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보컬 전성시대다. 굳이 여성 보컬이라고 말한 건 ‘여자 가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밴드에서 보컬을 맡은 여자를 말하기 때문이다. 한번 더 굳이 말하면 ‘록 음악’ 계열의 밴드의 간판, 이른바 프론트우먼(frontwoman)을 말한다. 자유림의 김윤아와 롤러코스터의 조원선이 큰 언니뻘 정도 되어서 ‘전형’을 만들어 냈다면, 최근 데뷔한 스웨터의 이아립과 체리 필터의 조유진은 막내뻘쯤 되는 것 같다. 남상아는 둘째 언니쯤 될까… 물론 실제 나이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경력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주주 클럽의 주다인, 더 더에서 독립해서 솔로로 활동하는 박혜경, 솔로로 데뷔한 박기영이나 임현정같은 ‘모던 록 디바’들까지 포함시키고, 조금은 족보가 다르지만 하나기획의 신인 오소영과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도 두루 엮는다면 현재 20대인 여성 보컬은 봉고차로 한 대 분은 될 것이다.

여기서 록과 여성에 관한 일반론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미권에서 록 우먼(ropck woman)이라는 현상은 이미 1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고 릴리쓰 페어(Lilith Fair)도 과거지사가 된 마당이니 참고할 만한 외국의 사례도 이제는 진부해지고 있다. 그래서 앨러니스 모리셋(Alanis Morrissette), 아니 디 프랑코(Ani Difranc), 돌로레스 오리오든(Dolores O’Riordan), 니나 페르손(Nina Persson) 등을 예로 들면서 ‘연상시킨다’는 말로 때우는 글은 무용하거나 불요하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외국의 아무개로부터 영향받았다’는 말로 때우는 글은 이제 짜증이 나서 못 읽겠다. 내가 쓴 글을 포함해서 -_-)

‘재미로 하는 호미 언니의 가설’은 아무리 영미 팝, 록, 인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대대로 조선 반도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상 선배 여가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메이크업과 코디로 이미지가 바뀌고, 성형수술로 골상이 바뀌고, 몸매관리로 체형이 바뀌더라도 성대 구조의 특징은 아직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과학적, 의학적으로 조사해 본 뒤 해답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70-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수놓은 여가수들의 흔적을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모던 록의 프론트우먼들에게서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20020924045828-pearlsisters2우선 여성 록 보컬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는 김윤아는 (펄 시스터즈의) 배인숙, 김정미 등 신중현 사단의 ‘싸이키 가수’의 직계다. 비음이 약간 섞인 육감적인 톤의 보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이 김윤아가 이 아줌마들(?)을 계승하는 전통이다. 이른바 ‘한 카리스마하는’ 보컬이다. 봉건시대의 유교 윤리의 용어법을 이용하면 ‘대가 세어 보이는’ 이미지도 국화빵이요 붕어빵이다. 단지 [열린음악회]에서 “헤이 헤이 헤이”를 부르는 것을 들은 나의 노모(老母)가 “쟤 노래는 혜은이를 닮았네…”라고 말씀하시던데 그건 나로서는 조금 이상하다. 나의 경우 오히려 “안녕 미미”같은 ‘재래풍 가요’를 들었을 때 “초우” 를 부른 패티 김을 떠올렸다. 이런 환청은 모전자전 현상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패티 김과 혜은이가 이른바 ‘길옥윤 사단’의 신구 세력(1970년대 말 기준임)을 상징하는 인물 아닌가. 그러니 ‘구라’를 조금 더 보태면 말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자우림이 대중적 록 음악으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맞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는 쬐끔 힘들다. 이건 개인적 편견이다. 김윤아의 직계라고 뻥을 친 아줌마들의 배후에는 신중현과 길옥윤같은 거물급 음악인이 있었지만, 김윤아의 경우는 자기가 직접 노래를 만들고 연주하니 나의 바램은 이건 과욕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은 내가 정리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녀와 그의 동료들이 이런저런 연구를 많이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훈계조가 되어 버렸는데 죄송. 신보를 들어 보니 음악적 방향이 뭔지 감이 잘 안 잡혀서 이러는 것 같다.

김윤아와 친구 사이인 임현정은 ‘1990 ~ 2000년대의 이은하’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이은하에 한영애를 더하고 이를 둘로 나눈…어쩌고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단, 2집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를 들으면 윤시내의 영향을, 3집의 “고마워요”를 들으면 신형원의 영향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선머슴아’ 계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시원하게 내지를 때도 목구멍에 무언가 꺼끌꺼끌한 게 있어서 허스키한 톤으로 나오는 창법이 이 족보의 특징이다.

