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레몐(변화) 1: 글라스노스찌(개방)

안드로뽀프 서기장에 의해 추진된 록 음악에 대한 탄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르뗌 뜨로이쯔끼의 표현대로 록 음악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4년도 “(비공식) 콘서트는 별로 없었지만, 테이프는 여기저기에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의 변화는 일단 소비에트 사회의 지도층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1980년대 초반 소비에트 사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교체과정을 검토해 보자. 회고적으로 검토해 본다면 1982년 11월부터 30개월 이내에 공산당 서기장 세 명이 관에 실려나갔다. 1982년 11월에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18년의 통치를 마감했고, 1984년 2월에는 유리 안드로뽀프, 1985년 3월에는 꼰스딴찐 체르넨꼬가 짧은 통치기간을 끝내고 사망했다. 그리고 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젊은’ 서기장이 등극했고,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잊혀진 단어가 되고 있지만 ‘개혁(혹은 재편)’이라는 뜻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개방’이라는 뜻의 글라스노스찌는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고르바초프가 당권을 장악한 지 6개월 이내 정부 문화성 장관과 당 중앙위원회 문화분과위원장을 비롯하여 문화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실력자들이 대폭 물갈이되었다. 이른바 글라스노스찌(개방)가 시작되었고, 록 음악은 글라스노스찌의 ‘신선한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국영 라디오와 TV는 서방과 소비에트의 록 음악을 일상적으로 방송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까지 ‘사회의 기생충’ 정도로 취급받던 국내의 록 음악인들은 갑자기 글라스노스찌 시대의 대중적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현실이었다. 특히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TV와 신문 등을 통해 ‘러시안 언더그라운드 록의 대부’ 등의 칭송을 받으며 유명인이 되었다.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단지 미디어의 일회적 관심에 그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1985년부터 1986년 사이 크고 작은 록 페스티벌이 연발로 개최되었다. 가장 큰 페스티벌은 1985년 8월 모스끄바에서 열린 제 12회 세계 청년학생 축전(12th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국제 록 페스티벌이었다. 시리즈 두 번째 말미에서 1957년에 열렸다고 말한 제 7회 축전 이후 거의 20년만에 개최된 축전이었다(여담이지만 다음 번인 제 13회 축전은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이 행사는 우리에게는 ‘임수경 방북’으로 유명하다). 157개국에서 26,00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반제국주의적 연대, 평화와 우애(For anti-imperialist Solidarity, Peace and Friendship)”라는 슬로건을 외친 이 자리에 영국의 ‘인디 댄스’ 그룹 에브리씽 벗 더 걸(Everything But The Girl)과 레게 그룹 미스티 인 루츠(Misty In Roots), 그리고 미국의 밥 딜런(Bob Dylan!!)이 참여했다. 꾸바나 유고슬라비아에서도 각각 이라께레(Irake),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 주) 등 ‘국가대표급’이 참여했다. 소비에트에서는 마쉬나 브레메니(Mashina Vremeni)와 스타스 나민 그룹(Gruppa Stas Namina) 같은 ‘프로페셔널 그룹’이 참여했다.

주)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는 ‘흰색 버튼(White Button)’이란 뜻으로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가 이끈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스’였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1990년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발발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에미르 꾸스뜨리챠(Emir Kustricia)의 영화 대부분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여 국제적 명성을 획득했다.

