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나가다 보니 “오빠… 어쩌구”하는 노래가 나와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인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곡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평론가 맞아’, ‘치매 아냐’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She Bop”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속으로 득의양양했던 것은 물론이다. 조금 있다가 라디오를 듣다 보니 “어제 우리가…”라는 노래가 나온다. 이건 뭐 모를 수가 없는 노래고, 문제는 가수가 누군지 알아 맞추는 일이다. 옆에 있는 동료와 내기를 했는데 코맹맹이 소리를 듣고 ‘유승준!’이라고 찍은 내가 이겼고 그래서 그날 밥을 얻어먹는 쾌거를 이룩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주절거렸냐 하면 바야흐로 ‘리메이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메이크? 영어로 ‘remake’일테니 ‘다시 만들다’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곡을 개작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다시 녹음한다는 뜻에 가깝다. 물론 유승준의 경우 원곡에는 없는 랩을 만들어서 삽입했지만 원곡의 골격을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으므로 저작권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엄마나 아빠한테 ‘리메이크’라는 말을 쓰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지도 모르니 조심할 것. 옛날에는 “오빠” 같은 곡을 ‘번안곡’이라고 불렀으니 ‘엄마 저거 번안곡야’라고 말하면 ‘우리 딸, 그런 것도 알아’하시면서 기특해 하실지도 모른다(왜 ‘번역’이 아니라 ‘번안’인가는 각자 생각해 보고 다음 시간까지 리포트로 제출하길!).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면 리메이크는 아무래도 ‘콩글리쉬’같다. 영미권에서는 ‘remake’라는 말보다는 ‘cover’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cover’라는 말을 듣고 ‘덮긴 뭘 덮지?’라고 의아해하지 말길.

20010501111852-remakeop1리메이크든, 커버든 이제 대중음악계에서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박지윤과 진주처럼 박진영 사단장님 휘하에 있는 언니들도 “하늘색 꿈”과 “난 괜찮아”라는 옛날 노래를 다시 불러서 떴다. 코요태도 혜은이의 “열정”을 불렀다. 요즘은 리메이크만을 수록한 음반들도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하덕규의 “가시나무”가 수록된 조성모의 [클래식]은 그가 정상의 자리를 굳히는데 공헌했고, 핑클도 [메모리스 & 멜로디스]라는 제목의 리메이크 음반을 내놓고 방송에 열심히 나와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부르고(아니 립씽크하고) 있다. 조성모, 유승준, 김현정 13명의 현역가수가 각각 리메이크곡 하나씩 수록한 [리메이크 Op. 01]도 나왔다. 헌정 음반(트리뷰트 음반)도 넓은 의미의 리메이크 음반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신곡을 담은 신보를 내지 않고 리메이크 음반을 내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상업적’ 동기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리메이크의 대상이 되는 곡들은 ‘왕년의 히트곡’들이다. 일단 품질이 검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세월은 좀 흘렀어도 잘 다듬기만 하면 신곡을 발표할 때보다 불확실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 20대 후반에 접어드는 가수들의 경우 팬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성인 취향으로 변신하려는 준비도 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리메이크 음반이나 편집음반(이미연의 [연가]나 이영애의 [애수]같은 ‘종합선물세트’)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요즘 노래들은 대체로 ‘그게 그거’ 같기 때문이다. 직업적 작곡가들도 이제 더 만들 노래가 없다고 투덜댄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마도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먹고 살려면 쓰긴 써야겠는데 딱히 쓸 말이 없네”하면서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의 처지와 비슷한가보다. 실험적인 곡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서태지와 신해철도 아무래도 예전만큼 팔리지 않는 걸 보면 한국에서 그게 장사가 되리라고 기대하면 바보다. “그동안 특정 장르와 사운드가 독주하다보니 우리 귀가 아예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낯설어하게 되어버렸다”, “리메이크 붐은 창작력 고갈의 반영이다”라는 ‘상투적’ 결론은 틀린 말이 아니다. 대안이 없어서 그렇지…

20010501111852-finkl_memories게다가 리메이크에 따르는 경제적 문제도 발생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리메이크곡의 라이센스를 받는 과정에서 원작자에 대한 ‘무례’나 ‘홀대’가 빈발하고 있다고 한다. 박완규가 “사랑한 후에”를 완전한 허락 없이 실었다가 전인권에게 항의받고 있고, 핑클도 리메이크 음반의 한 곡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음반을 내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작년에도 조성모 측은 하덕규에게 ‘푼돈’밖에 지급하지 않아서 ‘농성’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주류 가요계(=연예계)가 어떤 곳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계속 유심히 지켜보시도록. 디게 재밌는 곳이니까. 20010413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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