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2년 4월 5일
장소: 마포 한강변 [weiv] 안가(安家)
인터뷰어: 신현준

‘전설적 언더그라운드 포크 음악인’ 김두수와의 만남은 매우 힘들고도 쉬웠다. 힘들었던 이유는 그를 만나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무도 연락처를 몰랐기 때문이었고, 쉬웠던 이유는 작업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의 매니저(?)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지 않는 김두수와 일정을 맞추는 일이 다소 힘들어서 4월 5일 공휴일 오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예상과는 달리 차분하고 예의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처음 보는 순간부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같았다. 노래할 때의 귀기어린 목소리와는 다르게 말하는 목소리는 ‘구수하다’고 할 정도로 다정다감했고, 대구 억양이 남아 있는 말투도 정겨움을 더했다. 다소의 덕담이 오간 끝에 첫 질문이 나왔다. 상투적인 질문이.

‘언더그라운드 포크’에 대하여

문: 10년만에 앨범을 냈는데 그 동안 뭐하고 지내셨는지요?
답: (웃음) 그런 질문 많이 받았는데 그냥 일반적 삶을 살았습니다.

문: 서울을 떠나신 게 언제였죠?
답: 연도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1990년대 초에 양평에 갔고, 강릉에 산 지는 7년쯤 되었습니다.

문: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고 은둔자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답: 그건 머 활동을 안 했다는 이야기겠죠. 제가 속세를 떠나 탈속을 해서 어디로 숨어든 사람은 아닙니다.

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답: 글쎄요. 제 음악을 잘 받아주지도 않고 제가 염증을 느낀 부분도 있죠. 제도권 시스템 같은 것들에 대해서.

문: 마지막 앨범 낸 것이 1991년이면 그래도 그때는 제도권 시스템이 지금 같지는 않았던 때라고 생각하는데…
답: 지금 어떤지는 제가 잘 모르겠구요… 그때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음반사와 음악인들 간의 계약관계가 바람직하지는 않았죠. 오히려 지금은 자주 공개가 되고 하는데 그때는 장막 뒤의 일들이었으니까.

문: 2집을 발매한 동아기획과의 관계도 그랬다는 말씀이신지…
답: 그분들한테는 제가 좀 미안하죠. 음반을 내자마자 앓아 누워서 활동을 별로 못 했으니까. 동아기획하고는 그런 건 많지 않았구요. 그분들은 아마 내가 아픈 줄도 몰랐을 겁니다. 조동진씨나 그쪽 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하고 전화를 거의 안 하고 살았습니다. 전화라도 하고 좀 만나야 근황을 알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것이죠.

문: 그런 행적이 김두수씨를 이성원, 곽성삼과 더불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포크 3인방’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답: 그런 규정에 대해서도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일보에 있는 최규성씨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음악적 경향이라기보다는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것이라든가 한동안 활동하지 않았다가 10여 년만에 컴백한 것을 두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문: ‘언더그라운드 포크’라는 규정 가운데 ‘포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본래 포크(folk)란 민속음악을 포크라고 하는데… 기타, 어쿠스틱 기타 반주를 많이 하면 포크라고 부르는데 용어가 이상하게 쓰이는 것 같아요. 가든이 고깃집이라고 쓰이는 것처럼…

문: 그러면 자신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답: 그건 청자들의 자유 같습니다. 듣는 분들이 자기들 기준에 부합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로서는 ‘김두수가 포크 성향이 있다’는 정도가 무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문: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에 특별히 비중을 두시는 것도 아니신가요?
답: 그것 역시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죠.

이번 음반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누가 들을까.

문: 그렇다면 김두수씨에게 영향력을 미친 음악인이나 음악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꼭 이번 음반에 국한되는 질문이 아니라…
답: 그렇게 결정적으로 한 사람이 있다기보다는 모든 음악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없고… 저도 1970년대 음악들의 감상자의 한 명이었으니까… 특정한 스승이 있다거나 사모했다거나 깊이 빠져들었던 적은 없어요. 이번 앨범에서 고든 라이트푸트(Gordon Lightfoot)의 곡을 번안해 부른 것도 영향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김두수 – 새벽비(원곡: Gordon Lightfoot – Early Morning Rain) ([자유혼(2002)] 수록)
김두수 – 햇빛이 물에 비쳐 반짝일 때(명상을 위한 소리 ad-lib)([김두수 3집](1991) 수록)

문: 모호하네요(웃음). 김두수의 3집은 ‘프로그레시브’하다는 평이 있는데, 혹시 지금이라도 떠오르는 음악이 있으신가요?
답: 글쎄요. 역시 특정한 음악이라기보다는 연주를 자유롭게 하는 음악, 가령 A에서 B로, B에서 C로 진행하는 식이 아니라 자유롭게 형식을 펼치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그런 실험도 해 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역시 모호하죠?(웃음)

문: 최근 음악도 많이 접하시나요?
답: 정보가 많이 부족합니다. 예전에 갖고 있던 LP를 손님들이 오면 가끔 골라서 듣는 정도죠.

