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러시안 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들

“그때 당신은 로큰롤에 당신의 영혼을 바칠 수 있었다 / X-레이 쇼크로부터 들었던 사운드 / 누군가의 부러진 뼈의 사운드 / 아버지, 당신도 언젠가 비트닉이었다”(Viktor Tsoi)

무슨 말일까. ‘로큰롤에 당신의 영혼을 바친’ 일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 ‘아버지 세대’에 비트닉(이른바 비트족)이 있었다니 러시아의 록이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로큰롤이 ‘X-레이 쇼크로부터 들었던 사운드’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러시안 록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기는커녕 그곳에 록 음악이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에게는 생뚱맞기만 하다. 위 가사도, 그리고 이 글의 제목도.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은 ‘잘 모른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가 러시안 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점검하는 일로 오늘의 글을 시작하자. 달리 말한다면 이는 빅또르 쪼이의 죽음과 더불어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러시안 록에 대한 소식을 듣기 전에 무의식 속에 품고 있었던 착각들이기도 하다. 이것들을 대충 나열해 보자.

– 구 소련 사회에는 예술음악(art music)과 민속음악(folk music)만 있었고 대중음악은 없었다.
– 구 소련의 공산당 정권은 록 음악을 비롯한 서양의 대중음악의 유입을 통제하고 탄압했다.
– 구 소련에서 록 음악은 언더그라운드에만 존재했으며, 정치적으로 저항적이었고 ‘반공주의적’이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의 극히 일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오해들을 수정해 나가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아무래도 러시아 및 구 소련의 역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다지 흥미 있을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아직 애증(!)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울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취향과 거리가 멀다면 이 글은 넘어가고 다음 회부터 읽어도 좋다. 즉, 이 글은 구 소련 사회에서 록 음악 그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록 음악이 다른 음악과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도 차근차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구 소련에서 예술음악

1917년 10월 레닌과 뜨로쯔끼가 이끄는 볼셰비끼가 짜르(주: 러시아 황제)가 살던 모스끄바의 동궁(冬宮)을 접수함으로써 러시아에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이 나라는 그 뒤 주변 나라들과 함께 연방을 형성하고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차지했고, 1990년 12월 연방이 붕괴할 때까지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지배한 양대 초강대국(superpower)으로 군림했다.

여기서 좌파 시각의 ‘러시아 혁명사’나 우파 시각의 ‘소련 붕괴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라고 불린 체제에서 음악이 어떻게 존재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다. 먼저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혁명가들의 ‘취향’은 유럽(특히, 독일)의 클래식 음악이었다. 레닌이 베토벤을 정신없이 듣다가 “혁명을 하려면 이런 음악을 들으면 안돼”라고 소리쳤다는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이들의 취향을 설명해준다. 물론 1920-30년대 전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도 있지만 그런 건 미학 전공자한테 넘기는 게 예의일 것이다.

