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1일 토요일. 친구와 함께 영화 [신라의 달밤]을 재미있게 보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 교보문고 내 음반 매장 ‘핫 트랙스(Hot Tracks)’에 들르게 되었다. 사실 교보문고에 간 이유는 평소 보는 잡지 [모조(Mojo)]를 사기 위함이었지만(막상 교보에 [모조]는 없고, 근처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만 사들고 나오기엔 ‘핫 트랙스’라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핫 트랙스’에 진열된 CD와 DVD를 훑어보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컬럼비아 레거시(Colombia Legacy)에서 최근 내놓기 시작한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리마스터링 시리즈였다. 모두 12장의 앨범이 ‘리마스터링 + 보너스 트랙’의 형태로 재발매되고 있는데, 그곳에 진열된 건 [British Steel](1980), [Points Of Entry](1981, 이 앨범은 미국반과 영국반의 커버 디자인이 다르다. 비슷한 이미지이긴 하지만), [Screaming For Vengeance](1982), [Defenders Of Faith](1984) 정도였다.

살까말까 약간 망설이다, 결국 [Screaming For Vengeance]와 [Defenders Of Faith], 두 장을 집어들었다. 위 두 앨범은 별로 즐겁지 못했던 중고교 시절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해주는 ‘추억의 유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뭐, 내 청소년 시절이 주다스 프리스트 때문에 유쾌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절 자체가 대다수 사람들의 성장기가 그렇듯 별 볼 일 없었다는 의미다.

내가 주다스 프리스트를 처음 알게 된 때는 1982년경이었다. “최신 앨범 [Screaming For Vengeance]를 내놓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브리티쉬 헤비 메탈의 거목 주다스 프리스트! 가죽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무대를 활보합니다!!” [월간 팝송] 11월호인가, 12월호에서 대충 그런 내용의 번역 기사를 본 게 첫 만남이었던 셈이다.

이 기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1983-84년 사이 주다스 프리스트는 갑자기 ‘헤비 메탈의 신(Metal God)’의 위치로 등극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주다스 프리스트의 일거수 일투족은 [월간 팝송]과 메탈 매니아 모두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러한 인기는 미국과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적, 상업적 최전성기와도 일치하는데, 이는 [Screaming For Vengeance]가 플래티넘을, [Defenders Of Faith]가 골드 레코드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감지될 수 있다.

비단 주다스 프리스트 뿐만이 아니라, AC/DC,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디오(Dio),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데프 레퍼드(Def Leppard), 머틀리 크루(Motley Crue), W.A.S.P. 등등, 헤비 메탈 장르 자체가 미국 영국 할 것 없이 역사상 최고의 상종가를 치던 때였다. 물론 이 시기에 메탈리카(Metallica), 슬레이어(Slayer) 등의 쓰래셔(Thrasher)들은 졸지에 들이닥칠 ‘해뜰 날’을 모른 채 지하 클럽에서 박박 기던 시절이었지만.

이러한 헤비 메탈의 열풍은 극동의 작은 나라 남한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고,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 환경, 즉 공연을 볼 수 없다는 점과(Tom Jones, K.C. & The Sunshine Band 등의 내한 공연이 대서특필되고 TV에 방송되던 시절이었다) 무수히 존재하는 금지곡의 위용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이상 과열된 면이 없지 않았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좀 한다 하는 청소년들은 헤비 메탈을 듣지 않는다면 경멸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청소년들(물론 남자다)의 음악 취향 분포도를 대략 보자면, 메탈 매니아가 45% 정도, 프로그레시브 록 매니아(귀족적인 마인드를 은연 중에 뿜고 있었던 이들 ‘계급’은 대체로 ‘클래식 록 매니아’를 겸하기도 했다)가 15% 정도, 클래식 애호가가 5%, 나머지 35%는 팝송이나 가요를 즐겨 듣거나 아니면 음악 자체에 도통 무관심한 ‘기타 잡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학창시절을 보내던 강남 지역(서초 지역은 제외)에서는 그랬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서, 위의 분포도에서 ‘프로그레시브 록 매니아(겸 클래식 록 매니아)’에 속하던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헤비 메탈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 당시 나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러쉬(Rush)에 완전히 빠져 허우적거리던 상황이었다. 내노라하는 메탈 밴드의 음악도,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는 핑크 플로이드이나 러쉬의 ‘차원 높은’ 음악 세계와 비교해보자면, 한참은 모자라 보였다. 두 번째, 청소년기의 일반적인 정신세계로는 무척이나 희한하게도, 당시 (지금도 뭐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헤비 메탈이 표방했던 ‘악마주의’를 내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교적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나는, 메탈 음악을 즐기면 하느님이 벌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미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메탈 음반에 용돈을 지출하기 아까워하던 청소년기의 내가 그래도 간간이 헤비 메탈의 주요 음반들을 놓치지 않고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동생 덕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트렌드의 첨단을 고수하려는 성향의 동생은 당시 절대적으로 유행하던 헤비 메탈에 당연히 열광(을 지나 거의 발광)하였고, 그런 동생의 ‘신념’ 덕분에 언제나 음악적 호기심은 왕성한 편이었던 나는 귀동냥을 심심치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주다스 프리스트의 경우는, 동생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입수하여 듣게 된 상당히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내가 처음으로 산 주다스의 음반은 [Screaming For Vengeance]. 1983년경, 그때 말로 ‘빽판’이었다. 어쩌다 생기는 돈으론 핑크 플로이드 원판 사기에 바빴으니(내가 처음 산 원판 LP는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과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로, 이 또한 1983년경이었다), 메탈 ‘따위에’ 거금을 투자할 필요는 없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도대체 빽판 말고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반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그렇지만 매우 운이 좋게도, 중고교 시절의 나는 비교적 원판을 많이 접하며 자란 편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주변 친구들(동생의 친구들 포함)과 친척들이 가정 환경이 넉넉한 록 음악 애호가였다는 데 있다).

