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사람들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나처럼 게으른 종자들에게 설날 연휴는 ‘따분한 며칠’일 뿐이다. 평소 같으면 꿀처럼 달게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시간에 일어나 차례 지내고, 집안 어른들이 물어오는 레파토리 뻔한 질문을 어물쩡 웃음으로 넘기고(속으론 입술을 깨물고), 복잡거리는 시내에 나가 여자 친구랑 영화 한 편과 커피(혹은 술) 한 잔을 때리고, 그러고 나면 정말 막막해지는 것이다.

눈치 챘겠지만, 난 게으른 데다가 백수다. 빈둥거리는 게 생활인 탓에 이제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겼다는 걸 부인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달력 한 가운데 빨갛게 분칠해진 날은 물론 반갑긴 하지만 동시에 난처한 일이다. 뭐 어디 놀러갈 돈도 없고(어디 멀리 가는 것도 별로 안좋아하고 해서 여자 친구한테 자주 구박받는다), 짱구를 굴려 봐도 저렴한 비용으로(왠만하면 공짜로) 시간 때울 수 있는 그럴싸한 꺼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방바닥에 넙죽 누워서 TV 리모콘을 들고 요리조리 그림을 바꿔가며 ‘완상’하다가 잠들고, 배고프면 일어나 밥먹고 다시…

올해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거창하게 새 천년을 맞이하여 어쩌구, 그래서 치열하게 살겠다는 결심이 저쩌구 그런 건 없다. 딴은, 뭐, 따분한 시간을 좀더 잘 때워보겠다는 거다. 단,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설 연휴에는 비디오를 빌려다 놓고 볼 작정이다. 근데 뭘 본다지?

그래, 음악 영화를 보는 거야. 정말 오랜만에, 결심이란 걸 해본다. 그래서 폐지처럼 쌓여있는 지난 잡지들과 신문 쪼가리들을 뒤진다. 아, 쒸, 평소에 정리 좀 해둘 것을. ‘자료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각종 잡지의 글 목차들을 DB화한다’는 오래된 마스터플랜을 실천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그러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결정적일 때 짜증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 사소한 짜증을 감내하거나 혹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어쨌든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실은 투덜거리면서) 목록을 만들고 난 후, 얄팍하게도 유형별로 나누었다(학창 시절 공부 못한 티는 내고 싶지 않은데 꼭 이런 데서 고질병이 도진다). 그래봐야 내 맘대로 분류지만.

유형 A. 아직 덜 식은 영화 잊기 전에 되새김질 하기
유난히 음악 관련 영화가 극장에 자주 걸린 작년에 개봉한,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은 이미 본 영화들.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 [핑크 플로이드의 벽(Pink Floyd: The Wall)] [슬램(Slam)] [질주]. 목록 적고 벌써부터 드는 생각.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안보는 성질 머리를 어떻게 극복한다?

20001018062021-velvet1그치만 글램 록을 다룬 [벨벳 골드마인]은 다시 볼만하다는 최면을 건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영미 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섹슈얼리티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흥미로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들을 보고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커트 코베인 등의 이미지 퍼즐을 풀거나, 영화에 드러나는 1970년대 글램 록 기호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 보거나,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록과 팝에 관한 의미심장한 언술들을 음미하거나, 그도 아니면 동성애와 이성애와 양성애(나아가 현대의 가족제)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기. 사실 이런 식의 영화 보기는 ‘흔하지만 위험한’ 독해법이란 것에 유의하면서.

반면, 이미 오래 전에 비디오로 나왔지만 작년에 무삭제판이 상영된 [핑크 플로이드의 벽]은 내러티브보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더 비중 있는 영화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 [더 월(The Wall)]을 안들은지 꽤 됐고 고등학교 때부터 이 영화를 여러 차례 보아서 신선함은 별로 없지만, 인상적인 애니메이션 부분, 학교 교육의 폭력성과 획일성을 그린 “Another Brick In The Wall 2”, 주인공 핑크가 면도칼로 온몸의 털을 깎는 장면 등은 여전히 섬뜩하고 자극적일 것이다. 영화 자체로서의 성취가 만족할만한가는 다른 문제겠지만.

