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은 작년으로 음악인생 30년째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고작 살아온 인생 30년 짜리가 본격적인 평가를 하기는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저 여기에서는 제 개인적인 삶에 끼어 들었던 양희은의 노래들을 반추해 보고 싶습니다. 동세대가 아닌 한 세대 다음에 받아들여진 양희은의 노래들의 의미와 지금 현재적 의미는 어떤 것일까 라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는 제 입장에서 불가능하므로 그저 시간을 반추하면서 제가 기억하는 것들, 그리고 주변의 다른 이들이 이야기해 왔던 것들을 그저 두서없이 펼쳐놓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1. 1970년대의 유산과 금지곡 시대

저는 어린 시절(아마도 1980년대 초반) 팝 음악보다는 가요를 더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건 가사를 못 알아듣는(지금은 얼마나 알아듣는다고?) 이유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라디오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재력-싸구려 불법복제 테이프라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누나의 취향이 그대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누나가 듣던 대부분의 노래는 송창식이나 트윈 폴리오 같은, 당대에도 좀 오래된 가수의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중 양희은이라는 가수의 노래는 참 밝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얼핏얼핏 기억나는 곡들이 “한 사람”이나 “들길 따라서”, “터질 거예요”, “고무줄 놀이” 같은 곡이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어린 녀석의 정서에도 다소 유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동요적인 곡이어서 더 확실히 기억에 남았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노래들이 지금까지 명확하게 기억에 남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합니다.

초등학교시절. 그 시절의 부모들 역시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학원을 경쟁적으로 보냈지요. 혹은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학원에 보내달라고 떼쓰는 아이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학원들의 난립은 학원을 일정 정도 아이들의 오락장로 만들었습니다. 즉 관심을 끌기 위해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을 도입했던 건데요. 그래서 그런지 당시의 우리들은 참으로 많은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상당수의 동요 혹은 동요 풍의 가요들도 있었고요.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건전가요들도 끼어 있었던 같군요. 대부분의 곡들은 아마도 당시의 젊은이들끼리 놀러가서 통기타 치며 부를만한 노래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 양희은의 노래가 간간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 수 있었죠. 앞서 말한 노래들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러다가 좀 크면서 팝송 몇 소절 알게 되고, 역시 누나가 샀던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노래들을 즐겨 들으면서 뭔 바람이 났던지 기타학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보내 주셨던지, 아니면 따로 돈을 몰래 꼬불쳐 둔 돈이 있어서 그걸로 다녔는지 잘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하여간 한달 정도 다니다가 적당히 그만두고 말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런데 여기에서 나눠준 교재들에 뻔히 나오는 것들이 뭐겠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름다운 것들”, “내 님의 사랑은”, “빗속을 둘이서” 같은 노래들이지요.

그 때쯤에는 어느 정도 라디오도 자주 듣고 해서 양희은이라는 가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조금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상은 “한 사람”처럼 말랑말랑한 곡들 위주로 알고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니면 “하얀 목련”이라는 노래와 함께 겹쳐지는, 암 투병이라는 그녀의 개인사에 대한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었을까요. 그런데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만, 비슷한 시기에 라디오를 듣다가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는 어린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동요처럼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 반전되면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싸워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변화되는, 그 노래의 제목은 “작은 연못”이었죠. 다만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누나가 가지고 있던 금지곡 모음집 테이프에서 재생되고 있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군요.

그 무렵은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대학을 들어갔던 시기였습니다. 85학번이었던 누나의 방에는 가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집의 복사본이 돌아다녔지요. 그리고 간간이 “금지곡 모음”이라는 정체불명의 테이프들도 종종 굴러다녔습니다(사실 그 당시 많은 레코드점에서 그렇게 녹음을 해 준 걸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고래사냥”이니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의 노래들을 접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매우 익숙한 노래들이 대다수였던 점이었죠.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이미 포크 풍의 노래들에 상당히 익숙해진 탓일까요? 여하간 제게는 조용필로 대표되는 주류 대중가요의 화려함보다는 이 같은 ‘편안한’ 노래들이 훨씬 정겨웠던 것 같군요.

