – 약속(1970)

4)의 음반은 음반의 주인공이 여성 솔로라는 점을 제외하면 3)의 음반과 비슷하다. 양희은의 데뷔 음반인 이 음반에 수록된 총 10곡 중 7곡이 번안곡이다. 그렇지만 김민기의 곡이 둘(“아침 이슬”, “그 날”), 김광희의 곡이 하나(“세노야”) 수록되어 있는 창작곡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창작곡은 시험삼아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음반에서 가장 중요한 트랙들이다. 편곡은 김민기의 어쿠스틱 기타와 이용복의 12현 기타(역시 어쿠스틱 기타지만) 두 대의 합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개 작품집’이라는 부제가 없다는 점, 그리고 음반사가 ‘유니버어살’이라는 점이다. 유니버어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실질적으로는 킹’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이 음반의 제작자는 ‘킹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킹 레코드(혹은 킹 프로덕션)의 사장 박성배로서 양희은이 이후 발매하는 모든 음반의 제작을 맡게 되는 사람이다. 음반에서 킹 레코드의 이름은 KLS로 시작하는 일련번호에만 암시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렇지만 ‘신중현 사단’과 밀접한 인물로 ‘소울 사이키’의 폭발에 기여한 그가 ‘통기타 포크’의 재탄생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5)의 음반에 이르면 3)과 4)의 음반이 가지고 있는 과도적 성격마저 넘어서게 된다. 다름 아니라 음반의 주인공인 김민기가 ‘포크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열 개의 트랙 대부분이 그의 자작곡이며 한 곡은 번안곡(“저 부는 바람”)이며 다른 한 곡은 한대수의 곡(“바람과 나”)이다. 양희은과 뚜아 에 무아에 남아 있던 영어 가사는 사라졌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음반이 문자 그대로 ‘독립 제작’이라는 점이다. 음반사가 한 역할은 마스터 테이프를 프레싱하는 임가공 외에는 없었으며 나아가 킹이나 그랜드 같은 프로덕션조차도 없다. 김진성과 최경식이라는 방송국 PD들이 제작을 맡은 이 음반은 ‘개인 제작자’가 메이저 음반사를 거치지 않고 제작한 음반이고, 그런 의미에서 ‘독립 제작’된 음반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사·작곡이나 제작 면에서의 가치 외에 이 음반이 가지는 가치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악기편성과 편곡이다. 이 음반에는 ‘통기타’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오르간, 베이스, 플루트, 드럼이 등장한다. “아침이슬”에는 현악 편곡도 등장하는데 이것도 기성의 ‘악단’의 편곡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앞의 트윈 폴리오의 음반이 ‘아무개 작품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자와 편곡자가 한 일은 별로 없어 보이는 반면 이 음반에서 연주인은 분명히 ‘무언가’를 했다.

김민기 – 친구(1971)
김민기 – 아하 누가 그렇게(1971)

연주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잠시 뒤에 보기로 하자. 이런 점에서 이 음반은 한국 포크를 정초한 음반이 아니라 한국 포크를 새로운 단계로 이행시킨 작품이다. 즉, 포크를 통기타 순수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음반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작곡가이자 가수였던 김민기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열려 젖혀진 다음 ‘한국 포크’ 앞에는 김민기 노래 가사처럼 “여러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이 길 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길들이…. 이 글에서는 그 길들 중 첫 번째 길을 보도록 하자.

