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 Hangover (feat. Snoop Dogg) | 2014

 

이 뮤직비디오에 대해 뭔가 쓰는 게,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달려드는 걸로 보일 수 있다. 이걸 보기 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비디오를 몇 시간(!)이나 반복해서 보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몇 가지 키워드들. 일단 영화 [The Hangover] 시리즈. 3편(2013년)의 흥행 성적이 저조하긴 했지만, 1편(2009년)과 2편(2011년)은 모두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평점도 수익도 꽤 높다. 미국 수용자들이 술 때문에 인생 꼬이는 얘기(와 아시아적 무드의 음주 공간)에 나름 익숙하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뭐 중요한 건 아니다. 다음으로는 짜깁기, 우아하게 말하면 혼종(hybridism). 이건 좀 중요할 것 같다. 그다음으로는 팝 컬처와 K-Pop. 이것은 진행형의 논의라서 약간의 비약도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음악과 영상을 관통하는 것은 ‘짜깁기’다. 곡은 무겁고 강렬한 베이스와 쪼개지는 비트를 반복하는 트랩(trap)과 일렉트로 하우스(electro house)의 꿈결 같은 신스를 붙인다. 그 틈으로 꽹과리와 태평소 혹은 부부젤라가 연상되는 높고 날카로운 소음이 끼어든다. 신나게 흔들어대다가 중얼중얼 가라앉다가 문득 ‘빠라삐리뽀~’, ‘받으시오~ 받으시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등장하는 구조가 몇 번이나 맥락 없이, 어쩌면 단절적으로 반복된다. 듣는 입장에서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적어도 나는 굉장한 피로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 반복 구조는 일종의 광고 같은 역할을 한다. 스위치를 끄기 전까지 머리를 헤집은 다음 적당한 자리를 찾아 눌러앉는다. “hangover, hangover, hangover”의 라임 정도는 외워버릴 수밖에 없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영상을 앞뒤로 반복해서 되감고, [싸이 6甲](2012)의 표지가 연상되는 애니메이션도 나오고, 폭탄주와 편의점과 사우나와 할리데이비슨과 중국집과 노래방과 월미도와 당구장과 조개구이 집이 딱히 맥락이랄 것 없이 연속해서 등장한다. 맥락이라는 게 있다면 ‘술 마시는 공간’일 것이다. 공간들은 ‘밤새도록 여기저기서 술을 들이키는 점입가경의 여정’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데, 이 모험은 조개구이 집에서의 다툼이 서울 시내(의 일부)를 마비시키는 재앙으로 번질 때에야 끝난다.

그런데 이 ‘맥락 없음’을 “Hangover”의 단점이나 허점으로 봐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흥미롭다. 맥락 없음, 다시 말해 그때그때 여타 이유로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것들이야말로 서울 혹은 한국의 문화를 직관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은 음악보다 영상이 더 중요하다. “강남스타일”도 그렇게 소비되었다. 그 중심에는 유튜브가 있다. 저스틴 비버를 발굴해 유튜브로 데뷔시킨 스쿠터 브라운이 싸이의 미국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강남스타일” 이후의 싸이는 유튜브 영상이 음악 산업에서 더욱 필수적이 되는 구조에 가장 밀착된 음악가일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은 음악보다는 영상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오히려 음악이 부차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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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짜깁기’에 초점을 맞춰 영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에는 ‘한국적인 풍경’으로 가득하다. 저기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들이다. 사우나나 월미도 유원지 같은 곳을 즐겨 찾지는 않더라도 낯설지 않다. 특히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면 저 공간들이 ‘병맛’이나 ‘B급 정서’를 환기한다는 것마저도 익숙할 것이다(공교롭게도 크레용팝의 “빠빠빠” 촬영 장소도 버려진 유원지였다). 그런데 이 ‘한국적인 무엇’은 온갖 것들을 짜깁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폭탄주부터가 양주, 맥주, 소주 등을 섞은 술이다. 사우나, 중국집, 노래방, 월미도 유원지도 마찬가지다. 저 공간들은 원본 혹은 원본을 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리지널리티를 복사한 공간이다. 한국의 현실적 문화 공간은 대체로 그렇다. 이때 정말로 재미있게 보이는 건, “Hang Over”의 뮤직비디오가 이런 풍경들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싸이는 이소룡을 흉내 내고, 스눕독은 중국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씨엘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보기 힘든) 한자가 쓰인 병풍 앞에서 춤을 춘다. 클라이막스인 조개구이 집에서의 난장판은 무술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작 한국이 아닌 ‘아시아적인 무엇’이다. 국적이나 문화 대신 오로지 이미지만 작동한 결과. 하지만 이 오리엔탈리즘이 미국이라는 제국에서 상상되고 소비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 안에서도 ‘제3세계’는 이미지로만 작동한다. 대신 제국의 문화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와이를 카피해 제주도를, 디즈니랜드를 따라 에버랜드를 만들면 그게 한국의 메이저가 된다. 그러면 그들을 거듭 카피한 부곡 하와이와 월미도 놀이공원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국적 풍경은 바로 이런 카피캣의 순환 과정에 있다.