20011031112534-0321series01-pyotr사진설명: 즈부끼 무의 뻬떼르 마모노프
1986년 1월에는 모스끄바에서 제 1회 ‘록 래버러토리 페스티벌(rock laboratory festival)’이 개최되었다. ‘모스끄바 록 래버러토리’란 레닌그라드(뻬쩨르부르그)와 달리 비공식(아마추어) 밴드들의 공연장이 없던 모스끄바에 비로소 설립된 시설이었다. 이 페스티벌에서 그 동안 변변한 공연장도 없이 공장과 아파트의 지하실을 전전하면서 불법으로 공연을 하던 모스끄바의 비공식 밴드들이 모두 모였다. 이 시리즈에서 뻬쩨르부르그의 뮤지션들에 비해 홀대한 느낌이 들지만 모스끄바에서도 1980년대 이래 , 즈부끼 무(Zvuki Mu), 브라보(Bravo), 브리가다-S(Brigada S), 쩬뜨르(Tsentr) 같은 아마추어 밴드들이 활동해 왔고, 특히 풍자적 아방가르드 밴드인 즈부끼 무의 리더인 뻬뜨르 마모노프(Petr Mamonov)의 지위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의 지위와 비견되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모스끄바 밴드들의 단합을 과시했다. 복고풍의 스카-로커빌리 밴드인 브라보는 러시안 록의 전통에서는 이례적으로 잔나 아구자로바(Zhanna Aguzarova)라는 프론트우먼을 앞세워서 가히 선풍적 인기를 몰고 왔고, 이고리 수까체프(Igor Sukachev)가 이끈 브리가다-S 역시 복고풍 부기 밴드(boogie band)라는 평처럼 풍자와 재미를 앞세운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쩬뜨르는 ‘모스끄바의 빅또르 쪼이’라고 할만한 바실리 슈모프(Vasily Shumov)를 앞세워서 뉴 웨이브 스타일의 거라지 록으로 팬들은 물론 평론가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Brigada S – Skoriyi Poezd

이 페스티벌의 주최는 공식적으로는 모스끄바시 위원회의 문화성이었다. 이 점만 봐도 소비에트 정부 당국의 록 음악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정부당국 뿐만 아니라 공산당에서도 록 음악의 긍정적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하여 1986년 5월 꼼소몰 위원회 주최로 [록 파노라마 ’86]이라는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물론 ‘공식 행사’이다 보니 페스티벌의 주역은 철지난 프로페셔널 그룹들이었다. 어딜 가나 ‘당국’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티가 나는 법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리야(Ariya)와 크루즈(Kruiz: Cruise) 같은 헤비 메탈 밴드들이 참여했고, 아마추어 그룹들 중에는 브라보(Bravo)가 유일하게 참가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록 페스티벌은 아니었지만 1986년 5월 30일에는 체르노빌 원전 참사의 피해자를 위한 자선공연이 개최되었다. 30,000명을 수용하는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대형공연은 ‘소비에트판 라이브 에이드’ 같은 공연이었는데, 여기서 알라 뿌가쵸바(Alla Pugacheva)처럼 소비에트의 국가대표급 디바와 잔나 아구자로바 같은 풋내기 ‘아마추어’가 같은 무대에 섰다. 이 공연은 소비에트 국영 TV는 물론 서방의 TV들도 공연을 촬영하여 세계 몇몇 나라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체르노빌 자선공연 직후 개최된 제 4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페스티벌도 대내외적으로 글라스노스찌를 상징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변화를 상징하듯 비좁은 클럽을 벗어나 네프스끼 문화궁에서 개최되었고, 글라스노스찌를 상징하는 곡들, 알리사(Alisa)의 “Miy Vmeste(We Are Together)”, 끼노(Kino)의 “Khochu Peremen'(We Want Change)”, 뗄레비조르( Televizor)의 “Viyiti Iz Pod Kontrolya(Get Out Of Control)” 주) 이 발표되었다. 나아가 페스티벌이 끝난 직후 영국의 포크-펑크 뮤지션인 빌리 브랙(Billy Bragg)이 와서 예정에 없던 즉석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세계 청년학생 축전에 참여한 밥 딜런은 공식 행사만 마치고 증발했지만(그래서 그를 애타게 찼던 러시아의 밥 딜런인 그레벤쉬꼬프와 마까레비치를 실망시켰지만), 빌리 브랙은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 모인 ‘뚜소브까’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환담을 나누었다.

