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07060344-0419goldengrapes골든 그레입스 – 즐거운 고고 파티(신중현 사운드 3) – 프린스(SS7202), 1972

 

 

신중현 싸이키델리아의 숨은 역작, 또는 불쾌한 여행

[즐거운 고고 파티(신중현 사운드 3)]는 부제가 일러주듯 ‘신중현 사운드’ 시리즈의 세 번째 음반이다. ‘신중현 사운드’ 시리즈는 1971-72년에 신중현의 명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를테면 신중현이란 이름 석자를 브랜드화한 음반들이다. 당시 신중현이 작편곡가로서 ‘얼마나 잘 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골든 그레입스(Golden Grapes)도 다른 신중현 사단 가수들처럼 무작정 신중현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가서 데뷔하게 된 경우였다. 이들은 혼혈아들을 위해 세워진 펄벅 재단 고아원 출신의 일군의 청년들이었다. 1971년 신중현을 찾아갔을 때, 이들은 만18세가 넘어 고아원을 나와 함중아, 함정필 형제를 중심으로 그룹을 결성하고 기지촌에서 연주를 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중현의 도움으로 당시 최고의 무대 중 하나였던 풍전호텔 나이트 클럽에 ‘신중현과 골든 그레입스’란 이름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신중현의 개인 리사이틀 무대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음반이 골든 그레입스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앞선 두 장의 ‘신중현 사운드’ 시리즈(1971)가 ‘신중현 작편곡집’ 형식의 컴필레이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신중현은 이 음반에 작사, 작곡, 편곡, 리드 기타 연주, 게스트 보컬 등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노래는 신중현이 부르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창법과 발음이 유사하고(실제로 그는 보컬 파트에 참여했다), 리드 기타의 연주도 신중현의 ‘버릇’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특히 B면의 “즐거운 고고”).

“하필 그 사람”과 “그 사람아”는 노래만을 놓고 보면 그룹 사운드 곡이라기보다는 신중현이 솔로 가수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 같은 느낌을 준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스타일의 곡이란 의미다. 실제로 “하필 그 사람”은 바니 걸스, 김추자가 각각 이 음반 이전과 이후에 불렀고, “그 사람아”는 “민아”가 이미 불렀던 경우다. 이처럼 같은 곡을 여러 가수에게 준 것이야 신중현이 종종 한 일이니까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다. 다만 두 곡을 솔로 가수 버전([신중현 사운드 1, 2]에 실려 있다)과 비교하면, 이 음반에 담긴 버전이 확실히 다이내믹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하필 그 사람”은 산타나 스타일의 퍼커션, 리듬 중심의 오르간, 퍼즈 기타 간주가 돋보이고, “그 사람아” 역시 라틴적인 퍼커션과 환각적인 오르간이 귀를 잡아끈다. 영화 주제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정든 고향)”도 [신중현 사운드 1](1971)에 연주곡으로 실린 바 있는 곡이다. 브라스가 리드하는 이 싸이키델릭 영화음악은 이 음반에서 노래가 추가된 그룹 사운드의 역동적인 사운드로 탈바꿈했다. 싸이키델릭 오르간, 와와 기타가 고고 클럽에서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베이스 기타와 드럼이 자아내는 흥겹지만 어두운 느낌의 리듬은 “아름다운 강산”의 프로토타입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이 음반은 환각적이면서 역동적인 싸이키델릭 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앞서 보았듯 ‘소울 가요’ 풍의 노래들도 있지만 골든 그레입스의 연주는 이를 싸이키델릭적으로 감싸서 변환시켰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신중현이 솔로 가수들을 통해서는 주로 ‘소울 가요’를 구사했지만 그룹 사운드 활동에서는 대개 싸이키델릭을 추구했다는 점을 이 음반은 확인해주고 있다. LP의 A면은 3분 내외의 곡, B면은 긴 러닝 타임의 곡으로 된 구성은 이정화(덩키스)의 데뷔작(1969), 신중현과 퀘션스의 실황 음반 [In-A-Kadda-Da-Vida](1970), 그리고 [장현 and 더 맨](1972)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 음반의 싸이키델릭 사운드는 어떤 색채일까. 어둡고 둔중하다. 헤비하고 리드미컬한 경우도 경쾌하다는 느낌보다는 습하고 무겁다. 음반의 문을 여는 “그리워라”도 그런 경우다. 다이내믹한 싸이키델릭 록 넘버인 이 곡은 디스토션을 많이 먹여서 기타 리프를 강화했다면 영락없는 1970년대 하드 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밥 앤젤(Bob Angel)의 오르간 연주다. 오르간은 환각적으로 곡 전체에 출렁이는데 부분적으로 리듬을 강화해주기도 하는 반면, 신중현의 기타는 왠일인지 후주에서 짧게 기타 솔로를 연주하는 정도에 그친다. 신중현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오르간의 비중은 예상밖이다.

