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쿠바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아바나의 거리에는 R자가 떨어져나간 K/A/R/L M/A/X의 이름이 빌딩 위에 백화점 간판마냥 걸려있고, 곳곳에 베레모에 턱수염을 기른 불멸의 혁명가 ‘체’의 벽화가 남아 있는 곳.

소위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 등이 한 20년 정도 저켠에 비켜서있는 듯 보이는 거리와 사람들의 표정, 걸음걸이. 6-70년대 청계천 옷공장들을 연상 시키는 비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싱대만한 작업대 위에서 남녀 노동자들이 열심히 쿠바 특산물인 시가를 말고 있는, 낯설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은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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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냐구요? 아, 천만에. 당신은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대신 나는 영화를 보았지요. [베를린 천사의 시] 등으로 꽤 유명한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만든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거장 축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탄탄한 경력을 지닌 재즈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Ry Cooder)라는 친구는 그전부터 아프리카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소위 ‘세계 음악’이란 걸 미국 및 서방 제1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더랬지요. 어느날 그는 음반사 기획자로부터 전에 같이 일했던 아프리카 뮤지션과 쿠바 재즈 뮤지션 몇 명을 규합하여 앨범을 녹음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퍼커션 연주자인 조아킴과 함께 쿠바로 내려가지요. 그러나 일이 꼬여서 오기로 했던 아프리카 친구들은 오지 못하게 되고, 할 수 없이 이들은 현지조달 가능한 쿠바 뮤지션들을 끌어모아 일종의 즉흥제작 앨범을 만들게 됩니다 — 이게 바로 97년에 그래미상을 타고 이듬해 세계 투어까지 나서게 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우연찮은 탄생 설화올시다.

이들 쿠바 음악가들의 ‘인생역정’은 영화 속 인터뷰에서보다도 주름진 얼굴과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연하면서도 구성진 이들의 음악 속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라틴 음악하면 리키 마틴이나 마카레나 등을 으레 떠올리는 뮤직 비디오 시대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정서인가요.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의 댄스 음악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 만일 당신이 ‘맘보’나 ‘차차차’ 같은 명칭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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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 ‘뽕짝’의 일종 아니냐구요? 그렇게 틀린 얘기는 아니네요. 우리의 ‘그때 그시절’엔 모든 리듬, 모든 음악이 뽕짝이라는 거대한 필터를 통해서 수용되었으니까요. ‘지루박’도, 트위스트도, 탱고도, ‘부루스’도 그랬듯이. 마치 지금 이시절 모든 리듬이 표준 10대 댄스 음악의 하위 장르이듯 말이지요. 힙합이든, 테크노든, 정글이든, 하우스든.

그리하여 ‘라틴 음악답게’ 흥겨운 곡들도 여럿 있지요마는, 역시 제 귀에 들리는 주조는 처연한 아름다움입니다. 북아메리카의 눈치빠른 광고제작자들이 훔쳐다쓴 “Veinte Anos”의 스패니쉬 기타 전주에, 이어지는 부에나 비스타의 유일한 여성 멤버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의 보컬은 가히 앨범의 백미올시다.

가사는 어떠냐구요. 영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본거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언어가 스페인어일진대, 미처 그걸 배우지 못한 게 후회스러울 따름입니다만, 그래도 영어 자막이 나와주는 관계로 가사도 몇몇 구절을 주워들을 기회가 있었지요. 예컨대 “뚤라의 방(El Cuarto De Tula)”같은 노래에서는 “뚤라의 침실에 불이 났네, 그만 촛불 끄는 걸 잊었지. 전화를 해야 하나…” 등등 나이가 찬 사람들에게는 설명 안해줘도 알아챌 만한 은유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걸 좋게 봐줄 때는 ‘진솔하다’는 표현을 쓰곤 하지요. 진솔한 민중들의 삶, 그리고 그걸 노래에 담아내는 거리의 악사들.

영화는 세계 투어 공연과 아바나 에그렘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작업을 번갈아 오가고, 그 와중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스타’들의 이야기가 믹스되지요. 90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방망이 만한 쿠바산 시가를 뻐끔거리며 허세를 부리는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혁명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음악판에서 버림 받고 구두닦이로 연명하던 쿠바의 ‘냇 킹 콜’ 이브라임 페레르(Ibrahim Ferrer), 혁명 이전부터 쿠바 밖으로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신경통에 시달려 제대로 활동을 못하던 명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Ruben Gonzalez)…

혁명이 이들의 삶과 음악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밴드 이름을 혁명 전 아바나에 있었던 대규모 회원제 사교장의 이름에서 따온걸로 봐선 이들 노친네 음악가들의 삶도, 더불어 그들의 음악이 걸어온 길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란 건 분명하지요. 이들이 ‘세계’의 중심 뉴욕에 와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와 타임즈 스퀘어 한복판에서 서성일 때는 전형적인 시골영감들에 다를 바 없으나, 막상 카네기 홀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연주할 때 이들에게서 정복자의 위풍당당함과 여유를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요.

투어가 끝나고 이들은 다시 모여 이브라임 페레르의 솔로 앨범을 녹음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다큐멘타리 영화도 촬영된 거지요. 그리고 이 두 작품은 99년 여름께 각각 발표되지요. 이미 전작에서부터 단연 돋보이던 페레르의 재능은 이 앨범을 통해서 만개합니다 — 손(son)과 볼레로(bolero)라 불리는 쿠바 음악 장르를 대변한다는 페레르의 크루닝은 냇 킹 콜이나 레이 찰스를 뺨칠 만합니다. 제 개인적인 선호라면 오마라와의 듀엣곡인 “Silencio”를 단연코 꼽겠습니다.

그래미상 수상 및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한국에서 발매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더더구나 이브라임 페레르의 앨범이 발매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되겠지요. 어쩌면 차라리 영화가 수입되기를 바라는 편이 나을 수도. 어찌되었거나 이들의 음악을 들어볼 기회가 있다면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이 묘한 향수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저같은 축이야 실지로 체험해본 기간은 얼마 되도 않지만, 그래도 일종의 ‘집단적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초창기 주변부 삶의 경험같은 거 말이지요. 그래서 ‘이국적인’ 음악의 매력이 사실은 낯설다는 데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19991015 | 김필호 [email protected]

관련 사이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정보
http://afrocubaweb.com/BuenaVista.htm

CNN 영화평: 빔 벤더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http://cnn.com/SHOWBIZ/Movies/9906/30/review.buenavista/

라이 쿠더 팬 사이트
http://www.geocities.com/BourbonStreet/Delta/7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