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잡의 반만년(半萬年) 역사, 방그라의 반천년(半天年) 역사

방그라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대충 설명했지만 현대적 방그라가 아닌 민속음악으로서의 방그라에 대해서는 부연이 필요해 보인다. 방그라의 원산지인 펀잡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펀잡 지방은 주변 정치세력들에 의해 얄궂은 운명을 맞은 지역이다. 아리아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되어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아랍의 이슬람 세력, 징기스칸의 몽고 제국 등이 차례차례 펀잡 지방을 지배해 왔다.

15세기 말 – 16세기 초 구루 나낙 데브(Guru Nanak Dev)에 의해 카스트 제도를 비롯한 온갖 도그마들을 혁파하는 교의를 가진 시크교가 창안되었다. 시크교는 이후 펀잡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의 어지러운 역사를 떠올린다면 시크교의 발흥을 납득할 수 있다. 시크교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1801년에는 란지트 씽(Ranjit Singh)에 의해 시크교의 왕국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1839년 그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소멸했고, 곧이어 펀잡은 인도 대륙의 다른 지역들과 더불어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1849년의 일이다.

영국의 식민 지배하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세력 역시 펀잡인들이었다. 한국의 3.1 운동과 같은 해인 1919년 펀잡의 주도 암리차르(Amritsar)에서는 20,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379명이 사망하고 1,20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펀잡 출신의 혁명가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비폭력 노선’을 표방한 마하트마 간디와는 상이한 노선을 취했다. 이 혁명가들 중에서 바가트 씽(Bhagat Singh)과 우담 씽(Udham Singh)은 ‘펀잡의 영웅’으로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바가트 씽은 1928년 인도인을 구타한 영국 관리를 사살했고(1931년 사형 당함), 우담 씽은 1940년 런던에서 펀잡의 지배자 마이클 오드와이어(Michael O’Dwyer)를 사살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담 씽이 체포되었을 때 그가 모하메드 씽 아자드(Mohammed Singh Azad)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심히 보면 이슬람, 시크, 힌두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영웅은 뒤에 방그라의 가사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Kuldip Manak – Udam Singh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을 때도 펀잡 지방은 시크교를 표방하는 독립국이 되지 못했다. 동부 펀잡은 힌두교의 인도로, 서부 펀잡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각각 병합되었다. 이런 펀잡의 분단이 식민지배 시절 가장 격렬히 저항했다는 ‘괘씸죄’로 인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펀잡인들이 분단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펀잡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은 생활고와 폭력을 피해 이민을 결행했다. 인도가 영 연방(commonwealth)의 속했기 때문에 같은 영 연방에 속하는 곳으로의 이주는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래서 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도 많은 이민이 이루어졌다. 런던, 버밍햄, 맨체스터 등의 공업도시에 펀잡인들의 ‘아시안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험난한 역사에서 방그라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진화했는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하던 시기에 탄생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건 ‘고조선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나 비슷하다. 이른바 방그라가 ‘저항적 음악’임을 강조하는 설이다. 그보다는 14-15세기경 농민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남는 시간에 부르던 노래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보다 우세한 학설이다. 이는 곧 바이사키(Baisakhi)라고 불리는 4월 13일의 수확(봄이므로 ‘추수’는 아니다)을 축하하는 페스티벌을 낳았다. 한국으로 치면 ‘추석맞이 놀이 한마당’ 비슷한 행사일 것이다. 페스티벌에서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춤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면서 특정한 양식을 낳게 되었다. 그 뒤에는 수확을 축하하는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결혼식, 새해맞이 축제 등 동네의 대소사에서 춤과 어우러진 음악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방그라는 여러 가지 춤들을 아우르는 메타 장르로 사용되고 있다. 혹시 문헌에서 주마르(jhumar), 루디(luddi), 기다(giddha), 기다(giddha), 루디(luddi), 다앙카라(daankara), 다말(dhamal), 사미(saami), 가트카(gatka) 등의 단어를 만나면 방그라의 여러 변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들 중 주마르는 북 연주자 주위에 원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추는(강강수월래 같은?) 춤이고, 루디는 뱀처럼 배배꼬면서 추는 춤이고 기다는 여자가 손뼉을 치면서 추는 춤이라는 정도만 알아두자. 한국 춤도 잘 모르는 주제에 인도 춤까지 알아둘 필요가 있겠냐만, 혹시 인도/파키스탄계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살면 ‘구청에서 개최하는 외국인 노동자 위민 잔치’에서 혹시 이런 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춤을 출 때 입는 복장도 특이하다. 남자들은 보통 부가리스(Bhugaris)라고 부르는 터번을 쓰고 쿠르타(Kurta)라는 긴 상의를 입는다. 허리에는 룽기(lunghi)라고 부르는 복대(?) 비슷한 것을 찬다. 여자는 긴 상의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목 주위에 두파타스(dupattas)라고 부르는 것을 감는다. 복장이 촌스럽게 총천연색이라는 것은 그림만 보면 명확하다.

