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보드 게시판에 올려주신 ‘카우보이’님의 글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그러나 거의 원문 그대로) 실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름은 사계절 중에 가장 신경증적이고 흉폭하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나 했던 폭우와 태풍이 기승을 부렸고 그 때문에 휴가를 망친 사람들도 많으리라. 나를 포함해… 그리고 없는 사람에겐 여름이 낫다는 말도 수해를 입거나 에어컨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 앞에선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여름은 극단적으로 싫어하거나 아니면 광적으로 좋아하는 계절이기 쉽다. 나는 여름에 태어난 사자자리지만 여름을 싫어한다. 여름이 되면 단순경박해지기 쉽다. 심사숙고하지 않을 가능성도 많고 노느라 돈만 축낸다. 상처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기 때문에 통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연인들이 가장 많이 이별하는 계절은 여름이지 싶다.

원래 별다른 피서 계획도 없었지만 집에서 뒹굴면서 시원한 음악이 위로가 되리라는 확신에 가지고 있는 CD와 음악 파일을 뒤졌다. [weiv] 필진들의 추천곡도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 여학생에게 테이프 구워(?) 선물했다가 싸이코들이 듣는 음악 같다고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내가 골라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오후에 곡을 고르고 CD를 굽고 하는 것이 귀찮으면 Pulp Fiction OST나 심수봉 정도를 걸고 낮잠을 자면 될 것 같긴 하지만……

여행을 귀찮아하고 수영을 못해서 그런지 여름에 flower-printed 셔츠를 입고 해변으로 캠핑을 떠나는 내 모습은 익숙하지 않으며(어느 여름 지하철에서 똑같은 빨간색 꽃무늬 셔츠를 입고 계셨던 대머리 아저씨와 대면한 후로는 옷이라는 생각도 안 든다 -.-), 응당 해변도로를 질주할 때 들을만한 편집 음반도 그닥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편집한 여름용 CD는 집에서 비디오나 쌓아놓고 휴가를 보낼 때나 잠 못 이루는 열대야를 대비한 것이다. 더운 여름밤에 모과이(Mogwai)나 제스민(Jessamine)같은 잡음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는 것은 못 견딜 노릇이기 때문에……

다소 상투적이지만 첫 곡으로는 서프록이나 경쾌한 로커빌리 정도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치 보이스(Beach Boys)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따위(?)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고역이다. 그렇다면 펑키하면서도 경박스럽지 않은 아메리칸 포스트펑크 밴드들의 곡이 제일 무난할 듯 싶다. 로커빌리 리바이벌, 혹은 사이커빌리(Psychobilly : 싸이키델릭 로커빌리의 의미?) 밴드 크램프스(The Cramps)의 “Human Fly”는 그들의 데뷔 앨범에 실린 곡으로서 너무 로킹(rocking)하다 싶긴 하지만 엑조틱한 느낌의 포이즌 아이비(Poison Ivy)의 기타 연주와 익살스런 럭스 인테리어(Lux Interior)의 보컬은 여름 오후의 지루함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리라.

이제 본격적으로 해질 무렵의 와이키키나 카리브해를 연상시키는 쿵짝거리는 곡들을 배치하려 한다. 알렉스 깁슨(Alex Gibson), 크리스 깁슨(Chris Gibson), 패트릭 깁슨(Patrick Gibson) 삼 형제로 구성된 깁슨 브라더스(Gibson Bros. : Gibson Brothers Band라 하니 정말 깨는 밴드명이다 -.-)의 “Cuba”는 라틴팝에 브러스를 가미한 그루브 넘치는 곡이다. 또 말이 필요 없는 고전중의 고전 “Summertime”을 빼놓을 수 없겠는데 수많은 버전 중에 나는 빌리 스튜어트(Billy Stewart)의 것을 좋아한다. 소울풀한 보컬과 조화를 이루는 뿜빰거리는 브러스 반주가 부담스럽지 않아서이다. 다음 곡은 벨기에 출신으로 알려진 유로-라틴팝 밴드 챠카챠스(Chakachas)의 “Jungle Fever”이다. 물론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의 명곡 “Jungle Boogie”와는 다른 곡이다. 이 곡은 훵키한 기타 연주와 브러스, 봉고 리듬의 교감도 좋지만 신음소리 같은 남녀 보컬이 정글에서 질식하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이열치열인 셈이다.

