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6년~997년에 걸쳐 쓰여진 글입니다. 원래 책으로 묶어내기로 되었다가 여러 사정상 미뤄지고 발표되지 못하고 묻혀있던 글입니다. 쓰여진지 벌써 햇수로 4년째 되는 글이라 글쓴 본인들도 불만을 표시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weiv]를 위해 흔쾌히 공개해주었습니다. 혹 기회가 난다면 꼭 다시 고쳐쓰고 싶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weiv]에서는 4회에 걸쳐서 이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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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에서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테크놀로지의 사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랩/힙합과 관련하여 테크놀로지에 집착할 때, 이와 같은 광의의 의미로서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대중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1980년대는 디지틀 테크놀로지를 통해 음악이 순수 정보로 환원, 저장되어 음악 생산에 일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새로운 음향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는 샘플링이라는 기법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같은 기법이 가장 혁신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된 영역이 바로 랩/힙합이다.

20010319042956-dj_kool_herc사진설명 : 초기 힙합 블록파티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DJ Kool Herc.
악기의 수련을 중심으로 테크닉을 연마하면서 음악성을 키워간다는 고전적인 개념은 샘플링 기법에 힘입어 이제 기존의 음악을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음악성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킨다는 개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누구나 음악의 생산에 관여할 수 있고 연주할 수 있다는 ‘기회의 민주성’이라기보다는 생산 과정의 변화가 몰고온 새로운 음향적 가능성의 변화이다. 기술적인 발전의 도움을 받아 이전 음악을 단지 그대로 재생산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소모적인 일에 불과하다. 기계가 제공하는 수월함과 단조로움을 이용(혹은 극복)해 그 이전까지는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음악적 경험을 창출해내는 일은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국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며, 이는 랩/힙합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와 같은 새로운 음악적 경험의 밑바탕에는 음악을 둘러싼 마이너리티의 사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본문은 랩/힙합이 대도시에 거주한 흑인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라는 고전적인 입장은 유지하되, 문화적, 사회적 태도보다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그것의 음악적 가능성이 주는 의미에 좀더 무게중심을 두고자 한다(물론 이둘이 명백히 분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랩/힙합이 단일한 문화적, 음악적 토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세간의 오해를 피하고자 하는 바램의 결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랩/힙합내에서도 상이한 여러 양식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주고받기도 하고 모순을 보이기도 하는 등 양상을 통해 전개되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랩/힙합에서 보이는 몇가지 태도들을 네그리튜드라는 단일한 척도로 환원하는 것은 록음악을 저항이라는 단일한 척도로 환원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시도라는 것이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랩/힙합이 들려주는 사운드의 새로운 가능성이 처음부터 그토록 혁신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능성은 다른 대중 음악의 장르가 그러하듯 너무도 우발적이고 사소한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진부하지만 그 탄생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의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New York Connection

Sugarhill Gang “Rapper’s Delight”

20010319042957-sugarhillgang사진설명: 최초의 랩 레코드 “Rapper’s Delight”의 주인공 슈거힐 갱.
흑인들의 음악은 예로부터 정치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도시의 게토에 이르기까지 흑인문화, 특히 흑인음악은 미국 흑인들에게 강력한 생존수단을 제공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이언 체임버스 Iain Chambers는 “하위계급으로서, 그리고 하위인종으로서의 미국 흑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경험, 경제적 사회적 박탈감,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결부된 특유의 음악으로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들을 연결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 흑인들의 역사에서 흑인들을 흑인들의 경험 속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표현해 온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사실 흑인들이 생존과 저항의 수단으로 문화적 방식(물론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문화적 표현법은 음악이다)을 선택하게 된 것은 백인 사회가 흑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접근을 철저히 탄압, 차단하고 유일하게 오락과 예술적 표현만을 허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쳄버스가 언급한 것처럼 소울 음악과 그 이데올로기는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생존전략으로써 가장 큰 무기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했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랩/힙합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흑인 음악의 정치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심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체적인 쾌락을 동반한 흥겨움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그 중심에는 소위 ‘흑인 특유의’라는 모호한 수식어로 표현되는 훵키한 리듬이 자리하고 있다. 흑인 음악이 수반하는 육체적인 흥겨운 리듬감을 사회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역설적인 저항의 형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음악이 단순한 음악 이상이라는 점이다. 삶과 문화, 그리고 그 속에 자리잡은 음악 간의 경계가 명확히 분리되는 않는 흑인 문화의 특성은 음악적 양식을 지칭하는 ‘랩’과 음악을 포함하여 흑인들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춤, 거리의 벽을 현란한 형광의 원색으로 뒤덮은 그래피티(graffitti), 스포티한 의상 등을 모두 포괄하는 ‘힙합’이라는 개념이 항상 붙어다닌다는 점에서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리고 흑인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억압과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음악의 흥겨움은 랩/힙합의 탄생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아이러니로 작용한다(이는 자메이카의 스카/레게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다).