주) 김민기는 양희은의 데뷔 음반에 기타 연주자로 참여하기 이전 1970년 말에 음반 데뷔를 한다. 지금 보기에 의아한 것은 그의 경우조차 김인배의 이름을 대동하는데, 이 음반은 다름 아니라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대도, 1970.12.1)으로 이 음반은 한국의 음반 수집가들에게는 공공연한 비사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음반에는 도비두라는 이름으로 자작곡인 “친구”와 “세노야”,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인 “첫번 크리스마스(The First Noel)”가 수록되어 있다. 도비두는 김민기가 김영세와 결성한 듀엣으로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다. 그 이전에 참여한 레코딩이 있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한편 김민기의 독집이 ‘독립 제작’이라는 방식을 취했던 것은 당시 메이저 음반사인 신세기에서 거절당했다는 루머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스포츠신문식 가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비두 – 친구(1970)
도비두 – 세노야(1970)
김민기·조영남- 작은 별(1972)

킹 프로덕션, ‘폭송’에도 손길을 뻗치다(1): 신중현의 경우

한국 음악산업의 역사에서 킹 레코드의 사장 ‘킹박’ 박성배의 역할은 지대하다 못해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그에 의해 ‘물건’으로 지목되면 곧 히트로 이어졌다.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김추자, 펄 시스터즈 등 ‘신중현 사단’의 가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고 조용필과 이문세까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은 언젠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양희은의 모든 음반을 박성배가 제작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킹박의 손길이 ‘포크’에까지 미친 것은 꽤 오래 된 일이다.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KLS 27)의 표지 앞면

우선 1971년 가을 ‘킹’의 이름을 달고 제작된 두 종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살펴 보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자. 1971년 9월 1일자로 발매된 [71 킹 힛트 앨범 1집](유니버어살, KLS-25)과 1971년 10월 25일자로 나온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유니버어살, KLS-27)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71 킹 힛트 앨범 1집]은 우리가 ‘신중현 사단’으로 알고 있는 가수나 그룹의 히트곡을 모은 것이라서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두 번째 음반은 다소 낯설다. 일단 표지가 낯설다. 서양 남자와 여자 두 명이 통기타를 들고 있는데, 앞의 음반에 김추자가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이국적’이다. 마치 당시 유행하던 ‘빽판’, 그러니까 ‘오리지널 히트 팝송 모음집’같은 표지다(‘빽판’ 가운데 원판을 그대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편집을 거친 경우는 컬러 표지가 종종 있었다).

이 앨범 수록곡들 각각을 상세히 조사하면 기발표곡과 미발표곡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히트곡을 사후에 편집한 음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록된 음악들은 ‘킹’이나 ‘신중현’이 풍기는 이미지와는 다르다. 트리오 하파니스라는 정체불명의 그룹이 “사랑해”와 “꽃반지 끼고”같은 한국의 ‘폭송’을 부르면서 음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이들에 대한 언급은 앞서 인용했던 [주간경향]의 1970년 9월 9일자 기사 “소울·싸이키에 도전하는 포크 뮤직”에 기록되어 있다. 단, 후문에 의하면 이들은 멕시코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온 그룹이라고 한다). 다른 ‘폭송 가수’의 이름을 수록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양희은, 신중현, 서유석, 쉐그린, 트윈 폴리오다. 나머지는 그렇다 치고 신중현은 여기 왜 들어가 있을까? 그것도 작편곡자나 연주자가 아니라 ‘가수’로… 이런 의문은 잠시 거두자.

트윈 폴리오 – 떠나야 할 그 사람(1969/1971)
양희은 – 나뭇잎이 떨어져서(1971)

어쨌든 이 앨범에 이름을 올린 면면들은 당시 포크 가수들과 킹 프로덕션 사이에 모종의 ‘인맥’이 형성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 결과 의외의 트랙들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 김추자가 불러서 유명해진 “나뭇잎이 떨어져서”를 양희은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고 있고, 펄 시스터즈가 불러서 유명해진 “떠나야할 그 사람”을 트윈 폴리오가 드럼 비트와 현악 섹션이 더해진 버전으로 부르고 있다. 두 번째 경우로 눈에 띄는 곡들은 쉐그린이라는 포크 듀엣이 부른 “철새는 날아가고”, “침묵의 소리”이다. 이 경우는 당시 포크 가수들이 즐겨 부르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번안곡이라는 점에서는 포크 음반의 수록곡의 전례와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 않지만 사운드 면에서는 통상적인 ‘통기타 포크’와 다르게 다가온다. 포크 치고는 강한 록 비트도 그렇지만, 현란하고 싸이키델릭한 플루트가 불현듯 끼여드는 것도 이색(혹은 이질)적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경우는 조금 뒤에 살펴 보고 우선 첫 번째 경우에 집중해 보자.

