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입 안이 싸해진다. 그러니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한 해가 다 갔다.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고도 있었고 우연도 있었고 상처도 있었다. 받은 것도 많고 준 것도 많다. 그렇게 한 해가 다 갔는데 지금 내 손에 남아있는 건 뭔가 싶다. 그런데도 연말만 되면 다들 한 해를 결산하고 내년을 기대한다. 습관 같은 것이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지금 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사랑노래’를 듣고 있다. 아, 음악 얘기다.

개인적으로 올 초에 들었던 노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브롤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였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별이야말로 사랑의 증거더냐’란 생각이 들만큼 절절했다. ‘실패로 점철된 청춘 연애사’에 정서적으로 가장 근접한 이 노래는 형식적으로 ‘촌스러운 로-파이를 태도로 삼은’ 곡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노래가 더욱 절절하게 들렸던 건 성긴 녹음 상태와 무심하게 흐르는 여자 보컬 때문이었다. 그 흔한 바이브레이션도 없이 평범한, 건조한, 그러니까 소위 ‘매가리’없는 계피(브로콜리 너마저 보컬)의 창법은 근래 등장한 여러 여자보컬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최근 발매된 밴드의 정규 1집 수록곡 ‘보편적인 노래’ 역시 그녀의 목소리가 방점을 찍는다. ‘보편적인 노래’는 ‘앵콜요청금지’에 대한 답가처럼 남자 보컬이 ‘보편적인 노래가 되어/보편적인 날들이 되어,/보편적인 일들이 되어/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보편적인 사랑의 노래’를 읊조리는 곡이다. 그때 이 노래의 방점을 찍는 건 여자 보컬이 등장하는 후반부다. 이 클라이맥스는 꽤 인상적인데, 만약 여자 보컬이 없었다면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만 그런 게 아니란 점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여성 보컬이 다채로워진 건 사실이다. 여성 록 보컬의 기준이 서문탁 아니면 김윤아 뿐이던 시절이 얼마 전이라는 걸 상기하면 최근의 상황은 분명 풍족하다고 할 만하다. 올해만 해도 한희정이나 요조, 타루와 오지은, 휘루 등이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2007년 첫 앨범을 발표한 후 1년 동안 꾸준한 활동을 선보인 임주연이나 시와도 있다. 인디 신만의 경향도 아니다. 2년 전 방영된 드라마 <케세라세라> OST로 이미 활동을 시작한 W&Whale의 ‘웨일’을 비롯해 틴-팝의 총아로 떠오른 윤하, 그리고 최근 데뷔 앨범을 발표한 슈퍼모델 장윤주와 토이의 앨범에 참여했던 박새별도 각각 고유의 독특한 음색과 보컬 스타일을 선보였다. 재즈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나윤선과 웅산, 말로와 강허달림은 말할 것도 없다.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의 여성보컬이 활동하던 몇 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양적으로도, 장르와 무관한 개성을 하나로 묶기 어려울 만큼 질적으로도 성장했다는 얘기다. 밴드도 마찬가지다. 여성보컬을 앞세운 어른아이, 도나웨일, 디어 클라우드, 소규모아카시아밴드, 포츈쿠키와 네스티요나, 윈터플레이 등은 기존의 자우림이나 체리필터 등으로 대변되던 여성보컬 밴드의 전형을 해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여성 보컬이 음악시장에서 남성화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실천하고 있다. 샤우팅 같은 자기 과시가 줄어든 건 가요의 하위 장르가 분화된 결과이기도 하면서 각각의 고유한 스타일을 정립하며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제시한 결과다. 물론 그들의 음악적 실천이 결국 해외 여성 보컬들의 스타일을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일갈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경향이 한국의 음악적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경험이 바로 한국 여자 가수들의 자산이 되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등장한 여성 보컬들은 기존의 가수들과 명백하게 차별화된다. 다층적인 감성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선 여전히 ‘높은 음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가 노래 잘하는 가수의 기준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그 기준이 ‘기술’이 아니라 ‘정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이건 한영애나 장필순, 오소영, 손지연 등이 이미 제시한 기준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여성 보컬들이 급격히, 아주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음반이든 음원이든, 블로그든 커뮤니티든, 습득하는 정보의 양과 채널도 늘었다. 겨우 FM 등을 통해 접하던 크렌베리스의 돌로레스 오라이던이나 앨라니스 모리셋, 커트니 러브 정도를 여자 보컬의 역할모델로 삼던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덕분에 우리는 ‘무심한 듯 섹시한’ 비음의 요조와 로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타루를, 70년대 김추자나 김정미의 맥을 잇는 남상아나 휘루를, 허무적이고 공허한 한희정의 보컬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그 중에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있다. 그녀들은 자기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노래한다. 싱어송라이팅은 장르도, 스타일도 아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도 자기 삶의 편린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싱어송라이팅이다. 노랫말이 시적이거나 말거나, 스타일이 세련되거나 않거나 상관없다. 개인의 얘기야말로 가장 보편적이다. 노래가 다양해질수록 시장도 풍족해지고 수용자들이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도 늘어난다. 결국 모두가 즐거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여성 보컬에 있어서는 지독한 장기불황에도 비로소 풍요의 시대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까 연말이다. ‘핵겨울’이라고 말할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가 당장의 이런저런 선택을 결정하는 시대가 와버렸다. 취업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그나마 쥐꼬리만한 월급을 주던 회사도 망해가고 있지만 어쨌든 연말이다. 좋은 일만 기억하고 싶은 타이밍이다. 2008년은 참 많은 여성 보컬들로 즐거웠던 한 해였다. 그녀들이 제각각 다르게 노래해서 더욱 기뻤다. 더 이상 조니 미첼이나 나탈리 머천트나 에바 캐시디나 트레이시 채프먼, 혹은 린다 퍼헥스나 수잔 베가 등에 기대어 위로받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로 한 해를 열고 닫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맙다. 그리고 2009년에도 그녀들의 목소리가 흐르면 좋겠다. 또 다른 그녀들도 대환영이다. 그러니까 잘 가라, 2008년. | 차우진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