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 있지만,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중에 영국의 힙합문화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는 미국 흑인 남자애가 하나 있다. 이 친구는 재작년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1년 반 동안 현지조사를 하고 작년 가을에 돌아와서 열나게 논문을 쓰고 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서 자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는데, 미국의 힙합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한국과 영국의 힙합에 대한 정보를 아는 한도 내에서 서로 주고받기도 한다. 필자는 한국의 힙합이랍시고 Y.G. Family, 조PD, 김진표, 이현도, 업타운 등의, 한국에서 공수 받은 CD들을 열심히 구워서 들어보라고 그에게 가끔 권하는데, 물론 이 친구는 내 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긴 하지만 그다지 이들의 음악에 매혹되는 것 같지는 않다. 기껏해야 학교 근처의 코리아타운 식당에서 들었던 H.O.T(그는 ‘핫’이라고 말했지만)의 ‘열맞춰’가 재밌다고 (비)웃어대는 정도이니…

그가 이야기하는 영국의 힙합문화는 글쎄, 이건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힙합음악의 전형에 국한시켜 영국의 힙합문화를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영국의 힙합을 이야기하면서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은 항상 ‘클럽(club)’이다. 이 친구는 뉴욕의 젊은이들의 문화가 바(bar)를 중심으로 형성된다면, 런던의 청년문화는 클럽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것이 없다고 늘상 주장한다. 그리고 클러빙(clubbing)에 상응하는 음악들은 실로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클러버들을 단순히 힙합 팬, 테크노 팬 식으로 분명히 나눠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클럽에서 틀어주는 음악들이 힙합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고, 클러버들 또한 다양한 뿌리를 지닌 젊은이들이니…

이 경우 영국의 힙합문화에서 언급되는 힙합음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의 미국식의 ‘정통'(괜히 이 단어를 써서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지만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흑인 힙합음악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보통은 힙합음악과 음악적으로 분리하기를 주장하는 장르들인 트립합, 드럼앤베이스, 드럼앤재즈, 애시드재즈, 빅비트, 그리고 앱스트랙트 힙합 까지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인 것이다. 말하자면 레게나 훵크의 비트를 근간으로 다양한 기존 장르의 음악들(흔히 말하는 소울, 재즈, 알앤비 등의 흑인음악 뿐 아니라 백인음악이나 아시아 이민의 음악들까지도 포괄하는)의 잡종교배의 결과물들은 모두 힙합음악이라는 명칭 하에 걸고넘어질 수가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건 미국식의 ‘정통’ 흑인 힙합음악을 주무기로 하는 씬은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이런 변종 장르들을 바탕으로 영국 힙합문화 씬의 큰 틀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위 ‘정통’ 흑인 힙합음악을 즐기고 그 문화에 천착하는 젊은이들 또한 상당하다고 한다. 캐러비언 출신의 흑인들 뿐 아니라, 아프리카 이민들 심지어 아시안계 이민들과 백인 청년들 중에도 트립합이나 드럼앤베이스는 아예 무시해버리는 열혈 힙하퍼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경우, 이들 힙하퍼들이 듣는 음악은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 힙합음악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 내에서 힙합을 한다는 뮤지션들 중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진짜 흑인 힙합’을 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는 말인가? 물론 클럽들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인지도나 영향력이 영국 힙합 씬 전반에 걸쳐 확대일로에 있음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다고 이 친구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쪽의 음악은 철저히 미국 힙합의 영향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ritish Hip Hop Connection