우선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주목되는 첫 번째 사례들을 살펴보자. “나뭇잎이 떨어져서”와 “떠나야 할 그 사람”은 신중현의 곡인데, 문제는 이 노래들을 포크 가수가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울·싸이키’의 작곡가이자 연주인인 신중현과 포크 가수들의 만남이다. 이것이 단지 작곡가가 가수에게 곡을 주어 노래를 취입하게 하는 일반적 관행의 산물인지 아니면 더욱 긴밀한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앞서 트윈 폴리오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김인배 작편곡집 [아이 러브 유]에서 펄 시스터즈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은 희미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포크와 그룹 사운드 혹은 그와 관련된 인사들이 서로 무관심하기만 한 사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푸른 사과]: 이 영화는 김응천 감독의 1968년 영화로 주연은 남진, 최영희, 조영남이 맡았으며 이들은 사운드트랙 음반에서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이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그렇지만 신중현이 포크가 대중음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포크과 교류했다는 확실한 ‘물증’이 존재한다.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이 발매된 시점보다 2년 정도 앞선 1968년 12월에 영화 [푸른 사과]의 음악 감독을 맡아서 자신의 밴드 덩키스를 이끌고 참여했고 그 결과를 사운드트랙 음반(신향, DG 1023)으로도 발매했다. 이 영화음악의 몇몇 곡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의 포크지만 몇몇 곡은 신중현의 ‘소울·사이키’ 가요가 구현된 곡들이다. 그중에 트윈 폴리오가 부른 “떠나야할 그 사람”이 이미 있으니,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수록된 사실을 두고 놀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지난 호 [weiv]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신중현이 다른 그룹 사운드는 다소 폄하하는 반면, 포크 가수는 우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걸 기억한다면, 포크 가수가 신중현의 곡을 부르는 일을 낯설어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보기에 기이해 보이는 만남에도 이미 나름의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서유석의 ‘신중현 작편곡집’ 음반 뒷표지에 실려 있는 신중현과 서유석의 녹음실 사진

그런데 이는 혹시 작곡가들이 자신이 만든 곡을 여러 가수에게 부르게 했던 당시의 관행의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작곡가 신중현과 포크 가수’의 관계는 그것 이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발성으로 포크 가수들과 관계를 맺어온 신중현은 김추자, 김정미, 장현을 거느리고 ‘소울·사이키’ 가요를 주조해 내던 정점기에 포크 가수들과의 ‘외도’를 단행한다. 포크 가수의 음반에 신중현의 곡이 한두곡 수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포크 가수들의 독집 앨범에 ‘신중현 작품집’이라는 부제를 달게 한 것이다. 양희은, 서유석, 조영남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들의 음반이 발표된 1972-73년경이 신중현의 포크에 대한 관심이 가장 집약된 시기로 보인다.

김정미 – 바람(1972)
김정미 – 고독한 마음(1972)
서유석 – 선녀(1972)
서유석 – 나는 너를(1972)
양희은 – 당신의 꿈(1973)
양희은 – 나도 몰래(1973)
조영남 – 징글벨(1970?)(연주: 신중현 악단)

여기서는 양희은과 서유석의 음반에 주목해 보자(조영남의 음반은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에 신중현의 악단이 반주를 해준 것이므로 제외한다). 이 두 종의 신중현 작편곡집은 킹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 일련 번호를 보아도 양희은의 [당신의 꿈/나도 몰래]는 KLS-56, 서유석의 [선녀/나는 너를]은 KLS-57로 하나 차이다. 이 음반들은 신중현의 작품에 깊이 관여해 온 킹박이 ‘포크도 장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일 뿐일까. 그리고 신중현의 시도가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평가는 두 번째 경우를 살펴본 다음에 내리기로 하자.

