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423052339-k187양희은 – 양희은이 처음 부른 노래들 – 1987, 서라벌

 

 

어두웠던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노래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은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불리게 될 노래라는 운명은 상상도 못한 채 1971년 양희은의 데뷔 앨범에 수록되어 세상에 나왔다. 시적인 가사와 간결하고 명료한 멜로디의 이 노래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가사에 나오는 “태양”이 북측의 인사를 상징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1973년 정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이고, 동시에 “서울로 가는 길”, “백구”, “인형” 등 양희은의 다른 많은 곡들도 금지곡 선고를 받는다.

강산이 한번 반쯤 변하고 1987년이 되어 정부에 의해 금지곡이 대거 풀리면서 방송가에서는 “해금가요”라는 신종 장르가 만들어지고, 15년 동안 들을 수 없었던 양희은의 많은 노래들이 그 간의 히트곡과 함께 “아침이슬-양희은이 처음 부른 노래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발매된다. 본 앨범은 데뷔 곡 “아침이슬”부터 1985년의 “한계령”까지 양희은의 15년여에 걸친 활동을 알차게 담아내고 있다.

수록곡들의 작곡가를 살펴보는 것도 앨범을 감상하는 데 큰 의미를 준다. 김민기부터 한대수(“행복의 나라로”), 김광희(“가난한 마음”), 조동진(“작은 배”), 하덕규(“한계령”)까지 한국 포크의 큰 줄기가 한 아티스트의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들의 모든 색조가 양희은에게 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은 이 앨범이 지닌 큰 미덕이다.

수록곡은 금지가 풀린 곡들과 그간 양희은의 히트곡들이 섞여서 수록되었는데, 대부분의 곡에서 금지곡이라는 단어가 주는 급진성을 찾기가 힘든 편이고, 가사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고달프고 쓸쓸한 사람들의 일기장과 같은 솔직함이다. 군사정권이 문제를 삼은 부분은 어두운 시대를 어둡게 노래한 이 솔직함일 것이다. 수록곡 중 가장 직접적으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묘사한 곡은 “서울로 가는 길”(나 떠나면 누가 할까 / 늙으신 부모 모실까 /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이고 가장 은유적인 곡은 “인형”이란 곡인데, 가사 내용은 색동 저고리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종이 인형에 대한 묘사가 전부이다. 그러나 노래 중간중간에 나오는 실성한 듯 웃는 소리와 “바보 인형아”라는 강조는 양희은이 세상에 대해 내뱉는 유일한 욕설이다.

이 앨범의 백미는 “백구”라는 하얀 개의 오디세이이다. 황순원의 단편 [목넘이 마을의 개] 창작 동화 버전과도 같은 분위기의 이 곡은 포크의 ‘선율이 들어간 이야기’라는 요소를 잘 살리고 있고, 부드러운 기타 반주 위에 얹힌 백구의 애잔한 이야기는 청자를 은근하면서도 강하게 끌어들인다. “어디 가는 거니, 백구는 가는 길도 모르잖아”라는 양희은의 속삭임은 마치 데뷔 이후 군사정권에게 죄인 취급받았던 암울한 시절의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나 “사랑이야” 등의 곡들도 단아한 노랫말과 담백한 양희은의 목소리와 잘 어울리며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결코 촌스럽거나 구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로도 양희은은 꾸준히 가수 활동을 하고 있으며, 과거의 곡들만으로 먹고사는 추억의 가수로 머물지 않고 꾸준히 새 노래들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앨범 발매 이후로 “아침이슬”을 타이틀 곡으로 내세우는 양희은 히트곡 모음집이 10종 이상 발매가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앨범은 ‘남발된 히트곡 모음집의 시발’이라는 본의 아닌 오명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대표적인 한국 포크 가수의 초중반기의 궤적을 충실히 복원함과 동시에 어두웠던 현대사의 한 시절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시발’이 아닌 ‘시초’라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어쨌든 이 앨범 수록곡들의 면모는 별 10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만약 양희은이 아침이슬을 부르지 않았다면 대학가의 민주화 투쟁에서, 노동자의 쟁의 현장에서 어떤 노래가 울려 퍼졌을까? 20020428 | 이정남 [email protected]

8/10

수록곡
1. 아침이슬
2.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3. 세노야 세노야
4. 그사이
5. 일곱송이 수선화
6. 사랑의 기쁨
7. 늙은 군인의 노래
8. 사랑이야
9. 백구
10. 하늘
11 .아름다운 것들
12. 서울로 가는길
13. 아무도 아무데도
14. 작은배
15. 가을편지
16. 나의 친구
17. 찔레꽃 피면
18. 인형
19. 바다
20. 가난한 마음
21. 빈자리
22. 행복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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