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zz A Film By Ken Burns

20010301025736-kenburnsjazz지난 1월에 교양방송 채널 PBS에서 10회에 걸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켄 번스의 재즈(Jazz A Film By Ken Burns)]는 미국 전역에 걸쳐 다시금 재즈 열풍을 몰고 온 듯 하다. PBS에서는 방송과 동시에 똑같은 내용을 담은 10장 짜리 DVD와 비디오전집, 그리고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뮤지션들의 ‘히트곡 모음’과 컴필레이션 CD들을 직접 제작하여 상품으로 출시했다. 뿐만 아니라 음반회사들은 Louis Armstrong, Duke Ellington, Miles Davis, Benny Goodman, Count Basie,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Ornette Coleman, Herbie Hancock과 Wynton Marsalis에 이르기까지, 뉴올리언스, 스윙, 비밥, 아방가르드에서 현재의 퓨전까지, 재즈 역사 상의 각 하위범주의 대표적 뮤지션들의 음반들을 재발매하고 있고, 타워, 버진, HMV 같은 대형 레코드 가게들은 [켄 번스의 재즈]에 관련된 상품들–음반뿐 아니라 재즈 관련 전문서적까지–을 모아놓은 특별 섹션을 따로 두고 있을 정도이다.

일단, 이런 대중문화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점점 정교해지고 규모가 커지며 되풀이되는 문화산업의 동시다발적이고 치밀한 상품전략에 대한, 역시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냉소적 비판은 그냥 생략하기로 하자. 그리고 이 글에서 필자가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니, 이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생생한 음악들에 대한 언급 역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켄 번스(Ken Burns)는 뉴욕 출신으로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기록영화 감독 중의 한 명이다. 그가 미국을 대표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사회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역사적, 문화적 아이콘들을 영화의 주제로 일관되고 진지하게 그리고 큰 스케일로 다루어 왔으며, 덕분에 이 곳에서 어느 누구보다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밝혔듯이, [켄 번스의 재즈]는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야구(Baseball)]에 이어지는 미국사회와 역사에 대한 그의 야심찬 삼부작의 마지막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켄 번스는 이번에도 ‘인종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재즈, 나아가 미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코드들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재즈의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이 음악의 주체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이었기에, 그들이 뉴올리언스, 뉴욕과 시카고, 할렘, 그리고 KKK에 이르는 사회문화적 공간(혹은 대상)과 교차하며 갈등과 투쟁, 한편으로 교섭과 타협을 진행해온 100여 년의 시간은, 인종주의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국의 문화, 나아가 근, 현대사가 구성되어온 과정을 집대성한다. 20여 시간에 이르는 길이의 이 장대한 기록영화를 통해, 우리는 ‘재즈’라는 음악이 소울이나 힙합처럼 미국 사회의 최하층계급이자 가장 열등한 인종집단으로 송두리째 낙인찍혀온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가장 소중한 사회문화적 저항의 수단이자 생존과 적응의 기제였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저항과 폭력의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문화?

[켄 번스의 재즈]에서 표현된 재즈와, 그리고 재즈를 둘러싼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문화를 규정하는 방식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문화적 표현양식들, 특히 대중음악을 설명하는 주류 미국사회의 신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의 담론은 늘 그러했기 때문이다. 재즈도 그랬고 소울도 그랬고 지금의 힙합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모두 인종주의적 불평등이라는 넘을 수 없는 구조적 벽에 갇힌 도시의 흑인들, 특히 게토의 젊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남성들이 주류 백인 사회에 대해 때론 저항하고 때론 적응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타협하며,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들로 규정되어 왔다.

20010301025736-vibeVibe는 흑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가는 대표잡지 중 하나.
아프로-아메리칸 흑인의 문화를 다루는 주류 사회과학, 문학, 미디어의 이러한 지배적 담론은 거의 30여 년간 변화한 게 없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의 대도시 흑인 게토지역에 대한 ‘현장기술지적(ethnographic)’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니그로 문화’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전제를 가지고 게토에 들어간 이들의 편견어린 눈에는 길거리에서 건들거리며 사회에 대한 불만을 내뱉는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청년들의 모습만이 극대화되어 들어온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토의 다양한 연령집단들이나 여성들은 안중에 없는 게 당연하며, 그나마 젊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남성들의 이야기와 문화도 자신들의 결과물로 재단되기 위해 변형되고 왜곡된다. 그리고 그 과정의 결과는, 백인 독자의 눈과 귀에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백인 학자들과 미디어에 의해 재창조된, 거리의 투사로서의 젊은 게토의 흑인 남성들이다. 이들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남성들의 말, 노래, 행동거지, 옷차림과 머리모양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주류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저항의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것처럼 보이며 이 것이 바로 ‘진정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문화’로 정형화된다. 20세기 초, 중반에 재즈를 중심으로 형성된 흑인문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소울 문화, 그리고 1980, 1990년대의 힙합 문화는 그런 식으로 사회의식적이고 저항적이며 동시에 폭력적인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남성의 게토문화로 표준화된다.