20010626102919-series방그라 복장 그리고 돌 드럼
제일 중요한 악기 이야기가 마지막이다. 음악을 들을 때 ‘아, 방그라구나’라고 느끼게 된다면 열의 아홉은 돌(dhol)이라는 북 소리 때문일 것이다. 이후에 ‘돌’이라고 표기하면 장돌로 오해할까봐 앞으로는 ‘돌 드럼’이라고 표기하기로 하자. 15인치의 넓이를 가진 큰 북인 돌은 가죽끈으로 어깨에 맨 채 두 개의 스틱으로 두드리면서 연주한다. 베이스 음을 주로 담당하지만 음은 높은 편이다. 돌 드럼 위에도 다드(dhad), 다플리(dafli), 돌키(dholki), 담루(damru) 등의 북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구별해내기 위해서는 앞으로 음악을 열심히 듣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편 현악기로는 툼비(tumbi)와 사랑기(sarangi)가 대표적인데, 툼비는 한 줄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기는 여러 줄로 이루어져 있다.

방그라, 드럼 머신과 하우스를 만나다

방그라라는 범주에 속하는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 ‘현대적’ 방그라는 펀잡의 전통악기들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악기들뿐만 아니라 음악 스타일 면에서도 하우스, 레게, 힙합 등과 뒤섞여서 새로운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까지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에 의하면 1960-70년대에 펀잡에서는 쿨딥 마낙(Kuldip Manak), 참킬라(Chamkila), 아마르지요트(Amarjyot) 등 ‘모던’ 방그라의 전설적 음악인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현상은 이들의 영향을 흡수하여 펀잡(및 인도 대륙) 외부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일 것이다. 그 중에서 일단 영국의 몇몇 도시들에 시야를 한정해 보자. 일단, 로이 셔커(Roy Shuker)의 책 [대중 음악 사전(Key Concepts in Popular Music)](한나래, 1999)에서 방그라에 대한 항목을 인용해 보자.

“펀잡의 전통적인 민속 댄스음악에 기초한 인도계 영국인의 음악 장르 중의 하나로서 퍼커션 악기 위에서 연주된다. 방그라는 영국에서 세 가지 파장(wave)을 낳으면서 발전했다. 1970년대 후반 인도계 커뮤니티에서 신시사이저, 기타, 드럼 세트로 연주되었던 댄스 팝이었고, 두 번째는 1980년대 하우스, 댄스 음악, 드럼 머신과 결합되었고, 마지막은 1990년대 초 랩과 샘플링, 그리고 자메이카의 라가(ragga) 혹은 댄스홀(dancehall) 리듬을 결합하여 방그라머핀(bhangramuffin’)이 되었다. 이들 중 마지막 경우는 셰일라 찬드라(Sheilla Chandra)와 아파치 인디언(Apache Indian) 같은 아티스트에 의해 아시아 전역과 영국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아시아계 청년들에게 방그라는 기성사회(estabilishment) 및 부모들의 정체성과 구분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의 일부이다” – [Key Concepts in Popular Music], p. 26(국내 번역본은 pp. 147-8)