정성조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장면(사운드트랙 [겨울여자]에서)

킹 프로덕션, ‘폭송’에도 손길을 뻗치다(2): 정성조의 경우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수록된 쉐그린의 노래 “철새는 날아가고”, “침묵의 소리”로 돌아가 보자. 이 곡들에서 드럼과 베이스 등 록 밴드 편성의 악기가 등장하고, 플루트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포크 가요’의 음악 어법으로부터는 크게 벗어나고 있다. 쉐그린의 음악이 이 음반 이후 통기타 중심적으로 가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포크 가요’의 어법에서 벗어나는 편곡은 의외다.

그 낯선 플루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현재 KBS 관현악 단장이자 재즈계의 거물인 정성조다. 그렇다면 이제 1971-2년경 정성조가 개입한 중요한 포크 음반들을 거론해 볼 차례다. 앞서 말한 쉐그린의 두 노래들은 [최신 앨범 vol.1: 사랑해요 당신을/동물농장](유니버어살, KLS-14, 1971.4.25)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 음반 역시 당연히 킹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음반에도 신중현의 곡이 두 곡 있는데 1971년 무렵이면 신중현과 정성조 사이에는 이미 음악적 교류가 있었으므로 신중현의 곡을 삽입하는 일은 자연스럽다.주)그렇지만 이 트랙의 사운드는 ‘신중현 사운드’와는 또 다르다. 보컬은 강한 바이브레이션과 진한 감정을 담은 소울풍의 열창이 아니라 가볍고 산뜻한 포크풍의 창법이고, 거기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으로 단장하여 깔끔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정성조 자신이 작곡한 노래들에서도 대부분의 곡에 드럼 비트를 삽입하면서 12현 기타, 플루트, 현악기, 혼 섹션을 추가하여 ‘깔끔한 느낌의 포크 록 음반’을 만들어 내었다.

쉐그린 – 사랑해요 당신을(1971)
쉐그린 – 미련(1971)

주) 신중현과 정성조의 음악적 교류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이 화양연예주식회사가 소재한 용산구 원효로에 살았기 때문에 종종 함께 만나곤 했고 잠깐씩이나마 같이 음악 활동도 했다. ‘화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성조 역시 미 8군 무대와도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색서폰을 배우기 위해 화양과 인연을 맺었고 미 8군 쇼단인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의 멤버로 연주한 경력도 있다. 이후 그는 신중현과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화양을 떠나는데(정성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신문 기사에는 1970년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하던 ‘신중현 오케스트라’나 퀘션스 해체 이후 1971년 ‘신중현과 그의 캄보’에서 다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성조 본인은 기억에 없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므로 진위 여부는 파악하기 곤란한다).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포크 씬과 교집합을 이룬 것은 우연이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물론 그들이 포크에 개입하는 방식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작곡한 곡을 편곡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성조가 ‘포크 음반’에서 휘광을 드리우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결과는 김민기와 작업하면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김민기의 데뷔 음반 [김민기 노래 모음](대도 EU-716, 1971.10.21)에서 정성조는 ‘정성조 쿼르텟’을 이끌면서 리듬 섹션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플루트(“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와 색서폰(“종이연(원제: 혼혈아)”) 연주를 통해 재즈의 색채를 불어 넣었다. 그러니 이 음반의 주연은 당연히 김민기이지만, 정성조는 당당한 조연이고, 이 음반은 ‘조연이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한 경우’에 속한다.