사실 가보지도 않고 이런 말만 듣고, 그리고 영국 힙합에 관해 쓴 논문들 몇 개 읽고서 어떻게 알 수 있겠냐마는, 간접적으로나마 이러한 그 친구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흥미로운 결과물을 지난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힙합 잡지인 [힙합 커넥션(Hip Hop Connection)]은 올해 초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역대 힙합 명반 100장’을 뽑는 투표를 실시한 바 있다. 각자가 보낸 탑10들을 컴퓨터를 돌려 나름대로 신빙성 있게 추출해낸 결과는, 놀랍게도 미국의 힙합 잡지나 인터넷 CD샵에서 지난 연말과 연초에 뽑았던 역대 힙합 명반의 순위와 거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30위에 든 음반들만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30. Eric B & Rakim, [Follow The Leader](1988, MCA)
29. Public Enemy, [Yo! Bumrush The Show](1987, Def Jam)
28. Run-DMC, [Raising Hell](1986, Profile)
27. Eminem, [Slim Shaddy](1999, Interscope)
26. Raekwon The Chef, [Only Built 4 Cuban Linx](1995, Loud)
25. Gang Starr, [Step In The Arena](1991, Cooltempo)
24. GZA/Genius, [Liquid Swords](1995, Geffen)
23. Mobb Deep, [The Infamous](1995, Loud)
22. Showbiz &AG, [Runaway Slaves](1992, Payday)
21. Slick Rick, [The Great Adventures Of Slick Rick](1988, Def Jam)
20. Ice-T, [OG Original Gangster](1991, Sire)
19. Cypress Hill, [Cypress Hill](1991, Ruffhouse)
18. Canibus, [Can-I-Bus](1998, MCA)
17. Company Flow, [Funcrusher Plus](1997, Rawkus)
16. Public Enemy, [Fear Of A Black Planet](1990, Def Jam)
15. Gang Starr, [Moment Of Truth](1998, Cooltempo)
14. Gang Starr, [Full Clip: A Decade Of Gang Starr](1999, Cooltempo)
13. Notorious BIG, [Ready To Die](1994, Bad Boy)
12. Snoop Doggy Dogg, [Doggystyle](1994, Death Row)
11. Dr Dre, [The Chronic](1993, Death Row)
10. A Tribe Called Quest, [Low End Theory](1991, Jive)
9. Boogie Down Productions, [Criminal Minded](1987, B-Boy)
8. A Tribe Called Quest, [Midnight Marauders](1993, Jive)
7. Ultramagnetic MCs, [Critical Beatdown](1988, Tuff City)
6. De La Soul, [3 Feet High & Rising](1989, Tommy Boy)
5. NWA, [Straight Outta Compton](1988, Ruthless)
4. Eric B & Rakim, [Paid In Full](1987, 4th & Broadway)
3. Nas, [Illmatic](1994, Columbia)
2. Wu-Tang Clan, [Enter The Wu-Tang(36 Chambers)](1993, Loud)
1. Public Enemy,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1988, Def Jam)

브리티시 힙합의 자존심 건샷.

아무 전제 없이 이 차트만 불쑥 내민다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것이 영국의 힙하퍼들의 투표 결과라고 전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힙합음악에 관한 한은 영국의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이 결과만 볼 때 거의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100위 안에 영국 힙합 뮤지션의 음반은 단 세 장밖에 없다. Black Twang의 [19 Long Time](1998, Jammin’)이 96위, First Down의 [World Service](1994, Blitz)가 89위, 그리고 런던 힙합 씬의 자존심, Gunshot의 데뷔앨범, [Patriot Games](1993, Vinyl Solution)가 52위에 오른 것이 전부 다이다. 그리고 각종 변종 장르들, 심지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영국의 앱스트랙트 힙합 뮤지션의 음반들까지 이 차트에서는 거세되어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수적인 설문조사와 기타 통계 또한, 미국에서나 나옴직한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1994년을 힙합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혹은 절정기로 꼽는다든지(Notorious BIG와 Nas의 기념비적 데뷔앨범, Gang Starr와 Mobb Deep의 미국 힙합 씬 전면으로의 부상이 아마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Wu-Tang이 세상에 나왔던 1993년은 이등으로 밀렸다), 미국 이스트코스트의 음반이 총 69장으로 19장에 불과한 웨스트코스트를 압도하는 것, 그리고 100장 중 단 1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뮤지션들의 음반이라는 점, 80년대(16장)보다는 90년대 음반들이(84) 절대적이라는 점등이 그러하다.

영국 힙합의 자존심?

다른 유럽의 나라들, 가령 프랑스를 비롯해 이태리, 스페인, 벨기에 등지에서 독자적인 힙합 씬이 오버그라운드로 부상하고 스타 힙합 뮤지션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영국 힙합 씬의 상황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의 근본적 원인을 단순히 언어의 문제(같은 영어를 쓰므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 힙합의 파워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결국, 영국 내에서의 독특한 흑인음악의 역사와 발전과정, 다양한 청년 하위문화들의 지속적 재생산, 그리고 현재의 클럽문화의 역동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음반회사들을 비롯한 문화산업의 간섭과 통제, 혹은 양자간의 상호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거창하게 확대하자면, 이는 또한 식민지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에 걸쳐 영국과 다른 지역들, 특히 캐러비언 지역,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미국과의 문화적인 연결고리, 나아가 정치, 경제적인 복합적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까지도 요구할지 모른다.

어쨌든 이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인 것 같고, 당장은 영국 내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자생적 (정통) 힙합 씬의 추후 발전과정을 지켜보는 것만도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이들이 과연 미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힙합 음반들에 당당히 맞서 모국의 힙하퍼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영국 내의 흑인음악 혼성장르들처럼 또다른 변태의 과정을 거치게 될지, 이는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앞으로의 힙합 씬의 전반적인 전개양상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20000628 | 양재영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