여기서 1970년대의 방그라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까지 방그라 음반들은 주류 음악산업의 시스템에 따라 배급된 것이 아니라 아시안계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의 구멍가게(이른바 코너숍(cornershop)!)나 아시안 식료품 가게에서 판매되었을 뿐이었다. 또한 이 시기 방그라 음악인들은 ‘라이브 아티스트’이긴 했어도 ‘레코딩 아티스트’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정규 앨범’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다. 1994년 방그라에 대해 긴 커버 스토리를 발표한 [Billboard]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방그라 음반들은 ‘에쓰닉 자영 소매업자(ethnic independent retailers)’를 통해 90%가 배급된다고 한다. 방그라 음반은 그곳에서 인도계 주민의 소득수준을 고려하여 아직도 저가의 카세트로 판매된다고 하니 한국의 ‘구루마 테이프’나 ‘고속도로 도롯도 메들리’와 비슷한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방그라에서도 ‘레코딩 아티스트’가 등장하는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다. 위에서 로이 셔커의 인용문을 참고한다면 이 때는 이미 하우스 등 댄스 음악과 결합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시기다. 이 시기 방그라를 대표하는 음악은 말키트 씽(Malkit Singh)과 알랍(Alaap)일 것이다. ‘펀잡의 황금의 목소리(Golden Voice of Punjab)’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말키트 씽은 1963년 펀잡의 잘란다르(Jhalandar) 태생이다. 그는 인도에서 성공을 거둔 뒤 자신의 밴드인 골든 스타(Golden Star)와 더불어 1980년대 중반 영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경우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앨범만 16장에 이르고 27개국에서 공연을 갖는 등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방그라의 전설인 쿨딥 마낙(Kuldip Manak), 파키스탄 카왈리의 대부 누스라트 파테 알리 한(Nusrat Fateh Ali Khan)의 영향을 받고 뒤에는 자메이카의 라가(ragga)를 결합한 음악으로 영국과 인도는 물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도인들이 있는 세계 각지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20010618032643-series-02-Malkit20Singh‘펀잡의 골든 보이스’ 말키트 씽
Malkit Singh Kali – Teri Choti Hai Paranda Tera Lal Ni
또 한 명의 아티스트는 런던의 사우쓰홀(Southall) 지역 출신의 찬니(Channi)가 이끈 그룹 알랍(Alaap)이다. 흰색 스카프를 두른 사람으로 유명한 찬니는 1982년 앨범 [Teri Chunni de Sitare]을 발표하여 방그라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전통적 방그라의 음악 어법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드럼 머신과 신서사이저를 사용하여 ‘팝’의 말끔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알랍의 사운드는 빈곤층으로 살아가는 인도계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를 환기시킴과 더불어 ‘영국물이 든’ 인도계 유학생들의 엘리트적 취향에도 부합했다. 알랍은 음악뿐만 아니라 번쩍거리는 의상과 흰색 구두 등의 스타일도 크게 유행시켰다. 이때부터 올 데이어(all-dayer) 혹은 데이 타이머(day-timer)라고 불리는 ‘족(族)’들도 탄생했다. 간단히 말해서 야밤에 클럽에서 춤추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아시아계 가정의 ‘엄한 규율’로 인해 퍼브나 학교의 작은 홀을 빌려 마련된 공연장에서 방그라를 들으면서 춤추는 이들을 말한다.

20010618032643-series-03-alaap‘사우쓰홀 사운드’의 대표자, 알랍(Alaap)의 찬니(Channi)
Alaap – Chunni Ud Ud Jai
알랍 뿐만 아니라 프레미(Premi), 헤에리(Heeri), 홀레 홀레(Holle Holle) 등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구사하는 아티스트가 등장하면서 미디어에서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방그라를 ‘사우쓰홀 사운드(Southall Sound)’로 부르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미들섹스의 헤이스(Hayes)에서 방그라 전문 레이블인 멀티톤(multitone)이 설립되어 이들 아티스트의 ‘정규’ 음반을 발매하는 일도 본격화되었다. ‘어쩌구 사운드’라는 명칭은 음악의 로컬리티(locality)를 부각시키면서 속으로는 전국적 나아가 국제적 성공을 거두려는 마케팅의 일환이다. 그러니까 ‘이 음악은 어떤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음악이므로 위로부터 급조된 음악과는 질이 다르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그런 마케팅 전략이 없어서 문제니까. 그게 성공한다면 ‘돌파(breakthrough)’라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방그라 아티스트들은 ‘전국적 돌파’까지 수행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방그라의 가사가 ‘영어’가 아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방그라가 팝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방그라보다는 팝에 보다 익숙하고, 펀잡어보다는 영어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이 탄생하는 것이 필요했다.

