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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귀차니즘을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와 네이버 연예의 공동 기획 [스.압.주.의]

아무래도 최근의 핫이슈는 [국제시장]과 [토.토.가.]인 것 같다. 물론 이 둘의 배경과 맥락은 다르다. 심지어 그가 속한 위치도 다르다. 그럼에도 ‘과거를 소환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다양한 매체에서 둘을 이어 붙인다. 이런 행태는 입장에 따라 약삭빠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도 거기에 동참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국제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토토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둘을 언급하는 게 낚시질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사실 그 둘에 대한 이야기도 맞다.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

텍스트 비평만 하라는 요청

01-국제시장의논쟁적인장면

[국제시장]의 그 문제적 장면

알다시피,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의는 영화 밖의 것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논쟁에는 곧잘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 혹은 입장이 매겨지고 영화의 텍스트적 의미는 정치적인 맥락으로 전환된다. 조선TV에서 ‘인용 보도’한 허지웅 평론가의 발언은 발언의 그것의 발원지인 한겨레 신문의 좌담을 대신해 논란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 흐름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인용한 대통령의 발언도 한 몫 했다. 덕분에 [국제시장]은 정치적인 영화가 되었다. 이에 대해 윤제균 감독은 “현재와 같은 정치적, 이념 논란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치적으로 논란이 있을 소지는 다 뺐다”고 설명했다. 대신 “세대 논란은 예상했다. 젊은 세대들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여겼다. ‘니들은 복 받은 줄 알아라’라는 분위기로 받아들일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의 피로함 때문인지 [국제시장]에 대한 평가에는 대부분 이 영화가 위치하는 맥락과 파생하는 담론을 제거한 의견들이 많다. 댓글이나 블로그에서는 ‘직접 봤더니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는 내용이 꽤 많다. 또한 ‘영화 비평가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영화에 대해서만 평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눈에 띤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입장일 것이다.

한편 [토.토.가.]는 온라인 차트부터 동네 식당의 플레이리스트에 이르는 음악 취향을 20년 전으로 돌려놓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오갔다. 90년대 음악의 저력을 피력하는 글도 있었고, 그때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음악이 공존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때 음악이 지금보다 더 좋다는 의견도, 물론 있었다. 혹은 이 과거 회귀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글도 있었다. 아무튼 이 ‘현상’에 대해 말을 거드는 사례는 한 손으로 꼽기에도 모자라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반응은 ‘분석이 불필요하다’는 쪽이었다. 요컨대 ‘[토.토.가.]의 성공은 [무한도전] 덕분이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란 의견. 일정 부분 맞는 얘기다. [토.토.가]의 성공은 [무한도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섭외와 진행 과정이 드라마틱하다는 것 또한 영향을 줬다. 윤상이나 윤종신, 김동률처럼 지금도 활동하는 ‘90년대 음악가’들이 아닌 터보나 쿨, 김현정과 소찬휘, S.E.S.처럼 2015년 현재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 이들이 등장했던 것도 주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런 ‘당연한’ 일에 시대적, 음악적 분석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02-토토가는그저무한도전때문에성공했을까

[토.토.가.]의 성공은 [무한도전] 때문일까? S.E.S.때문일까?

비평이냐, 구매 가이드냐

하지만 이 두 개의 성공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들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가 냉소와 비아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비평가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서울시향의 파행을 두고 박현정 전 시향대표와 정명훈 지휘자에 대한 논란에서 음악, 혹은 음악적 성과가 소외되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중문화 비평이 텍스트의 영역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물론 지금 비평에 대한 대중적 거부는 대부분 비평의 주체들 탓일 것이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저널리즘 비평가들 중 일부는 비평적 대상이 되는 텍스트의 장르적, 기술적 이해가 부족하거나 글 자체를 다듬는 것에 소홀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텍스트를 통해 통찰력을 키우는 데에도 실패한 경우도 많았다. 좋은 관점이란 성찰적 태도와 포지션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때 글쓰기는 기술적인 영역에만 머물 수밖에 없다. 맥락과 정보, 요컨대 콘텍스트와 메타 데이터를 그 대상과 긴밀하게 엮지 못한다면 비평 혹은 비평적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03-드래곤볼,1991

1991년 최초로 한국에 정식 수입된 일본 만화 [드래곤볼]

이런 맥락은 시대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비평의 지위나 역할이 축소되거나 단편적인 것에 머무르라는 요청은 20세기의 한국에서 문화비평이 실패한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90년대는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던 시기였다. 영화도 음악도, 또한 방송을 비롯해 문학이나 미술 같은 예술 전반이 구조화되고 산업화되었던 맥락에는 87년 민주화 항쟁, 89년 해외여행자율화 조치와 일본문화 부분개방이라는 맥락이 존재한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회변화는 오래도록 유지된 군부독재와 결별하는 주체로서의 문민정부가 시민의 자유와 시장경제의 룰을 확립하려는 정책적 실천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야말로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대중문화의 성숙을 이끈 핵심적 배경이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중문화와 그에 반응한 대중적 반응은 저널리즘의 비평 수요를 빠르게 늘렸고, 그에 맞춰 젊은 비평가들도 대거 등장할 수 있었다. 이때의 ‘신진’ 평론가들은 주로 반자본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태도를 관철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기준이 종종 미학적 취향과 평가보다 우선된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중적 취향과 비평적 관점은 더 자주 괴리되었다. 이를테면 비평과 감상의 대립은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의 충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비평은 잘난 척 하는 것, 가르치려 드는 것으로 이해되며 대중으로부터 거부당했고, 대신 그보다 더 매끈한 구매 가이드가 선호되었다.