주) 뗄레비조르의 “Viyiti Iz Pod Kontrolya(Get Out Of Control)”의 가사(발췌 번역). “우리는 유치원 시절부터 감시당했지 / 멋진 남자들과 친절한 여자들이 우리를 때리고 /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를 골라서 우리를 농장의 동물처럼 대했지 / 그래서 우리는 훈육 받은 무리들처럼 자랐지 / 그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 / 그리고 우리는 덫에 걸린 것처럼 그들을 내려다 보았지 / 우리는 그저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때리는가를 보았지 / 통제를 벗어나 / 통제를 벗어나 / 네가 바라는 노래를 블러 / 허용된 노래만을 부르지 마 / 우리는 소리칠 권리가 있어”

그래서 이 시기 ‘뚜소브까’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은어가 되었다. 본래 팬을 뜻하는 이 단어는 이제는 팬들이 모이는 이벤트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것도 1980년대 초처럼 칙칙하고 비좁은 지하실에 비밀스럽게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당하고 개방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 밤 뚜소브까가 어디에서 있느냐”는 말은 “오늘 어디서 재미있는 공연이 있느냐”는 뜻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대감을 뜻하게 된 뚜소브까는 글라스노스찌 시기 소비에트 청년들과 록 커뮤니티의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었다.

뻬레몐(변화) 2: 뻬레스뜨로이까(재편)

뻬레스뜨로이까를 번역하면 영어로는 ‘restructuring’이고, 한국어로는 ‘구조조정’ 혹은 ‘재편성’이다. 얼핏 보기에는 순한 단어지만 실제로는 냉혹하고 살벌하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1997년 이후 실감하고 있다. 물론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뻬레스뜨로이까란 ‘시장원리의 도입을 통한 관료주의에 젖은 사회주의의 혁신(renewal)’을 목표로 했다. 실패한 정책을 재론하는 것은 맥빠진 일이지만 뻬레스뜨로이까는 ‘정부지원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돈을 벌어라’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소규모의 개인회사나 유한회사 같은 ‘사기업’의 설립을 허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국영기업들에게는 ‘독립채산제(khozraschet)’를 실시했다. 간단히 말해서 팔릴 만한 재화를 만들라는 것이고, 요즘 말로 ‘수익 모델’을 찾아나서라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산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련의 법률이 통과되면서 1987년부터 ‘아마추어’ 그룹들도 록 실습실(Rock Laboratory: ‘스튜디오’에 가깝다)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콘서트를 정식으로 ‘홍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해서 이제는 아마추어 록 뮤지션도 정부의 공인(즉, 검열)을 받지 않고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서양식 개념으로는 ‘인디펜던트’한 프로덕션과 공연 에이전트(한국어로는 ‘기획사’), 그러니까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민간’ 문화 조직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국영 레이블인 멜로지야에도 변화의 바람은 예외가 아니었고, 멜로지야는 1986년부터 록 앨범을 공식적으로 발매하기 시작했다. 비틀스(The Beatles)의 음반이 공식적으로 최초로 발매된 것도 이 때이며,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등 원만한 성인지향적 팝과 록의 라이선스 음반들이 뒤를 이었다. 마쉬나 브레메니(Mashina Vremeni), 아브또그라프(Avtograf) 같은 프로페셔널 록 밴드의 공식 음반, 그리고 이때까지 아마추어의 지위를 고수했던 아끄바리움(Akvarium)의 공식 음반이 발매된 것도 이 때다. 마쉬나 브레메니는 데뷔한 지 19년째 되는 해에, 아끄바리움은 15년째 되는 해에 비로소 비닐 LP 형태로 정규 앨범을 발매한 것이다.

