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16123821-0402ballboyBallboy – Club Anthems 2001 – SL Records, 2001

 

 

아름다운 아류의 매혹적인 성장기

[Club Anthems 2001]이라는 타이틀이 가리키는 것은 크림(Cream)이나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Ministry Of Sound) 류의 댄스 컴필레이션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신나는 베이스 그루브나 열광적 하우스 튠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순도 높은 팝 음악만이 귀를 간지를 뿐이다. 만일 라디오헤드(Radiohead)나 유투(U2)처럼 지명도 높은 밴드가 이런 앨범을 발표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탁월한 유머 감각을 예시하는 훌륭한 사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볼보이(Ballboy) 같은 무명 밴드에게 이런 식의 기호학적 장난은 상업적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앨범을 잘못 알고 구입한 댄스 뮤직 팬들은 당장 환불을 요구할 것이고 이들의 음악에 관심을 가질만한 인디 팝 팬들은 제목만 보고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앨범 타이틀을 잘못 붙여 실패한 제네시스(Genesis)의 역사적 선례가 있다. 이들의 데뷔 앨범 [From Genesis To Revelation]은 발매 당시 음반 매장들에서 종교음악 섹션에 진열된 탓에 상업적 참패를 면치 못했다.

에든버러 출신의 4인조 팝 밴드 볼보이는 두 명의 교사와 한 명의 유치원 보모 그리고 한 명의 음향 기술자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이들이 상업적 재앙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앨범 타이틀을 정할 수 있었던 데는 멤버들 각자의 안정된 직업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볼보이의 음악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 조건상의 특징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음악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삼는 전업 밴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운신의 폭을 누린다. 이들에게는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고 예술적 성취에 대한 조바심도 없다. 이들은 그저 그때그때 자기들이 하고싶은 음악을 할 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경우에 따라 일관성이 부족하고 독창성이 모자라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열정과 솔직함이 있다. 이들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풋풋한 아마추어리즘과 생생한 삶의 에너지는 현실에서 유리된 직업 아티스트들의 작품에서는 접하기 힘든 또 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볼보이의 음악이 거론될 때마다 곧잘 비교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의 음악이다. 이들이 이러한 평판을 얻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첫 싱글 “Donald In The Bushes With A Bag Of Glue”의 탓이 컸다(실제로 이들의 음악 중 벨 앤 세바스찬과 유사한 곡은 그리 많지 않다).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Brown Eyed Girl”을 벨 앤 세바스찬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곡에서 볼보이의 작곡가 겸 보컬리스트 고든 맥킨타이어(Gordon McIntyre)는 스튜어트 머독(Stuart Murdoch)을 연상케 하는 따스하고 여린 보컬과 유려하고 깔끔한 멜로디 라인을 선보인다. 비록 이들의 사운드가 벨 앤 세바스찬의 우아하고 절제된 체임버 팝보다는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브리티쉬 기타 팝에 더욱 가깝다는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두 밴드 사이의 유사성을 반박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같은 사소한 차이는 이들의 아류 혐의를 더욱 강화하는 징표로 작용한다. 아류가 원조에 대한 조야한 흉내내기를 의미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는 아류로 낙인찍힐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벨 앤 세바스찬의 섬세하고 우회적인 선율에 비해 이들이 들려주는 간결하고 직선적인 멜로디도 그렇고 벨 앤 세바스찬의 귀족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비해 이들의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악 성향도 그렇다.

이 앨범은 볼보이의 데뷔 앨범임과 동시에 이들이 발표한 세 장의 EP를 모아놓은 일종의 컴필레이션이다. 이 때문에 이것은 단일 작품집으로서보다는 이들의 음악적 발전을 기록한 성장기(成長記)로서의 의미를 더욱 크게 지닌다. 앨범의 첫 네 곡은 이들의 1999년 데뷔 EP [Silver Suits For Astronauts]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이다. 비록 데뷔작이라는 역사적 중요성은 있지만 이 EP에는 앞서 언급되었던 “Donald In The Bushes With A Bag Of Glue”를 제외하고는 별로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이들은 아직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노출한다. 그러나 2000년 EP [I Hate Scotland](트랙 5-8)에 이르러 이들은 눈부시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EP에서 고든 맥킨타이어의 선율은 시종일관 확신에 차 있고 이들의 연주는 전작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힘있고 과감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특히 아랍 스트랩(Arab Strap) 풍의 웅얼거리는 보컬에 모과이(Mogwai)적인 스페이스 록 사운드를 결합한 타이틀 트랙은 이들의 마스터피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2001년 EP [Girls Are Better Than Boys](트랙 9-12)에 이르면 이들은 원숙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무르익은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EP에서 무엇보다도 귀를 솔깃하게 하는 대목은 이들의 사운드가 마치 1970-80년대의 한국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데뷔작인 [Silver Suits For Astronauts]에서 이미 케이티 그리피쓰(Katie Griffiths)가 연주하는 신서사이저는 허성욱과 유사한 소리를 냄으로써 적지 않은 흥미를 유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와서 더욱 본격화된 ‘한국적 사운드’에 비하면 그것은 단지 예고편에 불과했다. 벨 앤 세바스찬적 멜로디에 송골매적인 기타 텍스처를 결합해 긴박감을 높인 듯한 “I’ve Got Pictures Of You In Your Underwear”나 김정호의 처연한 실내악 인트로를 되살린 듯한 “Swim For Health” 그리고 1970년대 한국 포크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재현된 듯한 “They’ll Hang Flags From Cranes Upon My Wedding Day”는 우리에게 특히 친근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물론 이들이 실제로 한국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지는 가정이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오랫동안 가까이서 접해왔던 사운드를 생각지도 못한 외국 밴드의 음악에서 다시 듣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볼보이의 이 앨범처럼 평자의 작업을 어렵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작품도 많지 않다. 이 앨범은 흔히 앨범에 대한 예술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내적 일관성’이나 ‘창조성’ 심지어 ‘개성’마저도 결여된 결격사유 투성이의 앨범이기 때문이다. 내적 일관성의 측면에서는 이렇다 할 비전도 없이 갖가지 스타일이 무분별하게 조합되어 있고, 창조성의 측면에서는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남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만을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트랙마다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사운드와 분위기는 도대체 이들만의 독특한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앨범의 수록곡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신선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음악에 대한 일반적 평가기준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감성의 언어인 음악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만 맞춰 평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음악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나 창조성 같은 형식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구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앨범 전체가 듣기 좋고 감동적인 음악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일관성의 부족이나 클리셰의 남발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볼보이의 이 앨범은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이러한 점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20020111 | 이기웅 [email protected]

6/10

수록곡
1. Donald In The Bushes With A Bag Of Glue
2. Day In Space
3. Dumper Truck Racing
4. Public Park
5. Essential Wear For Future Trips To Space
6. I Hate Scotland
7. One Sailor Was Waving
8. Olympic Cyclist (Acoustic Version)
9. Leave The Earth Behind You And Take A Walk Into Sunshine
10. I’ve Got Pictures Of You In Your Underwear
11. Swim For Health
12. They’ll Hang Flags From Cranes Upon My Wedding Day
13. Postcards From The Beach
14. Sex Is Boring (Acoustic Version)

관련 사이트
Ballboy 공식 사이트
http://listen.to/ball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