문: 이번 음반은 직접 프로듀싱하신 건가요?
답: 프로듀싱인지는 모르지만 작업을 직접 주관했습니다. 그런 게 프로듀싱 맞나요?

문: 통상 ‘포크 가수’라고 그러면 사운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이 있고 그래서 젊은 음악 감상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두수씨 이번 음반은 사운드에 세심한 신경을 쓴 면이 보이던데.
답: 사운드에 신경을 쓴 것 같습니까? 특별히 사운드에 집착한 것은 아니고, 제가 제일 바라는 건 저의 감정이 전달이 잘 되는 것이죠. 아무리 훌륭한 반주라도 노래 분위기를 해치면 저는 즉각 중단시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사운드보다는 전달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운드의 프로듀싱과 노래의 편곡 사이에 다소 소통의 장애가 있었다.)

문: 이번 음반은 사운드가 화려하지는 않고 소박하고 정갈해 보입니다. 저는 이전 앨범에서의 날카로움을 기대했는데 처음에는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여러 번 들으니까 나름의 맛이 있었지만…
답: 이번에는 소품들, 편안한 곡들로 선곡해서 꾸몄습니다. 처음에는 40곡쯤 되었는데 추리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죠. 앨범을 3년 전부터 준비했으니까 미리 써 놓았던 곡들도 있었고.

문: 지방에 거주하면서 서울을 왕복하면서 레코딩하시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만…
답: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집에 A-Dart 8트랙 레코더에서 먼저 노래하고, 기타 치고, 코러스 넣고 그 테이프를 서울로 가지고 와서 더빙을 했습니다. 악기 연주를 나중에 했으니까 역순으로 한 셈이죠. 더욱 어려웠던 점은…세 션 연주인을 선택하는 폭이 우리나라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몇몇 사람밖에 없고, 세션맨을 제 의도에 맞게 구하는 게 힘들었죠. 제가 12-3년만에 녹음을 하니까 전에 연락되던 분들이 이민도 가고 그만 두기도 하고 연락도 안 되더군요. 1집에서 베이스 연주하던 분은 미국으로 이민가셨고… 그분 성함이 서… 아, 기억력에 문제가 많습니다(웃음).

문: 과거와 비교해서 요즘 스튜디오 여건에서 어떤 변화를 느끼셨는지요?
답: 1집은 장충 스튜디오, 2집은 서울 스튜디오, 3집은 현대음향 스튜디오를 이용했는데, 이번에 해 보니까 스튜디오가 소규모화되어서 집중력은 좋아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엔지니어들이 굉장히 권위적이었습니다. 나이도 많은 분들이었고, 그래서 OK 사인을 엔지니어가 다 내 버렸죠. 제작자 측에서도 비용 때문에 ‘프로’ 수를 단속했고… 1집은 일곱 프로만에 끝내라고 오더가 떨어졌었죠. 반주하는 데 세 프로 노래 한 프로, 믹스다운 한 프로… 이러니 음반이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죠. 그때는 가수보다도 편곡자가 정해진 프로 내에 끝내줘야 했던 때였죠. 레코딩은 많이 하면 할수록 뭔가 달라지는 건데…(참고로 한국 음악산업에서 ‘프로’란 영어로는 ‘레코딩 세션(session)’의 단위이고 통상 3시간 반이다)

김두수 – 작은 새의 꿈(원제: 철탑 위에 앉은 새) ([김두수 1집](1986) 수록)