힙합 문화의 출현은 미국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랩/힙합은 뉴욕 사우쓰 브롱크스 South Bronx의 흑인과 히스패닉 게토에서 출발하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서인도제도(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의 이주지였던 브롱크스는, 이후 다양한 유색인종들의 이주로 인구 구성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브롱크스는 뉴욕이라는 대도시로 이주해온 유색인종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한 출발지점이었다. 하지만 1959년, 당시의 뉴욕 시장 로버트 모지스 Robert Moses가 브롱크스의 심장을 꿰뚫는 철로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6만여채의 집들이 헐리면서 브롱크스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근대화를 상징하는 철로와는 별도로, 철로 남단의 사우쓰 브롱크스 지역은 극도로 황폐해져갔고, 완전히 슬럼화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흑인 이주민들이 유입되고, 경제적 사회적 고립이 가속화되면서 이 지역은 더욱 피폐해졌고, 사우쓰 브롱크스 흑인들은 생존방식이자 대응방식으로써 자신들만의 문화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된다. 미국 북부출신의 흑인들과 카리브해 출신의 흑인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덴티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980년대가 되면서 흑인사회의 고립과 슬럼화는 특정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동부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레이건의 경제정책, 군사정책이 보수화를 기조로 세계를 주름잡던 이 시기에 미국의 대도시는 흑인과 유색인들의 새로운 거주지역으로 변모하였으며(사실 백인들은 낮에 일만 하고 저녁이 되면 교외의 부촌이나 백인거주지역으로 모두 빠져나간다), 정부로부터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급격히 소외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슬럼, 게토가 형성되고 분노와 좌절, 저항이 뒤섞인 독특한 흑인들만의 문화, 즉 랩/힙합 문화가 형성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인종학자 로즈 T. Rose는 “이들 흑인들은 또다른 탈식민지적 맥락에서 적대적이며 기술적으로 복잡한, 다인종적 도시지역에 그 뿌리를 둔 새로운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켰으며, 그 중심에는 랩/힙합 음악과 문화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랩/힙합은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대도시 흑인들의 문화적 혹은 일상적 대응과 적응의 양식으로 태동,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랩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랩/힙합의 탄생: 블록 파티에서 흑인의 목소리로

Grandmasterflash “The Message”

20010319042957-grandmasterflash사진설명: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
랩/힙합이 흑인 게토를 중심으로 한 블록 파티 bloc party(또는 게토 파티)로부터 유래했으며, 이는 DJ와 MC가 주도한 독특한 댄스 파티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기본적인 양식은 뉴욕의 한 디스코텍에서 음악을 틀어주던 자메이카 출신의 DJ 쿨 허크 Kool Herc에 의해 1973년경 처음으로 틀을 갖추게 된다. 1967년 자메이카에서 뉴욕으로 이주해온 DJ 쿨 허크는 디스코텍에서 비교적 힘있고 시끄러운 레게 음악을 틀었는데, 뉴욕의 흑인들은 좀처럼 이 음악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라틴풍의 훵키한 음악을 틀어주고 거리의 슬랭을 마이크를 통해 외치는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람들이 춤을 추고 라이브의 흥분을 만끽하게 만들었다. 점차 그는 대중적인 스타일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마이크로폰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여러 장의 음반을 짧은 시간동안 바꾸어가면서 틀기 시작했다. 2개 이상의 레코드덱을 사용하여 주로 기타나 베이스의 리프, 드럼 시퀀스 부분 등을 짧게 믹스하여 틀어주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레코드덱의 사용이 보다 빨라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자신은 음반의 믹스만 담당하게 되고, 그 리듬에 따라 래핑과 쇼, 춤을 도맡아하는 MC를 따로 고용하면서, 드디어 DJ와 MC라는 랩/힙합의 기본형식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형식은 한편으로는 디스코텍에서 그들과 유사한 팀들이 생겨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흑인 거리에서 자주 열리던 블록파티의 유행에 힘입어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된다. 저녁마다 거리 블록의 양쪽을 막고 MC와 DJ 팀의 주도로 열리던 이 댄스파티는, DJ가 턴테이블의 믹싱 작업을, MC가 래핑을 맡아 당시 디스코텍에서 행했던 쇼와 똑같은 형식의 파티를 열어서 흑인 청년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제 랩 음악의 기본적인 양식과 기술들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DJ들은 기술적으로 스크래칭, 펀치페이징 punch phasing과 같은 디스크 사용기술과 비트박스, 샘플 사용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브레이크비트 등 힙합 특유의 양식을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MC들은 점차 리듬을 타는 래핑 기술과 좀 더 효과적인 발음법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흑인 랩 특유의 세련된 라임 rhyme을 만들어 나갔다. 이와 같은 발전을 바탕으로하여 본격적인 의미의 래퍼들이 등장하는 것은 대개 1980년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본격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전의 DJ, MC에 비해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나름대로 의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 음악은 양식적으로 볼때 하나의 독립된 장르명을 부여받을 정도의 모양새를 갖추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초의 랩 음악이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누리고 있는 곡은 슈거힐갱 Sugarhill Gang의 1979년 작품 “Rapper’s Delight”이다(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다름아니라 이 곡이 최초로 ‘녹음된’ 랩 음악이기 때문이다). 흑인 훵크/디스코 그룹 쉭 Chic의 “Good Times”의 리듬트랙을 그대로 빌려다 쓴 이 곡은 디스코텍과 블록 파티의 흥겨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훵키한 디스코 리듬과 잡다한 효과음, 간간이 들어가는 기타와 건반의 삽입음 위에 리듬감 넘치는 래핑이 얹혀진 랩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등장한 주목할만한 또다른 래퍼는 그랜드매스터 플래쉬 Grandmaster Flash이다. 그가 이끄는 퓨리어스 파이브 Furious Five와 함께 이들은 랩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이들 음악이 흥겨운 파티의 주제로부터 도회지에서의 흑인들의 사회적 문제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1982년에 발표한 “The Message”는 단지 “때로 난 내가 어려운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라는 후렴구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면을 보인다. 손뼉과, 날카롭고 점점 줄어드는 타악기 소리의 혼합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신서사이저, 타악기의 인터플레이가 갈수록 혼란스럽고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로이 셔커 Roy Shuker에 의하면 게토와 빈민가 아파트라는 덫에 갇힌 생활을 은유로 기능하는 음악적 기법이다. 곡은 젊은 흑인들에게 갱스터와 범죄에 연루되지 말기를 층고하는 교훈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게토 생활과 그 지역의 언어를 잔잔하게 페이드 아웃하면서 끝난다.