김민기 – 아하 누가 그렇게(1971)
양희은 – 그 사이(1972)

1년 뒤쯤 발매된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제 2집: 서울로 가는 길](KLS-40, 1972. 11. 5)주)은 일련번호에서 알 수 있듯 킹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양희은의 ‘신중현 작품집’보다 몇 달 앞서 발매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음반은 통기타 중심으로 편곡되었던 양희은의 1집 음반에 비해 많이 다르다. 간략히 말한다면 김민기의 음반과 유사한 편곡이 들어가 있고, 아니나 다를까 음반의 뒷면 표지에는 정성조 쿼르텟이 등장한다. 주)

주) 이 음반에서 고영수와 조영남, 이수만(“인형”)의 참여는 당시 포크 공동체라 이름 붙일 만한 윤곽을 읽어낼 수 있는 코드가 될 것이다. 또한 김민기와 양희은의 두 음반에서 은연중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이는 독자적인 음반은 없지만 전설적인 포크 싱어송라이터인 김광희일 것이다. 김광희는 김민기의 음반에서 건반악기를 연주하고 현악 편곡을 맡았으며, 양희은에게는 ‘곡’을 주었다. 이런 ‘배후의 인물들’의 리스트에는 “백구” 등에서 기타를 연주한 강근식도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양희은 – 백구(1972)

마지막 사례로서 1년 반 뒤 ‘군에서 제대한’ 한대수의 [멀고 먼 길](신세계, SIS-81115)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도 정성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여기서 그는 플루트 등 관악기 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오르간 등 건반악기도 담당했다. ‘어쿠스틱 록’인지 ‘일렉트릭 포크’인지 헷갈리는 “물 좀 주소”에서는 당시 자신의 밴드 메신저스의 멤버였던 조경수(!)가 베이스를 연주했다(“아니야”를 부른 ‘가수 조경수’ 맞다. 참고로 이 음반에서는 히 식스를 거쳐 신중현과 엽전들의 멤버였던 권용남이 드럼 스틱을 잡았다)

김민기 – 바람과 나(1971)
한대수 – 바람과 나(1974)

이 세 종의 음반들 가운데 양희은의 음반을 제외한다면 킹 프로덕션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다. 또한 세 음반들 모두 쉐그린의 음반처럼 ‘정성조 작편곡집’이 아니라서 그가 음반을 전체적으로 감독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개성적 연주의 색깔은 너무도 강해서 이들 음반의 색깔에 깊고도 넓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종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꼽히는 세 음반에 정성조가 모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아니었을까. 이 글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포크 록의 탄생?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이제 신중현과 정성조가 개입한 포크 음반들에 대해 전체적인 평가를 내려 보자. 이제까지 언급한 포크 음반들에서 두 명의 역할은 요즘 말로 하면 ‘음악 프로듀서’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포크 음악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르다. 신중현이 자신이 구상하는 사운드를 실현시키기 위해 주도자의 역할을 자임했다면, 정성조는 포크송의 ‘심심한’ 사운드의 틈을 메우고 꾸며주는 보조자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의 싸이키델릭 록이 구현된 포크와 정성조의 재즈가 은근히 스며든 포크는 포크 씬이 보다 풍성해지는 계기를 창출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통기타 순수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포크라는 음악은 자신들의 음악적 열정을 불사르면서 뜻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즈에 심취해 있던 정성조에게 포크란 이 당시 부상하고 있던 대중음악의 하나의 새로운 조류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 반면 신중현의 시도는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음악에 포크 가수를 객원 가수로 초빙한 것에 가깝다. 결국 두 인물을 통해 포크 씬이 풍성해진 현상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 혹은 순간이 되었다.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라는 상이한 씬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경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신중현과 정성조의 손에서 태어난 ‘포크 록’은 사이키델릭 록도 아니고, 재즈 록도 아닌 별도의 차원으로 넘어가 버렸다. 짧은 순간 빛을 발하곤 급격히 사라져 버리는 별똥별처럼. 이럴 때 사람들은 ‘소중한 것은 순간 뿐이고, 순간만이 영원하리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주) 정성조의 그룹들 가운데 1972년 늦가을 경부터 활동을 시작한 정성조와 메신저스도 주목할 만하다.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 시카고 등과 비슷한 일명 브래스 록 밴드로 오비스 캐빈에서 열연했다. 같은 무대에 섰던 히 식스 같은 그룹 사운드와도 친분이 있었고 통기타 가수들과도 교류를 맺게 되었을 법하다. 신문보도([일간스포츠] 1972년 11월 5일)에 의하면 당시 멤버는 “트럼펫 최선배, 건반의 신관웅, 트럼본 윤광섭 등 TV 악단소속 등”이었고 그의 증언에 의하면 조원익(베이스)도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1977년 [어제 내린 비] 크레딧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최선배(트럼펫) 장석웅(기타 & 보컬) 변성용(오르간), 유영수(드럼), 조경수(베이스, 보컬), 최병걸(보컬), 정성조(색서폰, 플루트)에 이른다. 이들 중 유영수는 조원익과 함께 강근식이 이끈 동방의 빛에서도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정성조 작곡 제1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도니스(호와 섭) 음반(1976, 신세계, S 가 8013)에서 “정”을 비롯한 자신의 곡을 실었으며, 메신저스 이름으로든 정성조 개인의 이름으로든 수많은 영화음악들에 관여했다.