이 족보의 역대 최고의 곡은 이은하가 부른 “밤차”와 “아리송해”, 그리고 윤시내가 부른 “공연히”다. ‘이런 노래가 록 보컬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밤차”와 “아리송해”의 실질적 프로듀서이자 기타를 연주한 인물이 김명길이고, “공연히”의 실질적 프로듀서이자 편곡자는 신병하라는 사실을 전한다. ‘김명길과 신병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김명길은 1970년대 초 그룹 사운드 데블스(Devils)의 리더였고, 신병하 역시 사계절이라는 그룹에서 윤시내와 유현상(!)을 데리고 있던 존재라고 답변하겠다(신병하는 [애마부인]과 [남부군]의 영화음악으로 더 유명하다). 아무튼 이런 ‘가요’를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들으면 ‘아니 그 시대에 저런 연주가…’라는 감탄을 낳는다. 임현정이 3집에서 2집 때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역시 솔로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에게는 편곡자와 프로듀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20020924045828-nami8_1한편 조원선의 직계 언니는 나미다. 공일오비가 리메이크해서 재차 히트시킨 “슬픈 인연”의 원곡을 레코딩한 인물 말이다. 물론 나미의 트레이드마크는 “빙글빙글”과 “인디언 인형처럼”같은 불후의 댄스곡이다. 댄스곡은 댄스곡인데 무언가 품격이 달라 보인다면 나미의 배후에는 고(故) 김명곤이라는 1980년대 한국 최고의 편곡자가 있었음을 알려둔다. 참고로 말하면 “빙글빙글”은 한국 최초의 신쓰 팝이다. 신씨사이저만 가지고 모든 보컬을 제외한 모든 음향을 만들어 냈다는 의미다. 김명곤은 최이철이 이끈 사랑과 평화에서 1970년대 후반 키보드 주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고 뒤에는 작곡가, 편곡가로 날린 인물이다. 혹시나 [사랑과 평화 Disco]라는 연주음반(한국말로 ‘경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록 밴드가 댄서블한 음악을 연주하는 흐름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롤러코스터의 이상순의 훵키한 기타와 지누의 일렉트로닉한 음향의 프로듀싱은 매우 탁월하지만 김명곤의 업적에 필적하는 작품이 나올지는 두고 보아야 할 정도다. 물론 롤러코스터는 가수, 작곡자, 편곡자, 프로듀서가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밴드를 이루고 있으므로 아직은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체리 필터의 조유진의 창법도 유서가 깊다. 미스 미스터, 에머랄드 캐슬, 서문탁 정도만 떠올리는 사람은 1970-80년대의 음반들을 뒤져볼 필요가 있다. 와일드 로즈의 신정숙, 이브의 백운지, 그리고 도원경으로 이어지는 흐름 말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와일드 캐츠의 임종임, 조한옥과 은날개의 조한옥, 젊은 연인들의 지윤경으로 소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좀 오버같다. 그저 체리 필터의 신곡 “낭만 고양이”라는 제목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와일드 캐츠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고 변명하겠다. 아, 하나 더 있다. 이승철이 와일드 로즈를, 유현상이 도원경을 키운 것처럼 체리 필터 역시 ‘메인스트림’ 취향의 김영석에게 프로듀서를 맡겼다는 점도 무언가 시사적이고 징후적이다. 아무튼 목에 자연 디스토션을 달아놓은 듯한 ‘와일드’하고 ‘터프’한 언니들’의 전통은 꽤 있다. 혹시나 저런 음악을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들어 보고 생각을 수정해 보기 바란다. ‘기층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음을 느낄지도 모르니…

오소영은 조유진의 정반대 스타일이다. 불행히도 소속사(?)인 하나기획의 이름값이 워낙 높다 보니 그녀는 직계인 장필순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또한 포크 혹은 포크 록 계열의 여가수의 경우 전통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옛날 노래 스타일로 들린다’는 편견과도 싸워야 한다. 양희은, 김광희, 방의경, 박인희, 현경과 영애 등 1970년대의 기라성같은 여성 포크 가수들 말이다. 이런 음악들에 대해 젊은 사람들은 ‘흘러간 노래’로 치부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그때가 최고’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녀의 미래는 의외로 불안할 수 있다. 게다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소녀’같은 창법과 이미지도 현실에서 이런 소녀들이 날로 희귀종이 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에서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물론 이런 특징은 잘만 하면 ‘희소성’의 장점으로 둔갑할 수 있고 게다가 오소영은 포크 계열 여가수로서는 흔치 않은 싱어송라이터이니, 차기작을 기다려 보도록 하겠다.

20020924045828-kws104‘소녀 같은 창법과 이미지’가 포크 록 계열에만 전수된 것은 아니다. 스웨터의 이아립은 장필순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런 계보에 한 발을 딛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의 의견처럼 이아립의 보컬은 장필순 뿐만 아니라 김완선(!)을 닮았고 그래서 오소영과(科)보다는 현세적(?)이고 말괄량이처럼 들린다. “분실을 위한 향연”같은 댄스곡의 고음부에서 모음(母音)을 과장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런 이야기가 ‘노래를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이아립에게는 김완선에게는 없는 작사의 능력이 있으니까 음악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그래서 스웨터의 미래는 작곡을 맡고 있는 신세철에게 손무현만한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하긴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귀염둥이 핑클은 강수지와 하수빈을, 빽빽이 신지는 혜은이를, 재간둥이 S.E.S.는 세또래(이건 아닌가..)를, 섹시걸 박지윤은 김완선을 각각 ‘벤치마킹’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비단 여가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김동률의 저음에서 ‘우워워어…’하는 노래는 최희준과 배호을, 이적의 고음으로 팍 째는 보컬은 위키 리나 유주용이라는 오래 전의 모델들을 상기시킨다. 더 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심심풀이로 해 본 것이라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런 이야기야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끼워 맞추면 말이 되는 이야기니까… 단, 그런 생각은 든다. 외국의 아무개에 기울이는 정성의 1/3만 국내의 선배들에게 기울이면 지금보다 훨씬 그럴 듯한 음악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 20020919 | 신현준 [email protected]

p.s.
생각해 보니 김추자의 후예는 찾기 힘들다. 역시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옛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다(참고로 청자는 그때 제일 비싼 담배였다). 한영애의 후예도 찾기 힘들다. 남상아가 조금 그러려나… 최근 등장한 지현이라는 페미니스트 가수도 조금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음악이나 들어보고 말해야겠다. 아차 이은미와 이상은 이야기도 없었다. 그건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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