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록의 시생대에 대한 기억들: ~1967

* 저자 주: 이 글은 1960년대 한국의 록 음악을 위시한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연구 노트입니다. 조사의 미비함으로 인해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사실의 경중을 가리는 작업은 아직 미진한 상태이므로, ‘연습용’ 글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62년.. 한국에서도 록 음악이 태동하다

1962년. 영국 런던에서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비트 그룹’ 비틀스(The Beatles)가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직업적 음악인으로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기가수 토니 셰리단과 함께 “My Bonnie”를 레코딩한 데 이어 데카에서 오디션에 떨어진 후 팔로폰(Parlophone)과 계약을 맺었다. 그 해 9월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꿔 놓는 싱글 “Love Me Do”가 발매되었다. 비슷한 시점에서 12살이 된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가 노래하고 연주한 “Fingertips”가 역시 차트를 점령했다. 한편 1년쯤 뒤에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가 밥 딜런(Bob Dylan)이 작사·작곡한 “Blowing In The Wind”를 불러서 팝 차트의 ‘Top 10’에 올려놓았다.

이 세 개의 사건은 ‘196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순서대로 각각 로큰롤(혹은 비트), 소울, 포크(포크 록)라는 이름을 달게 될 세 갈래의 음악은 이른바 ‘록의 시대’를 형성하면서 1960년대를 청년문화가 폭발한 시기로 만드는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한국은? 동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이 나라에도 록 음악과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 왔을까.

20020903062741-0417krockspecial_1add4사진은 애드 훠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최초의 록 밴드’가 분명히 존재했다. 물론 ‘록 밴드’라는 이름은 당시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룹 사운드’라는 명칭이 당시의 용어법이었다. 록 밴드가 ‘전기 기타와 드럼을 중심으로 한 악기편성으로 노래와 연주를 모두 하는 밴드’라고 한다면 이런 형태의 그룹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시점은 1961년과 1962년 사이의 어딘가일 것이다. 시기상으로는 비틀스가 막 뜨기 시작한 무렵과 비슷하다.

하지만 1960년대 전반기에 이런 사운드를 ‘라이브’로 들은 한국인은 많지 않았다. 네댓 명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연주하는 앰프로 증폭된 전기 기타 사운드, 낮게 둥둥거리는 베이스 기타 사운드, 시끄럽게 두들겨대는 드럼 사운드, 외쳐대거나(shouting!) 울부짖는(crying!) 보컬 말이다. 물론 AFKN 라디오로 ‘외국’의 밴드가 연주한 음반이 재생되는 것을 들은 사람은 꽤 있었을 것이다.주)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들 한국의 그룹 사운드가 ‘미 8군’을 무대로 활동했고, 미 8군 무대에는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록 밴드로 키 보이스, 애드 훠, 코끼리 브라더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미 8군 무대에서 이들 그룹 사운드가 어떻게 발생했으며 또 어떤 형태로 활동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루어야 할 것이다.

