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록의 미디어: 갈비뼈 레코드와 마그니즈다뜨

지금까지 이 글은 러시아(및 구 소련)에 록 음악이 존재했다고 가정했지만 그게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50년대 말 – 1960년대 초의 해빙기 동안 소련 사회가 어느 정도 개방되면서 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서양의 레코드’가 유입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음반이라는 상품의 유입이 ‘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어찌 보면 예측가능하다. 록 음악이 아예 싹이 잘리거나 재빠르게 상업화되지 않는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수순일 것이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저 좋아서’ 듣는 사람들이 형성된다 → 어설픈 흉내를 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점차 확산된다 → 나름의 자의식이 발생하고 ‘대안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언더그라운드가 형성된다 → ‘로컬 영웅’이 나타나서 씬(scene)을 이끌면서 ‘황금시대’를 만들어낸다.

물론 나라와 지역에 따라서 마지막 단계는 성취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록 문화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계속 비실거리다가 스멀스멀 사라지고, 오버그라운드에서는 ‘팔아먹기(selling-out)’에 성공한 엄한 놈이 스타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불행히도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고 생각되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러시아 같은 ‘폐쇄 사회’, ‘철의 장막’에서 어떻게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는가라는 점이다(물론 저런 용어는 이데올로기적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여기서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되는데, 먼저 ‘음반’과 미디어에 대해 알아 보자.

서방세계의 라디오나 TV 방송으로 음악을 듣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주크박스 같은 것도 희귀했으므로 소련에서 록 음악의 전파는 순전히 ‘음반’이라는 미디어에 의존했다. 그런데 국영 레이블에서 서양의 ‘팝’ 레코드를 합법적으로 음반을 복제하여 배급하는 일은 먼 훗날의 일이고, 암시장에서 ‘원판’을 구하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결과 소련의 록 팬에게 서양의 LP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비판한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의 제 1의 대상이었다.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대안적’ 복제방법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앞에서 빅또르 쪼이(Victor Tsoi)가 말한 ‘X-레이 판’ 혹은 ‘갈비뼈 레코드(record on rib)’고 불리는 소련판 해적판에 대해 언급할 차례다. 웬 갈빗대? 다름 아니라 서양의 원판이 너무 귀한 데다가 암시장을 통해 비싼 가격으로밖에 구할 수 없던 나머지,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버리는 얇은 판을 복제의 미디어로 삼았던 것이다. 가운데 구멍을 뚫고 언저리는 가위로 오려내어 원형으로 만든 소련판 ‘빽판’은 갈비뼈가 허옇게 보이는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음질은 최악이었고 전축 바늘이 상하는 일도 많았지만 갈비뼈 레코드는 러시아의 초기 록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매체였다.

물론 갈비뼈 레코드는 이제는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다음 단계는 카세트 테이프(마그네틱 테이프)였다. 간단히 말해서 ‘더블 데크로 더빙한 테이프’이고, ‘원판’이 귀하다 보니 한번 더빙한 걸 다시 더빙한 걸 또다시 더빙하는 일련의 과정, 요즘 말로 하면 시리얼 커피(serial copy)를 통해 만들어진 테이프는 친구와 지인을 통해 ‘손에서 손으로’ 소련의 광활한 영토 전역에 퍼졌다. 이렇게 ‘홈 테이핑’된 카세트 테이프는 마그니즈다뜨(magnizdat)라고 불렸는데, ‘러시아 혁명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제정 러시아 시기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발행한 ‘불법 출판물’인 사미즈다뜨(samizdat)로부터 따온 이름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마그니즈다뜨는 처음에는 서양의 팝 레코드를 복제하는 것이 대다수였지만, 1970년대부터는 언더그라운드 록 그룹이나 비소쯔끼나 오꾸자바 같은 바르드가 비공식적으로 레코딩한 음악도 전파하게 되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대학가와 노조를 통해 은밀하게 유통되었던 ‘비합법 테이프’와 비슷할 것이다. 이렇게 비합법적이자 비상업적인 ‘지하경제’가 러시안 록을 성립시킨 주요 미디어였다. 물론 한때는 ‘건전한 지하경제’였던 이런 관행이 지금은 ‘러시아는 불법 복제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듣는 관행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르지만.