여름의 단순경박함에 버블검 팝(bubblegum pop)만큼 어울리는 장르도 드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과이 등의 엄숙주의와는 완벽한 상극이니 말이다. 앤디 킴(Andy Kim)은 캐나다 태생의 재능있는 송라이터로서 몽키스(Monkees) 등에게 곡을 주기도 했지만 그가 부른 노래는 유독 ‘Baby’가 많이 들어간 제목의 사랑타령 일색이다. 물론 이런 닭살스런(?) 노래 한 번 안 불러본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한 적 있나요? 당신을 껴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그건 설명하기 어려워요…’ 이렇게 말하는 “Baby I Love You”의 도입부는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골동품 뒤지기는 이쯤 해두고 좀 더 모던하면서도 환각적인 밤을 맞을 필요가 있겠다. 대안적 록음악 중 열대 풍 이국취향을 자극하는 밴드는 단연 픽시스(Pixies)이다. 이들의 대표작 중 하나인 “Wave Of Mutilation”은 이들의 대표 앨범인 [Doolittle]에 수록되어 있으나 부틀렉(bootleg) 앨범에 실린 해변용(Surf) 버전이 훨씬 좋다. 이 곡은 킴 딜(Kim Deal)의 둥둥거리는 베이스 소리에, 에코가 강하게 걸려 있지만 절제된 조이(Joey)의 기타연주가 질량감 없이 유랑하고 블랙 프랜시스의 나른한 보컬이 대양으로 침잠하는 듯한 아름다운 곡이다. 여름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다음은 픽시스와 서프록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사이키델릭 펑크(psychedelic punk) 밴드 클리닉(Clinic)의 “Cement Mixer”를 들어야겠다. 이 곡은 EP 모음집에 실려 있는 초창기 곡으로 All Music Guide에서는 이들의 사운드를 팽팽한 긴장감(taut)과 통통튀는(chugging) 기타 스크래치로 묘사하고 있고, 이 곳 [weiv]에서는 신작 [Walking With Thee]에 대한 리뷰에서 이들의 음악이 ‘초현실적이며 기묘하다’라고 쓰고 있으나,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멜로디에 드라이빙감이 강한 기타 리프가 주도하는 싸이키델릭 팝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좀 황당한 것은 이들이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음악을 ‘상처받고 지칠 때 영혼을 위로하는 치료약’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엔 뇌를 스크래치 당할 만큼 신경증적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한가? 무료하고 답답한 여름밤에 이런 자극이 땡기는 것을……

여름에는 호러영화를 많이 보지만 사실 막상 비주얼로 펼쳐지는 실현된 공포보다는 청각을 자극해 상상하게 만드는 무서운 음악이 더 썰렁하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좋을까? 얼핏 떠오르는 황병기 선생의 연주나 호러 프로그레시브 고블린(Goblin) 정도? 허나 이런 건 졸릴 것 같고 더 노골적인 공포를 원한다면 수어사이드(The Suicide)의 “Frankie Teardrop”이 제격이다. 이들은 보컬인 앨런 베가(Alan Vega)와 키보디스트 마틴 레브(Martin Rev)의 듀오로 1971년 뉴욕에서 결성된 뉴욕 펑크 계열의 밴드인데, 키보드를 연주하긴 하지만 이들에 대한 소개에 신스팝이라는 발랄한 용어가 등장하는 건 정말 아이러니다. 그들의 셀프 타이틀 데뷔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1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고장난 선풍기나 앰프에서 출몰할 법한 웅웅거리는 노이즈 위로 앨런의 중얼거리는 말소리와 고문을 당하며 연주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괴한 비명소리만 들려오는 가학적인 음악이다. 집에서 야밤에 스피커로 틀면 쫓겨나거나 신고 들어오기 딱 좋은 곡이니 얼마나 훌륭한 여름 음악인가!