주) 당시 가정에서 레코드판과 전축은 부모의 것이었지 자식들의 것이 아니었다. 전축은 가정의 마루에 놓여 있었고 가부장적 권위 하에서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음악을 재생하는 하드웨어 가운데 ‘애들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광석 라디오)가 유일했다. 라디오의 크기보다 배터리의 크기가 더 큰 라디오의 음질은 조야했고 그나마 다이얼을 잘 돌려야(요즘처럼 누르는 게 아니었다) 정확한 주파수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들려오는 팝 음악은 마치 천상의 계시처럼 듣는 이를 사로잡았다’는 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전달해 주는 경험담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들을 수 있을까? 이들의 활동이 기록된 동영상 자료는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더라도 쉽게 접할 수 없다. ‘음반’은? 음반 역시 정상적인 경로로 구할 수 없다. 재발매 CD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모르는 사람이다. 중고 LP를 쉽게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아도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한국 음반시장의 이상한 구조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발매된 LP들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기 때문에 매우 ‘고가’에 거래되고 있고 그나마 1960년대 초중반에 나온 LP들은 수요에도 불구하고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코끼리 브라더스의 경우 이런저런 소문이 있지만 아직까지 발견된 음반이 한 종도 없다. 키 보이스와 애드 훠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그렇지만 키 보이스의 경우 1965-6년 경 발매된 합동 음반(스플릿 음반) [쟈니 리/키 보이스](신세기, 가 12125)가 이제까지 발견된 것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음반인데, 그 이전에 발매한 음반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애드 훠의 경우 1964년에 발표한 독집 음반 [비 속의 여인(The Add 4 First Album)](LKL, 1964)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정도만 가지고 ‘한국 록의 기원’을 따지기에는 아직 우리의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기원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 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코끼리 브라더스의 경우 최영완, 최명완, 조영조, 장영, 박명수, 하청일(!) 등의 이름이, 애드 훠의 경우 신중현, 윤광종, 한영현, 김대환, 서정길, 권순권 등의 이름이, 키 보이스의 경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 김홍탁, 윤항기, 유희백 등의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 ‘왜 사람의 이름이 많냐’고 묻는다면 ‘여러 사람이 밴드를 거쳐갔다’고 답변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여기 거론한 것 외에 훨씬 많은 수의 밴드들이 있었을 것이고, 밴드를 거쳐간 사람의 수도 꽤 될 것이다. 특정한 가치판단을 무시한다면, 이들이 ‘한국 록의 선구자’에 속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만 따질 때 선두주자는 키 보이스였을 것이다. 5인조 그룹 사운드 키 보이스는 미 8군 무대에서는 여가수 송영란과 함께 락 앤 키 보이스(Lock & Key Boys: 당시에는 ‘Rock & Key Boys’로 잘못 표기했었다)라는 이름의 ‘패키지 쇼’를 통해 인기를 누렸고, 키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국내의 일반 무대에서도 어느 정도 인기를 누렸다.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는 1966년 경 밴드를 탈퇴한 뒤 솔로 가수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차중락이 1968년 요절했을 때는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 일어나기도 했다.

키 보이스가 1968년경부터 멤버를 모두 바꿔 인기 그룹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키 보이스에서 기타를 연주한 김홍탁은 히 화이브(He 5), 히 식스(He 6)를 결성하였고, 이들은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신중현이 결성한 밴드들, 예를 들어 덩키스, 퀘션스, 더 맨 등과 더불어 그룹 사운드계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애드 훠도, 코끼리 브라더스도, 키 보이스도 서양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록 밴드’나 ‘록 스타’가 되지는 못 했다. 물론 그들이 당시에 인기를 누렸던 것은 분명하고 수입도 괜찮았다고 하지만, 한국의 록 팬들이 이들을 미국인들이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를 숭앙하는 것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한국’과 ‘록’ 사이의 악연(惡緣)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한국에서 ‘1960년대’가 어땠는지를 전반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1960년대, ‘풍요의 시대’가 아닌 지독한 빈곤의 끝자락

한국의 1960년대는 ‘선진국들’의 1960년대와는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의 나라들과 일본은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 경제부흥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던 반면, 한국은 1950년부터 3년 동안 미국과 중국(당시는 ‘중공’)까지 대규모 군대를 증파하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루었다. 1953년 가까스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1955년까지는 ‘공비 토벌’ 등으로 뒤숭숭했다. 1955년이 미국에서 ‘로큰롤이 탄생한 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시공간의 차이는 너무도 확연하다.

