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거리, 한 남자(김석훈 扮), 걸어간다. 한 여자(이영애 扮), 괴로운 듯 넋이 빠져 있는 그를 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친다. 기차 길을 건너다가 그 남자, 쓰러진다. 놀라 달려가는 그녀. 하지만 기차는 빠르게 지나간다. 다행히도 그는 건널목 저편에 휘청거리며 서 있다. (얼마나 극적인가!) 다음 이야기. 술집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우체부인 그는 매일 우편물을 배달한다. 그녀는 그를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자신에게 소포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 사실을 알게된 그와 그녀, 서로 좋아하게 된다. (이 또한 얼마나 애절한가!)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녀에게는 야쿠자 애인(손지창 扮)이 있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 남자 앞에 끌려와 기모노(헉, 그럼 일본인이 주인공들?)를 입고 무릎 꿇은 그녀, 손가락을 자른다. (이 얼마나 처절한 사랑인가!)

이 이야기는 소설도 영화도 아닌, 최근에 ‘뜬’ 뮤직 비디오 “가시나무”의 내러티브다. 설경 아래 펼쳐지는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가 아닌가. 그러나 42인조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태양의 제국] OST에 나오는 체코 성악곡을 도입부에 삽입하기도 했다는 조성모의 음악에서 무언가 허전함이 밀려오는 건 왜일까. 1988년 시인과 촌장의 원곡이 자아 성찰적 노래였는데 사랑 노래로 변모했기 때문에? 혹은 곡 사용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저작권과 관련되어 불거진 소송사건 때문에? (이런 점도 문제지만) 단지 그뿐일까?

지금 뮤직 비디오가 뜬다고 하면 새삼스럽게 웬 호들갑이냐고, 언제는 음반 홍보를 위한 뮤직 비디오가 없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사실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최근 2-3년간 가요계의 한 현상으로 자리잡은 뮤직 비디오 붐은 1998년 “To Heaven” 이래 발생한 ‘조성모 현상’이 컸다(고 이야기하면 그쪽 관계자의 농간이 아닐까 의심도 해보지만).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각 방송사는 조성모의 음반(정규 음반도 아닌 리메이크 음반)이 나오자마자 “가시나무”를 틀어주기에 분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래는 가요 순위 상위권에 등극했다. 지난 [For Your Soul]로 200만장이 팔렸다는데, 이번 2.5집 [조성모 클래식]은 선 주문이 얼마네, 김건모의 270만장 판매 기록을 깨겠네 등등 음반이 나오기 전부터 (조금 과장하자면) 난리였으며,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가시나무”를 노래할 때 250인조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기록’까지 세웠다.

호화 캐스팅과 해외 촬영, 그로 인한 비용상승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 현상

최근의 뮤직 비디오 붐에서 볼 수 있는 경향 하나는 호화 캐스팅과 해외 촬영이다. “가시나무”는 이영애, 김석훈, 황인영, 구본승, 손지창을, 스카이의 “영원”은 차인표, 장동건, 김규리, 정준호 등을 내세워, 각각 일본과 캐나다에서 촬영되었고, 헬기 같은 장비,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되기도 했다. ‘어떤’ 음악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캐스팅해서 ‘어디서’ 촬영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음악성보다는 화제로 승부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뮤직 비디오에 거액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지난 해 약 300여 편의 뮤직 비디오가 제작되었는데, 그 비용은 전보다 상승된 평균 1500-2000만원 정도라 한다. 이런 비용 상승은, 3억원이 투자되었다는 조성모나 스카이의 경우처럼 덩치 큰 뮤직 비디오들 때문이다. 이렇듯 하늘로 치솟는 액수 경쟁은 3D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 제작으로 극에 달한다. 8억이나 투자된 유승준의 뮤직 비디오에서 한술 더 뜨는가 싶더니, 급기야 이정현의 뮤직비디오에서는 10억 원대까지 기어올라가 버린 것이다.