문: 요즘 대중음악계의 환경을 볼 때 이번 음반 같은 경우 어떻게 ‘홍보’하실지 솔직히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답: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문: 아니 그런 말이 아니구요. 어떻게 청중을 찾아나가시려는지 궁금하다는 점입니다.
답: 그건 옆에 있는 리버맨 뮤직에 전적으로 의뢰한 것이고, 그게 제 파트는 아니죠. 저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고… 일종의 역할분담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그런 말도 아니고(웃음) 최근 ‘베테랑의 컴백’이라는 식으로 일정한 흐름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노스탤지어에 머문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두수씨도 의도하지 않게 그런 흐름으로 매이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왠지 말이 잘 안나오네요(웃음).
답: 제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데 명수입니다. 우선, 저는 전혀 베테랑이 못 됩니다. 그리고 옛 분위기를 답습한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솔직히 고백해서 ‘동료’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 불행입니다. 오히려 교류하면서 보완도 되고 같은 흐름도 가질 수 있을 텐데 저는 그런 부분이 없죠. 이번에 세션으로 참여한 김광석씨 같은 경우도 블루스 기타를 잘 치시니까 한 곡에 참여하신 것이지 꾸준히 교류해 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예를 들어 하덕규씨의 경우 함춘호씨같이 그렇게 기타를 잘 치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기타리스트도 아닌데 제 스타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으니까 제가 해결해야 되는 거죠.

‘한국적’ 유토피아를 찾는 구도자?

문: 하덕규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김두수씨 음악이 하덕규씨 음악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실은 나의 개인적 견해다). 두 분의 음악 모두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구도자 같은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단지 다른 점은 김두수씨의 음악에는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서가 있는 점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 자세히 여쭤 보고 싶군요.
답: 한국 사람이니까 된장찌개, 김치찌개 먹고 한국적 토양 위에서 성장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요(웃음). 하지만 한국 음률이라는 게, 개념이 모호하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한 음률이 있지 않습니까. 꼭 집착하는 것은 아니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음률 같은 게 있습니다. 들으면서 편한 음률. 그걸 동양적이라고 해야 할지 한국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점은 생각을 하고 작곡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들어주시면 반갑죠.

문: 혹시 무슨 ‘선(禪) 사상’이나 신비주의 사상 같은 것에 심취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답: 하하.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고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음반 제작하시는 어떤 분이 제 음반을 듣고 ‘김두수는 분명 대마초 꾼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문: 대마초도 안 하는데 그런 음악이 나오는 건 다른 뭐가 있는 것 아닐까 해서 ‘사상’을 물어본 것입니다. 이번에도 “추상”이나 “Romantic Horizon” 같은 음악은 좀 난해하고 신비주의적 색채가 있는 것 같습니다. 2집에서 “청개구리 수희”나 B면의 수록곡들도 그랬던 것 같고…

김두수 – 추상 ([자유혼](2002) 수록)
김두수 – 내 영혼은 그저 길에 핀 꽃이려니 ([김두수 2집](1986) 수록)

답: 무슨 말인지? (그리고 “청개구리 수희”를 재생했다). 이게 그런 느낌입니까. 이건 이병우가 기타 친 것 같은데… 아, 이건 오베이션 기타를 이병우 기타를 빌려서 내가 친 겁니다. 기타가 없어서 빌려 달라고 했더니 빌려 줘서 제가 쳤죠. 근데 이 곡은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자취하던 방 맞은 편에 젊은 부부랑 딸 하나 세 식구의 가족이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고대 뒤쪽이었는데 두 분이 치킨집을 했었습니다. 밤에는 애를 데려갈 수 없으니까 머리를 홀랑 깎여 놓더라구요. 그게 안스러워서 만든 노래입니다. 걔 이름이 수희였어요. 말 무지하게 안 들었어요 청개구리 같다고 맨날 부모한테 얻어맞고. 그래서 여자애를 중머리를 해 놓았어요. 귀엽게 생겼는데… 걔도 많이 컸겠네요.

김두수 – 청개구리 수희 ([김두수 2집](1988) 수록)

문: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한국적인 정서’에 대해 목적의식을 가진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포크’가 ‘민속음악’이라고 한다면 이건 참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음악 하는 젊은 친구들은 ‘한국적 정서’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힘든 현상입니다.
답: 맞습니다. “망부석”을 부른 김태곤씨나 정태춘, 이성원, 곽성삼씨 등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면 후배들도 좋을 텐데 후배들도 너무 기댈 데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으니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선배들이 정립해 놓은 것도 없고 괜히 야단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겠죠. 선배들 탓이죠. 저를 포함해서. 그러니까 모방 일색으로 가니까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김두수 – 여로 ([김두수 1집](1986) 수록)
김두수 – 해당화 ([자유혼](2002) 수록)

