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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찬바람이다. 한 계절이 바뀌는 건 하나의 세계가 바뀌는 것 같다. 기뻐할 사람, 괴로워할 사람, 무관심할 사람이 있겠지만 어쨌든 골목을 정의하던 열기가 한기로 바뀐 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계절이 좋다. 공기의 온도가 바뀌면 듣는 음악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즐겨듣던 앨범들을 밀어 넣고 새로운 음악을, 전쟁 같은 하루의 순간적인 위안을 위해 상냥하고 인간적인 사운드트랙을 찾게 된다. 다들 마찬가지이리라. 영화도 그렇다. 오죽하면 <바빌론 A.D.>의 카피가 ‘올 가을 유일한 SF영화’일 정도로 박스 오피스는 촉촉한 감성의 영화들로 꽉꽉 채워진다. 최근엔 <스마트 피플>을 봤다. 사라 제시카 파커가 단지 몇 벌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도, <주노>의 엘렌 페이지를 다시 보는 것도, 데니스 퀘이드와 토마스 헤이든 처치의 상반된 중년 남성상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건 사운드트랙 때문이었다. “More Than Words”의 누노 베텐코트가 총괄한 사운드트랙이라니. 익스트림의 재결성 소식과 맞물려 관심을 끄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의 배급정책과 흥행성적은 참담했다. 심지어 사운드트랙마저 MP3로만 발매되었다(ZIP코드가 없는 우리로선 난감하지만, 어쨌든 아마존닷컴에서 9달러 49센트에 판다). 그래도 매 씬과 시퀀스에 흐르는 누노의 기타 리프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배려 없는 상영시간에 모든 일정을 맞춰야했던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었다. 콘트라베이스가 동원된 아름다운 연주곡 “This Is Your Life”와 “School Girl Crush”를 비롯해 여성보컬이 가세한 “Hamburger In Bed”같은 누노의 신곡들은 “Flow”나 “Pursuit of Hapiness”같은 기존의 솔로곡들과 함께 영화 전반을 수놓는다. 구성적으로도 스코어가 아닌 사운드트랙 음악가로서의 누노의 고민이 엿보이는 트랙들은 호주 밴드 베이비 애니멀스의 “Stitch”와 “Rush You”, 익스트림의 보컬 게리 셰론의 솔로곡 “Need I Say More”로 증명된다. 이 모든 곡들이 영화에 가득한 늦가을 피츠버그의 서늘한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점에서 영화음악감독으로서 누노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영화를 곱씹을수록 제작사의 편협한 사운드트랙 발매 정책이 원망스럽고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뭐, 나는 그런 인간이니까.

재미있는 건 <스마트 피플>의 사운드트랙이 누노 베텐코트의 첫 영화음악 작업이라는 점이다. 종종 이렇게 영화음악에 문외한이거나 초보인 음악가가 영화의 내러티브와 맞물려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사운드트랙을 총괄한 라디오헤드의 조이 그린우드를 비롯해 <댄 인 러브>의 손드레 라르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쿠루리 같은 음악가들은 자기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그 영화에 어떤 격을 더한 창작자들이다. 그런데 주로 감성적인 영화일수록 그 성과가 더 돋보이는 것 같다. 특히 <댄 인 러브>의 손드레 라르케는 본연의 감성적인 기타 프레이즈를 세심하게 다듬으며 영화음악의 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레지나 스펙터와 부른 “Hello No”를 비롯해 위트 넘치는 “Modern Nature”,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벤조까지 동원해 아날로그 감수성으로 덧칠한 댄과 마리를 위한 세 개의 테마곡(“Dan and Marie Picking Hum”, “Dan and Marie Melody”, “Dan and Marie Finale Theme”)은 어떤 점에선 ‘인간적이면서도 따뜻한’ 영화음악의 모범을 선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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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면서 따뜻한. 바로 여기가 영화음악에 문외한인 음악가들이 만든 제각각의 사운드트랙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건 <스마트 피플>과 <댄 인 러브>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 음악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계절의 감수성을 담은 로맨스 영화를 위한, 혹은 당신이 누군가와 시린 손을 맞잡고 산책을 하거나 차가운 이불 속에서 맨살을 기댄 채 키득거릴 어떤 시간들을 위한 사운드트랙들이다. 그래서 이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낙엽 가득한 거리에 나란히 서 있는 커플이 아로새겨진 영화 포스터를 찾게 된다. 당연하다. 가로등이 유난히 선명해지는 가을과 겨울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종종 필요이상으로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인간적이고 따뜻한 음악이란 게 존재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음향학이나 심리학 너머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설명이 난해한 지점이다. 하지만 누노 베텐코트나 손드레 라르케 같은 음악가들이 영화와 함께 어떤 감각을 위해 봉사하는 영역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영화음악 거장들의 업적과는 다른 영역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가장 기대하고 있는 영화음악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이누도 잇신 감독의 <구구는 고양이다>의 사운드트랙이라고 대답하겠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쿠루리를 기용하며 신선한 감각을 선보였던 이누도 잇신 감독은 <구구는 고양이다>의 음악을 위해 밴드 해피엔드와 프로듀스 모임 틴팬앨리를 이끌고, 사카모토 류이치와 다카하시 유키히로가 속했던 YMO를 통해 70년대 이후 일본 록과 팝의 근거를 마련한 호소노 하루오미를 불러들였다. 그는 <은하철도의 밤>과 <메종 드 히미코>의 영화음악 감독이었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 <씨네21> 672호 (2008.9.30~10.07)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