또한 러시아 출신 중에서도 혁명 이전의 차이코프스끼나 혁명 이후의 쇼스따꼬비치나 쁘로꼬삐에프 같은 교향악 작곡가도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혁명 이후에도 소련의 음악 아카데미가 클래식 음악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은 당연하다. 소련에서 클래식 음악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아니 그들보다도 더 ‘헤게모니적’ 음악이 되어 지배 문화를 구성했다. 이는 아무래도 대중음악인들이 ‘순수’ 음악인들에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러시아의 록 평론가는 한탄스러운 논조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련에서 클래식 음악의 위세는 아동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광적인 록 충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물론 바하나 베토벤이 고상한 음악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서 유감이다’라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선호는 서양의 ‘대중’음악에 대한 취향에서도 드러난다. 대중음악의 경우도 러시아인들은 복잡한 편곡, 거장 테크닉, 유려한 멜로디 등을 선호한다. 대중음악도 ‘예술음악’의 관점에서 듣는다는 것이다. 록 음악의 경우도 에머슨, 레이크 & 파머(Emerson, Lake & Palmer)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처럼 ‘클래시컬’한 록이나 [Jesus Christ Superstar] 같은 ‘록 오페라’가 다른 나라보다 많은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도 이런 현상의 반증이다. ‘순수성(purity)’과 ‘완성도(perfection)’라는 미학적 판단 기준은 유럽의 부르주아들뿐만 아니라 소련의 ‘지배계급’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서양 대중음악을 소비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산할 때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대중음악과 예술음악 사이의 거리는 서양세계보다 멀지 않아서 교향악단의 악기편성과 오케스트라 풍의 편곡이 많다. 이는 록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1970년대 이후 소련에서도 많은 ‘아트 록’ 음악이 탄생했고 개중에는 클래식 작품을 록 음악의 편곡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중 아트 록 밴드 트랙(Track)이나 에드와르드 아르쩨미예프(Edward Artemiev) 같은 존재들은 ‘국제적 아트 록 공동체’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들이다. 특히 아르쩨미예프는 영화감독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y Tarkovskiy)의 대부분의 사운드트랙을 맡는 등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능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음반은 핑크 플로이드 못지 않게 ‘실험적, 전자적, 우주적’인 데다가 ‘기타 속주’까지 곁들여져 있다. 헤비 메탈 그룹의 경우조차도 ‘마구 때려부수는 스타일’보다는 아리아(Aria)처럼 ‘거장적 기타 연주’를 과시하는 이른바 ‘아트 메탈(art metal)’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Eduward Artemiev – Birth of Earth (in [Warmth of Earth])

지금 시점에서 이런 ‘러시안 취향’의 뒤안길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다. 영국이나 유럽 각국의 문화 엘리트들이 예술음악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음악에게도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영악함을 보이는 반면, 러시아의 문화 엘리트들은 아직까지도 완고하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덕분에 국내 대중음악인들이 ‘싼 맛에’ 러시아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불러 레코딩하고 왔던 일이나 ‘집에 돈은 있지만 실력은 없는’ 애들이 국내 음대를 낙방한 뒤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는 어부지리를 얻기는 했지만. 하긴 나같이 클래식 음악이라곤 하품만 나오는 사람에게도 조그만 혜택이 있었다. 1990년대 초 멜로지야에서 발표한 많은 클래식 LP들이 대량 수입되어 역시 ‘싼 맛에’ 수준급의 연주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꼭 이런 부작용만 있는 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훈련받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피아노, 현악기, 관악기 등 클래식 음악에서 사용되는 악기들이 록 음악과 접속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접속되는가라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1970년대까지는 ‘거장적 연주’를 구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이 생산적 결실을 맺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상이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듯하다.

러시아의 민요와 바르드(bard)

러시아 및 구 소련은 ‘클래식 음악의 강국’이자 풍부한 ‘민속음악’을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대학교 노래 동아리에서 만든 노래책자를 보면 “스쩬까라찐”과 “기러기” 같은 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곡들이 바로 ‘러시아 민요’다. 러시아 포크송은 볼세비끼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 시대에 농촌 공동체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똘스또이의 소설에서 보듯 제정 러시아 시대의 농민의 삶이란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러시아 포크송은 이런 힘겨운 삶을 반영하듯 절망과 탄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러시아 포크송은 ‘대중의 양식(food of masses)’라고 불렀는데, 그 점에서 종종 미국의 흑인영가나 블루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음악 형식 면에서의 비교가 아니라 문화적 지위 면에서의 비교지만.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 ‘위대한 스딸린 동지’의 영도 하에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가 착수되면서 농민들이 대거 도시에 몰려와 노동자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러시아 포크송도 특유의 공동체적 연예의 기능을 상실해 갔다. 지금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러시아 포크송은 레드 아미 코러스(Red Army Chorus) 같은 합창단 등 ‘훈련된’ 보컬리스트(≒성악가)들이 발랄라이카, 바얀, 돔라 등의 민속악기를 곁들인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반 레브로프(Ivan Rebroff)나 스베뜰라나(Svetlana) 등 외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보컬리스트의 음반이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이들의 노래는 ‘가요’보다는 ‘가곡’에 가깝게 들린다. 실제로 음반 매장에서는 ‘클래식’으로 분류되어 있으니 번짓수를 잘 찾을 일이다. 스베뜰라나의 노래는 ‘북구의 서정과 애상’이라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월드 뮤직 취향(?)’에 속할 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번짓수가 아닌 것 같지만.