물론 뮤직 비디오는 상업적인 목적에서 출발했다. 뮤직 비디오는 음반의 홍보 수단으로서, 불황을 타계하려는 음반 산업계의 움직임과 맞물려 미국 MTV 방송의 개국 이래 유행한 포맷이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는 야외에서 노래하는 장면이나 가라오케 영상에 불과했던 것이 음악 전문 케이블 TV의 등장과 더불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뮤직 비디오의 성행을 부채질한 것은 영상 문화의 발달이다. 과잉이라 할 정도의 영상 이미지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그것과 친숙해졌다는 것은,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 지겨운 이야기다.

사실 “영상물이 음악을 지원한다”고 어떤 비평가가 이야기했듯, 영상이 덧붙여진 음악을 들으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쉽게 각인되고 기억에 오래 남게 되므로, 그걸 이용해서 음반을 사도록 만드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음악이 수단이 되고 비디오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 현상에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거액의 비용을 다 뽑아내기 위해 틀어대는 한두 곡만을 지겹도록 들어야 하고, 스타를 등장시킬 수 없는 신인들이나 인디 뮤지션들은 관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뮤직 비디오, 영상과 음악이 만나는 다층적 공간: 너무나 기본적인, 너무나 중요한

뮤직 비디오의 작품성은 그 매체의 속성을 얼마나 잘 활용했느냐에 달려 있다. 뮤직 비디오는 3-5분짜리 단편이지만, 다층적인 텍스트다. 텍스트(영상의 내러티브) 바깥에 또 하나의 텍스트(가사 혹은 음악)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내러티브 공간, 노래/연주되는 공간, 음악/노래 자체의 공간이 공존하는 중층적 공간이다. 그 속에서 말하는 사람도 분명치 않다. 영상 내러티브 속의 주인공, 노래 속의 화자, 곡을 부르는 가수가 있으므로. 때문에 형식도 여러 가지일 수 있는데, 한 극단에서는 뮤지션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만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수나 가사와는 무관한 극적 구조를 지닐 수도 있다.

이처럼 뮤직 비디오는 애매하고 복잡한 매체이다. 그러나 어쩌면 단순할 수도 있다. 뮤직 비디오는 상대적으로 음악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뮤직 비디오에서 내러티브의 일관성은 음악이라는 요소 때문에 유지되기도 힘들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이에 따라 인과관계나 연속성, 시공간의 관계는 깨지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나 실험적인 기법이 뮤직 비디오만의 스타일이 된다. 장면과 장면이 끊기고 가사와 장면이 분절된 것 같아도, 음악과 영상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될 수도 있다. 또한,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독창적인 장면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뮤직 비디오가 될 수 있다. 인디 펑크밴드 크라잉 너트의 “서커스 매직 유랑단” 뮤직 비디오는 비용을 적게 들인 만큼 조악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 밴드 멤버들은 서커스 단원, 철지난 싸구려 분장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 요즘의 ‘때깔고운’ 뮤직 비디오와는 정반대로, 화질과 편집도 조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점을 의도적으로 역이용한 듯, 오히려 키치적이고 희화적인 느낌의 뽕끼 섞인 음악과, 촌스럽고 3류적인 영상 이미지는 잘 맞아 떨어진다.

‘거액’을 투자한 요즘의 뮤직 비디오들은 드라마화된(dramatized), 그것도 폭력물 아니면 구애/실연의 삼각관계 멜로물로 편중되는 경향이 짙다. 그 결과 음악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영상은 잘 보이는데, 음악은 영상을 위한 ‘배경음악’ 같기만 하다.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개성과 독창성) 역시 ‘보이지’ 않는다. 잘 생긴(혹은 예쁜) 뮤지션의 얼굴과 몸매만을 과시하듯 보여주는 뮤직 비디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런 씁쓸한 현상은 뮤직 비디오가 영상과 음악의 복합적 텍스트라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0000229 | 최지선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