러시안 록의 주체: 스띨랴지와 ‘아마추어’ 그룹

다음은 록 커뮤니티의 ‘주체’들이다. 영미권이 아닌 지역에서 록 커뮤니티란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일군의 집단’이라고 간단히 정의되지만 ‘나름의 토착적 전통’이 없이는 쉽게 형성되지 않고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유행에 그치고 만다. 러시아의 경우 적어도 30년간 록 커뮤니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언가 선사(先史)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가이드를 한 명 구하자. 가이드는 러시아의 록 평론가 아르뗌 뜨로이쯔끼(Artem Troitsky)라는 인물로서 1986년 ‘러시안 록의 진정한 스토리’에 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이다. 이 책은 영어로 번역되어 서방세계에 러시안 록의 소문을 알렸고, 제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Back in the U.S.S.R.]이었다.

20010916105650-0318series01kolya사진설명 : 뻬쩨르부르그 록 클럽에 모인 청중들. 셋째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에 “비틀스 외에는 모든 것이 억압”으로 생각했던 ‘비틀즈올로지스트(Beatlesologist)’ 꼴리야 바신(Kolya Vasin)이 앉아 있다. 출처: A. Troitsky(1987), [Back in the U.S.S.R.]

이 책에 저술된 내용을 믿는다면 러시아에서는 1950년대부터 모스끄바와 쌍뜨 뻬쩨르부르그 등지에 러시아 최초의 힙스터(hipster)라고 할 만한 스띨랴지(stilyagi)가 존재했다. 스띨랴지라는 단어가 영어의 ‘style’로부터 파생되었듯, 이들은 ‘소비에트 드림’과는 무관심하게 멋진 옷을 차려입고 댄스 클럽에서 재즈를 들으면서 하릴없이 놀던 일군의 무리들이었다. 당시 ‘코스모폴리타니즘과의 투쟁’에 경주하던 소비에트 당국은 주기적으로 ‘청소’를 단행하여 인간망종 같은 스띨리야지의 긴 머리카락과 몸에 꽉 달라붙은 바지를 가위로 잘랐다고 한다(박정희가 떠오르는가, 김일성이 떠오르는가).

뜨로이쯔끼는 1950년대 후반 스띨랴지가 샤뜨니끼(shatniki)와 비뜨니끼(beatniki)로 분열되었다는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샤뜨니끼란 영어의 ‘state’라는 뜻의 ‘shat’로부터 파생된 말로 이때 ‘state’란 ‘United States’, 즉 미국을 가리켰다. 이들은 주트 수트, 헐렁한 레인코트, 짧은 ’플랫 톱‘ 헤어 스타일을 하고 비밥과 쿨 재즈를 들었다. 반면 비뜨니끼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로큰롤에 맞추어 춤을 춘 최초의 ‘로큰롤 피플’이었다. 이들은 1950년대 말 소련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하면서 점차 소멸해 갔지만 후대의 록 커뮤니티의 성원들에게 중요한 상징작용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스띨랴지는 ‘최초의 청년 하위문화’이기는 해도 ‘수동적 소비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어설프지만 ‘생산자’가 탄생한 것은 전기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록 그룹들이 탄생하면서부터다. 기록에 의하면 1961년 리가(Riga)에서 리벤저스(The Revengers), 1963년 뻬쩨르부르그에서 스뜨라니끼(The Wanderers) 주)에서 각각 ‘지역 최초의 록 밴드’가 밴드가 탄생했다고 한다. 무엇에 복수하려는지, 어디를 방랑하려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이들은 서투른 영어 발음으로 서처스(The Seachers)와 비틀스(The Beatles)의 곡을 ‘커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신성한 사명인 것처럼 ‘모든 사운드와 목소리를 가급적 오리지널과 똑같이 연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물론 집에 있는 피아노 줄을 뽑아서 수제(手製) 기타를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도 함께 전해진다(피아노를 작살낸 다음 부모한테 혼 깨나 났을 것 같다).

