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의 하드코어 랩과 서부의 갱스터 랩을 통해 초기 1세대 래퍼들이 보여준 세 가지 가능성 가운데 두 가지 즉, 사회참여적인 경향과 오락적인 경향이 전개되고 상호 관여하는 양상에 대해 살펴본 셈이 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절충주의적이고 지성적인 랩의 흐름들을 살펴보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이와 같은 흐름은 퍼블릭 에너미나 부기다운 프로덕션스로부터 전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단, 이들은 정치성보다는 사운드의 예술적 가능성을 중시했으며, 몇몇 그룹은 아프리카 중심적인 세계관을 재즈나 소울, 가스펠 등 흑인 음악 본류에 대한 관심을 통해 표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소음이나 대화, 일상적 음향보다는 정제된 사운드를 샘플로 사용했으며(특히 관악기의 사용), 리듬과 텍스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이 보여준 실험적인 자세와 대도시에 거주한 마이러니티의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적 태도는 퍼블릭 에너미 류의 강경한 랩에 식상해있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De La Soul “Me Myself and I”(Badmarsh+Shri Remix)

20010319065249-Delasoul컬리지 랩은 보통 정글 브라더스 Jungle Brothers, 드 라 소울 De La Soul,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A Tribe Called Quest 등 ‘네이티브 텅 파씨 Native Tongue Posse’의 일원인 뉴욕을 근거지로 한 밴드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힙합에 재즈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선구자인 정글 브라더스는 비단 재즈 뿐 아니라 하우스, 훵크 등 다양한 소스로부터 빌어온 음악에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을 담아 아프리카 밤바타가 개척한 가능성을 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꽃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류의 음악이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89년 타미 보이 Tommy Boy 레이블에서 발표한 드 라 소울의 [3 Feet. High and Rising]를 통해서였다. 다소 오만한 듯한 유머와 재치, 진보적인 정치 의식이 교묘하게 결합된 이 앨범은 훵크, 재즈, 소울, 팝, 레게, 싸이키델릭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다층적으로 샘플링한 사운드로 큰 인기를 끌었다. “Me Myself and I”와 함께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앨범 수록곡 “Magic Number”를 들어보면 LP의 잡음으로 시작해 60년대 소울을 연상시키는 대중적인 선율, 아름다운 하모니, 힘찬 힙합 리듬, 역동적인 스크래치, 장난스러운 샘플링 등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 이들은 동시대의 래퍼들이 폭력적이고 선동적인 메시지를 앞세운데 비해 사랑과 평화라는 히피들의 고전적인 가치를 내세워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샘플링이 갖는 가능성을 싸이키델릭적인 무드를 창조하는데에 사용했는데, 이들이 보여준 대도시 근교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음향적 세계는 비의적인 가사, 플라워 이미지와 결합하여 힙합 씬의 대안적인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A Tribe Called Quest “Can I Kick It?”

20010319064336-atribecalled드 라 소울의 데뷔 앨범에 잠시 모습을 보인바 있는 큐팁 Q-Tip이 이끄는 힙합 트리오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는 90년대에 들어 드 라 소울이 어둡고 거친 사운드를 내세워 다소 고전하고 있는데 비해 여전히 컬리지 힙합 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데뷔 앨범 [People’s Instinctive Travels and the Paths of Rhythm](1990) 이후 [The Low End Theory](1991), [Midnight Marauders](1993), [트, 라임 그리고 삶 Beats, Rhymes and Life](1996) 앨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갱스터 랩이 챠트를 한바탕 휩쓸고 그 기세가 한풀 꺾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비평가와 얼터너티브 팬들의 관심과 지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데뷔 앨범은 루 리드의 “Walk on the Wild Side”에서 리듬을 빌어온 “Can I Kick It?”을 비롯하여, 영화 ‘록키’ 주제가를 연상시키는 “Luck of Lucien”, 스티비 원더의 “Sir Duke”에서 리프를 따온 “Footprints” 등 샘플링에 있어 흥미로운 이들의 재능을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이전의 곡에서 샘플을 빌어와 거기에 랩을 덧붙이는 관습적인 방식을 넘어, 샘플이 되는 소스 자체에 변형을 가한다. 그리고 이는 예측할 수 없는 곳에 순간적으로 삽입되었다가 곧 다른 음악적 요소에 자리를 내주며, 때론 스크래치나 다른 샘플과 어지러히 교차하면서 텍스처와 리듬감을 구현해낸다. 이들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 류의 훵키한 리듬 대신 한가롭고 평온한 laidback 샘플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그루브감을 만들어낸다. [중략]

이밖에도 재즈적인 어법에 기초한 힙합을 구사하는 그룹으로 뉴욕 출신의 트리오 디거블 플래닛츠 Digable Planets를 들 수 있다. 데뷔 앨범 [Reaching](1993)은 아트 블래키 Art Blakey, 소니 롤린tm Sonny Rollins 등 재즈의 거장들과 커디스 메이필드 Curtis Mayfield 등 소울 뮤지션으로부터 빌어온 샘플을 마약, 성차별주의 등 흑인들의 사회적 이슈와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다. 특히 싱글로 발매되어 큰 히트를 기록한 “Rebirth of Slick”은 어쿠스틱 베이스의 풍부한 울림과 힙합 비트, 관악기, 독특한 신서사이저 합성음, 남성 래퍼와 여성 래퍼의 특징적인 래핑의 교차 등으로 인해 재즈-랩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들은 이어지는 앨범 [Blowout Comb](1994)을 통해 그들은 관심 영역을 자메이칸 덥으로까지 확장시켰고, 아울러 사회적 발언의 수위도 좀더 높였다.