워낙 “주다스! 주다스!”하는 분위기라, 나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이 그렇게도 대단한가’라는 궁금함을 못 이기고 결국 이들의 대표작 [Screaming For Vengeance]를 구입했던 것이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오 상당히 프로그레시브하다!’였다. 당시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은 글렌 팁튼(Glenn Tipton)과 K.K. 다우닝(K.K. Downing)의 각고의 노력으로 인해 상당히 ‘우주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원초적이고 때려부수는 게 헤비 메탈의 전부였다고 여겼던 내게, 주다스 프리스트가 구사하는 육중하지만 나름대로 정교한 ‘스페이스 록’은 상당히 신기하게 다가왔던 것이다(나중에 아이언 메이든의 10분을 넘기는 ‘프로그레시브 메탈’도 감동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처음 주다스 프리스트를 접한 뒤 본격적으로 이들의 음반(이때는 물론 ‘원판’이다)을 만져보게 된 건 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1, 2학년을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름 아닌 주다스 프리스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친구는 미국에 계신 이모를 십분 활용, 주다스 프리스트의 원판 다수를 보유하고 있었다(머틀리 크루의 원판 카세트도 다량 구비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British Steel]과 [Defenders Of Faith], [Turbo](1986) 등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특히 [Defenders Of Faith] 원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주변 메탈 키드들의 주목 대상이었다(당시 그 앨범과 머틀리 크루의 [Shout At The Devil](1983), 아이언 메이든의 [Live After Death](1985),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1986) 등의 원판(LP)을 확보하고 있으면 ‘특권 계층’으로 대접받았다).

때는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었던 ‘상아 레코드’가 원판 판매로 용돈 많이 받는 강남 소년들의 각광을 받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드디어 우리 말로 된 메탈을 들을 수 있다!(그런데 프로그레시브 록은 언제?)”라는 감격에 잠을 설치게 하던 시나위, 백두산, 부활 등이 대거 등장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친구는 강남 어린이치고는 성격이 상당히 좋은 편(이타적)이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주요 앨범들은 항상 ‘대여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그때 당시 나도 슬쩍한 – 훔쳤다기보다는 빌려와서 못(?) 돌려준 – LP 중에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주다스 프리스트의 [British Steel]과 머틀리 크루의 [Girls, Girls, Girls] (1987)가 있다).

물론 내가 친구로부터 ‘대여’해 온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은 곧장 내 동생의 품에 안기게 되어 있었다. 특히 동생이 열광하던 음반은 [Defenders Of Faith]였는데, 당연히 이 음반은 마음씨 좋은 친구도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던 작품이었고, 결국 빼돌리기에 실패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돌려주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리고 1986-87년 무렵. 컬럼비아(CBS) 레이블의 라이센스를 도맡던 지구 레코드, 그리고 주다스 프리스트의 초기 소속 레이블인 RCA의 라이센스 공급원이었던 서울 음반에서 드디어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금지곡으로 얼룩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작’에 육박하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작품들이 대거 라이센스로 선보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반이 되어 세상이 좋아질 때까지 끝끝내 ‘Printed In Korea’의 딱지를 달고 나오지 못한 앨범 세 장이 있었으니, 그것은 [British Steel], [Screaming For Vengeance], 그리고 [Defenders Of Faith]였다. 1980년대 초중반 최전성기 때와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그들의 음반들만 속속 라이센스로 발매될 때마다, 빽판의 빗발치는 잡음에 지친, 또는 원판 빌려준 친구가 언제 돌려달라고 하나 불안에 떨던 우리들은, 과연 위의 세 음반을 2500원 주고(1987년 하반기부터 3000원으로 올랐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언제 올까,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런 척박한 시절이 있었고, 세월은 흘러 오늘날 나는 그런 과거는 까맣게 잊은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코 들른 대형 매장에서 아주 우연히 청소년기를 뜨겁게 달궈주었던 주다스 프리스트의 옛 음반들이 고도의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새로 발매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환호작약하여, 자신의 금전 상황을 망각한 채 CD를 냉큼 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주다스 프리스트, 또는 롭 핼포드(Rob Halford)가 한국에 온다면, 당연히 공연을 보러 갈 것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무리 사고방식에 있어 첨단을 추구하며 ‘앞서나간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그래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몸부림쳐 보았자,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과거의 추억과 유물에 온 몸이 녹아나는 비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하루였다. 20010825 | 오공훈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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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Judas Priest 공식 사이트
http://www.judasprie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