따라서 1960년대가 ‘풍요의 시대’라는 규정은 한국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P)는 100달러 이하의 수준이었다. 화폐가치가 변해서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현재의 환율을 가정한다면 한 사람이 1년 동안 벌어들인 소득이 고작 12만원이고, 한 달이면 1만원이라는 이야기다. 당시 회사에 취직한 사람의 월급이 3-4만원이었다는 이야기를 감안한다면, 그리고 당시의 실업률이 매우 높았음을 고려한다면 이런 통계 값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위정자들의 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정치깡패’가 날뛰고 ‘거지’가 들끓었다. 한국인들은 미래에 대한 별다른 희망이 없어 보였다. 영화 [오발탄]에 나오는 암울한 분위기를 지금 우리가 실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상의 이야기마저도 서울 등 대도시에 국한된 이야기다. 당시 한국인 가운데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농촌의 주민들은 ‘보릿고개’라는 말로 대변되는 더욱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문화는 고사하고 일반적 대중문화조차도 도시의 제한된 계층이 향유하는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흔히들 청년문화 탄생의 조건들로 청년 세대의 인구비중의 증가, 소득의 증가에 따르는 물질적 풍요, 그리고 피임법의 보급 등을 통한 성 혁명 등을 꼽는다. 그렇지만 산업화도 도시화도 낯선 것이었던 한국의 현실은 이런 조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 ‘록 음악’이란 것은 아주 낯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같은 것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 한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60년 4월의 학생혁명으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타도되었고, 1961년 5월 16일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감행했다. 여기서 이런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하나의 해석을 제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62년부터 단행된 ‘제 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은 이후 한국 사회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박정희가 ‘조국근대화’라고 부른 정책 목표는 어쨌든 도시화와 산업화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박정희의 통치 기간 중 ‘도시화와 산업화는 성공했어도 정치적 민주화나 정신적 근대화는 달성하지 못한 현실’은 한국 사회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다.

이런 사회 전반의 변화 속에 한국의 대중음악은 어떤 형세를 취했을까. ‘록 음악’이나 ‘그룹 사운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1960년대 대중음악 전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전반적 트렌드’를 짚어보는 것 이상도 이하는 아니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 ‘악극단 뽕짝’ 대 ‘미 8군 팝’?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한 1961-2년 경 한국의 음악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변화가 발생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세 가지만 언급해 보자.

첫째는 민간 라디오 방송국(이른바 ‘민방’)의 등장과 KBS-TV의 탄생이다.주) 이제까지 ‘KBS 라디오’ 하나밖에 없던 상황에서 라디오가 다채널화 되어 소비자의 선택권이 확대되고, TV 방송이 시작되어 시각적 요인이 중요해진 것이다. 방송산업의 확장은 ‘연예인’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낳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주) 1961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개국하고, 1964년 동양방송, 1969년 문화방송이 TV 개국을 하게 된다.

둘째는 LP 레코드의 등장이다. 1956년 10인치 LP가 SP(standard play)를 대체한 데 이어 1962년에는 12인치 LP가 10인치 LP를 대체하게 된다. 당시의 LP는 아직 모노(mono)였지만 그 이전의 SP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음질을 가지고 있었고, ‘신상품’의 도입으로 음반산업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셋째는 한국연예협회의 창립이다. 이는 그동안 아무런 이익단체를 갖지 못하고 있던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단체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이 국내의 ‘일반 무대’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새로운 방송 매체(민방 라디오와 TV), 새로운 음반 포맷(LP 레코드), 새로운 이익단체(한국연예협회)라는 제도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게 된다. 그 첫 테이프는 손석우가 작사·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였다. 뒤에 스윙 재즈 풍으로 재편곡되어 히트하게 되는 이 곡은 처음 레코딩 할 때는 바이올린의 전주가 이끄는 컨트리&웨스턴 풍의 곡이었다. 한편 1년 뒤인 1963년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한산도 작사·백영호 작곡)는 10만장 이상의 공식 판매고를 기록한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와 “동백 아가씨” 두 곡은 각각 상이한 ‘시스템’을 표상한다. 간단히 말하면 전자는 ‘미 8군 무대’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배후로 하고 있었고, 후자는 ‘일반 무대’라는 전통적인 시스템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일반 무대란 전국 각지의 극장을 돌면서 순회공연(투어?)을 하는 ‘쇼단’의 무대로서 한국 대중음악의 전통적 공연 형식이었다. 따라서 미 8군 쇼가 도회적이었다면, 악극단 쇼는 농촌적이었다. 이를 간단히 대비한다면 팝과 트로트, 양색(洋色)과 왜색(倭色), 조금 더 속어를 사용한다면 ‘빠다끼’와 ‘뽕끼’의 대립이었다.