1986-7년 경 멜로지야가 발매한 러시아 뮤지션의 음반들 대부분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이전에 발표했던 비공식 테이프를 ‘재발매’한 것들이었다.주). 그렇지만 1987년부터는 록 밴드들에게 스튜디오를 개방하여 새로운 레코딩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기껏해야 8트랙(심지어는 2트랙)으로 레코딩했던 뮤지션들은 멜로지야의 24트랙 스튜디오에서 난생 처음 레코딩을 하게 되엇다. 첫 테이프는 역시 아끄바리움이 끊었는데, 1987년에 발매된 [Ravnodenstvie(Equinox)]가 그것이다. 같은 해 나온 알리사의 [Block Ada]는 비공식 스튜디오와 멜로지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병행한 것이었고, 이듬해 나온 D.D.T.의 [Ya Poluchil Etu Rol]는 멜로지야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멜로지야에서 음반을 발매해도 ‘셀링 아웃’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 한 예로 [Akvarium]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앨범(일명 ‘화이트 앨범’)은 [Den’ Serebra](1984)와 [Deti Dekabriya](1985)를 발췌한 ‘편집음반’이었다.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멜로지야를 찾아가 신곡을 추가하고 리믹싱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담당자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20011031112534-0321series02-aguzarova사진설명 : 러시안 록의 여왕, 잔나 아구자로바
음반과 더불어 영화도 록 뮤지션들을 주연배우로 기용하고 록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1987년에 나온 두 영화 [Vzlomschik(Burglar)]와 [ASSA]는 각각 꼰스딴찐 낀체프(Konstantin Kinchev)와 빅또르 쪼이를 앞세워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Vzlomschik(Burglar)]는 청소년 비행과 록 뮤지션의 삶을 다룬 것으로 알리사, 아욱찌온(Auktsyon), 아비아(Avia) 등이 연주하는 장면이 삽입되었다. [ASSA]에서는 빅또르 쪼이가 세르게이 부가예프(Sergey Bugaev)와 함께 주연을 맡고 아끄바리움, 브라보, 끼노 등의 음악이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되었다. 대대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젊은이들의 애정과 삼각관계’를 다룬 신통치 않은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빅또르 쪼이는 이듬해 [Igla(Needle]를 촬영하여 이런 평을 만회한다.

Bravo feat. Zhanna Aguzarova – Chudesnaya Strana

이렇듯 정부 지원 하에서 ‘팔리지 않아도 상관없는’ 음반들을 줄줄이 발매하던 멜로지야가 갑자기 록 앨범을 발매한 것이나 ‘어렵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던 영화산업에서 언더그라운드 록의 스타들을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일에 특별히 고상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시장경제에 적응하여 ‘팔릴 만한 음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인사(人事)가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테이프를 제작했던 안드레이(안드레이 뜨로삘로)가 멜로지야의 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멜로지야가 1970-80년대 제작되었던 비공식 테이프들을 쉽게 재발매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만 유통되던 음반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햇빛을 보게 만든 것은 분명 안드레이의 공적이다. 문제는 멜로지야가 뮤지션들 본인에게는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끄바리움의 음반은 200만장 넘게, 그리고 D.D.T.와 알리사의 음반도 100만장이 넘게 팔렸지만, 뮤지션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수고비’ 수준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아직 ‘작곡가 동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아마추어’이었기 때문이었다(아끄바리움의 경우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만 곡의 저작권자라는 이유로 8,000루블를 받았다).

이런 ‘횡포’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정부 지원 하에서 소비자의 수요를 무시하고 음반을 공급해 왔던 멜로지야는 다른 국영기업과 마찬가지로 ‘부실경영’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특별히 악의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뮤지션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이 점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하나의 단면을 보여준다. 1980년대 소비에트 사회를 움직였던 경제적 실력자는 국영기업이라는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시장에 적응하는 ‘기회주의적’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글라스노스짜든 뻬레스뜨로이까든 모스끄바와 뻬쩨르부르그를 비롯한 러시아의 대도시, 그리고 유럽에 가까운 라뜨비아(Latvia), 리투아니아(Lithuania), 에스또니아(Estonia) 등 이른바 발틱 3국 정도에만 불어왔을 뿐이다. 지방의 소도시나 읍에서는 당국의 입김이 여전히 강력했고, 이들은 변화의 과정을 통제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D.D.T.의 유리 셰브추끄는 러시아 지방의 상황을 ‘봉건적 사회주의(feudal socialism)’라고 표현했는데, 그 정도로 지방의 상황은 열악했다. 그 결과 셰브추끄처럼 록 뮤지션이 고향을 등지고 모스끄바와 뻬쩨르부르그로 이주하는 일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셰브추끄의 경우 1980년대 초반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주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레코딩과 공연의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이주하는 뮤지션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점은 러시아 제 3의 도시인 스베들로프스끄(현 에까쩨린부르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랄 산맥 넘어 시베리아의 초입에 위치한 이곳은 나우찔러스 뽐삘리우스(Nautilus Pompilius), 차이 에프(Chai-F), 우르핀 주스(Urfin Dzhus) 등의 록 밴드와 알렉산드르 바슐라체프(Aleksandr Bashlachev)라는 바르드 등 1980년대 러시아 언더그라운드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들이 활동했다. 그렇지만 이들 중 나우찔러스 뽐삘리우스의 리더 비야체슬라브 부뚜소프(Vyacheslav Butusov)는 1987년 뻬쩨르부르그로 이주해 와서 밴드를 재조직했고(1988년 멜로지야에서 공식 앨범을 발표한다), 알렉산드르 바슐라체프도 비슷한 시기 뻬쩨르부르그로 이주했다.