1989년경에는 대규모 해금조치로 위에 이야기한 곡들이 금지곡에서 풀린 적이 있었지요. 머리통이 조금씩 굵기 시작했던 저는 음울한 표정의 얼굴 사진이 빛이 바랜 것 같은 푸른 톤으로 인화되어 있는 김민기의 음반을 나오자마자 구입했지요. 거기에서 들었던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노래와는 딴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창법은 묘한 매력을 담고 있었지요. 당시 저는 ‘괜히 쎈치한’ 녀석이었으므로 당연히 양희은의 음악보다는 김민기의 그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종이연”의 음울함은 잊지 못할 것이었죠. 그런데 이 음반 역시 당시의 시대적 상처가 큰 자국으로 남아있습니다. “꽃 피우는 아이”(지금 생각해보면 불온한 가사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여전히 금지곡이었고 대신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실려 있었죠.

2. [상록수]

“찔레꽃 피면”은 “하얀 목련”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양희은의 신곡이었습니다. 실제로 나온 건 1985년이라는군요. 당시 그녀의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던 매체는 주로 오후 4시경의 라디오 방송이었습니다. 적당히 시기를 비껴간 노래를 선곡해서 방송하던 이 시간대에 그녀의 노래는 자주 흘러나왔는데요, 제가 3-4년 후의 노래로 착각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특히 “한계령” 같은 경우는 더 심했지요. 제게는 양귀자의 소설로도 상당한 인상이 남아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양희은이라는 가수가 살아온 인생이나 그 연령대를 함께 늙어온 사람들의 회한 같은 분위기를 어린 저에게도 어렴풋하게나마 전달했었지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런데 사실 이는 사후적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양귀자의 소설을 한참 후인 대학생 때 읽은 까닭도 있겠지만, 또 하나는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당시 저는 그다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죠.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맛이 간 것 같았죠. 심지어 애처로울 정도였어요. 하지만 좀더 나이가 들고나서는 차라리 그것이 진솔하게 느껴지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상당한 숙련을 통한 노회함처럼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당시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양희은의 노래들은 과거의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록 음악을 좋아하던 흔해빠진 어린 녀석들이 그렇듯 저도 주말에 청계천을 돌아다니면서 빽판(재수 좋으면 싸구려 원판도 있었죠)을 사다가 모으는 인간이었죠.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게 양희은의 1978년작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었습니다(아마도 제 자의로 산 최초의 양희은의 음반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솔직히 제가 이 음반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양희은보다는 김민기 작곡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어릴 때 들어본 금지곡들에 대한 추억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음반은 제게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양희은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찼고 사람들의 마음에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비록 “상록수”, “금관의 예수” 같은 제목들과 가사들이 심의에 의해 상처받고, 김민기의 이름이 김아영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음반에는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밤뱃노래”는 제게는 두렵도록 음울하고 슬픈 것이었고, “고무줄 놀이”의 비유도 전혀 새롭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식구생각”, “알캉달캉” 같은 곡들도 소박하고 편안하지만 결코 편안하게 들을 수만은 없는 노래들이었죠. 저는 그때서야 그녀의 목소리가 왜 시대의 대변자였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듯했습니다.

“천리길”의 동요적인 멜로디도 그때는 마냥 좋았습니다. 그건 아마도 고교시절의 인상적인 ‘공적’ 사건과 관련이 있었을 겁니다. 당시 몇몇 소년소녀들은 어울리지 않게 몇몇 불온교사들의 뜻에 부응해 학교에서 참교육이라는 이상한 상표의 물건들을 강매하고(강압적이라기 보다는 호소에 의한), 괜히 전교조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이상한 노래들을 배우고 이상한 영화들을 보면서 불온사상에 잠식되었죠. 그 당시 기억나는 노래는 “그루터기”, “천리길”, “이 세상의 절반은 나” 같은 곡들이었습니다. 좀 순진했던 저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앞서의 노래들은 순진한 아이들의 교육단계의 초입으로 적절한 노래들이었겠죠.