20010901011234-0317series01okudzava불라뜨 오꾸자바, 러시안 바르드 = 기타를 든 시인
물론 러시아 포크송의 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비소쯔끼(Vladimir Vysotsky), 불라트 오꾸자바(Bulat Okudzhava), 알렉산드르 갈리치(Alexander Galich), 율리 낌(Yuli Kim) 같은 ‘바르드(bard)’들이 그들이다. 통상 음유시인이라고 번역되는 바르드의 기타 시가(guitar poetry)는 차스뚜쉬까(chastushka)주)*라고 불리는 러시아 농촌의 노래형식의 전통을 발전시킨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이들의 노래를 음악이라기보다는 시로, 즉, ‘가창’이라기보다는 ‘낭송’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솔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시를 읊는 전통은 러시아의 록이 영미의 트렌드를 추종하는 단계를 넘어 자기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 주) 차스뚜쉬까란 ‘속요(俗謠)’라는 뜻이며 4행 시의 짧은 선율을 반복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하는 형식을 취한다. 러시안 록의 악곡형식이 ‘마치 블루스처럼’ 정형적이라면 여기에는 차스뚜쉬까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편 차스뚜쉬까 이전에는 로망스라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는 11세기 이후 음유시인들이 귀족영주의 ‘피고용악사’가 되어 무도회를 돌면서 즉흥연주를 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상은 앞에서 언급한 이반 레브로프(Ivan Rebroff)의 음반 {The Best Of Russian Folk Songs]의 라이너 노트로부터 참고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비소쯔끼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다. “기타를 든 셰익스피어(Shakespear-with-a-guitar)”라는 찬사까지 받은 비소쯔끼는 고문당하는 듯한 목소리와 단호한 가사로 당대의 거의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깊고도 넓은 영향을 주었다. 비소쯔끼는 1938년 모스끄바에서 태어나 1960년 모스끄바 예술 극단(Moscow Arts Theater)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졸업한 뒤 1964년부터 모스끄바 연극과 희극 극단(Moscow Theater of Drama and Comedy)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프로페셔널 배우’로서 햄릿과 돈 후앙의 배역을 맡고 26편의 영화에도 출연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반체제(dissident)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배우로서는 공인(公認)된 인물이었지만 가수로서 혹은 시인으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600곡이 넘는 곡들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들의 레코딩은 그의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매되지 못했다.

한국인에게 비소쯔끼의 작품은 영화 [백야]의 주제곡 “야생마”가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곡은 편곡이 ‘화려한’ 편이라서 이것만으로는 비소쯔끼의 진면목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비소쯔끼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블라뜨나야 무지까(blatnaia muzyka) 혹은 블라뜨니 뻬스니(blatny pesny)의 전통이었다. ‘범죄 음악(delinquent songs)’이라는 뜻의 이 노래 형식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러시아의 농촌을 여기저기 전전하던 불한당들이 부르던 것이었다. 영어권에서 밥 딜런(Bobn Dylan), 톰 웨이츠(Tom Waits), 닉 케이브(Nick Cave) 등이 종종 발굴해내는 영미 포크의 하나의 전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비딸리 까네프스끼(Vitaly Kanevsky)의 영화 [Zamri, Umri, Voskresni(Freeze-Die-Come to Life)](한국어 ‘의역’: [얼지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에서 중년의 술주정뱅이가 술병을 들고 흥얼거리는 노래가 블라뜨나야 무지까 본래의 느낌에 가깝다. 이 곡이 비소쯔끼의 곡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20010901011235-0317series02vysotsky침묵의 나라(Silent Nation)의 목소리, 블라디미르 비소쯔끼
이런 노래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비소쯔끼의 작품이 소외되고 주변화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술과 섹스, 감옥의 생활, 거리의 패싸움 등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노래가 당국을 불편하게 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또한 그의 목소리는 단지 저항의 이념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드는 ‘진실의 전달자’였다. 그래서 그는 “내 노래의 멜로디는 음계의 단순합보다도 단순하다. 하지만 내가 진실의 어조를 잃는 그 순간부터 마이크는 채찍이 되어 내 얼굴에 흉터를 남긴다”고 말할 수 있었던 듯하다.