뉴욕은 지성적인 문화적 분위기 때문에 문화적인 실험이 활발히 시도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힙합이 갖는 음악적인 가능성을 간파하고 샘플링이나 래핑 등의 음악적 기법을 예술적으로 구사하려는 시도들이 뉴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재즈가 주는 도회지적이고 이지적인 분위기는 쉽게 동부쪽의 힙합 뮤지션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는 몇몇 재능있는 뮤지션들에 의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들 역시 힙합이 가지는 거리의 문화로서의 에너지와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라는 측면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으로 건너가 사운드 실험을 위한 음악으로 정착한 트립합과 컬리지 힙합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PM Dawn “Set Adrift On Memory Bliss”

20010319064643-pmdawn198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대안적 힙합은 1991년 말 드디어 팝 챠트의 정상을 정복한다. 형제 듀오 피엠 돈 PM Dawn은 영국의 로맨틱 팝 그룹 스팬도 발레 Spandau Ballet의 히트곡 “True”의 멜로디와 간주, 후렴구를 적절하게 샘플링한 “Set Adrift On Memory Bliss”를 빅히트시켰다. 특히 그들이 보여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영혼을 자동기술하는 듯한 영적인 내용의 가사와 읊조리는 듯한 자기 고백적이고 독백적인 래핑은 비록 몇몇 동료 래퍼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이후 스피치 Speech를 중심으로 구성된 대규모 남녀혼성 그룹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 Arrested Development가 피엠 돈의 상업적 성공을 이어받는다. 이들은 1992년에 발매된 데뷔 앨범 [3 Years, 5 Months and 2 Days in the Life of…]에서 독특한 아프리카의 토속 리듬과 아프로-아메리칸의 구술적 전통에 입각한 래핑을 선보여 큰 인기를 모았다. 서사시적인 독특한 문체의 가사로 아프리칸의 자긍심과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 나아가 아프리카 부흥운동을 주장한 그들은 이어지는 앨범 [Zingalamaduni](1994)를 통해 아프리칸 토속리듬에 대한 보다 풍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중략]

새로운 힙합의 대안?

현재 랩/힙합 씬은 재능있는 신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양식을 형성할 정도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하드코어 씬과 컬러지 씬은 이미 더 이상 창조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기를 멈춘지 오래고, 갱스터 랩 진영 역시 투팍과 노터리어스 비아이지 The Notorious B.I.G.의 죽음 이후, 그리고 닥터 드레의 데쓰 로 레이블 탈퇴 이후 상업적인 R&B로 흡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우탱 클랜 Wu-Tang Clan을 중심으로 한 동부쪽의 신진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비평적, 대중적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들의 음악이 기존의 랩의 양식을 얼마만큼 넘어서 독창적인 가능성으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양적으로 보자면 현재에도 다양한 신진 세력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특징적인 면을 들자면 이제 뉴욕과 LA라는 대도시 이외의 지역에서도 다양한 래퍼들이 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랩/힙합이 동부의 메트로폴리스에서 태어나 서부의 메트로폴리스로 옮겨가고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다. 이제 도시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흑인과 유색인종이 새로운 거리의 힙합문화를 형성하는 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이들 90년대의 청년들이 갱스터 랩과 같은 랩/힙합을 들으며 성장한 게 일반적이라고 본다면 더 이상 랩/힙합 음악이 뉴욕과 LA로만 국한될 이유는 없다.

“랩/힙합 씬의 혁신이 뉴욕과 LA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스핀]지의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제 클리블랜드 출신의 본 썩스 앤 하모니 Bone Thugs-N-Harmony를 비롯하여 시카고의 크루셜 콘플릭트 Crucial Conflict와 두 오 다이 Do Or Die, 버지니아 출신의 렉스 앤 이펙트 Wreckx-N-Effect, 애틀랜타의 아웃캐스트 Outcast, 필라델피아의 루츠 The Roots 등의 대중적 성공을 목도하고 있다. 이들 음악이 특징으로는 부드러운 R&B나 모타운 스타일의 뉴 잭 스윙 new jack swing, 아카펠라 등과 맞물린 크로스오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힙합과 레게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는 뉴저지의 푸지스 Fugees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후략] 19970421 | 양재영, 장호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