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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터레이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은 1967년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몬터레이 컨트리 페어그라운드에서 열렸다. 뉴포트 포크 앤 재즈 페스티벌, 뉴올리언스 마디 그라(New Orleans Mardi Gras) 같은 선례에서 힌트를 얻어 탄생하게 된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공식 명칭과는 달리 대규모 록 페스티벌의 원조 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7100여 개의 준비된 좌석이 매진되었음은 물론이고, 티켓도 없이 몰려든 5만 여명의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랑의 여름 Summer of Love’을 낳은 몬터레이 페스티벌의 슬로건은 헤이트 애시베리(Haight-Ashbury) 히피들의 윤리인 ‘음악, 사랑, 그리고 꽃’이었다. 이에 걸맞게, 청중들은 손에 꽃을 들고 참가했고 더러는 그 꽃을 경찰의 총구에 꽂아주기도 했으며 자유분방한 애정 표현에 거리낌이 없었다. 또 이들은 LSD 같은 마약과 싸이키델릭 록 음악에 심취했다. 이런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 [몬터레이 팝 Monterey Pop](펜베이커 D. A. Pennebaker 감독)은 이 페스티벌이 단지 히피들의 음악 축제로서뿐만 아니라 1960년대 록 역사에서 화려한 순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웅변했다.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이전까지 국지적인 지명도만 가지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의 뮤지션들에게 명성과 기회를 안겨 주었고 무명에 가까운 출연진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또 미국인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후(The Who)의 놀라운 연주를 인상깊게 소개한 페스티벌이기도 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Wild Thing” 연주 말미에 기타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라든가, 후가 “My Generation” 연주를 마치며 기타를 부수고 드럼 세트를 망가뜨리는 장면은 몬터레이 무대의 정점이었다.

몬터레이 페스티벌의 출연진은 주목할만하다. 2년 후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면면을 예시한 출연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 포함된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The Jimi Hendrix Experience), 후(The Who),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그레이트풀 데드(The Greatful Dead),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Quicksilver Messenger Service),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and Papas),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 버즈(The Byrds),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라비 샹카(Ravi Shankar), 부커 티 앤 디 엠지스(Booker T and the MG’s) 등.

하지만 그런 화려함과 함께 불길한 측면도 드러냈다.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엄청난 숫자의 청중을 모았지만, 장부 계원은 수입의 일부를 갖고 튀었고, 그래서 게토 지역에 음악 프로그램과 무료 강습으로 기부할 목적이던 수익금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페스티벌이 끝나자 일부의 사람들은 히피들의 마약 남용과 공공연한 섹스 행각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터레이 페스티발의 성공은 이후 비슷한 포맷의 록 페스티벌을 유행시켰다. 대부분의 아류 행사들은 졸속 기획과 진행을 보였지만, 1969년까지 미국 전역은 더 크고 더 나은 이벤트를 내세우는 페스티벌들로 들끓었다. 그러면서 불충분한 음식과 물, 더러운 화장실과 샤워실, 표준 이하의 음향 설비는 록 페스티벌의 표준적인 조건이 되었고, 입구를 부수어 티켓 없이 들어가는 행위와 청중의 마약 복용과 난동 역시 록 페스티벌의 감초가 되었다.

매년 열리는 이벤트로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식 명칭에 적힌 어구처럼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히피의 ‘국제적인’ 신화, 그리고 클래식 록의 신화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우드스탁으로 이어진다. 19990815  | 이용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