비소쯔끼를 비롯한 바르드들은 러시아의 록 커뮤니티와 직접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에 활동한 러시아의 록 뮤지션들은 하나같이 비소쯔끼를 숭배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비소쯔끼는 러시안 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솔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시를 읊는 전통은 1970년대 이후 러시아의 록이 영미의 트렌드의 추종을 넘어 자기 발로 서는 과정에서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비소쯔끼의 문화적 영향력은 지난 번에 언급한 안드레이 마하레비치, 보리스 그레벤쉬꼬프 그리고 빅또르 쪼이에게서도 드러나지만, ‘러시아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라고 불리는 유리 셰브추끄(Yuri Shevchuk: 그룹 D.D.T.의 리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Vladimir Vysotsky – Miy Vrashchaem Zemliu (It’s Us That Makes the Earth Go Round)
DDT – Agidel(Belaia Reka) (Agidel(Belaia Reka))

만약 러시안 록이 흥미롭다면 그것이 단지 록의 지역적 변종(local variant)이나 어설픈 잡종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 바르드의 영향이다. 물론 그렇지만 러시안 록이 ‘자국의 전통’ 위에서만 발전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러시안 록에서도 적어도 초기에서는 ‘서양(혹은 서방)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러시아 록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지만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셈이다. 계속하자.

‘서양 대중음악’의 유입

서양이 아닌 곳에서 ‘서양식 대중문화’를 정부가 통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1970-80년대 한국처럼 동양(orient)에 속하는 사회에서는 문화적 이질감이라는 이유가 주요한 것이었다. 반면 소련과 같은 ‘동방(east)’혹은 ‘동구’에 속하는 사회에서는 문화적 이질성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더 중요했다. 한마디로 혁명 이후 소련 당국은 서양의 대중문화 전반을 ‘부르주아적이고 데까당트한 연예’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영국의 학자 테리 브라이트(Terry Bright)가 “러시아에서 ‘재미’는 항상 서양으로부터 왔다”고 말했듯 서양의 대중음악은 혁명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소련 사회에 유입되었다. 무겁고 장중하기만 한 러시아의 음악에 비해 서양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유쾌했기 때문이었다.

20010901011235-0317series03allapugacheva러시아의 ‘슈퍼 디바’ 알라 뿌가쵸바. 1970년대에는 ‘관제(?)’ 록 그룹 졸리 키즈(Jolly Kids)에서 잠시 보컬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유입된 서양의 대중음악은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맞게 이용되었다. 처음에는 평이한 사랑노래를 ‘당에 대한 사랑’으로 개사하는 등의 해프닝도 잠시 벌어졌지만, 곧 ‘서양의 영향을 무조건 금지하기보다는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정책의 기조가 확립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에는 일군의 ‘직업적’ 작곡가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대중음악이 탄생했다. 새로운 대중음악은 유럽의 버라이어티 쇼의 음악과 미국의 빅 밴드 재즈*주)의 요소를 러시아 특유의 ‘웅장하고 비장한’ 분위기와 결합한 형식이었다. 서양의 한 연구자는 이 시기를 ‘소비에트 틴 팬 앨리’의 시기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어떤 스타일의 음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글렌 밀러, 헨리 맨시니 같은 ‘경음악’ 작곡가(및 악단 리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대중가수들이 소련에도 탄생한 것이다. 지난 번 언급한 알라 뿌가쵸바나 요시프 꼬브존 같은 가수는 이런 시스템의 후예들이다.

주) 1920년대에는 재즈가 유입되면서 이에 대한 논쟁도 전개되었다. 1927년 국가기관지 [이즈베스쨔(Izvestiya)]와 당 기관지 [쁘라브다(Pravda)] 사이의 수 개월 간의 논쟁 끝에 결국 쁘라브다가 승리했고, 비로소 재즈가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에 수용되었다. 수용의 근거는 음악적 이유라기보다는 재즈가 “억압받는 남부 아메리카 니그로의 음악”이라는 문화적 이유였지만.