대도시의 거대한 게토지역의 문화가 하나의 단일화된 문화로, 그것도 생존 투쟁과 저항만을 위한 폭력적인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청년들의 문화로만 묘사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다. 학문, 문학, 미디어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미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지배하는 이러한 담론의 주도자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사회의 30여년 간의 투쟁을 묘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거세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사실은 역설적으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신자유주의의 가면 하에 보다 정교하고 은밀해진 인종주의의 주체들이기도 한 현재의 이러한 담론 생산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탄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제는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을 극대화할 때라고 강권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묘사해온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 특유의 저항적이고 사회의식적인 문화(특히 지금은 힙합 문화)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고 당사자들에게 역설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재 아니 앞으로도 만약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이 게토의 빈곤을 결국 못 벗어난다면, 이는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 순전히 그들 스스로의 문화적 주체로서의 역량이 여전히 함량미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문화 가공하기

무엇보다 아프로-아메리칸 문화를 이렇게 생존전략, 저항과 투쟁의 기제로서 표준화되고 단일화된 문화로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 차원에서 존재하는 대도시 아프로-아메리칸 게토 공동체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이러한 지배적 담론이 단순히 미국의 주류 백인 집단의 것만이 아니라 아프로-아메리칸 공동체 바깥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가령 한국인들(힙하퍼들을 포함해서)도 이러한 백인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상상하는 흑인사회의 모습은 사실 갱스타 랩(반드시 갱스타 랩이 아니어도 좋다. 이건 Public Enemy에서부터 DMX까지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가사에 나오는 그것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건 간에 모두 마찬가지이다. 덕분에 미국에 장기간 살고 있는 교민들, 몇 년째 머무르며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 심지어 며칠 전에야 JFK 공항에 도착한 관광객들에게까지 할렘과 같은 미국 대도시의 흑인 거주지역은 늘상 ‘(공포스러운) 금기의 공간’이 된다. 즉,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곳에 갖다 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용기인양 과시용이 되고(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조선일보 모 기자의 뉴욕 방문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 세대에게는 발가락 하나라도 들여놓아서는 안되는 불가침의 지역으로 성역화(?)된다.

조야한 문화상대주의적 혹은 인본주의적 반론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곳도 우리처럼 똑같은 인간들이, 단지 우리와 피부색만 다른 이들이 주로 모여 사는 대도시의 한 주거지역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결코 획일화될 수 없는 다양한 계층과 직업, 나이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반쪽은 여성들이다. 또한 그들도 어떤 형태로든 현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얽혀서 외부의 제도, 조직,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연관 하에서 살고 있으며, 결코 고립된 전근대적 공동체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한편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인기가요의 노래 가사와 똑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처럼, 그들 역시 대부분은 랩의 가사대로 살지 않는다.

하지만 외부인들이 볼 때, 과거엔 소울, 그리고 지금은 힙합이라는 단일한 문화적 표현양식으로 낙인찍힌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삶과 문화는, 경계지워지고 고립된 게토, 붐박스, 배기진, 어수선하고 난잡한 거리, 젊은 흑인 남자애들의 욕이 뒤섞인 랩과 갱스타적인 행동, 마약과 폭력, 그리고 마초적 태도 이상은 아닌 것처럼 보여진다. 덕분에 이러한 카테고리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의 상상력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우리가 할렘을 가고 브루클린을 가더라도 그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의 눈에 그들은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사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들, 장년층, 동성애자들, 중산층 집단의 일상생활과 문화적 실천의 면모들은, 주류 백인 사회에서 아프로-아메리칸 문화를 규정하는 담론의 확대 과정에서 철저하게 거세된다.

동시에 그러한 아프로-아메리칸 문화에 대한 협소한 정형화 과정에서, 소위 ‘니그로적’ 정형에 맞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 또한 잊혀지기 시작한다. 지난 번 브루클린 미술관, ‘Hip Hop Nation’ 전시회 관람기에서 언급했듯이, 애초부터 존재했던 다문화적 혹은 하이브리드(hybrid)적인 힙합 음악과 문화의 특성과 요소들은 언젠가부터 없었던 얘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프로-아메리칸 흑인의 음악과 문화가 지닌 그 복잡한 다이아스포라적(diasporic)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적 표현양식들은 애초부터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집단들과는 고립된 아프로-아메리칸만의 진정하고 순수한 자산으로 계속 존재해 왔던 것처럼 규정이 되어버린다.