두 흐름에 대해 후자에 대해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트로트의 음악적 질이 낮다는 일방적 단정이 아니라 트로트의 메시지가 대체로 비통과 탄식이었고 농촌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 취향의 새로운 음악’을 논하려는 이 글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미 8군 출신의 가수들의 음악은 도회적이었다. 한명숙, 현미, 이금희, 윤복희, 패티 김 같은 여자 가수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등의 남자 가수들, 그리고 봉봉 사중창단, 블루 벨스, 쟈니 부라더스, 이 씨스터스 같은 중창단들은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 도회적이었다.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 위키 리는 솔로 활동과 병행하여 포 클로버스(Four Clovers)라는 중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학사 가수’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들 때문이다. 한편 쟈니 리, 쓰리 보이, 트위스트 김 등은 이른바 ‘양아치 클럽’이라고 불리면서 미 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과는 또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의 거칠고 반항적이고 ‘터프’한 이미지는 포 클로버스의 점잖고 신사적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것이었지만 ‘도회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도회적 사운드를 만들어낸 주체는 누구일까. 당시는 가수가 노래를 직접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가수를 그 주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건 다름 아니라 손석우, 최창권, 김호길, 김인배, 정민섭, 김강섭 등 ‘팝’ 계열의 직업적 작곡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미 8군 무대에서 연주자로 경력을 시작하여 작곡가로 독립한 경우다. 이들이 만든 음악이 대체로 ‘빅 밴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작곡하고 위의 가수들이 노래한 음반을 들으면 대체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음악이 트로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음반산업계에서 활동하던 ‘시스템’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직업적 작곡가가 배후의 실력자이고, 가수는 얼굴 마담인 시스템’ 말이다. 이 시스템은 음반회사와의 ‘전속계약’이라는 관계를 통해 움직였다. 그래서 당시의 음반들은 ‘아티스트의 앨범’이 아니라 ‘아무개 작곡가 작품집’이라는 포맷을 취하고 있다. 유명 가수가 아니라면 가수의 이름이 앞면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작곡가의 이름은 음반의 흥행을 좌우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음반사는 작곡가들과 전속계약을 체결하여 안정적 흥행을 보증하려고 했다. 그 결과 1960년대 한국의 ‘팝’은 트로트와 달리 어느 정도 ‘도시의 활기’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인 취향이고 ‘스탠더드’했다.

그렇다면 애드 훠처럼 직접 작곡을 하고 연주하려고 했던 그룹이나 키 보이스처럼 직접 작곡을 하지는 않았어도 작곡가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해서 연주하려고 했던 그룹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던 미 8군 무대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이다.