주) 뜨로이쯔끼의 책에는 러시아 밴드들의 이름도 영역되어 있어서 러시아어 이름을 알아낼 수는 없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The Wanderers’는 ‘Straniki’로 보인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이 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은 ‘미국의 로큰롤 그룹’보다는 ‘영국의 비트 그룹’에 친화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미국의 로큰롤에서 흑인적인 거친 리듬, 빠른 템포, 보컬 샤우팅, 성적 인토네이션 등은 ‘이국적’이었다는 것이 뜨로이쯔끼의 평가다. 따라서 최고의 우상은 비틀스였고, 영국 출신 밴드라고는 해도 롤링 스톤스와 후처럼 ‘미국적’ 로큰롤을 연주하는 그룹은 비틀스의 라이벌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비틀스에게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화성과 멜로디’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점은 ‘추운 나라’에 사는 음악 팬들에게는 공통적 현상으로 보인다. 아니, 이런 말은 조야한 지리결정론이므로 ‘추운 기후라는 자연적 조건과 유럽 예술음악의 전통이 강한 문화적 조건을 가진 나라’로 수정해야 덜 부정확하겠지만.

이들 그룹의 뮤지션들은 그들 스스로 서양 록 음악에 대한 열렬한 소비자로서 스띨리야지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편 공연도 갖기 시작했다. ‘원본과 똑같은 카피’라는 뮤지션의 목표는 팬들의 바램과도 일치해서, 이 그룹들은 테이프(마그니즈다뜨)마저도 귀하던 시절 카페와 클럽에서 ‘라이브 주크박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신청곡’을 받아 즉석에서 연주했다는 뜻이다. 라이브 주크박스는 갈비뼈 레코드와 더불어 러시안 록의 초기 역사에 나오는 또 하나의 전설이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1966년 최초의 ‘페스티벌’이 개최되어 200석의 까페에서 다섯 그룹이 연주했다고 하니 어떤 분위기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물론 페스티벌 같은 공식 행사에는 꼼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나온 심사위원들이 ‘관찰’을 했다고 한다. 반면 1967년에는 드디어 ‘사고’가 발생했다. 뻬쩨르부르그의 뽈리떼끄닉 연구소에서 아르고너츠(Argonauts)라는 밴드가 연주할 때 팬들이 보드카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웠고, 급기야는 무대 위에 올라가 ‘행패’를 부린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뻬제르부르그시 공산당 중앙위원회까지 개최되었고 아마추어 그룹들은 당국의 승인 없이는 공중 앞에서 연주가 금지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런 금지는 보다 적극적 정책을 위한 예비였다.

아마추어 vs 프로페셔널 그리고 셀링 아웃

1960년대 소련에서 ‘록’이라는 용어는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틀스 등 영국 그룹을 지칭하던 ‘비트 그룹’이라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었다. 어쨌거나 이들 비트 그룹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음악적 수준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그 전까지 소련의 대중음악은 오직 작곡가 동맹에 소속된 ‘프로페셔널 작곡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고, 200여 개의 공인된 단체에 소속된 ‘직업 음악인(프로페셔널 뮤지션)’에 의해서만 연주될 수 있었다. 그러니 소련의 직업적 작곡가들이 비틀스를 들으면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감히 자작곡을 연주하다니’라면서 놀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건 뭐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국가가 공인하는’ 직업적 음악인이 되어야만 임금도 받고, 순회 공연의 기회도 생기고, 장비도 무료로 제공받고, 음반 레코딩이나 방송 출연도 가능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아마추어 음악인은 음반 판매는커녕 공연을 통해서도 돈을 벌 수 없었고, 자작곡을 연주하려고 해도 청중이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런 시스템은 1980년대 중반 최초의 ‘공인된’ 록 클럽이 만들어지면서부터 겨우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 음악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미덕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수한 아마추어 그룹들이 만들어졌고, 1960년대 말에 접어들면 “학교나 공장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밴드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뜨로이쯔끼가 1970-72년의 시기를 (소련에서) “록 음악의 전국적 융기의 절정(Nation-wide Rise of Rock)”이라고 부를 정도로 록 음악은 금지 일변도의 정책으로는 다룰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소비에트 당국의 정책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다름 아니라 ‘프로페셔널 그룹’을 만들어서 아마추어 그룹에 대응하는 정책이었다. ‘록’이나 ‘비트’라는 용어는 여전히 기피되었으므로 이들은 VIA라고 불렸는데, 이는 ‘보컬/인스트루멘틀 앙상블 vocal/instrumental ensembles’의 러시아어 이니셜이다. 이들은 10명 안팎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영미 히트곡의 번안곡이나 러시아 대중가요를 연주했다. 음악은 어땠는가. 연주할 레퍼토리의 가사와 곡조를 관계기관에 제출하여 매월 사전 검열을 받고 연주하는 그룹이 오죽하겠는가. ‘노래하는 기타’, ‘행복한 아이들’ 등의 그룹 이름부터가 이들이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 지 짐작케 해준다. 뜨로이쯔끼는 이들을 ‘훈육받은 비트 그룹’ 혹은 ‘거세된 비트 그룹’이라고 표현했다. 하긴 이들이 소비에트식 관변 연예 스타일로 훈육된 케이스라면 몽키스(The Monkees) 등은 아메리카식 쇼비즈니스 스타일로 훈육된 케이스 아니겠는가. 또 대학교 당국에서 ‘장학금’을 주면서 육성했던 한국의 캠퍼스 그룹 사운드는 별다른가.

