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간산으로 트립합 훑어보기

트립합(trip-hop)의 본산지 브리스톨(Bristol)은 영국의 남서쪽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영국에 해가 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노예무역항으로 악명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브리스톨에는 흑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이 정착하게 되었고, 다양한 인종만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해왔다. 트립합이란 장르가 탄생하기 전, 1980년대의 브리스톨은 자메이카를 포함한 서인도제도의 문화가 트렌드의 큰 부분을 차지했고, 음악적으로는 레게와 덥(dub)이 중심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다른 지방과는 다르게 브리스톨에서는 클럽 문화가 융성하지 않았고 대신에 사운드 시스템(Sound System)이 클럽 문화를 대신하고 있었다(사운드 시스템은 여러 명의 DJ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 음악 기기를 차에 싣고 동네들을 돌아다니며 음악 파티를 여는 것). 브리스톨의 DJ들은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음악적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결국 와일드 번치(Wild Bunch)라는 이름의 사운드 시스템이 새로운 음악 스타일의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미디어에서는 그 음악을 트립합이라고 불렀다.

트립합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4년 일렉트로니카 잡지인 [믹스맥(MixMag)]에서다. 힙합이지만 기존의 힙합과는 다른 모왝스(Mo’Wax) 레이블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믹스맥은 트립합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무렵 포티스헤드(Portishead)와 트리키(Tricky)가 뜨면서 트립합은 하나의 장르(용어)로 자리를 굳혔다. 최초의 트립합 밴드로 소개된 밴드는 1989년 데뷔 앨범을 낸 소울 투 소울(Soul II Soul)이다. 이 앨범의 크레딧에는 브욕(Bjork)의 프로듀서로 더 유명한 넬리 후퍼(Nellee Hooper)와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 하위 B(Howie B)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비록 소울 투 소울의 음악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트립합의 음악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만, 그 맹아적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명성을 얻기 전의 넬리 후퍼와 매시브 어택의 손길이 느낄 수 있다.

1991년 매시브 어택이 데뷔 앨범 [Blue Lines]를 발표하면서 트립합은 그 장르적 원형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트립합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힘든 일인데, 매시브 어택의 데뷔 앨범을 예로 들어보아도 힙합을 기반으로 모든 음악적 요소를 망라해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설명은 ‘(자메이카 스타일의 독특한 타악기와 결합한) 느린 힙합 리듬이 주는 몽롱하고 우울한 음악’일 것이고 향정신성 약물 복용 후의 몽롱한 기분을 나타내는 ‘trip’과 힙합의 ‘hop’이 그 어원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한편 같은 트립합이란 장르명으로 불리지만 브리스톨 사운드는 영국 모왝스 레이블의 미국 아티스트 DJ 섀도(DJ Shadow)나 일본 아티스트 DJ 크러시(DJ Krush)의 음악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모왝스의 트립합은 슬로 비트 힙합이라는 점에서 브리스톨 트립합과 공통점이 있으나 보다 미국적인 힙합에 기반하고 있고, 애시드 재즈에서 많은 자양분을 취했다. 근래에 모왝스 아티스트는 트립합보다 힙합 아티스트로 소개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브리스톨 트립합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매시브 어택과 포티스헤드가 (트리키는 예외로) 띄엄띄엄 앨범을 발표하던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많은 일렉트로니카 밴드가 트립합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들의 음악은 트립합적인 느낌을 가지긴 했으나 소속사의 홍보용 문구에 소개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트립합이 된 경우도 많았고, 느린 비트의 힙합이나 자메이카 스타일의 리듬은 거세된 채, 몽롱하고 우울한 정서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트립합은 음악의 형식적 분류에 의한 장르라기보다는 음악의 정서적인 분류의 장르로 점차 인식되고 있고, 밴드의 음악적 스타일을 설명할 때보다 곡의 분위기를 설명할 때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트립합 아닌 트립합 밴드가 무수히 나타남으로써 트립합이 번성하기보다 그 실체가 더 옅어지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 이들 밴드의 대부분은 맑은 음색의 여성보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보컬이 구사하는 감성은 포티스헤드의 베스 기븐스를 계승한 듯한, 그러나 좀더 깔끔하게 포장된 멜랑콜리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일종의 극단적인 우울한 정서의 유행에 민감한 추종자일 수도 있다.

이들과는 별개로 매시브 어택이 키워낸 알파(Alpha) 등 몇 안 되는 아티스트들이 보다 엄밀한 의미의 트립합 밴드라고 불릴 만도 하지만, 브리스톨 3인방에 비하면 음악에 있어서나 뮤지션/밴드의 독특한 캐릭터에 있어서나 선배들이 구가한 전성기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의 소설 [어셔가의 몰락]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근친결혼으로 인해 이상한 유전병에 걸려 결국은 몰락한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처럼 브리스톨 트립합 가문도 곧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 혹은 과대망상이 든다. 하지만 다음 세대야 어찌되든 간에 아직 브리스톨 1세대는 건재하고, 곧 매시브 어택과 포티스헤드의 새 앨범도 나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들려온다. 20010701 | 이정남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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