미 8군 무대… ‘악단’으로부터 ‘캄보’로, 그리고 ‘그룹 사운드’로

미 8군 무대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심형섭(토미 심)과의 인터뷰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 8군 무대’에 대한 최종적 가치판단은 유보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미 8군 무대에 선다는 것은 음악에 대한 갈증과 생계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특권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연주인을 미 8군 무대로 발탁하는 역할은 용산에 자리잡은 화양이나 대영 같은 기획사가 담당했는데, 이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단위를 ‘쇼’라고 칭했다.주) 이른바 ‘패키지 쇼’의 경우 빅 밴드 스타일의 관악기가 포함된 10인조 정도의 밴드를 구성했고, 각 쇼마다 가수와 무희가 따로 있었다. 이런 경우 음악은 스윙과 컨트리 뮤직을 주로 연주했다. 미 8군 출신의 가수들의 최초의 레퍼토리들이 스윙이나 컨트리 계열이었다는 점은 ‘미 8군 쇼’의 성격과 관련이 많다. 엄 토미, 김호길, 김인배, 이봉조, 김강섭, 여대영 등이 재즈로부터 영향받은 ‘악단’을 이끈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주) 미 8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6개월마다 엄격한 오디션을 거쳐야 했고, 각 쇼의 수준에 따라 트리플 A, 더블 A 라는 식으로 등급을 매겼다는 사실, 그리고 한 부대에 ‘하우스 밴드’로 전속되어 연주하는 경우와 전국 각지의 미군 기지를 순회하면서 패키지 쇼를 하는 경우로 구분되었다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20020903062741-0417krockspecial_2keyboys사진은 초기 키 보이스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빅 밴드의 편성에서 소규모 편성의 밴드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4-6인조의 소규모 편성의 밴드는 ‘캄보’라고 불렸다. 이는 ‘밴드’라는 이름이 ‘브라스를 포함한 대규모 편성의 악단’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별도의 용어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런 소규모 편성의 밴드인 캄보는 전기 기타와 드럼을 중심으로 한 밴드였는데, 그 선구적 인물은 기타리스트인 이인성과 김희갑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이 결성한 밴드는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를 음악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도 ‘록 그룹’이나 ‘보컬 그룹’이라기보다는 ‘악단’이나 ‘인스트루멘틀 그룹’의 성격이 강했고, 레퍼토리는 외국의 유명 음악을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이었다. 코끼리 브라더스의 경우도 전기 기타 중심이었지만 고정된 보컬이 없이 ‘캄보 밴드(악단)’와 ‘보컬 그룹’의 중간적 형태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애드 훠와 키 보이스의 선구적 의미를 미리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선구적 그룹들은 ‘노래는 가수, 연주는 밴드(악단)’라는 이제까지의 구분을 없앴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현상이다. 혹시 ‘록 순수주의자’들은 1960년대 한국의 그룹 사운드를 ‘자작곡이 없이 카피곡만 연주하거나 자작곡이 있다 하더라도 재래가요와 다르지 않았던 존재’라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전기 기타를 앞세우고 노래와 연주를 모두 하는 그룹’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혁신적이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이들보다 조금 젊은 세대들에 의해 ‘비틀스의 영향을 받은 그룹 사운드’가 출현한다. 몇몇 문헌을 보면 이들 외에도 샤우터스, 김치스, 바보스, 가이스 앤 돌스, 화이브 휭거스 등이 1960년대 후반 미 8군 무대를 풍미한 존재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빅 밴드, 즉 재즈나 스윙을 거치지 않고 경력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애드 훠나 코끼리 캄보와도 구분된다. ‘빽구두’를 신고 나팔바지를 입고 장발을 휘날리면서 명동거리를 거닐던 이들을 한국 최초의 ‘청년 하위문화’의 리더라고 부를 수 있을까.

1960년대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 번안곡의 시대?

1960년대 한국의 음반산업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앞서 극히 간략히 설명한 바 있다. 한마디로 직업적 작곡가가 지배하는 시스템이고, 작곡가의 명성은 음반의 흥행을 보증하는 조건이었다. 작곡가는 단지 ‘곡’을 만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악기편성을 비롯한 편곡을 미리 하고 나아가 녹음 현장에서 악단의 연주를 제어하는 ‘악단장(밴드마스터)’이기도 했다. 당시의 편곡이 관현악의 비중이 큰 악단의 연주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음반을 들어보면 느낄 수 있는 점이다. 그래서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도 음반사에 ‘전속’되었고, 몇몇 음반사는 전속 악단을 보유하기도 했다. 작곡가가 지배하는 시스템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가수가 ‘스타’가 되면서 점차 변화하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전통적 악단이 아닌 그룹 사운드의 연주가 들어간 음반은 없을까. 물론 꽤 많다. 요즘 말로 하면 ‘세션’이지만 당시에는 그룹의 멤버들의 이름을 음반 표지에 적는 일은 매우 드물어서 그걸 찾아내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룹 사운드의 연주(세션)라고 하더라도 전통적 악단에 의한 편곡과 절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직업적 작곡가의 전통적 편곡에 전기 기타의 편곡을 추가한 정도가 당시 레코딩의 지배적 관행이었다. 아, 그리고 물론 당시 한국의 스튜디오 레코딩의 수준은 아직 ‘모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 사운드가 ‘독집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자작곡을 녹음하는 일도 음반의 흥행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그룹 사운드가 레코딩에 참여한 음반은 다른 가수들과의 ‘옴니버스 음반’이거나 아니면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한 음반이고 독집은 아주 드물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쟈니 리와 키 보이스의 스플릿 음반의 경우 키 보이스가 연주를 담당하고 앞면은 쟈니 리의 노래를, 뒷면은 키 보이스의 노래와 연주를 각각 수록한 경우다. [정원과 샤우더스 전집]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정원이 노래를 부른 트랙과 샤우더스가 노래를 부른 트랙이 앞면과 뒷면으로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음반들에 수록된 그룹 사운드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번안곡’들이다. 따라서 ‘록 음반’을 ‘개별 밴드가 자작곡을 녹음한 독집 앨범’이라고 협소하게 정의하는 사람에게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그룹 사운드의 음반은 ‘록의 선사 시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왜 창작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도 ‘당시 그룹 사운드에게는 음반을 위한 시장은 고사하고 연주할 공간마저 미 8군 무대를 제외하고는 드물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자기의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 한국에서 청년 취향의 음악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소수의 향유물에 그치고 있었다.주)