VIA는 소련의 촌구석까지 ‘전기 기타로 연주하는 밴드의 존재’를 알리는 순기능도 가졌지만, ‘과도기’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잔재는 남아 있다. 지금은 망해버린 삼성뮤직 산하 레이블인 오렌지에서 발매한 [Best Of Russia]에서 이런 ‘관제 록 그룹’의 음악을 몇 개 들을 수 있을뿐더러(이런 걸 도대체 왜 발매하는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현재 가장 인기있는 그룹이라는 이바누쉬끼 인떼르나찌오날(Ivanushiki International)에서도 이런 ‘전통’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면 통제의 주체가 ‘정부’로부터 ‘민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를 포함해서 ‘록 음악’이 저항적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어리석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록 음악의 존재 형식은 매우 다양하고, 그 중 어느 것이 지배적인가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에 의존한다’는 답변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Ivanushki International – Kukla (Doll)

아마추어 그룹들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이들의 에토스이기는 해도 이른바 ‘미디어 커버리지’가 없던 이들에게 공연의 기회마저 없다면 음악을 홍보할 기회는 없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공연을 조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비합법적으로 공연을 조직하는 것이다. 방법은 음악당을 빌린 다음 집에서 만든 티켓을 친구들에게 판매하는 것으로서, 이것 역시 ‘지하경제’의 일종이었다. ‘브레즈네프 시기’라고 불리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 사회는 ‘선진 사회주의’라는 당의 구호가 무색하게 경기침체와 부정부패로 푹푹 썩어 들어갔고 이로 인해 각종 지하경제가 번성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록 음악마저 지하경제로부터 혜택을 보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자 현실이었다.

20010916105650-0318series02gorkypark사진설명: 러시안 록의 ‘수출용’ 밴드 고르키 파크 = 빠르끄 고르꼬그(Park Gorkogo). 1990년 머큐리에서 발매한 음반은 한국에서도 라이선스 발매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이런 일을 대행해주는 인물들도 탄생했는데, 이들은 영어식으로 ‘매니저’라고 불렸다. 그 가운데 스타스 나민(Stas Namin)이라는 인물은 직접 밴드를 이끌고 음악도 연주하면서 매니저를 겸했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뒤에 한국에도 음반이 발매된 헤비 메탈 밴드 고르끼 빠르끄(Park Gorkog: Gorky Park)의 라이너 노트(필자: 성우진, 제목: 자유세계로 진출을 시도한 소련 출신의 최정상 그룹)에 밴드의 매니저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모스끄바의 록 씬의 실력자로 군림해 왔다. 국영 레이블 멜로지야에서 최초로 음반을 발매한 것도 스타스 나민이 이끈 밴드였다.

소련에서는 이렇게 국영 레이블로 활동의 장을 옮기는 경우를 ‘셀링 아웃’이라고 불렀다. 영미권 등 서방세계에서는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클럽에서 ‘합법적’으로 공연을 조직하는 것은 ‘셀링 아웃’에 해당되지 않는다. 메이저 레이블로 이적하는 경우 팬들로부터 ‘팔아먹기’ 혹은 ‘배신’이라는 뜻의 ‘셀링 아웃’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반면 소련 사회에서는 직업적으로 음악인이 된다는 자체가 정부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을 조직하는 것은 ‘배신 행위’에 속한다.