Soul, Afro, Cool, Dozens

하지만 오로지 사회저항적이고 오로지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한 남성 중심적이고 어느 한순간도 아프로-아메리칸 공동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은 채 자생적으로 성장한 순수하고 진정한 문화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단지 그것만으로 전체 아프로-아메리칸들의 삶과 문화를 단번에 규정할 수 있을까? 우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아프로-아메리칸 흑인집단의 삶을 재단했던 소울(soul) 문화의 요소들에 대한 몇 가지 예를 통해, ‘한편으로 사회저항적, 남성중심적, 마초적이면서 한편으로 순수하고 진정한 니그로 문화’로서의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문화 담론의 허구들을 짚어보자.

사실 소울 음악과 그 문화적 아이템들에 대한 과거 미국 사회 지배적 담론들의 규정방식은, 지금의 힙합에 대한 정형화, 타자화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적 작업들과 미디어를 통해 소울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동안 단순히 음악의 차원을 넘어, 경제적, 정치적인 주변적 위치에 적응하기 위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남성들의 대표적인 문화적 표현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태도로서의 ‘쿨(cool)’하다는 것과 외양으로서의 ‘아프로(afro)’ 헤어스타일은 그러한 인종주의와 빈곤에 맞서는 소울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은 소울의 요소들이 훨씬 더 복잡한 다문화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결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묵살한 채, 소울의 의미를 흑인 남성들의 마초적 태도, 그리고 동시에 빈곤에 대한 저항의 기제로만 국한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아프로(afro)’ 헤어의 기원은 1960년대 후반이라기 보다, 1950년대 후반의 (다양한 인종집단을 아우르는) 부르주아적 패션 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는 다양한 인종과 직종의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기본적으로 패션으로서의 즐거움이 더욱 강조되는 문화적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전반적인 흑인운동의 확장과 이 운동에 대한 미디어와 사회과학 담론(좌파들이나 자유주의 모두에게 해당된다)은 아프로를 아프로-아메리칸 흑인의 남성성과 호전성의 상징으로 변모시켰다. 흑인 남성 중심의 급진적인 저항운동을 통한 아프로의 전유과정에서 일상에서의 여성적인 세련미에 대한 향유와 즐거움의 한 부분으로서의 심미적인 의미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쿨 포즈(cool pose)’ 또한 마찬가지이다. ‘쿨’이 지니는 아프로-아메리칸의 미학적 가치평가의 의미는 역시 단순히 흑인 남성들이 미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인종주의와 억압을 극복하기 위한 적응전략으로 축소되고, 급기야 미디어와 문화산업이 아프로-아메리칸 소울 문화에 대한 상품화를 선도하는 단어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덕분에 흑인 여성들, 게이 흑인 남성들, 혹은 중산층 흑인들의 다양한 문화적 실천에 존재하는 명백한 ‘쿨 포즈’는 아예 고려 대상으로 취급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울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힙합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일종의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 특유의 언어게임이라 할 수 있는 ‘더즌(dozens)’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 ‘더즌’은 기본적으로 상대방과 상대방의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농담을 적당한 욕을 섞어서 대화형태로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가령 “Yo’ mama’s…”로 시작되는 이러한 대화는 얼핏 들으면 상대방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일종의 농담 게임 이상의 의미는 없다. 즉, 단지 웃고 즐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더즌에 대해 백인 사회과학자 혹은 사회언어학자들은 문학적, 메타포적인 과중한 의미들을 부여하며, 특히 젊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남성들의 투쟁을 위한 집단적 결속과 심리적 충전을 위한 일종의 ‘의례’라고까지 정의한다.

사실 더즌에서 보듯이,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에게는 웃고 떠벌리며 입담을 통해 자신의 구화적 기량을 과시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적 코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러한 농담게임을 통해 떠들며 즐기는 것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농담게임, 혹은 구어적 대결이 대다수의 아프로-아메리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관심은 배제된 채, 마치 생존과 투쟁을 위한 전략으로서, 더군다나 길거리와 바, 공원에서 어슬렁거리는 소수의 젊은 남성들의 전유물로서 해석된다는 것은, 게토의 문화적 표현양식들을 남성중심적으로 재구성하고, 백인들의 입장에서 소위 ‘진정한’, 혹은 ‘순수한’ 게토적 감성의 형태로 재해석함으로써 그들을 이국화, 타자화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Hip Hop 혹은 Rap Music