그렇지만 이런 문화적 통제가 순탄하게 지속되지는 못했다. 스딸린이 사망한 뒤 1956년 등장한 흐루시초프가 등장하여 이른바 해빙(解氷)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 시기는 소련 사회가 희망에 부풀었던 시기였다. 흐루시초프는 특유의 장광설로 “소련은 20년 내에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다”라고 호언했고, 유리 가가린의 세계 최초 우주비행, 꾸바 혁명의 성공 등으로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라는 당의 선전도 잘 먹혀 들어가던 시대였다.

그와 더불어 “모든 인류의 진보적 세력과 협력과 연대를 추구한다”는 개방적 정책을 발표하면서 세계 각지의 대중음악도 선별적으로 유입되었다. “보통 인민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천성”이라는 이유로 에디뜨 삐아프와 자끄 브렐의 샹송, 마를렌느 디트리히의 카바레 팝이 수용되었고, “국제적 제국주의와의 투쟁으로 타오르는 대륙”이라는 이유로 라틴 아메리카의 삼바, 보싸 노바, 칼립소 등이 취사선택되었다. 당시 소련은 국제저작권협정에 가입하지 않았으므로 저작권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이들 음악을 사용할 수 있었고, 멜로디야는 “Round The World”라는 타이틀로 이런 음악을 러시아어로 ‘커버’한 레코드를 시리즈로 발매했다. 이렇게 소련 당국은 서양 대중음악 중에서 체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음악들을 선별하여 ‘공식 연예산업(official entertainment industry)’를 육성했다.

이런 개방적 분위기에 하나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 대상은 다름 아니라 영미의 록 음악이었다. 특히 비틀스 붐이 한창인 1964년 3월 관영신문 [Literaturnaya Gazetta(문학신문)]은 “벌들과 똥 같은 비틀스의 삶(The Life Of Bees And Dung Beetles”라는 제하로 비틀스를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를 표상하는 부르주아적이고 데카당트한 장르”라고 비판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반전운동과 청년 반문화 운동이 태동하고 비틀스가 여기에 깊숙이 가담한 1960년대 후반에는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어쨌든 이런 공식적 평가가 나온다는 것은 비틀스의 음악이 이미 소련 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었다. 러시아 반문화의 베테랑인 꼴리야 바신(Kolya Vasin)이 “나는 그때 비틀스를 제외한 모든 것을 억압으로 느꼈다”고 한 말은 소련에서의 록 음악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에 인용되는 문구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주) 20010828 | 신현준 [email protected]

주) 물론 그전부터 균열의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57년 여름 모스끄바에서 개최된 “제 7회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서의 해프닝이다. 세계 각국의 젊은 좌파 운동가들은 신기한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처녀지 같은 러시아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막상 축제가 시작되자 신기한 눈이 된 사람들은 소련의 젊은이들이었다. 자본주의권 출신의 ‘청년 학생 운동가’들은 멋지게 옷을 입고 로큰롤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세계혁명의 전위’를 자처하는 러시아의 청년들은 뻣뻣하게 서서 구경만 했기 때문이다.

관련 글
그 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 (1) – 빅또르 쪼이(Viktor Tsoi):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아니, 쌍뜨 뻬제르부르그의 마지막 영웅 – vol.3/no.16 [20010816]
Vladimir Vysotsky, [Golden Best] 리뷰 – vol.3/no.17 [20010901]
Svetlana, [Chanson Russe] 리뷰 – vol.3/no.17 [20010901]

관련 사이트

러시안 바르드 사이트(영어)
http://russia-in-us.com/Music/Artists/
러시아 대중음악 데이타베이스(러시아어)
http://www.music.ru
러시아 음악 mp3 사이트(러시아어)
http://www.omen.ru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서우석 교수의 세계민요 사이트
http://usoc.snu.ac.kr/mp3-folksongs/mp3-all.htm
Vysotsky 재단 공식 사이트(영어)
http://kulichki-lat.rambler.ru/vv/eng
Vysotsky 사이트(독일어)
http://www.vladimir-vysotsky.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