이들이 발표한 음반은 ‘대개’ 킹의 ‘폭송’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했지만 빠뜨린 이야기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 보자. 물론 정성조의 경우는 신중현처럼 킹박이나 킹 레코드와 ‘전속’관계와 같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참여한 몇몇 음반들은 킹을 통해 나왔음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또한 이른바 정통 포크 계열로 일컬어지는 서유석, 양희은을 비롯해, 이 글에서는 분량 상 언급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들인 방의경, 오세은, 이연실 등도 킹 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발표했는데,이 음반들은 대체로 통기타 중심의 편곡이다. 결과적으로 킹을 통해 나온 음반들은 ‘통기타 사운드 중심의 포크 음반 아니면 일렉트릭한 사운드를 담은 록 음반’ 둘 중 하나다.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여기서 언급한 사례들, 즉 조심스럽게 ‘포크 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음반들은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음반들이고, 요즘 유행하는 문화연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잡종(hybrid)’이자 ‘이형체(anomaly)’이자 ‘사생아(bastard)’다.

그렇다면 ‘포크 록’이든 ‘포크 팝’이든 ‘포크 가요’든(혹은 다른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포크 고유의 ‘순수성’의 확대든 타락이든 포크가 ‘한국 대중음악’의 하나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이는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1973년에 포크가 대박을 터뜨린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킹 이외에 포크 음반을 제작하던 ‘전문 프로덕션’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하나는 ‘애플’이고 다른 하나는 ‘오리엔트’라는 프로덕션이다. 이 중 오리엔트는 킹박과 더불어 1970년대 한국 음반산업계의 풍운아인 ‘나현구 사장’이 운영한 프로덕션으로, 이장희의 3집 음반을 통해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애플은? 애플 역시 킹과 마찬가지로 ‘유니버어살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대명 제작했다. 그런데 유니버어살 음반사에서 발매한 음반들의 일련 번호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드는 시점을 전후하여 KLS 시리즈와 K-Apple 시리즈로 양분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 킹박이 관여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자가 킹이고 후자가 애플이며, 전자는 킹박이 직접 관여하고 운영한 것이 맞지만, 후자는 이종환이 관여하고 그의 처남인 김웅일이 운영한 프로덕션(대표는 고재동)이다. 이런 궁금증은 다음에 풀어보기로 하자. 20021017 | 최지선 [email protected]

* 최지선이 쓰고 신현준이 확대·보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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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윈드버드
http://www.windbird.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