기본적으로 미디어나 학자들이 랩 음악, 혹은 힙합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우선은, 랩 음악이 소울을 비롯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투쟁적이고 희생적인 문화적 표현 양식들의 전통과 그들의 문화적 통합성을 약화시킨 채 폭력만을 조장함으로써, 흑인 문화의 진정성을 약화시킨다는 논리가 있다. 다른 입장은, 기존의 소울과 같은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문화적 표현양식들처럼 랩 음악과 힙합 역시 게토 청년들의 진정하고 비타협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템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상반된 입장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사회의 문화적 표현양식들은 게토라는 공동체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 속에서 지금까지 발전되어온 진정하고 순수한 것들이(어야 하)며, 동시에 빈곤과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적응의 기제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랩 음악을 비롯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문화적 표현양식들은 결코 단일한 경계 내에서 정형화될 수 없는 다문화적이고 복합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었고, 우리가 낭만화해 온 것처럼 주류 사회에 대한 처절한 투쟁, 혹은 최소한 거칠은 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힙합의 다양한 음악적, 인종적, 민족적 뿌리들에 대해서는 지난 번 브루클린 미술관, ‘Hip Hop Nation’ 전시회 관람기에도 물론 언급했었지만, 실제로 초기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어보고 그들의 인터뷰나 자서전을 살펴보면 랩 음악의 놀라운 하이브리드한 본성(hybridity)을 감지할 수 있다. 가령 1980년대 초 뉴욕의 뉴웨이브 클럽에서 힙합과 펑크가 질퍽하게 결합된 공연들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던 것이나, Grand Master Caz와 같은 힙합의 시조들이 Barry Manilow, Neil Diamond, Simon & Garfunkel 같은 소프트 록과 주류 팝 음악을 듣고 자랐고 동시에 그러한 사운드를 랩 음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것은 원형적인 힙합 문화의 하이브리드 감성에 대한 또다른 사례들로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힙합을 투쟁을 위한 단순한 정치적 텍스트로 환원하는 것 또한 상당 부분은, 구체적인 흑인 문화의 기본적인 실천들과 그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랩 음악의 내용을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생활의 직접적인 반영물로 해석하는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초창기부터 랩 음악에서의 가사는 직접적인 거리생활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마이크를 제대로 로킹할 수 있느냐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스토리 자체보다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중요하고, 따라서 마이크를 통해 드러나는 엠씨의 구어적 표현 능력, 창조적이고 즐거운 말장난, 메타포, 스타일의 복합적 발현이야말로 랩 음악의 핵심인 것이다. 이는 아프로-아메리칸 흑인들의 구술적 전통에서 비롯한 듯한데, 특히 더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직접적인 의미의 전달보다는 언어 자체의 즐거운 사용을 통한 독특한 구어적 미학의 극대화가 랩 음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역설적으로, 이러한 랩 음악의 본원적인 미학에 대한 고려는 거의 배제된 채, 주류 사회의 담론을 통해 하나의 정치적 실천형태로 왜곡되고 재규정된 랩 음악과 힙합 문화를 근간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주류와 인디 씬 양쪽에서 꾸준히 정치적 성향을 지닌 아프로-아메리칸 힙합 뮤지션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 이러한 정치적 성향의 힙합 뮤지션들이 마치, 애초부터 존재했던 힙합의 정치적 본성에서 출현한 당연한 결과물인 것처럼 보아 왔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힙합을 정치적 텍스트로 바꾸어 놓았던) 주류 백인사회의 담론이 어떻게 이러한 정치적 힙합 뮤지션들의 출현을 조장했는지, 그리고 다문화주의와 보다 정교해진 인종주의로 무장한 채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주류 백인사회의 저의는 과연 무엇인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디제이들이 턴테이블과 디지털 샘플러를 통해 컷앤믹스와 컷앤페이스트로 갖가지 음악적 장르로부터 유래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그들이 적절하게 뽑아낸 브레이크비트의 리듬에 맞춰 모두가 육감적으로 즐길 수 있는 흥겨운 언어게임으로서의 래핑을 엠씨들이 거칠 것 없이 뿜어내는 가운데, 한편으로 그들의 라임에 맞춰 춤추는 브레이커들의 난장판이 이어지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힙합 문화, 나아가 소위 말하는 대도시 게토의 ‘블랙 컬처(black culture)’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극복전략’, ‘적응기제’, ‘진정성’, ‘순수성’과 같은 단어들만을 통해 고정화될 수는 없는, 구체적인 과정으로서의 문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주류 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는 포착되지 않거나 혹은 거세되었던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문화의 직접적인 주체이자 문화적 실천가들에게, 힙합과 같은 문화적 표현양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이제는 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훵크의 대부, George Clinton이 늘상 이야기하는 ‘즐거움의 본질(pleasure principle)’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즉 블랙 뮤직 혹은 문화의 창조성, 언어적 실험성, 그들의 걸음걸이, 말투, 스타일이 드러내는 즐거움의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랩 음악의 가사와 노래 제목, 몇몇 흑인 래퍼들의 과장된 언사를 통해 흑인 사회와 문화를 규정해온 (거의 무조건적인) 경향과 편견들에 대한 의심이 필요할 때가 된 것이다. 20010225 | 양재영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