종합해 본다면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록을 둘러싼 상황은 문화적 표현은 개방되었지만 이에 걸맞는 경제적 시스템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좋게 말한다면 이 시기는 ‘자본주의적(?)’ 표현의 자유와 ‘사회주의적(?)’ 복지 시스템 양자의 혜택을 모두 누렸던 시기다. 그 결과 록 뮤지션들은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음악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고, 록 페스티벌의 개최나 록 클럽의 운영은 아직 당국의 재정 지원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는 상황은 음악인들에게는 좋은 조건일 것이다. 1980년대가 소비에트 사회에서 ‘록의 시대’였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고 과도적인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서방과 대면하면서 소비에트 록의 스토리는 꼬이기 시작한다.

자 그라니쩨이(경계를 넘어) 1: 페스티벌과 투어

1980년대 후반 모스끄바와 뻬쩨르부르그를 비롯한 대도시를 찾은 외국인들은 “사회주의 나라에 왠 양아치들이 이렇게 많은가”라고 놀랐다고 한다. 이들이 본대로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서방 ‘하위문화’가 번성했다. 검은 가죽 점퍼를 입은 헤비 메탈을 듣는 메딸리찌(metallitsi), 스포티한 복장으로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브레이께리(breikeri), 지저분한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 밴드를 두른 히빠니(khippany), 헐렁한 슈트와 뾰족구두를 신은 스띨랴지(stilyagi), 싸구려 보석으로 장식한 노비 로만띠까(Noviy Romantika), 거기에 스킨헤드족처럼 ‘서양물 먹은 애들’을 증오하는 루베리(luberi)까지… 1980년대 소비에트의 대도시는 영미 하위문화의 역사적 스타일들의 축소판 전시장 같았다.

이렇듯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비에트 록의 문화적 상황은 ‘국제화’되어 있었다. 서방의 미디어들은 소비에트 록의 ‘난데없는’ 출현에 좋은 취재감을 발견한 듯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을 올렸다. 러시아의 록 음악인들은 ‘수박 겉핥기’같은 다큐멘터리 내용에 실망스러워 했지만, 프랑스에서 제작한 [Rock Around The Kremlin], 영국 BBC에서 제작한 세르게이 꾸리오힌(Sergei Kuryokhin)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 소비에트 록 음악과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에 관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꾸리요힌은 아방가르드 재즈 뮤지션으로 1980년대에는 아끄바리움의 멤버로도 참여했다).

미디어의 주목과 더불어 소비에트 록의 ‘수출’이 시작되었다. 1986년 경에는 스타스 나민 그룹, 아브또그라프(Avtograph), 디알로그(Dialog) 같은 프로페셔널 록 그룹들이 서방세계의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1987년부터는 ‘아마추어’ 그룹들도 외국으로 진출했다. 아끄바리움이 몬트리올에서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료인 컨퍼런스 주최로 열린 자선공연에 초대되어 크로스비, 스틸스 & 내쉬(Crosby, Stills & Nash), 브루스 콕번(Bruce Cockburn)과 함께 공연했고, 이후 많은 밴드들이 ‘난생 처음’ 외국 땅을 밟아 소비에트 록의 존재를 알렸다.

