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717031142-cassette2학창시절에는 나만의 카세트테이프 만들기를 무척 즐겼다. 이 앨범 저 앨범에서 좋아하는 트랙들을 골라 나만의 컴필레이션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고, 용돈이 떨어졌을 때는 친구들의 생일선물로도 유효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한 때는 내가 만든 테이프가 입 소문을 타고 퍼져 쇄도하는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테이프 만드는 일이 뜸해졌다.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장만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테이프를 만들어도 주변에 줄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테이프 만들기에 대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살던 중 웨이브에서 여름 특집을 기획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형식은 자유란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름에 듣기 좋은 음악을 모아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시대에 발맞추려면 ‘여름 특집 CD 굽기’가 더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CD보다는 카세트테이프를 만들 때 그 내용물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생각하고 정성을 많이 들였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순히 테이프의 경우 오류를 교정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CD보다는 카세트테이프가 내용적으로 더 만족스러웠던 경우가 많았다.

자 그러면 제작을 시작해보자. 테이프의 내용적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를 일관하는 분위기를 결정해야 한다. 좀 상투적이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피서나 휴가 같은 기분 좋은 일들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 여름은 기본적으로 더위-불쾌지수-짜증의 삼각함수다. 이런 조건에서 우울하거나 골치 아픈 음악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너무 자극적이거나 무거운 음악도 사절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가볍고 신나는 음악 아니면 장마철의 빗줄기를 보면서 들을 수 있는 분위기 있는 음악 정도일 것이다. 한국 여름의 양면성을 두루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둘 다 선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여름 음악’하면 올디스 넘버들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에 나온 음악들은 낙관적이면서도 과시적이지 않아 언제나 신선한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만일 이 테이프가 나 혼자 듣기 위한 것이었다면 토네이도스(The Tornadoes)의 “Telstar”나 채드 & 제레미(Chad & Jeremy)의 “A Summer Song” 같은 노래들로 앞뒤를 꽉 채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데도 아니고 웨이브에 쓰는 글에 이런 곡들을 선곡한다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벌써부터 ‘쿨하지가 않잖아!’라는 원성이 귀에 꽂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나의 취향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웨이브의 쿨한 기호에도 부합할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복고풍 음악에서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런 발견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복고풍 음악이 양적으로는 많을지 몰라도 질적으로까지 우수한 작품을 발견하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질적인 만족을 추구하려면 엄격한 기준을 세워 선별에 선별을 거듭하는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분위기의 흐름과 일관성에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선택할 수 있는 곡의 개수는 더욱 제한되고 만다. 따라서 욕심부리지 않고 60분 짜리 테이프의 한 면만 채우겠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20020717031249-summer3먼저 ‘여름’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서프기타 음악으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할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그룹 브라디포스 훠(The Bradipos IV)의 음악은 신나면서도 전통주의적이어서 첫 곡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일단 ‘정통파’로 분위기를 조성한 뒤 ‘변칙’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로스 스트레이트재키츠(Los Straitjackets) 역시 정통파 서프 록이지만 브라디포스 훠보다는 좀더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기 때문에 점층 효과를 고려해 두 번째 곡으로 선곡했다. 변칙으로 분류될 수 있는 맨 오어 애스트로맨(Man or Astroman?)의 공상과학 서프 록과 아쿠아 비스타(Aqua Vista)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재해석은 서프 음악의 단순함에서 오는 단조로움을 피하고 보다 다양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 곡으로 배치했다. 사실 이 곡들 외에도 선곡할만한 곡들은 많지만, ‘금새 지겨워진다’는 서프 록의 근본적 한계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자제했다. 네 곡 정도면 다소 아쉬운 감은 있지만 지루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서프 록의 흥겨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분위기를 새롭게 전환하기 위해서 같은 시대의 느낌이 묻어 있는 사이키델릭 팝을 선택했다. 에이슬러 셋(The Aisler Set)의 “Long Division”은 서프 록에서 사이키델릭 팝으로 다리를 놓는데 손색이 없는 곡이다. 다소 약한 감이 있어서 처음에는 뺐던 곡인데, 이 자리에 놓고 보니 드러나지 않게 분위기를 바꿔주는 묘기를 발휘한다. 덕분에 키커(Kicker)의 “Boy Have You Got It?”의 등장이 좀더 부드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경쾌한 비트와 활기찬 여성보컬 그리고 화려한 오르간 사운드는 오래된 삼류 흑백영화에서 본 서양의 1960년대 사이키 클럽 또는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 같은 한국의 1970년대 분위기로 듣는 이를 인도한다. 원래는 이런 스타일의 곡들을 좀더 많이 선곡하려고 했는데, 키커의 곡 만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곡 이후에 잇달아 등장하는 컴온스(The Come Ons)와 베이비 우드로즈(Baby Woodrose)의 노래들은 간결한 멜로디와 명쾌한 기타리프가 주도하는 곡들로, 아쉬우나마 “Boy Have You Got It?”의 감정적 연장선상에서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다.

더트밤스(The Dirtbombs)의 “Chains Of Love”는 사이키델릭 팝 컬렉션에 약간의 변화를 초래한다. 팝/록 취향을 주조로 한 지금까지의 곡들과 달리 이 곡은 템테이션스(The Tempations)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라지 소울 넘버다. 그 동안의 곡들이 다소 쿨한 느낌이었다면 이 곡은 화끈한 느낌이라는 것이 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선택의 여지가 좀 더 있었다면 이 곡을 굳이 넣지는 않았을 텐데 별로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곡도 그 자체로는 훌륭한 작품이고 신나기는 다른 곡들과 매한가지다. A면의 마지막으로 선곡된 플레이밍 스타즈(The Flaming Stars)의 노래는 여기서 가장 무겁고 록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곡들에 비해 분위기가 크게 동떨어지거나 튀지는 않는다. 단지 좀 묵직하고 드라마틱하게 A면의 막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 “You Don’t Always Want What You Get”이라는 제목이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 노래와 비슷하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두 곡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미소를 유발하는 장난스러운 제목과 달리 곡 자체는 좀 진지한 편이다.