다른 곡들도 그렇지만, B면 전체를 장식하는 곡이자 이 음반의 백미인 “즐거운 고고”는 오르간의 호연(好演)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14분 44초의 연주곡인 “즐거운 고고”는 제목과 반대로 즐겁지 않다. 전반부는 느린 템포에 블루지한 기타 솔로가 반복 변주될 뿐이고, 7분 15초가 되어서야 템포가 빨라지면서 리듬의 변화가 오는데 이후 라틴 스타일의 그루브감 있는 리프가 반복된다. 이때부터 2분 여간 오르간이 가세해 블루지한 기타 함께 연주의 주체를 이룬다. 9분 20초경부터는 밥 앤젤의 오르간이 연주의 주도권을 잡고 환각적인 애드립을 전개한다. 12분 20초부터는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가운데 베이스 기타 연주가 상대적으로 돋보이고 14분 넘어서 40여 초간 이어지는 드럼 솔로를 끝으로 곡이 마무리된다.

골든 그레입스의 [즐거운 고고 파티(신중현 사운드 3)]는 신중현의 싸이키델릭을 김추자, 김정미 정도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줄 것이다. 골든 그레입스와 신중현이 빚어낸 이 박진감 넘치면서도 어둡고 환각적인 싸이키델리아는 곡이 아닌 ‘사운드’에 방점을 찍은 신중현의 숨겨진 역작으로, 나아가 한국 싸이키델릭의 한 단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이 음반은 약물 여행으로 치면 ‘배드 트립(bad trip)’에 해당할 것이다. 그 여행이 끝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태로 다시 돌아온 일상은 여행보다 더 진저리쳐지는 것이었을 게다. 그때나 지금이나. 20021004 | 이용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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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8010410-0419goldengrapes_concert신중현은 골든 그레입스의 멤버가 아니었지만, 이 음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연주 활동에 종종 참여해 무대에 함께 올라갔다. 사진은 골든 그레입스가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신중현이 함께 출연해 연주하던 모습.

<사족>
1. 함중아의 회고에 따르면, 골든 그레입스가 처음 신중현을 찾아갔을 무렵 신중현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오는 가수지망생들이 워낙 많아서 신중현의 얼굴을 한번 보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중현은 이 혼혈아들(함중아 형제는 혼혈이 아니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들이 뮤지션의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악기와 거처를 제공하였다. 신중현은 너무 바빠서 실질적으로 ‘지도’를 해주지는 못했지만, 골든 그레입스의 일반 무대 데뷔를 주선해주었고 고고 클럽이나 방송에 출연할 때 같이 무대에 올라 연주해주었다.
2. 이후 골든 그레입스는 한 명의 기타리스트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가 이후 “아파트”,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톱 가수로 부상하게 되는 가수 윤수일이다. 함중아 역시 골든 그레입스 이후 함중아와 양키스, 함중아와 무서운 아이들을 이끌었고 “내게도 사랑이”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 초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수록곡
Side A
1. 그리워라
2. 생각하는 사람
3. 하필 그 사람
4.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정든 고향)
5. 그 사람아
Side B
1. 즐거운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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