주) 스타스 나민 그룹은 도쿄에서 피터 게이브리얼(Peter Gabriel), 루 리드(Lou Reed)와 함께 무대에 섰고, 아브또그라프는 런던의 캐피틀 라디오(Capitol Radio)가 주최한 페스티벌에, 그리고 디알로그는 파리의 MIDEM 페스티벌에 각각 참여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밴드들을 초청하여 서방에서 개최된 공연과 페스티벌들은 ‘동서의 친선’을 목표로 하는 비상업적 이벤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8년까지 소비에트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으로 외국에서 공연을 할 경우 공연수입의 80%를 국가공연위원회(Goskontsert)가 징수했기 때문이다. 1989년 법령이 개정되면서 비로소 민간 공연조직이 외국의 에이전트와 직접 계약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상업적 목적’의 외국 공연(이른바 ‘투어’)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외국 진출과정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는 1990년 뉴욕과 LA 등지에서 투어를 가졌던 유리 셰브추끄의 밴드 D.D.T.였다. ‘돈 문제’에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던 러시아 록 뮤지션들은 공연관련 계약서에 ‘계약서에는 공연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비용은 밴드가 공연에서 번 수입으로 충당한다’는 말을 읽지 않았다. 미국측 에이전트도 그 사실을 밴드에게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밴드가 뉴욕을 거쳐 로스앤젤리스에 왔을 때 수중에는 돈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때서야 이들은 에이전트로부터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통보받았다. 러시아의 루블화는 ‘태환성(convertibility)’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비행기표를 구매하기 위해 막일을 해서 달러를 벌어야 했다. 이때 이후 유리 셰브추끄는 미국인들에 대해 극도로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다.

20011031112534-0321series03-mikhail사진설명: 뗄레비조르의 미하일 보르즈이낀
또 하나의 씁쓸한 경험은 뗄레비조르의 미하일 보르즈이낀(Mikhail Borzyikin)에게 발생했다. 1992년 베를린에서 “White Night Of St. Petersburg”라는 이름으로 3일간의 페스티벌이 개최되었고, 뗄레비조르는 D.D.T. 등과 함께 참여했다. 명색은 국제 페스티벌이었지만, 독일측 기획자는 포스터에 공연 날짜를 잘못 적는 등 수준 미달이었고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청중은 독일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마지막 날 D.D.T.의 공연에는 300-400명의 청중이 참석했지만, 첫째 날에는 청중이 100명을 넘지 못했다. ‘흥행 저조’를 이유로 에이전트는 뗄레비조르에게 멤버당 20마르크(약 12달러 = 1만 5천원)를 주겠다고 말했다. 보르즈이낀은 이때의 경험을 “굴욕(Unizhenie)”이라는 곡으로 표현했다.

Televizor – Unizhenie

공연을 가진 밴드가 돌아오는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나 흥행성적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러시아 록 뮤지션들에게 이는 너무나도 생경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공연이나 페스티벌이란 ‘뚜소브까의 정서적 친밀성’을 기초로 하는 행위였고, 주최자는 초대한 밴드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페스티벌’이라는 행사에서는 참여하는 밴드들이 정액의 개런티를 받는 것이 또 하나의 관례였다. 이런 환경에서 활동해온 이들에게 서방의 음악 비즈니스는 냉혹하고 비정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미국이나 영국처럼 음악산업 시스템이 확고한 나라의 록 뮤지션이라면 자신의 예술적 자율성을 견지하면서 음악 산업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그렇지만 서방세계에 난생 처음 나가본 러시안 록의 ‘영웅’들은 음악산업과의 게임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이는 일회적 공연이 아니라 레코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라니쩨이(경계를 넘어) 2: 음반 발매

아마도 러시아의 밴드들 중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밴드는 모스끄바의 헤비 메탈 밴드 고르키 파크(러시아 이름은 빠르끄 고르꼬그)일 것이다. 모스끄바 록 음악계의 실력자인 스타스 나민(Stas Namin)의 후원 아래 1987년부터 외국 진출을 모색한 고르키 파크는 MCA와 계약하고 1989년 셀프 타이틀의 음반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Bang”의 뮤직 비디오가 MTV 전파를 탔고, “Try To Find Me”와 본 조비와의 공작인 “Peace In Our Time”이 한때 라디오 전파를 탔다. 고르키 파크는 1989년 9월 모스끄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열린 [Moscow Music Peace Festival]에서 러시아 밴드로는 유일하게 본 조비(Bon Jovi), 모틀리 크루(Motley Crew),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스콜피온스(Scorpions), 스키드 로우(Skid Row), 신데렐라(Cinderella) 등 서방의 메탈 밴드와 같은 무대에 섰다.