20001018062021-slam21970년대 말 프로그레시브 록 대가들의 저 ‘마스터피스’가 속에 얹혀서 소화가 안되면, [슬램]을 보면서 랩/힙합으로 날려버려야지. 1990년대에 (미국화된)전세계 청(소)년을 사로잡은 랩/힙합이 정작 미국 게토 흑인에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될 듯. 영어 실력이 딸려서 랩의 운율과 맛을 느낄 수 없는 나 같은 영어 백치들에겐 영어 공부에 대한 자극제로 그만일 것이며, 아니면 최소한 우리말의 구술적 전통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로도 그만일 것이다. 그도 저도 다 귀찮으면, DJ 스푸키가 주도한 힙합과 일렉트로니카의 세계에 몸을 맡겨도 좋겠고.

20001025062932-jiljoo[질주]는 딱히 음악 영화라고 볼 순 없지만, 홍대 앞 인디 씬의 헤로인 남상아가 주연을 맡고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나이트 클럽에서 연기자들이 옐로 키친 음악에 맞춰 평범한 닭장 춤을 열심히 추던, 다소 황당했던 씬. 인물의 전형성이 상투성으로 빠진, 성공하지 못한 청춘 영화지만, 남상아의 노래와 연주 그리고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인디 음악들은 ‘다시 이런 음악을 이렇게 영화에서 들을 수 있을까’하는 아련함을 줄 것 같다. 모두에게는 아니겠지만.

유형 B. 일명 회고전 또는 시공 넘나들기
[열정의 로큰롤(Great Balls Of Fire)] [하드 데이스 나잇(A Hard Day’s Night)] [백비트(Backbeat)] [도어스(The Doors)] [우드스탁(Woodstock)] [김미 셸터(Gimme Shelter)] [시드와 낸시(Sid And Nancy)] [커미트먼트(Commitments)]

1950년대 로큰롤 가수 제리 리 루이스를 그린 [열정의 로큰롤]은 히트곡을 다수 남긴 로큰롤 스타였지만 13살의 육촌 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함으로써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그의 전성기를 그린 작품. 자료를 보니, 논란이 된 루이스의 삶을 재구성한 이 영화는 루이스와 결혼하는 육촌 동생 역으로 위노나 라이더가, 루이스의 사촌으로 알렉 볼드윈이 등장한다는군.

음악을 테마로 한 영화가 비틀스를 그냥 놔둘리 없겠지. [하드 데이스 나잇]은 전세계에 비틀매니아가 득세하던 1964년 비틀즈의 활동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꾸민 영화.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영화로 포장해서 팔아먹는다는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기획이지만, 이 영화는 한동안 ‘최고의 로큰롤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아카데미상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나? “Can’t Buy Me Love” 등의 노래들도 흥겹고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한 장면들도 재밌다는데… [백비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틀스의 무명 시절에 관한 영화.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의 클럽을 전전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비틀스의 오리지날 멤버인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편을 보고도 비틀스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작년 하반기에 디지털 리마스터링되어 나온 [Yellow Submarine] O.S.T. 음반을 꺼내 듣던지.

록 역사에서 전설의 연대기인 1960년대에 대한 영화 세 편도 빼놓을 수 없겠지. 먼저, 싸이키델릭 록 그룹 도어스(의 짐 모리슨)에 관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도어스]. 올리버 스톤의 1960년대에 대한 ‘집착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영화는 관점이 좀 맘에 안들긴 하지만 발 킬머가 잘 재현한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음악만은 괜찮은 편이다. 아참, 짐 모리슨의 여자 친구로 나오는 멕 라이언에 주목해서 봐야겠다. 좀처럼 안벗는 멕 라이언이 벗은 영화니까(근데 그 장면은 가위질된 라이센스 판에는 잘렸다든가). 아, 왜 예전에 무삭제판으로 봤을 땐 그녀가 멕 라이언이란 걸 몰랐을까. 아까비…

1960년대 후반은 히피의 시대이자 페스티벌의 시대이기도 했다. 1969년에 열린 대규모 공연 둘을 다큐멘타리로 만든 [우드스탁]과 [김미 셸터]는 히피 반문화의 절정과 비극의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드스탁]은 40여만명이 모여 3일간의 ‘우드스탁 네이션’을 이룬 1960년대의 신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록한 영화이고, [김미 셸터]는 ‘제2의 우드스탁’을 목표로 했으나 보디가 드들에 의한 흑인 청년 살인 사건으로 악명을 얻고 막은 내린 롤링 스톤스의 ‘알타몬트 콘서트’를 정리한 영화. 근데 [김미 셸터]는 비디오 출시가 안된 것 같다. 아는 형이 두 장짜리 비디오 CD를 갖고 있는 걸 봤는데, 그거 빌려야쥐.