주) 팝 음악을 비롯한 젊은 취향의 음악의 전파와 수용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다룰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몇 가지 지적해 둘 것이 있다. 먼저 1950년대 중후반에는 돌체, 은하수 등의 음악다방이, 1950년대 말부터는 디쉐네와 세시봉 등의 음악감상실이 생겨났고, 음악감상실은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음악감상실은 충무로, 종로, 명동 등 서울의 일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젊은 취향의 음악은 ‘매스 미디어’로부터는 소외되어 있었다. 민방 개국 뒤 음악감상실의 인기 DJ들이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음악의 대량전파 시대로 이행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연주인이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할 국내의 무대가 탄생한 것은 1960년대 후반 ‘생음악 살롱’이라는 이름의 전문 공연장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명동과 종로 일대에 존재했던 은성 살롱, 닐바나 살롱, 미도파 살롱, 코스모스 살롱 등이 이때 등장한 새로운 문화 공간들이었다.

이 점에 대해 음악의 생산뿐만 아니라 음악의 수용과 관련된 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196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의 ‘청년’은 아직 ‘청년다운 성격’을 구비하지 못했고, 따라서 ‘청년 문화’는 아직 수면 위로 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을 거친 탓에 한국에서 베이비 붐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야 시작되었고, 그래서 1960년대 한국의 청년 세대는 인구학적 비율 면에서도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고, 이 점이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른 조건이었다. 물질적 풍요나 성 혁명이란 것도 아직은 요원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록 음악은 그저 수면 이하에서만 꿈틀거리는 것으로 머물렀을까. ‘중심부’에서는 1967년 캘리포니아에서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가 절정을 맞이하고, 1969년 뉴욕주의 한 농장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이 개최되면서 록 음악이 단지 대중음악이 아니라 반문화(counterculture)의 중요한 효소가 되었던 바로 그 시점에도 ‘주변부’인 한국에서 록 음악은 숨죽이고 있었을 뿐일까. 하지만 한국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록 음악은 수면 위로 분출했다. 1968년 말 신중현이 작곡하고 펄 시스터즈가 노래한 “님아”가 주류 대중음악 시장을 두드렸고, 1969년에는 (후기) 키 보이스가 그룹으로서는 처음으로 인기 스타가 되었고, 김홍탁이 새롭게 결성한 신예 그룹 히 화이브(He 5)도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수면 이하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1968-9년 한국 그룹 사운드의 동향을 ‘소울 & 싸이키’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영미 대중음악계에서 ‘소울’과 ‘싸이키델릭’은 상이한 음악 장르이자 상이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그런 구분이 엄격하게 유지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울 & 싸이키’는 한국에서 록 음악과 록 문화가 ‘컬트’를 넘어 문화로 발전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매스 미디어용 용어였다. 다음에는 이 ‘폭발’의 현장으로 가 보자. 1960년대의 한국의 음악 문화에 대한 수박 겉핥기식 소개에 대한 ‘미진함’은 별도의 연구로 보완하기로 하고… 20020901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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