고르키 파크는 이후 두 종의 앨범을 더 발매했지만, 이때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왜일까? 미소 친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고르키 파크는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한 뒤 효용을 잃어버렸다. 이와 동시에 ‘헤어 메탈(hair metal)’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의 TV 프로그램인 [Saturday Night Live]는 소련의 붕괴에 관한 ‘톱 텐 리스트’를 뽑으면서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이제 더 이상 철의 장막 배후에 고르키 파크 같이 구린(cheesy) 메탈 밴드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들의 역할이 시효만료되었음을 말해주었다.

고르키 파크는 처음부터 ‘수출용’으로 성장한 케이스였고 국내의 언더그라운드에 확고한 기반을 둔 경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다 지역적 신뢰(local credibility)를 가진 음악은? 이야기는 1986년 7월 발매된 [Red Wave: Four Underground Bands In The U.S.S.R.]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뻬쩨르부르그의 네 밴드 아끄바리움, 알리사, 끼노, 스뜨라니에 이그리(Stranniye Igry: Strange Games)의 레코딩을 수록한 이 더블 앨범과 관련된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의 비벌리 힐스에서 태어난 조애너 스팅그레이(Joanna Stingray)라는 미국 여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틀리 크루의 토미 리(Tommy Lee)와 잠시 동거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스팅그레이는 1985년 뻬쩨르부르그에 건너 와서 뻬쩨르부르그 언더그라운드에 관심을 보였고, 이윽고 이들의 음악을 미국에 소개한다는 취지 하에 [Red Wave]를 발매했다.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그녀는 급기야 끼노의 기타리스트인 유리 까스빠리얀(Yuri Ksaparyan)과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존재는 서방세계에 나가기 위한 비자조차 발급 받기 힘든 뻬쩨르부르그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에게는 마치 신세계로 향하는 한줄기 빛 같은 것이었다.

사진설명: 1987년 미국에서 ‘비합법적으로’ 발매된 러시안 언더그라운드 록의 샘플러 [Red Wave]의 표지.
그렇지만 [Red Wave]는 소비에트의 저작권법을 무시하고 발매된 ‘불법’ 음반이었다. 조애너 스팅그레이는 “소비에트 관리들이 허락할 것 같으냐?”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지만 절차를 무시한 행동의 영향이 오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까스빠리얀과 이혼한 뒤에 영화계와 음악계를 전전하면서 숀 펜(Sean Penn), 퍼프 대디(Puff Daddy) 등과 염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행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Red Wave]를 발매한 그녀의 행동이 책임감과 성의를 결여한 점과 왠지 무관치 않아 보이는 대목이다.

Joanna Stingray(Dzhoanna Stingrei) – Gost’

[Red Wave] 이후 조애너 스팅그레이는 앞서 언급한 모스끄바의 ‘뉴 웨이브 거라지 밴드’ 쩬뜨르의 바실리 슈모프(Vasily Shumov)의 영어 앨범 [My District]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메이저 레이블은 캐피톨 산하의 골드 캐슬(Gold Castle) 레이블에서 1989년에 발표된 이 앨범 역시도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그 뒤 바실리 슈모프는 가스빠리얀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는데, 왠지 미국의 부자 처녀가 러시아의 순박한 청년들에게 바람만 잔뜩 불어넣은 것이 아닌가라는 씁쓸한 느낌이 든다. 쩬뜨르는 평론가 뜨로이쯔끼가 “모스끄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뉴 웨이브 그룹”이라고 평가한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986년 당시에는 뜨로이쯔끼도 스팅그레이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었지만,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뮤지션들이 그녀에 대해 품는 감정은 그리 곱지만은 않다.

