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31111536-0401pulpPulp – We Love Life – Island, 2001

 

 

초목 우거진 숲에서 펄프가 들려주는 이야기

펄프(Pulp)를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로 만들어준 것은 복고적인 댄스 팝 사운드와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의 못 말리는 쇼맨십이었지만, 진정 펄프의 본령은 매력적인 선율 속에 담긴 소시민적 삶의 냉정한 기록들이다. 짐작에 불과하지만, 펄프가 1996년 예술성에 보다 초점을 두는 머큐리 음악상을 앨범 [Different Class]로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삶의 단편들을 포착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자비스 코커는 대서양 건너편의 에디 베더(Eddie Vedder)와 더불어 일상을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시인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펄프의 3년만의 신작 [We Love Life]을 듣는 순간 나는 그들의 사운드가 점차 그들의 가사에 근접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난센스다(가사에 어울리는 사운드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들이 바라보는 삶이 유쾌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면 좀더 낯설고 모호한 음향을 기대해볼 만도 하다. 이번 앨범이 바로 그런 느낌을 준다. 부클릿을 보면 이번 앨범의 컨셉트가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를 거쳐 로버트 앨트먼(Robert Altman)에 이르렀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아뿔싸, 제목이 “우리는 삶을 사랑한다”라니.

이들의 태도에 어떤 변화라도 있는 것일까. 앨범에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Weeds”, “Weeds II (Origin Of The Species)”, “The Trees” 등 식물을 지칭하는 곡이 많다는 점이다. 첫 곡 “Weeds”는 잡초(‘common people’의 은유?)를 의인화한 곡이며, 이어지는 “Weeds II (Origin Of The Species)”는 종의 기원이 된 잡초의 이야기다. “The Trees”에는 “저렇게 쓸모 없는 나무가 내가 숨쉬는 공기를 만들어낸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 씨디 케이스에서 씨디를 집어드는 순간 한 장의 낙엽과 함께 “당신의 삶을 살 권리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뭇 비장한 글귀를 보게 된다. 펄프는 아마도 식물(혹은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빌어 삶의 소중함을 끌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앞서 말했듯이 처음 이 앨범을 들으면 모호하고 낯선 분위기에 당황하게 된다. 이는 프로듀싱을 맡은 1960년대 바로크 팝 뮤지션인 스콧 워커(Scott Walker)의 손길 때문인데, 그 결과 고풍스럽고 영묘한 분위기가 앨범에 불어넣어졌다. 가령 독백으로 진행되는 “Weeds II (Origin Of The Species)”는 전자적으로 처리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 듯 기타와 퍼커션, 합창, 피아노 등이 독특하게 믹싱된 곡이다. “Roadkill”은 펄프의 곡 중 가장 미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곡이라 할 만한데, 한음씩 명징하게 울리는 기타와 힘을 한껏 뺀 자비스의 목소리, 5현 일렉트릭 첼로 등이 적적한 분위기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앨범을 지배하는 정서는 이처럼 기존의 펄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데, 특히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화려하기보단 정갈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채롭다. 그렇지만 가끔은 예전의 펄프를 떠올리게 하는 고감도의 팝송들도 선보인다. 유명세의 덧없음을 노래한 “Bob Lind”와 과거의 달콤한 추억을 노래한 “Bad Cover Version”을 들으면 누구든지 얼굴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Bob Lind”의 중간중간에 끼어 든 매력적인 기타 선율과, “Bad Cover Version”의 종소리 같은 기타 소리 및 하모니는 이들의 팝적 감각이 건재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중적이면서 묘하게 낯선 “The Trees”와 “Birds In Your Garden”이 있다. 이 곡들은 가사나 사운드에 있어서 펄프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들이다.

펄프는 이번 앨범으로 브릿팝 밴드들 중 자기변신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고 멋지게 이루어내고 있다. 대중들의 인기나 미디어의 관심과 상관없이 이 앨범은 곱씹는 즐거움과 삶의 연륜을 맛보게 해준다. 혹시라도 이들의 경박스러운 쇼맨십에 일찌감치 질려 그 재능을 제쳐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앨범은 분명 그들에게 펄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20011229 | 장호연 [email protected]

9/10

수록곡
1. Weeds
2. Weeds II (Origin Of The Species)
3. The Night Minnie Timperley Died
4. The Trees
5. Wickerman
6. I Love Life
7. Birds In Your Garden
8. Bob Lind (The Only Way I Down)
9. Bad Cover Version
10. Roadkill
11. Sunrise

관련 사이트
Pulp 공식 사이트
http://www.pulpon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