1970년대까지 소련의 아마추어 록 그룹들이 셀링 아웃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비에트 당국은 아마추어 록 그룹들을 ‘체제의 기생충’ 정도로 취급하면서 프로페셔널 밴드인 VIA가 활성화되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안이한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앞서 본 것처럼 ‘대관’을 통해 공연을 조직하는 현상도 지속되었고 뻬쩨르부르그의 ‘록 클럽’처럼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공간도 만들어졌다. 무언가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뜨빌리시 80] 그리고 마쉬나 브레메니

1980년대를 한 달 앞둔 1979년 12월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위성 정권’을 세웠다. 이 사건은 다가올 1980년대가 험악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오사마 빈 라딘이 ‘투사’가 된 것도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나 한국의 광주항쟁 등의 분쟁이 발생한 것도 1980년이다. 마침내 1980년 말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 사이에는 ‘신냉전’이 전개되었다.

소련 내부에서는 무슨 사건이 있었을까. 그해 7월 19일부터 8월 3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제 22회 하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렇지만 참가국은 81개국에 그쳐서 4년 뒤의 로스앤젤리스 올림픽(140개국 참가)은 물론 4년 전의 몬트리올 올림픽(88개국 참가)보다도 적었다. 다름 아니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대한 미국의 카터 정권이 올림픽 보이코트를 선동했기 때문이다(한국도 당연히 불참했다).

그렇지만 소련의 록 커뮤니티 성원들에게 1980년에 가장 중요한 사건을 물어본다면 한결같이 “[뜨빌리시 80]”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해 3월 스딸린 ‘동지’의 고향인 그루지야의 수도에서 개최된 이 행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범소비에트적 페스티벌이었다. 비록 관에서 나온 심사위원이 우수 그룹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경연대회 형식이었지만, 뜨빌리시 80은 시베리아를 제외한 전역에서 ‘비공식적’ 록 밴드들이 초빙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소비에트판 우드스톡’이었다.

20010916111207-0318series03mashinavremeni사진설명: ‘러시아의 비틀스’ 마쉬나 브레메니. 제일 왼쪽이 안드레이 마까레비치

[뜨빌리시 80] 페스티벌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그룹은 마쉬나 브레메니(Mashina Vremeni: ‘타임 머쉰’이라는 뜻)였다. 안드레이 마까레비치(Andrei Makarevich)가 이끈 마쉬나 브레메니는 1970년대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던 존재이자 ‘러시아의 비틀스’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순수하게 음악적 관점에서의 평가가 아니라 ‘후대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의 평가다. 사실 이들의 음악은 매우 표준적이고 원만한 스타일이고 서양적 기준에서는 ‘팝 록(pop rock)’으로 분류될 만하다. 그런데 이들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1970년대부터 소련의 록 그룹들은 ‘비틀스의 모방’을 넘어 딥 퍼플, 레드 제플린, 시카고, 산타나, 예스 등 영미의 슈퍼밴드들이 만든 국제적 트렌드에 영향받았다. 동시에 자작곡의 비중이 증대하고 가사도 영어를 벗어나 러시아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기는 해도 대부분의 그룹은 여전히 러시아어로 노래부르는 것을 불쾌한 의무 정도로 생각했다. 마쉬나 브레메니가 동시대의 다른 그룹들과 달랐던 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안드레이 마까레비치는 바르드의 시가(詩歌)의 전통으로부터 영향받아 러시아어로 ‘시’를 썼고, 이를 록 음악의 비트와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는 마치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밥 딜런이 했던 것처럼 록 음악에 ‘생각’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소련의 록은 영미의 트렌드에 강하게 영향받은 스타일(‘하드 록’이나 ‘아트 록’)과 마쉬나 브레메니 스타일의 바르드 록(bard rock)으로 양분되었고, 록 커뮤니티의 청중들은 점차 후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나아가 ‘러시아어 시를 가진 록 음악’은 록 커뮤니티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접근할 수 있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쉬나 브레메니가 1970년대 이후 소련에서 ‘가장 인기있는 록 그룹’인 것은 부동의 사실이다.