문: 그런데 한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다르고…
답: 아쉽지만 그게 대세라면 할 수 없는 거죠. 소위 글로벌 시대에… 하지만 LP가 CD로 바뀌는 걸 보면 작아지고 편리해지고 좋은 것도 있지만, 하나 편리해지면 하나가 사라지고 아쉬워요. 아쉽죠. 예전 LP를 받아 들었을 때의 기분하고 CD를 요렇게 받아드는 기분과는 참 다르죠. 손으로 직접 닦고 올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CD를 듣다가 LP를 듣는 건 귀찮은가 봐요. 여기도 LP는 별로 안 보이고 CD 세상이네요(웃음).

그때를 아십니까?

문: 그러면 옛날 이야기를 해 볼까요? 성장기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고향이 대구라고 하셨나요?
답: 태생만 대구이고, 고향이라고 물으면 대구라고 얘기해야 되지만 대구에서 낳아서 마산에도 좀 살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성장했습니다. 대학교는 경북대 다니다가 그만 두고 1980년대 초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군대는 시력이 나빠서 가지 않았고…

문: 기타는 언제부터 어떻게 치기 시작하신 건지요? ‘독학’이셨나요?
답: 글쎄 어떻게 쳤더라…(웃음). 아, 선생이나 스승을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중학교 때 누나 친구한테 잠깐 C – Am – Dm – G7 뭐 이런 거 배운 적은 있죠. 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친 거죠(참고로 1집의 마지막 트랙은 저 코드 진행으로 이루어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문: 대학교 다닐 때 음악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답: 1986년에 첫 음반을 냈으니까 그전까지 대학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 같은 걸 했죠. 그때 무교동, 명동 등에서… 그때는 살롱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 김정호씨가 했던 운영했던 [꽃잎]이라는 곳이 있었죠. 거기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PJ 살롱]이나 [쉘부르] 같은 곳에서도 노래를 불렀고…

문: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들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답: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음악에 재능 있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음악의 길을 가지 않게 되더라구요,. 장래가 잘 보이지 않으니까. 음악 잘 하는 사람들이 다른 것에도 재능이 많으니까 조금 더 장래가 밝은 쪽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한다고 하면 장래가 정말 불투명하죠. 첫 장애물이 생계라는 거니까 많이들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죠. 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것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좋은 감상자가 되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만들 필요는 없죠. 길이 그쪽인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은 하지 마라고 그래도 음악을 하게 됩니다. 다른 길을 갈 사람은 아무리 붙잡아도 다른 길을 가게 되고…

문: 김두수씨의 경우 음악을 해서 좋은 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음악을 해서 좋은 점은 표현수단을 하나… 그러니까 출구라고 그래야 할까요. 표현의 출구를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했다면 사라져 버리거나 혼자만 알고 끝내버리니까 표현의 출구를 하나 가진다는 건 좋은 점이 있죠.

문: 무례한 질문이지만 음악을 해서 나쁘다거나 후회스러운 점은 혹시 있었는지요?
답: 그런 쪽으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표라든가 그런 게 있으면 좋은데, 거기까지는 아직 발전하지 않고 있고,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거죠.

문: 그래도 자신의 음악을 어떤 사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바램’은 있죠. 마음이 어지러울 때 마음의 위로나 평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음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자 바램이 있습니다. 그게 본래 음악이 태어난 이유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하다못해 동요라도 부르면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습니까. 그게 음악의 좋은 점이죠. 이번 음반을 듣고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좀 거칠었던 것도 편안하게 만들었죠.

그리고 자유롭게…

이후의 인터뷰는 정말 두서없이 되어 버렸고 문답이 아니라 대화 형식이 되어 버렸다. 나로서는 좋은 경험이었지만 독자들로서는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옮겨 본다. 이때 틀어놓은 CD 플레이어에서 그의 대표곡(?)이자 이번 앨범에 재수록된 “보헤미안”이 흘러나왔고 갑자기 기타 연주에서 닐 영의 영향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앞서 모호하게만 말했던 점에 대해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김두수 – 보헤미안([김두수 3집](1991) 수록)
김두수 – 보헤미안([자유혼](2002) 수록)

문: 혹시 닐 영 좋아하셨나요?
답: 닐 영 좋아했죠. 대단한 사람이죠. 음악이 설득력이 있죠.