방그라, 레게 그리고 랩과 만나다

지금은 다소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100% Rap]이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이 있다. ‘힙합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입문용 음반이다. 음반의 네 번째 트랙의 제목은 “Boom Shak-a-Lak”이고, 주인공은 아파치 인디언(Apache Indian)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악곡 형식은 ’12마디 블루스’를 따르고 있고, 사운드는 1990년대 초까지 랩 음악 대부분이 그랬듯 ‘빈티’가 난다. 보컬 스타일은 랩보다는 노래에 가깝지만 노래라기에는 한 음 한 음의 음고가 불명확해서 자메이카산(産) 라가(ragga) 혹은 댄스홀(dancehall)에 가장 가깝다. 이른바 ‘라가머핀(raggamuffin)’이라고 불리는 창법이고, 가사는 영국 영어보다는 ‘자메이카 영어’, 이른바 파투아(patois)에 가깝다.

Apache Indian – Boom Shak-A-Lak

음악의 주인공은 지난 번 시리즈에서 ‘아시아계 최초의 팝 스타’라고 언급한 바로 그 인물이다. 그가 ‘랩 음반’에 이름을 올린 점을 감안한다면 아시안계 랩 음악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메이카의 라가/댄스홀이 ‘랩의 한 장르’로 인식되기도 하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펀잡의 잘란다르에서 태어나 버밍햄에서 자라난 스티브 카푸르(Steve Kapur)라는 본명을 가진 이 인물은 ‘방그라 뮤지션’이 아니고 본인도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로 그는 레게 차트에 자신의 곡을 올려놓았고 뒤이어 팝 전체 차트로 이동하는 레게 스타들의 표준적 경력을 밟았다. 하지만 특이한 출신성분이라도 팝 스타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영국의 팝 음악 관련 미디어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레게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자 라디오와 잡지는 ‘아시안 비트’, ‘방그라머핀’ 등의 문구로 홍보했다. 이런 ‘미디어 하이프(hype)’는 “Boom Shak-a-Lak”이 발표되기 이전인 1993년 초 앨범 [No Reservation]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New Musical Express]와 [Melody Maker]가 모두 아파치 인디언에 관한 특집 기사를 내보냈고, 앞서 언급했듯 이듬해 [Billboard]가 방그라에 관한 커버 스토리를 내기도 했다.

1993년 8월 아파치 인디언은 유년 시절 떠났던 고국 인도를 방문했다. ‘MTV Asia’ 덕택으로 그는 인도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맞먹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공연도 ‘마이클 잭슨 같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인도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심각한 빈곤과 불평등을 목격한 뒤에는 카스트 제도를 비난하고 부패 구조를 꼬집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마하트마 간디의 손녀를 만나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 “당신은 우리 할아버지만큼의 잠재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말도 들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그해 9월의 지방선거 직후에도 아파치 인디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아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사는 밀월(Millwall)의 타워 햄리츠(Tower Hamlets)의 지방선거에서 “백인을 위한 권리”를 주장하는 극우파 국민당의 후보 데릭 비컨(Derek Beackon)이 승리했고, 그날 밤 ‘무언가 해달라’는 아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인해 아파치 인디언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그는 “Movin’ On”이라는 곡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서 비컨과 국민당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말들도 적지 않았다. 인도에 귀국했을 때 값비싼 화려한 호텔에 머물면서 ‘크레인에서 무대로 내려오는’ 공연을 하는 팝 스타가 ‘자신이 태어난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나라의 사회적 문제에 개입하는 일은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인도계 주민 내부의 문제의 경우에도 아파치 인디언은 힌두, 이슬람, 시크 사이의 종파적 폭력을 비판하고 ‘하나로 살자(live as one)’고 주장했지만 이런 비폭력 평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는가는 의문이다.