그런데 마쉬나 브레미니는 ‘아마추어 그룹 최초로 셀링 아웃한 존재’라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칭호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 아마추어의 세계와 프로페셔널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었고, 아마추어의 세계에서 ‘존중받는’ 그룹이 프로페셔널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1980년 소비에트 당국의 록 음악에 대한 정책의 변화 때문이다. 아마추어 록 그룹을 억압 일변도로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소비에트 당국은 개별 아마추어 연주 센터(Centre for Individual Amateur Performance), 국가 공연 조직(State Concert Organization: Goskontsert) 등의 기관을 설립하여 아마추어 그룹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미 ‘비공식’ 부문에서 음성적으로 영업하던 록 클럽들에게 가사 검열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록 그룹의 합법화와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유화 조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후 통첩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마추어 록 그룹은 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는 대가로 가사 검열을 감수하든가, 아니면 재정지원도 가사검열도 모두 거부하든가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했다. 마쉬나 브레메니의 경우 이 제안을 수용하여 1980년 이후 ‘프로페셔널 록 그룹’이 된 것이다. 그 점에서 [뜨빌리시 80]은 소비에트판 우드스톡인 것이 맞다. 이전까지의 ‘운동’의 정점이자 상업적 변질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Mashina Vremeni – Kogda Mi Soydem S Uma (When We will not be Mad)
Andrey Makarevich – Eto Noviy Den’ (That New Day)

아끄바리움: 러시안 펑크 록의 대부?

소련에서 ‘록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1980년대 록 커뮤니티의 성원들은 안드레이 마까레비치와 마쉬나 브레메니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커뮤니티의 동료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에 가까운 답일 것이다. 이는 그들이 프로페셔널 록 그룹이 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음악적 정서 면에서 마까레비치는 1980년대 이후의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는 단지 물리적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마까레비치와 거의 비슷한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명의 인물은 1980년대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맏형이라는 대우를 받는다. 일단 영국인 연구자인 폴 이스턴(Paul Eastern)이 직접 관찰한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사진설명: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아끄바리움. 1980년 [뜨빌리시 80] 록 페스티벌에서의 연주장면. 가운데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Boris Grebenshikov). 출처: A. Troitsky(1987), [Back in the U.S.S.R.]

“뻬쩨르부르그의 울리차 소피아 뻬레소파(Ulitsa Sofia Peresofa)에 있는 그의 공동체적 아파트에 가면, 대중의 의식의 후견인(custodian)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증거들을 볼 수 있다. 8층에 있는 그의 집으로 이르는 계단의 벽은 온통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다. ‘보리스, 당신은 삶입니다’, ‘우리는 당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아끄바리움 – 소비에트 청년의 정신과 의식’(유명한 레닌 포스터의 패러디다). 이런 것들은 고립된 히피들의 감정적 표현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낙서 밑에 쓰여진 지명이다. 노보시비르스끄, 끼에프, 그 외에도 수천 마일 떨어진 많은 지역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소년 혹은 소녀가 보리스를 만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중략)… 단지 그가 자기의 손을 잡는 감촉을 느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를 여행해 온 것이다. 이런 순례에는 무언가 종교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중략)… 존 레논 정도만이 보리스보다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저자는 러시아인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때 17살이었고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수년간 BBC로 록 음악을 들어 왔다. 나는 록 음악의 파워를 좋아했지만 가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끄바리움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음악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러시아 시가(poetry)를 결들인 록 음악이었다. 나의 친구는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 새로운 사운드를 들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그레벤쉬꼬프가 결정하도록 맡겼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 록은 하나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결정하도록 맡긴’ 인물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는 확인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수라고 해도 하더라도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에 국한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음악인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일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가 1980년대 소비에트 록의 새로운 흐름의 선구자라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끄바리움의 리더인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1953년생(다른 자료에 의하면 1952년생)이고 1975년부터 밴드를 결성하여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것은 없다. 최근 이들이 초기 레코딩이 박스 세트로 발매되었다는 뉴스가 있지만 이들의 팬 사이트에서도 1970년대 이전의 아끄바리움의 활동을 ‘선사 시기’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로 이 당시의 작품들은 ‘희귀본’이다. 게다가 이를 들어본 사람에 의하면 이들은 밥 딜런,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보위의 곡들을 러시아어로 번안한 작품이 많았다고 한다. 한 평자에 의하면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는 “Knocking On The Doors Of Grass”가 되었고, 조지 해리슨은 “In The Temple of Radjah Krishnu”로 경배되었고, 데이비드 보위의 곡은 “Song Of The Silent Days”가 되었다”고 한다.