북더블린에서 리듬앤블루스 밴드를 조직하려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커미트먼트]를 통해서는 1960년대의 소울 음악들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앞서 말한 [핑크 플로이드의 벽]을 연출한 알란 파커 감독의 작품.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흑인이고, 더블린인은 아일랜드의 흑인이고, 북더블린인은 더블린의 흑인…”이란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반면, [시드와 낸시]는 1970년대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시드 비셔스와 그의 여자 친구 낸시 스펀젠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영화.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 영화는 마약과 펑크 록에 관한 것이라보다는 관계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 이 두 편은 한 영화 소녀가 ‘강추’해준 영화.

유형 C. 록 오페라 관전하기
단, 최대한 편한 자세로 담배 한 대 꼬나물고. 대상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토미(Tommy)] [록키 호러 픽쳐 쇼(Rocky Horror Picture Show)].

유명한 록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예수 삶의 마지막 일주일을 다룬 이 영화는 예수와 유다의 대비,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투사한 당대의 사회상 등을 돋보인다고 한다. 막달레나가 예수를 연모하며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등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의 히트곡들과 함께, 이 영화의 시각이 성서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영화 [토미]는 1960년대 모드족의 송가 “My Generation”으로 유명한 록 그룹 후(The Who)의 컨셉트 앨범 [토미]를 록 뮤지컬로 만든 영화. 후 멤버들을 비롯, 엘튼 존, 에릭 클랩튼, 티나 터너 등의 뮤지션들을 볼 수 있고, 잭 니콜슨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켄 러셀 감독은 후의 음반을 토대로 위선적인 종교, 상업화된 현대 사회의 모습 등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예전에 조각 조각 본 걸 전부 보는 게 이번 의 목표. 근데 이거 비디오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없으면, ‘아까 그 형’한테 비디오 CD로 빌려서 봐야지, 뭐. ‘고리짝’ 펜티엄 클래식 CPU의 우리 집 컴퓨터에서 비디오 CD가 잘 돌아갈는지 걱정이긴 하다. 앞서의 [김미 셸터]와 마찬가지로. 이 참에 컴퓨터를 확 바꿔버려?

재작년 나의 개봉 영화 베스트인 [록키 호러 픽쳐 쇼]는 다시 보려고 벼르던 것. 심야 상영관의 장기 흥행, 관객들이 각 배우의 복장을 하고 행동과 대사를 따라하는 영화관 풍경, 컬트 영화의 원조 등등의 소문으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된 영화 (야… 참 오랜만에 쓰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표현). 손꼽히는 여배우 수잔 서랜든, 그래미상에 빛나는(푸훗) 록 가수 미트 로프의 옛날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치 않지만, 그 외에도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섹스, 호모/트랜스 섹슈얼리티, 록 음악, 그루피, 프랑켄슈타인, 1930년대 호러 영화의 관습, 1960년대 청년 문화, 캠프 등 다양한 논제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작품. 나도 리모콘으로 반복 재생 버튼을 눌러가면서 화장을 하고 배역들을 따라해 볼까나.

록 오페라는 뭘까. 록이 예술이라는 일부의 주장을 증명한 양식? 록이 저항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비추어 예술적 심미화의 가면을 쓴 록의 이반? 예술에 대한 컴플렉스가 가져온 록의 변이? 그냥 음악 잡지와 음반 산업이 붙인 저널리즘/마케팅 용어? 섹스 피스톨스나 너바나라면 ‘그따위 말에는 신경쓰지마’라고 하겠지. 하긴 설 연휴용으론 함량초과이긴 하다.

암튼, 계획은 빠방하게 섰다. 설날 연휴는 전혀 지루하지 않겠다. 걱정이 앞서긴 한다. 이 많은 비디오를 다 구할 수 있을까. 변두리 청년의 설움이여. 근데 그보다도, 그 많은 걸 다 볼 수 있겠냐구? 에이, 설마~ ^^; 그치만, 뭐, ‘딸기밭’ 연휴가 어디 설날 뿐이겠어? 매일 매일이… 20000131 | 이용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