1세대 래퍼라 불릴수 있는 이들 중 가장 후대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는 아마 아프리카 밤바타 Afrika Bambaataa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동시대의 랩에 비해 절충주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으며, 아프리카 줄루 Zulu 족의 전설적인 추장에서 따온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아프리카 중심적 세계관은 줄루 네이션 Zulu Nation을 비롯하여 80년대 말 뉴욕을 중심으로 한 래퍼들의 정신적인 원형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프로토 테크노 그룹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Trans-Europe Express”의 선율에 힙합 리듬을 혼합한 “Planet Rock”(1982)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Looking for the Perfect Beat”(1982)에서는 하드코어 랩의 원형이 보인다.

그의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으로부터 샘플을 빌려와 독창적인 사운드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데, 제임스 브라운 류의 훵키한 리듬 뿐만 아니라 클래식이나 존 케이지의 전자음악, 헤비 메탈 방송 멘트, 잡다한 음향효과들을 적절히 믹스한 사운드는 큰 주목을 받았다. 단지 랩이라는 범주만으로 규정하기에는 그의 음악 세계가 넓으며, 혹자는 그의 음악에서 디트로이트 테크노, 마이애미 베이스, 그리고 시카고 하우스의 맹아를 찾기까지 한다. 그는 음악적인 면뿐 아니라 흑인 사회 내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 가사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훵크를 종아하는 거리의 비행 소년들을 규합해 줄루 네이션 Zulu Nation을 조직하여 흑인사회 내부의 계몽운동을 이끌었으며, 동시에 대표적인 흑인 투쟁조직인 블랙 무슬림 Black Muslim의 활동과도 밀접한 결합을 하면서 흑인 인권옹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랩 음악이 사회적인 인지를 획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초반, 뉴욕을 중심으로 이스트코스트에서 일기 시작한 1세대 래퍼들의 음악에서 우리는 이후 랩/힙합을 지배하는 세가지 흐름을 보게 된다. 슈거힐 갱 류의 흥겨운 파티음악으로서의 랩, 그랜드마스터 플래쉬 앤 퓨리어스 파이브의 사회의식적 메시지의 랩, 그리고 아프리카 밤바타의 실험적 랩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후 랩 음악의 모든 양식적 특징과 태도를 1980년대 초반의 음악으로부터 끌어내려는 시도가 작위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랩 음악이 초창기부터 상이한 세 가지 태도를 갖추고 거기에 걸맞는 음악적 양식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만은 인정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제 세 가지 흐름을 중심으로 랩 음악의 전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이중 가장 먼저 도착하여 랩의 존재, 나아가 흑인의 목소리를 대중적으로 알리는데 공헌한 것은 바로 두 번째 흐름이다. 이는 보통 하드코어 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19970421 | 양재영, 장호연 coct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