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0년 6월 2일
장소: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
입장료: 3만원

20001025045319-deli1믿을 수 없었다. 델리 스파이스가 소극장 공연을 매진시키다니. 그것도 450석 규모의 연강홀을 세 번씩이나. 클럽 공연은 서서 보기가 괴로울 정도의 흥행력을 자랑하던 그들이었지만 소극장 공연은 대조적으로 썰렁한 빈자리가 안쓰러운 그들이 아니었던가. 역시 방송(그래봐야 규모면에서는 ‘인디’급이지만)의 힘은 대단한 것인가. 예술의 전당을 찾아가면서 나는 지난 연강홀 공연 소식을 자꾸 떠올렸다. 혹시 남아있는 표가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물론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공연은 야외무대에서 있었다. 야외 공연은 떼거지로 몰려나오는 연합 공연이 대부분이라 단독 공연을 야외에서 보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야외 공연은 우선 관객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서 좋다. 탁 트인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시선을 마음대로 둘 수도 있다. 바람도 살랑살랑, 벌레들은 날아다니고. 날씨만 맑았다면 초여름의 별자리를 손으로 그려볼 수 있었을 텐데. 이 즐거운 소풍을 함께 한 사람은 눈대중으로 400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공연은 이것저것 두루 배려한 모습이었다. 3집까지 발표한 ‘중견’ 밴드인지라 대표적인 레파토리만으로도 20곡 정도는 너끈히 채울 수 있어서 무슨 곡을 연주할지 기대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3집의 수록곡이 많기는 했지만 1집과 2집의 곡들도 골고루 연주했으며, 미발표곡, 외국곡도 노래했다. 양용준, 최재혁도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서비스를 기꺼이 제공했다. 또 무대에는 멀티비전 두 대가 마련되어 그들의 비디오클립과 공연장면을 전해주었고, 어쿠스틱 기타(이한철)와 브라스(권오태, 홍성진) 세션도 연주의 맛을 더했다. 참, 김민규(기타)의 에드워드 머리를 빼놓을 뻔했다.

공연은 로킹한 곡, 어쿠스틱 넘버, 그루브한 곡들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수자리”로 시작하여 “Across The Universe”로 1부가 끝나고, 게스트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마이 앤트 메리(My Aunt Mary)는 특유의 유머와 카리스마로 관객을 사로잡았으며, 체리필터(Cherryfilter)는 여성보컬의 압도적인 목소리로 우면산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체리필터의 이미지는 메인 밴드인 델리와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긴 게스트까지 세세하게 배려해줄 정도로 밴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요구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20001025045319-deli22부는 ‘이소라의 프로포즈’ 분위기로 시작하여 일부의 관객이 방방 뛰는 난장으로 끝났다. 중간에 깜짝 이벤트에 이은 “Moon River”가 있었고, “이어폰 세상”이 연주될 때에는 힙합 그룹 사이드 비(Side B)가 무대를 뒤집어놓았다. 앵콜곡으로는 다양한 변주를 자랑하는 “달려라 자전거”가 카펜터스(Carpenters)의 “There’s a Kind of Hush”를 인트로로 삼아 연주되었다(사실 이 곡의 오리지널은 허먼스 허미츠(Herman’s Hermits)이다).

여기까지 읽는다면 분명 델리의 공연은 흥분되는 멋진 공연이었으리라고 다들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3만원을 내고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한 사운드가 공연을 제대로 즐기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장비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록 공연에 익숙치 않은 엔지니어가 기계를 만졌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이번 공연에서 사운드상의 문제는 정도가 심했다.

그 때문인지 공연은 성공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델리의 성숙된 모습보다 무명 시절의 순수함과 풋풋함이 강조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열린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이 작용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사운드로 즐기는 공연보다 함께 뛰고 느끼는 (또 자연과 호흡하는) 소풍 같은 공연이었다. 실내 공연장이 주는 긴장감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 문제일 정도였으니까. 델리 본인들로서든 팬들로서든 델리의 최상의 공연은 아니지만 기억할 만한 공연으로 남을 듯하다.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델리를 보러 온 관객들 중에는 팔짱끼고 사운드를 즐기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것. 꼭 나라는 말은 아니지만. 20000604 | 장호연 [email protected]

곡목 리스트
1부
1. 사수자리
2. 귀향
3. 현기증 + 가면
4. 1231
5. 고양이와 새에 관한 진실
6. 투명인간 (Vocal: 양용준)
7. 30
8. Kiss Kiss
9. Across the Universe

2부
10. 거울 II (Vocal: 최재혁) – acoustic
11. Fantasia (Vocal: 윤준호) – acoustic
12. Still Falls The Rain – acoustic
13. Moon river
14. 워터멜론
15. Video Kille The Radio Star
16. 나랑 산책할래요
17. 미안 + 이어폰 세상 + B Boys Style (feat. Side B)
18. 챠우챠우

encore
19. 달려라 자전거
20.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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