어쨌든 불법이라도 음반이 소개된 결과 여기 수록된 밴드들의 이름이 미국의 음반업계에 알려졌다. 결국 1987년 말 CBS(현 소니)의 켄 샤퍼(Ken Schaeffer)라는 인물이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를 만나러 뻬쩨르부르그를 찾아왔다. CBS는 벨카 인터내셔널(Belka International)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하여 소련과 동유럽의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발매하려는 프로젝트를 세웠고, 그 첫 작업으로 아끄바리움의 음반을 발매하려고 했다. 결국 1987년 말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미국을 향해 떠났다. 떠나기 전 뻬쩨르부르그의 동료들에게 “내가 찾아가는 곳은 미국이 아니다. 나는 내 노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아끄바리움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프로듀서는 평소 보리스의 팬을 자처한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데이브 스튜어트(Dave Stewart)였고, “러시아의 딜런: 글라스노스찌의 바람에 실려(Russia’s Dylan: Blowin’ In The Glasnost Wind)”, “팝 음악의 궁극적 크로스오버 아티스트(Pop Music’s Ultimate Crossover Artist)”, “글라스노스찌가 로큰롤 대사를 만들다(Glasnost Produces Rock-n-Roll Emissary)”라는 제하의 ‘미디어 하이프’도 뒤따랐다.

그렇지만 CBS 측은 아끄바리움의 그룹이 연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영미의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하고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노래만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처음에는 뻬쩨르부르그의 동료들을 초청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런저런 어려움이 닥치면서 결국 기획자의 요구를 수용하여 [Radio Silence]라는 솔로 앨범을 레코딩했다. 불행히도 레코딩 결과는 마치 밥 딜런이 유리스믹스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 것처럼 어정쩡한 것이 되어버렸다. 상업적으로는? 역시 성공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긴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이 러시아에 와서 E 스트리트 밴드(E Street Band) 없이 음반을 제작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뻬쩨르부르그에 돌아오자마자 “왜 우리의 리더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배신하는가”라는 식의 말을 들어야 했다. ‘메이저 레이블’에서 ‘영어 음반’을 ‘솔로’로 레코딩한 행위는 이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급기야 알리사(Alisa)의 꼰스딴찐 낀체프(Konstantin Kinchev)는 “Snova v Amerike(다시 미국에서)”이라는 곡을 만들어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를 신랄하게 조롱했다. 아끄바리움의 멤버들은 이전부터 결속력이 약화되어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한데 모이지 않게 되었다.

이상의 두 경우는 ‘영어 앨범’이었다. 오히려 모스끄바의 즈부끼 무와 뻬쩨르부르그의 아비아처럼 러시아어 음반을 서방의 레이블과 계약하고 음반을 발표한 케이스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즈부끼 무는 프로듀서를 맡은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아방가르드 음악으로 유명한 오팔(Opal) 레이블에서 발매하여 ‘무언가 괴짜스러운 음악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낳았다. 물론 그 대가는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록’의 스테레오타입이 ‘아방가르드하고 풍자적인 카바레 록’이라는 인상을 낳는 것이었다.

1990년부터 동유럽과 러시아의 록 음악에 대한 서방 세계의 관심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 어쨌든 빌리 브랙이 1986년 레닌그라드 록 클럽을 찾아 와서 했던 이야기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현재 서방의 많은 아티스트, 뮤지션, 젊은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찾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혁명적 예술에 주의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서방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엄청난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들의 뿌리를 천착하여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업적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서방의 아티스트들….이 러시아의 혁명적 예술에 주의를 돌리는 일’은 단기간의 집중적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집권한 옐친 정권이 선택한 ‘시장경제로의 급진적 이행’은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갔다. 1980년대까지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질식할 정도로 갑갑했지만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은 시장경제 하에서 생계를 벌기 위해 음악 활동을 해야 했다. 서방의 음악산업을 실제로 접하면서 시장에 의한 통제가 공산당과 KGB의 정치적 탄압 못지 않게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자각하기 시작하자마자,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시장이라는 괴물과 만나야 했다. 아이러닉하게도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그들이 그토록 바래왔던 자유와 개방의 물결이 한바탕 지나간 뒤 이전과 마찬가지로 ‘반체제’, ‘비주류’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슬픈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20011027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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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Grebenshikov의 [Radio Silence] 관련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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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러시안 록 데이터베이스 (바이오그래피, 리뷰, 음원)
http://txt.zvuki.ru
러시안 록 mp3 다운로드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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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sa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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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entr(Vasily Shmov) 관련 정보(디스코그래피와 가사)
http://www.kulichki.com/moshkow/KSP/centr.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