문: 그런 분은 요즘도 활동하고 있고 최근에 신보도 나왔습니다. 젊은 음악 하는 친구들도 닐 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답: 아,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너무 조로하죠. 우리는 토양이, 그런 음악인을 키울 토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문: 앞으로는 나아질까요?
답: 나아지겠죠. 나아져야 되고…

문: 조동진씨를 한번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자기는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이 없다.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답: 하하. 그나저나 한번 찾아뵈어야 되는데…

문: 조동진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 뭐 누굴 지지한다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사전검열 같은 것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정치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답: 그때는 슬픈 노래도 못 했죠. 항상 희망적으로, 사랑도 희망적으로 끝나야 했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 비탄조라고 해서 빨간 줄을 그었죠. 그때 비하면 지금은 좋아진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해서는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하는 것은 없네요. 잘 모르니까 우선… 분명히 제 생활에 영향은 오는데, 저 같은 일반 서민한테 영향은 오는데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문: 정말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생계는 어떻게 꾸리시는지요? 저도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이라서 여쭤보는 겁니다.
답: 가난하게 사는 수밖에 더 있나요?(웃음), 정당한 수입이라는 건 인세나 계약금을 받는 것일 텐데 아직은 뚜렷한 성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과거 음반에 대해서도 받을라고 하면 조금 있을 텐데 그쪽으로는 찾아가 보질 않으니까 받은 게 없죠. 사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쪽으로도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후배들이 부당한 관행을 당해서 ‘선배들은 뭐 했느냐’고 말해도 욕 들을만 하죠.

문: 이번 음반이 잘 되셔야겠네요. 노래방에 들어가는 곡도 생기고…(웃음) 사실 요즘은 음반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음반은 홍보 수단이고 주 수입원은 라디오나 노래방이 된 것 같습니다.
답: 한국에서 음반은 타이틀곡 몇 곡만 들을 만 하니까 음반 사라는 것이 아니죠. 음반이 스타를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고, 음악이 아니라 자기 장사를 하는 거죠.

문: 그런 식은 아니라곤 해도 홍보를 하셔야 할 텐데…
답: TV보다는 라디오쪽으로 알아 보려고 합니다. 라디오의 경우 예전보다는 분위기가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라디오가 굉장히 파워가 강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매체가 다원화되었으니까 어떤 출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문: 개인적 바램으로는 모습을 직접 뵐 수 있는 공연 같은 걸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이 허락하시는지는 모르지만요. 공연 계획은 어떻게 잡고 계신지요?
답: 공연은 정말 잘 해야 되죠. 공연은 잘 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러니까 ‘감상’이 되는 공연을 해야죠. 예전처럼 기타 하나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녹음을 하면서 어려웠다고 말했듯이 세션 연주자들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앨범에 참가한 분들이 하면 제일 좋은데, 한 프로에 50만원은 드려야 하는 비싼 분들이고(웃음), 세션맨들은 바쁜 분들이라서 연습비도 드려야 하는데… 어쨌든 공연을 제대로 하려면 저변이 더 생겨야겠죠. 홍보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그 뒤에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말문을 잘 열지 않고 모호하게만 표현했던 그는 그 뒤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도 했다. 나 역시 머뭇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졌다. 그와 매니저에게는 그날 동숭동에서 세션 연주자들을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조금 늦게 가겠다”고 연락한 뒤 나와 동석을 계속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녹취를 하지 않아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학교 다닐 때 교사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당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은 뒤라서 “스위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가 마치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맞듯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경험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고 했다. ‘한국적 정서’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그도 어린 시절은 서양에 대한 동경으로 출발했던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두들겨 패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교사의 심뽀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시절에는 동료 음악인 이성원이 찾아와 병상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그 경험은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라는 산울림의 가사 같은 것이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인터뷰 내내 “나에게는 음악적 동료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故) 김광석이나 이원재처럼 ‘지금 다시 들어보니까 한국적’인 음악인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특히 김광석은 죽기 몇 일전 서울에 오랜만에 나왔다가 신촌에서 우연히 부딪혔을 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음악문화나 문화 일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은둔을 오래 한 사람이라서 정보에는 어두웠지만 판단은 그리 무디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서는 하루에 볼 일을 두 개 이상 처리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나는 대도시의 광기의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불현듯 나도 언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때 할 말은 준비해 두었다. 무리들이여, 안녕! 20020502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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