복고풍 음악은 일단 A면으로 마무리하고 B면에서는 분위기를 크게 바꾸기로 했다. 만족할만한 복고풍 레퍼토리가 떨어져가서이기도 하지만 ‘비 오는 날이나 여름밤에 편안히 들을 수 있는 감미로운 팝 음악’에도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 부합하기로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Eighties Fan”만한 곡도 드물다. 이 곡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앨범 버전은 프로듀서로 참가한 스튜어트 머독(Stuart Murdoch)이 지나치게 잔재주를 많이 피운 탓에 거부감이 좀 든다. 이 곡의 소박 담백한 아름다움은 EP버전에서 훨씬 잘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당연히 여기서는 EP버전을 선곡했다. 이어지는 살룬(Saloon)의 “Electron” 역시 이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곡인데,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선율과 약간의 애조가 깃든 보컬은 여름밤의 몇 분 동안이나마 달콤한 낭만에 빠져들도록 한다. 내가 B면을 팝 음악으로 채우기로 결심한데는 이 두 곡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앞선 두 곡만큼 감미롭지는 않지만 멜리스(Melys)의 “Chinese Whispers”도 매우 멋진 노래다. 스테레오랩(Stereolab)을 연상시키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작품으로, 앞선 곡들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좀더 상큼한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이 곡을 B면의 첫 곡으로 염두에 두었는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세 번째에 놓여지게 되었다. 헤프너(Hefner)는 근작 앨범에서 신쓰팝을 시도함으로써 비평적으로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을 초래했다. 그러나 “When Angels Play Their Drum Machines”는 참으로 듣기 좋은 노래인 것 같다. 굳이 헤프너라는 선입견을 갖고 대하지만 않는다면 이 곡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훌륭한 팝 넘버다. 멜로디를 쓰는 재주에 관해 말한다면 트렘블링 블루스타즈(Trembling Blue Stars)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자매 그룹인 애버딘(Aberdeen)의 음악을 이들의 노래에 나란히 연결하는 것이 다소 뻔한 선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배열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20020717031142-summer1여기까지 진행시키고 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음악이 많이 빨라지고 강해진 듯 하다. 여기에 베어수트(Bearsuit)의 “Hey Charlie, Hey Chuck”까지 선곡하고 나면 출력과 템포는 거의 록 음악의 수준(?)에 육박하고 만다. 그러나 이 귀엽고 앙증맞은 곡을 차마 저버릴 수는 없다.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이나 여름밤에 편안히 들을 수 있는 감미로운 팝 음악’이라는 애초의 취지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어지는 톰폴린(Tompaulin)의 음악은 애초에는 후보에도 끼지 못했던 곡이다. 그러나 후보로 생각했던 곡들이 예상을 깨고 이 대목에서의 음악적 흐름에 영 어울리지 않음을 발견했다. 고민 끝에 이들의 음악 중 가장 밝은 편인 “My Life At The Movies”를 끼워 넣어봤다. 생각보다 결과가 훨씬 좋았다. 멀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Mull Historical Society)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 동안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Watching Xanadu” 하나만큼은 늘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어느덧 흥겨운 분위기가 돼버린 이 테이프의 맥락에 잘 부합하는 곡으로 생각되어 선곡했다. B면의 마지막 곡은 마블러스 메커니컬 마우스 오르간(The Marvellous Mechanical Mouse Organ)의 “Emperor’s Garden”이다. 틴더스틱스(Tindersticks) 풍의 단아하고 차분한 챔버 팝 발라드 곡인데, 마지막 곡에서라도 애당초 의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했다. 아울러 그 동안의 약간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테이프를 조용히 마감하기에 적절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여름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름을 위한 음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면 그게 가장 좋은 여름 음악인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낀다면, 인생살이가 그리 재미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러면서도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용기는 나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자잘한 구실을 찾아 잠시 분위기를 바꿔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여름 특집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치한 발상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유치함에 동참하고 싶다. 이런 유치함이 가져다 주는 잠시 간의 즐거움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똑똑하고 싶지는 않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핑계 아닌 핑계로 삼아 마음껏 유치해질 수 있다면 여름은 분명 특집을 꾸밀만한 가치가 있는 계절일 것이다. 유치함을 즐기면서도 그것이 유치한 것임을 알만큼 현명한 사람들과 함께 이 테이프를 즐기고 싶다. 20020712 | 이기웅 [email protected]

선곡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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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A
1. Kissin’ Bonobo Roll (The Bradipos IV)
2. Kawanga! (Los Straitjackets)
3. Polaris (Man Or Astroman?)
4. The Model (Aqua Vista)
5. Long Division (The Aisler Set)
6. Boy Have You Got It? (Kicker)
7. Red Lips And Fingertips (The Come Ons)
8. Flaminica (Baby Woodrose)
9. Chains Of Love (The Dirtbombs)
10. You Don’t Always Want What You Get (The Flaming Stars)

Side B
1. Eighties Fan (Camera Obscura)
2. Electron (Saloon)
3. Chinese Whispers (Melys)
4. When Angels Play Their Drum Machines (Hefner)
5. The Ghost Of An Unkissed Kiss (Trembling Blue Stars)
6. Sink Or Float (Aberdeen)
7. Hey Charlie, Hey Chuck (Bearsuit)
8. My Life At The Movies (Tompaulin)
9. Watching Xanadu (Mull Historical Society)
10. Emperor’s Garden (The Marvellous Mechanical Mouse 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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