3. 성숙 혹은 단절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 한 인간과 한대수에 대해 이래저래 이야기하다가 다른 한국 포크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대수를 상당히 좋아하지만 그 이외의 한국 포크 음악은 그다지 즐겨 듣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김민기에 대해서는 다소 따분해 했고, 양희은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내세우더군요. 그 비판의 이유는 간명했습니다.
“닭살이다.”
그때 양희은의 가장 유명한 노래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였죠. 그 노래는 아마 다른 매체에 삽입되면서 뒤늦게 인기를 얻은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그의 공격은 특히 창법에 있어서 두드러졌습니다. 성악가 같은 창법에 대해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겠지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요. 한 친구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들으면서 ‘우리 같은 세대가 딱 좋아할 노래다’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우리 같은 세대라는 표현은 동감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과거의 가치들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듯해도 은근히 그에 기대고 있고, 요즘 세대들의 사고방식을 좇는 듯하지만 항상 거리감을 느끼는, 그런 어중간한 인간들이 있기는 있죠. 그런 까닭에 양희은의 근자의 노래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젊은 시절의 노래들은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어중간한 평가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온몸을 내지르듯이 부르는 그녀의 창법은 그녀의 노래들이 분명 그 시대의 송가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 더욱 강한 요소로 발휘했을 것입니다(어쩌면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지금, 40대를 위한 노래들을 부르겠다는 선언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겠지요. “한계령” 이후로 그녀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음악적 주제를 확실히 변경시켜 온 것이니까요.

하지만 좀더 공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근래에 우리는 공익광고에서, 3·1절 기념식에서 양희은의 노래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얼마 후 조영남이 진행하는 무슨 TV프로에선가 저는 우연히 양희은의 인터뷰를 목격했습니다. 두 사람은 3·1절 기념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노래가 여기까지 오기에 30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들을 하며 자랑스러워하더군요. 그리고 금지곡 시대를 회상하면서, 얼토당토않은 심의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도 ‘그 노래는 전혀 그런 의미는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양희은과 같은 경우는 분명 시대가 만든 저항가수라는 의미에 적절한 것 같고,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근자에 그녀가 발표한 앨범들은 대게 ‘울궈 먹기’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양희은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듯한 닭살스러운 얼굴표정과 목소리로 “봉우리”를 부르더군요. 그때 다시 한번 느껴진 것이, 양희은이 젊은 시절 부른 노래들과 근자에 다시 부른 같은 곡들의 차이입니다. 이는 노래의 의미가 변화되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의미가 바뀐 만큼 그 표현양태도 바뀌어야겠지요(아니면 표현양태가 바뀌면서 의미도 함께 조응해 간 걸까요?). 직선적으로 뻗어가던 창법은 상당히 노회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상록수”를 예로 들어볼까요. 원곡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은 이제는 마치 모두를 포용할 수 있다는 편안함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아침이슬”의 후주는 어이없게도 “애국가”였습니다. 전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공연 리뷰를 쓰신 분이 지적을 하시겠지만, 그녀의 음악이 지금 소통되고 소비되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의 플리(Flea)가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의 오프닝을 선 후에 느꼈던, 자신들의 음악을 착취해서 먹고사는 행태에 대한 짜증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사실 이건 무척 서글픈 일입니다. 음악에 대해서 그리 정통하지도 못하고 나이도 별로 안 먹은 젊은 놈에게도 무려 30년 동안 한국 포크 음악을 대표해 온 가수를 씹는 것이 쉬워 보인다는 건…. 그만큼 우리사회의 음악적 토양의 빈곤을 반증하는 걸까요?

제게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노장들의 복귀가 반드시 반갑게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건 옳은 일일까요? 결론을 짓는다는 건 제게 다소 버거운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과거의 의미가 항상 퇴색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라고 싶군요. 20020430 | 김성균 [email protected]

사족 1: 대개의 1970년대 한국 포크 가수들이 그렇듯이 양희은의 경우도 적잖은 수의 곡들이 번안곡인데요(그렇다고 박인희의 “스카보로의 추억”처럼 깰 정도는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곡이 “아름다운 것들”이죠. 한때 아트 록을 즐겨듣던 저는 그것이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의 “Ninna Nanna”를 번안한 줄로만 알았는데, 불과 몇 년 전에야 민요 “Mary Hamilton”이 원곡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존 바에즈(Joan Baez)가 불렀죠.
사족 2: “알캉달캉”이란 노래는 1978년작 뿐만 아니라 영화 [별들의 고향 2] OST에도 실린 바 있습니다. 기묘한 엔딩 때문에라도 인상이 강하게 남는 이 곡은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별들의 고향 2]가 TV에서 방영할 때 그 이미지가 완전히 깨졌습니다(영화에선 장미희씨가 부르더군요, 물론 성우 더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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