이 글만 보아서는 아끄바리움이 ‘표절을 일삼는 밴드’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앞서 보았듯 소련 사회처럼 저작권 ‘개념’이 불분명한 나라에서는 번안(혹은 표절)이 ‘공식 문화’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걸 비난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와 아끄바리움의 음악 취향이 비틀스 → 블루스 록 → 하드 록 → 아트 록 혹은 헤비 메탈로 이어지는 록 음악의 정통 계보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다.주)

주) 여기서 록 평론가 뜨로이쯔끼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묘사한 문장을 인용해 보자. “나는 보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적으로 ‘당신들은 무슨 음악을 연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인들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는 루 리드(Lou Reed)도 있었다. 러시아의 록 음악인의 입에서 루 리드의 이름을 들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마침내 그는 공연을 보게 되었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들의 공연이 시작되면서 나는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미친 것들을 세어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중얼대는 포크 록, 캣 스티븐스 스타일의 부드러운 곡, 그리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류의 단조로운 록, 그리고 스틸리 스팬(Steeley Span)이 자랑할 만한 토마스 맬로리(Thomas Malory)의 가사를 가진 멜로딕한 중세의 발라드… 나는 즉시 그들과 영혼의 형제가 되기로 했는데, 그것은 이들의 솔직한 절충주의(frank eclecticism)가 대부분의 러시아 록 그룹의 경직된 보수주의보다 영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뜨빌리시 80]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 페스티벌에서 ‘명예’는 마쉬나 브레메니에게 돌아갔지만, ‘스캔들’은 아끄바리움의 몫이었다. 이들은 기타를 마이크 스탠드에 대고 치다가 갑자기 무대 위에 누워 기타를 배 위에 올려놓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대 위에서 멤버들 사이에 말을 주고 받는 등 연주는 자연발생적이었고 사운드는 조잡하고 시끄러웠다. 심사위원들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른 뮤지션들도 ‘록 음악이 겨우 공인 받으려는 순간에 저런 망나니들이 나타나서 망쳐버리고 있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들은 멋있는 폼으로 거장적 연주를 하려고 애쓰는 다른 밴드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이런 스캔들로 인해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는 다니고 있던 대학교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Akvarium – Marina (live at Tbilisi-80 Festival) (1980)
Akvarium – Pepel (in [Arox I Shter]) (1982)

이 공연을 촬영한 핀란드의 한 TV는 뒤에 [소비에트 록]이라는 제목으로 4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와 아끄바리움은 ‘소비에트 펑크의 대부’로 소개되었다. 실제로 아끄바리움의 출현은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스나 클래쉬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그룹은 ‘펑크 밴드’의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드럼, 베이스, 기타 외에 첼로, 플루트, 바순 등도 연주했다. 그리고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의 목소리는 모노 톤의 거친 샤우팅이 아니라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속삭임이었고, 가사 역시 직접적인 아나키의 선동이 아니라 시적 풍자와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었다.

이후의 작품을 염두에 둔다면 아끄바리움은 ‘펑크 밴드’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음악적 편력을 보여준다. 한 극단으로 이들의 비공식 데뷔 앨범인 [Siniy Albom(The Blue Album)]은 ‘어쿠스틱 포크 록’에 가깝고, 1990년대 이후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의 작품은 ‘러시안 포크송’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준다. 다른 한 극단으로는 [Tabu], [Elektrichestvo](A면은 [Tbilisi 80]의 라이브다), [Arox I Shter]에서 ‘노이지’하고 ‘그런지’한 펑크 록이 있다. 이렇게 단아하고 어쿠스틱한 포크송과 시끄럽고 일렉트릭한 펑크 록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보이듯 이들의 ‘절충주의’는 이전의 록 밴드들의 엘리트주의와는 사뭇 달랐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 소비에트 록의 ‘뉴 웨이브’(혹은 ‘모던 록?’)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20010915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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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러시안 록 서치 사이트
http://www.slavweb.com/eng/Russia/music/rock-e.html
Mashina Vremeni 사이트
http://www.mashina-vremeni.com (러시아어)
Akvarium 사이트
http://www.planetaquarium.com (러시아어)
http://www.aquarium.ru (러시아어)
http://www.planetaquarium.com/eng (영어)
http://www.dharmafish.org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