보통은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근본 없는 대중문화를 비판한다. 고루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정부의 지원 정책이나 다수의 기획자, 창작자들은 여전히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Hangover”를 보면 싸이도 그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서양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맥락 없이 뒤섞인 한국의 대중문화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것으로부터 나름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성을 만들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대중문화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다고 여겨지는 제국의 좋은 것들을 대량 공장생산 체제에서 저렴하게 재현한 짝퉁의 역사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팝 컬처 혹은 큐레이션의 관점에서는 ‘오래된 미래’다. (싸이가 소속된) YG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T.O.P의 “DOOM DADA”의 뮤직비디오는 그 안에 있는 주류의 ‘지식인적 딜레마’를 은연 중에 드러낸다. 여기엔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정체불명의 문화 코드에 대한 추앙과 한국 문화의 고유성에 대한 강박이 공존한다. 반면 싸이의 “Hangover”는 음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서로 다른 것들이 입체적으로 기묘하게 접착되는 순간을 좀 더 수월하게 드러낸다. 애초부터 싸이의 포지션은 머리보다 몸을 먼저 쓰는 쪽이었고, 스스로 ‘싸구려’라고 말하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건 아니다. 바로 언어다. 한국어를 사용하되 받침 없이 누구나 따라 하기 좋은 의성어로 훅(hook)을 만드는 감각은 이 짜깁기에 고유성을 부여한다.

이제 K-Pop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강남스타일”을 K-Pop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가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2013, 돌베개)에서 지적한 대로, 주류의 K-Pop 산업은 ‘한국 자본+유럽(미국) 제작+아시아 판매’라는 구조에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역설적으로 오리지널리티다. SM, YG, JYP를 비롯해 큐브나 FNC 등의 메인스트림 기획사들이 음악적 완성도와 고유성으로 글로벌 시장을 돌파하려고 했다면 “강남스타일”을 만들던 당시의 싸이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다. 오히려 “강남스타일”은 빅뱅 같은 ‘친한’ 아이돌 그룹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빅뱅이 ‘제주도’라면 싸이는 ‘부곡 하와이’인 셈이다. 그런데 “강남스타일”이 성공하면서 졸지에 그가 K-Pop의 대표자가 되었다. “강남스타일”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DJ 바우어(Baauer)의 “Harlem Shake”나 일비스(Ylvis)의 “The Fox (What Does the Fox Say?)”, 화제가 되자마자 소니뮤직과 글로벌 계약을 맺은 크레용팝의 “빠빠빠”를 생각해보라. “강남스타일”은 21세기 메인스트림 팝 계보 중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어이없는, 돌발적인 혼돈 이후에 나온 것이 “젠틀맨”이었고, 알다시피, 여러모로 실패했다. 하지만 “Hangover” 때문에 “젠틀맨”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음악이나 영상에서 “강남스타일”을 반복하는 “젠틀맨”은 오히려 혼란 속 신중함의 결과다. 경험 없는 시장에 진입하면서 인력이든 자본이든 최소한으로 재활용하려고 애쓰는데, 문득 문득 어깨에 힘이 들어간, 욕심을 부리는 순간들도 있는 것이다. 여기엔 키치(Kitsch)한 위악은 있지만 자연스러운 뻔뻔함은 없다. 하지만 “Hangover”에는 그런 뻔뻔함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건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다시 말해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로 시장에 진입하겠다는 기존 한국 아이돌과 대응하는, 싸이 본연의 태도와 근접하다. 단호하고 얄짤없이 이것은 의미 없는 엔터테인먼트니까 그냥 즐기라고 부추긴다. 에헤이, “예뻐 보일 때까지 빠라삐리뽀~” 그렇지만 여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지역성(locality)을 포기하지 않는 영리함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접착이야말로 한국 아이돌 팝, K-Pop의 근본이기도 하다. K-Pop은 당대에 유행하는 것들을 이어 붙이며 성장했다. 80년대 ‘힛트’ 가요부터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댄스 가요까지의 맥락에는 영국, 미국, 일본의 히트곡들을 카피한 역사가 있다. 그 맥락이 21세기에도 꾸준하게 영향을 미쳤고, 거기서부터 벗어나거나 다른 미래를 상상한 소수에 의해 ‘어떤’ K-Pop은 동시대의 ‘좋은’ 것들을 이어 붙여 탄생한,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짝퉁’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도 보여준다. 그제서야 K-Pop은 의미심장한 맥락에 놓이게 되고, 이것이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을지 그저 음악의 국적을 일컫는 데에 머물지는 차차 결정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자. 나는 그 점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옹호하고 싶을 정도다.

팝 컬처는 애초에 멍청한 쓰레기였다. 경쟁적 자본주의(competitive capitalism)와 매스미디어의 사생아로 태어나 귀족(적) 예술을 적당히 베끼면서 성장했다. 그러다 엉뚱하게 저 자신이 예술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가 온갖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어쩌다 팝 컬처에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한 시대였다면, 그다음은 온통 그걸 베끼거나 부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켜켜이 쌓인 쓰레기의 역사. 그중에 어떤 건 정말 대책 없는 쓰레기고, 어떤 건 그냥 예쁜 쓰레기고, 어떤 건 겁나 예술적인 쓰레기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우리는 그 속에서 성장했고, 그중 어떤 것들에는 미친 듯 열광했으며, 어떤 것들은 아예 범접할 수 없는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대중문화는 그렇게 순환되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량으로 소비된다.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는 팝 컬처는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과잉된 엔터테인먼트로부터의 피로감밖에 얻을 게 없는 이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진즉에 타란티노가 그랬듯이, 차라리 쓰레기통을 뒤져서 완전히 새로운 쓰레기를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그 기준으로 싸이는 이제야 자기 방향을 찾은 것 같다. “Hangover”는 엄청난 속도와 변수가 작동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아시아의 로컬 아티스트가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지 제시한, 첫 번째로 유의미한 결과물이고(“젠틀맨”은 차라리 프로토타입이다) 나는 그가 꽤 오래 버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싸이는 이미 우리가 상상하는 ‘메이저 음악계’보다 더 확장되고 알려지지 않은 게임의 장에 진입했다는 생각도 든다. 정작 이 ‘음악’에 대한 호불호나 평가와는 무관하게, 그가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는 뻔뻔함과 영리함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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