더구나 아시아계 주민의 정치적 대변자라는 지위는 그의 팝 스타로서의 지위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1995년에 발표된 앨범 [Make Way For The Indian]에 수록된 음악은 정글의 영향을 흡수하는 등 팝 음반으로는 뛰어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고는 데뷔 음반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아시아계 주민을 기반으로 하고 서인도제도 주민과 일부의 백인까지 포괄했던 아파치의 청중 가운데 어떤 부분이 이 음반을 외면했는지는 알아내기 힘들지만, 정치적 대변자라는 부담스런 지위가 대중음악 팬들의 선택에 미친 효과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아파치 인디언 같은 팝 스타가 아니라 지역의 언더그라운드에 보다 깊게 연관된 방그라의 조류는 어떤 게 있었는가. 아파치 인디언이 스타로 등극하기 직전인 1991년 버밍햄에서는 나추랄(Nachural: 인도식 발음이다)이라는 레코드 레이블이 설립되었다. 나추랄 레이블은 [What Is Bhangra?](1993), [East II West: Bhangra For The Masses](1994) 등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표하는 등 ‘지하경제’ 중심으로 유통되던 방그라 음반을 지상세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음악에서도 하우스, 랩, 레게와의 결합은 보편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시아계 커뮤니티 밖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존중받는 아티스트들이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현상인데, 예를 들어 최근 방그라 아티스트의 인기 순위에 오른 뮤지션들을 보면 금시초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그라 공식 서치 엔진에서 조사한 방그라 아티스트들의 인기 순위

방그라의 리믹스 아티스트, 볼리 사구(Bally Sagoo)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의 방그라 아티스트들이 지상세계로 진입하는 현상과 동시에 ‘방그라 음악인’에는 솔로 가수 혹은 래퍼 뿐만 아니라 클럽 DJ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DJ 들과 구분하기 위해 데시 DJ(Desi DJ)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버밍햄 출신의 볼리 사구(Bally Sagoo)다. 자신의 음악을 “타블라와 인도 사운드도 조금 있지만, 기본적으로 훵키한 드럼 비트, 제임스 브라운의 샘플 위에서 만들어진다”고 설명하듯 그는 기본적으로 훵크에 기초를 둔 ‘리믹스 아티스트’다. 소니 레이블과 계약하여 방그라 아티스트로서는 아파치 인디언에 이어 두 번째로 다국적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인물이 되었는데 자신의 활동과는 별도로 Ishq라는 레이블을 설립하여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음반을 프로듀싱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1년 말키트 씽의 리믹스 음반 [Golden Star Raggamuffin’ Mix]를 제작하여 말키트 씽을 인도계 이민 2세대에게 대중화시킨 장본인도 바로 볼리 사구였다.

방그라의 ‘하이 에너지’ 수흐비르(Sukhbir)
‘방그라 DJ’가 많아지는 현상은 아시아계 가정에서도 ‘영국 물을 먹어서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요즘 애들’이 많아지면서 밤 시간에도 클럽을 찾는 아시아 청년들이 많아지는 현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그라는 클럽 댄스 음악의 한 장르가 되었고, 영국의 클럽 댄스 음악의 스타일이 극히 다양하듯 방그라라는 범주로 포괄되는 음악 장르도 극히 다양해졌다. 영국의 경우에만 한정하더라도 탤빈 씽(Talvin Singh)같은 ‘인텔리전트’한 언더그라운드 성향의 DJ부터 사호타스(The Sahotas) 같은 밴드 형태를 거쳐 수흐비르(Sukhbir) 같은 댄스 팝 성향의 아이돌 스타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인들 모두가 방그라라는 이름 아래 포함되었다. 방그라의 가사로 사용되는 언어도 펀잡어만 사용하는 경우, 영어와 펀잡어를 섞는 경우,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게 되었다. 가사의 메시지 역시 시크교의 입장에서 영국인의 지배에 대한 비판, 인도계 커뮤니티 내부의 삶에 대한 묘사, 소년과 소녀 사이의 낭만적 사랑의 표현 등을 망라하게 되었다.

방그라 월드와이드?

또 한번 비유로 끝낼 수밖에 없는데, 방그라의 진화과정은 레게보다는 살사(salsa)와 비슷해 보인다. 즉, 꾸바의 쏜(son)이 뉴욕으로 건너가서 살사(salsa)로 재탄생한 뒤 전세계에 퍼져있는 라틴계 주민들의 음악 문화를 연계시키고 있듯이, 방그라 역시 펀잡에서 탄생한 뒤 런던과 버밍햄에서 재정의된 다음 세계 각지에 산포되어 있는 인도계 주민들의 음악 문화를 연계해주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탤빈 씽의 출신 지역인 런던의 이스트 엔드 지역은 펀잡계보다는 방글라데시계 주민의 게토가 있는 곳이므로 ‘펀잡 음악’인 방그라보다는 ‘벵골 음악’에 가까워야 하지만 이곳의 주민이 즐겨듣는 음악도 넓은 의미의 방그라에 포함된다.

