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21크라잉 너트 – 하수연가(下水戀歌) – 드럭/Digital Media, 2001

 

 

준 주류 펑크밴드의 하이퍼 하이브리디즘

이제, 어느 밴드의 위치가 언더에서 오버로 바뀌면서 유발되는 문화적 순도의 변질에 대한 언급은 시대착오다. 가사나 사운드의 정서적 강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계급성, 그로 인해 가시화되는 이데올로기적 전복성을 확인하려는 것은 고전적인, 그래서 그 자체로 컬트가 되고 마는 평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인디 펑크, 특히 한국의 홍대 앞 펑크 씬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여전한 문화적 에티튜드다. 펑크 에토스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한 채 기치를 세우고 있는 그곳에서, 게다가 최근의 서태지 이외에는 유사 ‘장르’의 맥을 찾아볼 수 없는 풍토에서 주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은 변질로 받아들여진다.

밴드 사이에서가 아니라 밴드와 매니지먼트, 혹은 상이한 취향의 팬덤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한 ‘드럭 vs. 문사단’의 구도가 이를 시사한다. 까놓고 말해 그 구도의 양쪽 끝은 크라잉 너트(Crying Nut)와 노 브레인(No Brain)이라는 색으로 칠해진다. 더 까놓고 얘기하면 그것은 펑크 순수주의와 팔린 펑크의 현실로 나뉜다. 노 브레인은 자의적으로 단일 공동체(드럭)에서 탈피, 자주 레이블이라는 새 기반(문사단)을 통해 보다 지평이 넓어진 인디 펑크 제 2기를 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노 브레인의 행보는 분명 주목할만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인디의 틀 안에서의 일이라면, 크라잉 너트는 좀더 복잡한 결을 드러낸다. 크라잉 너트는 자의건 타의건 최초의 인디 스타의 입지에서 당 문화에 대한 이해(오해?)를 대중적으로 확보한 탈 인디 – ‘준’ 주류 밴드라는 이중적 혹은 모호한 위치가 그렇다.

그래서 크라잉 너트를 듣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해 버린 평결 기준을 다시 소급하게 만든다. ‘주류가 된 인디의 효시’라는 인식에 대한 회의는 그렇다 치고 롤러코스터나 자우림 같은 비 펑크 밴드들과 다르게 ‘인디 에토스가 유지해야할 순도(?)의 급’을 어디까지 지키고 있는 가라는 불편한 질문이 따라다닌다. 판매량, 팬덤, 인지도 모든 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만 그래서 어디에도 제대로 거하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그들을 어떤 기준으로 들어야 할까.

이번 3집 [하수연가(下水戀歌)]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다. 수록곡들은 모두 일정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고 흡인력도 있다. 의도적 위악 혹은 치기로만 곱게 봐 주기엔 다소 민망했던 1집을 생각해 볼 때 이는 2집을 거친 점진적 발전이라 할 만하다. 펑크 팝을 기조로 컬리지 록, 카바레 뽕짝(빵구 록?), 하드코어, 폴카, 스카, 심지어 전형적인 기타 팝까지… 매 트랙마다 스타일상의 차이를 최대화하려는 노력은 가령 “금환식” 같은 곡에서 (사물놀이패에게) 솔로 파트를 할애하는 것이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지지만 밉게 튀진 않는다.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Leningrad Cowboys Go America)], 영화음악가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 가수 톰 웨이츠(Tom Waits)나 더 가까이의 어어부 프로젝트, 황신혜밴드를 들으면서 정서적으로 많이 동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앨범도 반겨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롭진 않다. 전혀. 이미 하나의 인디 스타일로 정착된 것들을 보다 분명한 펑크 코드에서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문화적 특수성(?)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라면 이 앨범은 현 인디 씬의 특정 동태에 대한 다이제스트다. ‘가치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어어부 프로젝트보다 유아기적이고 황신혜밴드보다 치기가 적다. 그것이 득이 된다면 펑크 ‘키드’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첫 곡 “이소룡을 찾아랏!!”은 배짱에만 기운 허장성세가 유쾌하고 위악적인 한국형 스카 펑크 트랙이다. 인트로 없이 바로 노래가 나오는 펑크 키드의 대책 없는 희망가인 “만성피로”는 NoFX의 하모니가 기억나는 발랄한 펑크팝 트랙이다. 뒤에 깔리는 ‘mmbop’ 형의 소년 코러스도 이들의 막나가는 귀여움을 위한 장치다. 서프 록적인 기타가 느긋한 “밤이 깊었네”를 지나면, 어어부 프로젝트의 “사각의 진혼곡”(영화 [반칙왕] OST)에 대한 노골적인 오마주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지독한 노래”가 나온다. 요지경 세상에 대해 요지경하게 풍자하는 가사가 특징. 가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불만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어두운 단조 기타와 프렌치 아코디언이 청승맞은 “붉은 방”은 상당히 민망하다. 속칭 어항 집의 나 어린 창녀에 대해 값싼 휴머니즘으로 하소연하는 것은 걸진 치기가 자칫 속살을 드러낼 때 느껴지는 악덕이다. 폴카를 덧씌운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하드코어의 무게와 창법이 실린 “하수구”등 하이퍼 하이브리디즘의 숨가쁜 질주는 계속된다. 힘을 뺀 보컬이 불협화음적이지만 몽환적인 일렉트릭 기타의 반주와 함께 펑크에서 일탈한(?) 기타 록 트랙인 “몰랐어”는 의외지만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다.

자, 그럼 아까 이야기하다만 ‘인디 에토스의 순도’ 문제로 돌아와야 할까? 크라잉 너트는 이 앨범을 통해 인디 에토스를 유지, 여전히 한국 주류 대중음악에 불침을 놓는 첨병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해야 한다면, 이런 회의도 끝을 낼 때가 한참 지났다는 것이다. 채널들이 한참 모자란 한국 주류 문화가 ‘낯설고 반역적’이라 한 번 건드려준(?) ‘사건’ 이후, 여전한 분리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양 세계 사이에 끼여 필요할 때마다 만만한 상징으로 불러들여지는 것이 크라잉 너트 아닌가? 주류란 곳도 가끔은 문화적 환상을 꿈꿔야 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정상급 가수 대접을 받는 쇼를 열건, 선진국 페스티벌의 서브 스테이지에 서건, 연예 프로그램 카메라에 잡혀 당돌한 재롱을 떨건, 급기야 그 스타 성을 인정받아 주연 영화까지 찍게 되었건, 모든 것은 인디 에토스도, 홍대 인디 문화도, 크라잉 너트 자신의 의도도 아닌 모호한 문화소비 행태로 보인다. 이에 대한 크라잉 너트 자신들의 펑크적 발길질이 강박인지 무관심인지 아니면 조롱거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20010613 | 최세희 [email protected]

6/10

수록곡
1. 이소룡을 찾아랏!!
2. 만성피로
3. 밤이 깊었네
4. 지독한 노래
5. 붉은방
6. 양귀비
7.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8. 금환식
9. Honey
10. 불놀이
11. 코미디의 왕
12. 하수구
13.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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