소프트웨어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사회

여기에는 디지털 환경의 발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은 그 어디보다 빨리 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한 국가다. 이를 기반으로 자원 없는 영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한국의 디지털 정책은 문화 콘텐츠 사업과 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정보의 광범위한 공유, 전통적인 미디어의 몰락과 새로운 산업과 대중적 취향의 계발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 산업과 높아진 학력을 기반으로 2015년의 사람들은 온갖 정보를 취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모든 것을 콘텐츠로 바꾸고 있다. 콘텐츠는 데이터의 집합이다. 누적되고 축적된 데이터가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을 때 콘텐츠는 탄생한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압도적인 권위를 부여 받는 시대인 것이다. 2015년 현재 음악이나 영화, 문학을 비롯해 저널리즘 분야는 모두 이 소프트웨어 환경을 토대로 재설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전에는 없던 세계다. 국지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구적인 변화인 것이다. 불가항력적이고 동시대적이다. 이 앞에서 누군가는 도태되고 누군가는 멸종할 수도 있다. 기존 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 변화의 맥락에서 비평처럼 산업에 밀접한, 그럼에도 해당 산업의 경제적 이득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2차 산업은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 대중문화 비평의 입지가 줄어든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04-한병철,투명사회

한병철의 [투명사회]

이에 대해 가장 선동적이고 논쟁적인 지적은 한병철의 [투명사회]일 것이다. 피로에 절은 한국인들을 자극한 제목 때문인지 폭발적인 관심을 얻은 전작 [피로사회]보다는 주목을 덜 받은 이 책은,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21세기의 사회가 데이터 기반으로 재편되면서 사회의 메커니즘이 보다 명백한 것,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 투명성이야말로 획일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맥락에서 이론(혹은 가설)은 실증적 데이터에 밀려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주장은 오늘날 비평의 위치와 처지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 21세기의 독자들 상당수는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나 데이터, 그러니까 ‘팩트’를 수집한 것으로 그 사안을 이해하는데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전에는 정보의 접근 자체가 어려웠으므로 저널리즘이나 전문가 그룹이 그 역할(정보의 수집과 해석)을 맡았고, 저널을 통해 그 해석이 대중에게 전달되었지만, 누구든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원하는 정보를 취할 수 있게 된 요즘에는 이 권력구조에 균열이 일어난다. 이런 환경적 변화에 그 동안 경험적으로 습득한 지식인 그룹에 대한 불신이 더해지면서 비평그룹에 대한 피로함이 가중되는 것이다. [국제 시장]이나 [토.토.가.]를 중심에 두고 이런 저런 얘기를 쏟아내는 비평에 대해 ‘비평가는 영화나 음악 얘기만 하면 좋겠다’는 요청과 ‘실제 작품이나 방송을 다루지 않는 건 과잉 해석일 뿐’이라는 평가는 모든 것이 쉽게 보이는 투명한 사회에서 비평이라는 작업이 진실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질문하는 글쓰기와 독자의 발명

하지만 투명성은 오히려 많은 것을 감춘다. ‘팩트’가 곧 ‘진실’이 아닌 것처럼, 어떤 대상의 속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과 그로부터 뭔가를 발견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투명한 상태는 이 모든 의미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반응이 환기하는 것은 소비주의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한국은 착실하게 소비사회로 이동했다. 소비주의는 시민 사회와 공동체의 자리에 소비자를 채워 넣었다. 모두가 소비자인 사회에서 권력이나 자본을 바탕에 깐 갑질은 역설적으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욕망의 순환고리 안에 위치한다. 주차장에서 알바생을 모욕한 ‘부자’는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 재벌 2세라도 핵심 권력을 얻지 못하면 ‘아버지의 자식’에 머물 뿐이다. 소비사회는 누구도 절대적인 갑이 될 수 없는 세계다. 지난 세기 내내 한국은 이런 세계를 향해 ‘빨리빨리’ 나아가기만 했다. 요컨대 지금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점에서 과거에 대한 평가는 보다 본격적이어야 한다. 70년대가 박정희의 유신과 통기타, 청년문화로만 소환될 수 없는 것처럼 90년대 역시 엑스세대나 대중문화 산업의 심화 단계로만 호명되면 곤란하다. 2015년 현재가 누적된 과거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향수를 자극하는 현재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결과물과 그를 대하는 대중적 반응은 한국의 어떤 정신세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영화 그 자체, 음악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은 해설이다. 그리고 해설이야말로 소비자를 위한 가이드다. 소비자로서의 우리는 정치부터 교육, 행정, 노동, 공동체와 엔터테인먼트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서비스적인 가치를 요구한다. 비평을 두고 ‘텍스트’나 다루라는 요청은 소비자로서 정당한 요구 같지만, 중요한 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과연 시민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되물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05-비평은별점을매기는일일까

비평은 별점 매기기일까? (씨네21 캡쳐)

비평은 주관을 토대로 맥락을 유추하고 구축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실패할 것이다. 비평이 곧 답을 제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패야말로 상상력, 매끄럽고 투명한 세계를 꿰뚫는 롱기누스의 창이다. 따라서 비평의 본질은 질문이어야 한다. 그 질문의 목적은 주체적인 독자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그렇다, 독자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이로써 세계는 긴장을 토대로 순환하게 되고, 그 안에서 무게중심은 능동적으로 변화하며 균형이 잡힐 것이다. 다만 별점과 독설과 작품 소개가 비평의 전부로 이해되는 한, 소비자는 오직 소비자로 남게 되고 비평은 여가의 유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note. [웨이브] 편집장, 음악평론가. 하지만 ‘지구멸망’과 ‘부동산’에 더 관심이 많은 아저씨. 저 둘이야말로 지금의 한국을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