탤빈 씽의 음악 장르 역시 ‘편의 상’ 이름이 많이 알려진 방그라로 포함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파키스탄계 멤버가 있는 펀더멘털(Fun^da^mental)과 아시안 덥 파운데이션(Asian Dub Foundation)도 마찬가지다. 물론 본인들은 ‘우리 음악은 고정된 장르로 구분하기 곤란한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응답은 선진국 음악산업에서는 ‘게임의 법칙’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남아시아 대륙의 극히 다양한 음악을 방그라라는 블랙홀로 몰아넣는 것은 굳이 ‘음악산업의 요구’ 뿐만 아니라 음악 청중의 용어법상의 관습의 문제도 크게 작용한다.

이는 몇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반백년의 시간 동안의 진화를 통해 방그라는 이제 더 이상 지역의 전통문화에 머물지 않고 지구적인 대중문화가 되었다. 방그라는 펀잡 주의 경계 내에 머무르는 것도, 인도 외부의 아시아계 커뮤니티에 머무르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는 인도계 사람만 방그라를 즐기는 것은 아니며, 방그라의 청중이 ‘오직 방그라만 듣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방그라가 영국에서 주류 문화를 공격만 하던 시기도 다른 시기로 이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방그라 아티스트도 탄생했고, 멀티톤과 나추랄 같은 전문 레이블들도 BMG 산하로 흡수되었다. 최근 영국의 펩시 광고는 방그라를 사운드트랙으로 이용하고 인도 배우를 출연시킨 점도 시사적이다.

그렇다곤 해도 ‘영국의 식민 지배로 피폐해진 조국 인도의 현실’을 개선하고 싶은 인도인들의 욕망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이런 현실이 남아시아 대륙의 내부의 문제로 인한 것인지 영국이라는 외세의 지배로 인해 초래된 것인지에 대해 여기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외세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달라진 점은 ‘글로벌’ 시대에는 어떤 투쟁(어감이 거칠다면 용서를!)이라도 ‘영국 대 인도’라는 식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영국 내에서의 문화적 대립도 ‘앵글로색슨계 주류 문화 대 아시안계의 언더그라운드 문화’ 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별 말이 아니라 극도로 과격한 요구라고 하더라도 ‘대중문화’라는 장 속에서 수행되기 시작했다는 뜻, 공격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인들이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문화의 장에서 그들 나름의 정치를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본 방그라의 스타들 가운데 아파치 인디언은 이런 정치적 대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데 실패한 듯이 보이고, 탤빈 씽은 정치적 대안보다는 문화적 대안에 보다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독자들 중에는 ‘이제 펀더멘털, 아시안 덥 파운데이션 등이 나올 차례군’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맞다. 다음 시리즈는 이들로부터 시작해 보자. 20010616 | 신현준 [email protected]

시리즈 차례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1): 타블라를 두드리면서 춤추는 ‘영국인’들 – vol.3/no.11 [20010601]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2): 방그라, 드럼 머신과 레게를 만나다. – vol.3/no.12 [20010616]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3): 정치 선동 그리고 파란 눈의 ‘문화적 아시안’들 – vol.3/no.13 [20010701]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4): 신대륙으로 건너간 아시안 비트 – vol.3/no.14 [20010716]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5): 인도 팝(indipop)으로 돌아온 아시안 비트 – vol.3/no.15 [20010801]

관련 글
아시아를 벗어난 ‘아시안 비트’ (1): 타블라를 두드리면서 춤추는 ‘영국인’들 – vol.3/no.11 [20010601]
Apache Indian, [No Reservation] 리뷰 – vol.3/no.12 [20010616]
Various Artists, [What Is Bhangra?] 리뷰 – vol.3/no.12 [20010616]

관련 사이트
펀잡 문화와 관련된 백과사전식 사이트
http://www.punjabonline.com
방그라 공식 서치 엔진
http://punjabilink.com/bhang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