신경증과 공포엔 위로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다음으로 흘러나오는 인디팝 밴드 어섹스 그린(Essex Green)의 ‘Mrs. Bean’은 통기타 반주에 맞춰 부드럽고 밝게 노래한다. 심지어 인트로에는 청아한 플룻 소리까지 들려오니 이 곡만큼은 내가 듣는 음악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여동생에게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레이디버그 트랜지스터(Ladybug Transistor)나 트렘블링 블루 스타즈(Trembling Blue Stars) 류를 좋아하는 친구는 이 앨범을 명반으로 꼽던데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라틴 기타 연주를 빼놓으면 여름밤은 좀 더 신경증적이게 되리라. 로스 인디오스 타바야라스(Los Indios Tabajaras)는 안테노 리마(Antenor Lima)와 나탈리치오 리마(Natalicio Lima) 두 형제로 구성된 브라질 출신의 듀오이다. 이 곡은 1964년에 발표된 그들의 두 번째 앨범 타이틀곡인데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1990)에 삽입되면서 유명해졌다. 대부분의 라틴 기타 연주곡이 여름에 잘 어울리지만 이 곡은 특히 슬로 템포의 리듬 위로 흐르는 멜로디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느낌을 갖게 하는 아름다운 기타 야상곡이다. 특히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阿飛:장국영 분)가 생모를 만난 후 야자나무 숲길을 휘청거리며 걸어나올 때 이 곡이 흘렀던 기억 때문에 더욱 열대 풍의 엑조틱한 무드를 풍기는 것 같다.

아무리 기상이변이 심해지더라도 여름에서 겨울로의 비약은 불가능하겠지만 만일 여름에서 바로 겨울이 된다면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 호주 같은 남반구의 크리스마스는 보다 정열적일 것이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에 불쾌하게 땀을 흘리며 듣는 캐럴은 어떨까? 로우(Low)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는 “Blue Christmas”는 널리 알려진 대로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스, 마일스 데이비스 등 많은 뮤지션들이 연주했던 성탄절 고전이다. 로우의 미미 파커(Mimi Parker)는 슬로코어니 하는 장르적 색채와는 무관한 담담하고 고즈넉한 목소리로 여름밤을 차분히 식혀준다. ‘그대가 없는 우울한 크리스마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를 고독한 크리스마스……

이제 덥지만 잠을 잘 시간이다. 모리씨(Morrissey)가 부르는 “Moon River”. 그의 몽환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목소리로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엔딩 트랙으로 적당할 것 같다. 이 곡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기타를 치며 부르던 사랑스런 소품이었지만 모리씨는 이 곡을 무려 9분 30여 초 동안 길고 긴 전자음의 딜레이와 드론 노이즈로 뭉개놓았다. 한 여름밤 자장가로 삼기엔 아련히 들리는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다소 청승맞긴 하지만 어느새 나는 꿈속으로 페이드 아웃(fade out) 될 지도 모른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가보니 건너 방에서는 어머니가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로운 여름밤이다. 20020821 | 카우보이 [email protected]

List Of Compiled Songs

The Cramps – Human Fly [Gravest Hits](1979)
Gibson Bros. – Cuba [Cuba](1995)
Billy Stewart – Summertime [Unbelievable](1966)
Chakachas – Jungle Fever [Jungle Fever](1972)
Andy Kim – Baby I Love You [Baby I Love You: Greatest Hits](1999)
Pixies – Wave of Mutilation(U.K. Surf) [Bootlegs : Velouria](1991)
Clinic – Cement Mixer [EP Collection : Clinic](1999)
The Suicide – Frankie Teardrop [Suicide](1977)
Essex Green – Mrs. Bean [Everything Is Green](1999)
Los Indios Tabajaras – Always In My Heart [Always in My Heart](1964)
Low – Blue Christmas [Christmas](1999)
Morrissey – Moon River [World of Morrissey](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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