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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A twigs │ M3LL155X EP │ Young Turks, 2015

 

뒤틀린 목소리로 더 지독하게, 여기에

 

1. 아, 얘도 쟤랑 자고 싶나 봐

‘아, 얘도 쟤랑 자고 싶나 봐(Yeah, Fantano definitely wants that FKA pu**y).’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FKA 트윅스(FKA twigs)의 세 번째 EP [M3LL155X EP]를 다룬 영상 리뷰에 달린 댓글이었다. 당시 댓글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예고도 없이 발매된 [M3LL155X EP]는 등장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음침한 음악, 무려 네 곡을 연이어 만든 16분짜리 뮤직비디오, 손이 얼굴을 관통한 것처럼 보이는 앨범 아트가 그러했다. 이런 음반에 대한 반응은 대충 정해져 있다. 소수의 애호가는 칭찬을 쏟아낼 것이며 다수는 외면할 것이다. 예상대로 리뷰는 음반에 10점 만점에 9점을 줬고 예상대로 저 댓글은 예술적 성취에 무심해 보인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됐다. 사람들이 평소처럼 음반을 외면하는 대신 댓글과 ‘좋아요’로 적극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실을 알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FKA 트윅스가 흑인 여성 음악가라는 사실, 그녀가 유명한 백인 남성 배우와 약혼했다는 사실, 이후 급증한 안티들이 그녀에게 온갖 차별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 따위를 알고 나니 상황은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이건 그저 공기처럼 익숙한 차별의 풍경이었다. FKA 트윅스는 그간 이런 상황들과 정면으로 맞서왔고 [M3LL155X EP] 또한 그런 싸움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녀는 압도적인 음악과 영상을 무기 삼아 여성으로서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음반이 그저 성적 유혹으로만 취급되지는 않아야 하기에 음반에 더 많은 말을 보태기로 했다. 고작 한 줄의 댓글 때문에 쓰인 글이지만 여성 혐오가 늘 문제인 나라에서라면 그 이상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2. 뒤틀린 목소리로

여성이 여성을 다룬 음반이다. ‘자신의 여성적 에너지(personal female energy)’를 다뤘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고 영상은 임신과 출산, 섹스돌까지 다룬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 같은 결연한 영웅의 형상이 얼핏 떠오른다. 하지만 [M3LL155X EP]에서 FKA 트윅스는 그런 여전사의 반대편에 서 있다. 첫 곡 “Figure 8”의 첫 소절에선 ‘날 살아가게 해줘(Let me live)’라고 노래하고 다음 곡 “I’m Your Doll”은 아예 ‘난 너의 인형’이란 가사를 후렴으로 삼았다. 과하다 싶게 종속적이다. 만약 이게 다였다면 [M3LL155X EP]는 좋게 봐야 여성의 열악한 처지를 폭로하는 데 그친 작품일 것이다. 여성적 에너지를 과시하겠단 기획에는 당연히 못 미치게 된다.

그러나 가사의 뒷면엔 정반대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말을 전달하는 방식에 주목하면 곡은 거꾸로 보인다. 가장 나약해 보이는 “I’m Your Doll”만 해도 그렇다. 노래처럼 여성이 인형 취급을 받는 상황에선 관계의 주도권이 보통 남성에게 주어진다. 주인인 남성이 ‘넌 나의 인형’이라고 선언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여기선 오히려 여성이 관계를 제안하고 주도한다. 영상 속 남성은 그저 침 흘리며 제안에 빠져들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관계에서 제 의지대로 살아가는 건 차라리 여성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말, 발톱을 숨긴 말들이 [M3LL155X EP]의 곳곳에 숨어있다. “In Time”에선 전처럼 행복한 관계를 위해 ‘내가 더 나아지겠다(I will be better)’고 약속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그걸 감당하고 헌신한다는 조건(If you can resist it and make a commitment)’ 아래서다. 첫 곡 “Figure 8”에서 요약한 것처럼 그녀는 천사를 자처하지만, 이 천사는 언제든 ‘등에 달린 날개로 (상대를) 내려칠(My back wings give the hardest slap that you’ve ever seen)’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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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적인 건 가사만이 아니다. 음악만 떼어놓고 들어도 어울리기 힘든 것들이 기묘하게 뒤섞여있기는 마찬가지다. 고음역에서 팔세토 보컬이 유려하게 흘러갈 때 저음역과 중음역에선 온갖 소리가 쏟아지면서 곡을 신경질적으로 꼬아놓는 식으로 말이다. [M3LL155X EP]의 마법은 이처럼 따로 놀 것 같은 보컬이 음악에 섞여드는 순간 작동한다. 강약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보컬과 그 보컬을 치밀하게 편집해 켜켜이 쌓은 프로덕션 덕분이다. “In Time”과 “Glass & Patron”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이다. “In Time”은 연약한 가창으로 시작하지만, 후렴에선 오토튠 입힌 보컬을 몇 겹씩 쌓아 ‘너 간도 크다(You’ve got a godd**n nerve)’는 협박을 내뱉는다. “Glass & Patron”은 느릿하게 노래를 시작한 다음 노래한 부분을 빠르게 돌려버린다. 보컬의 속도와 음정을 모두 올려 샘플링하는 기법을 잘 써먹은 것인 데다 여성성의 여러 면을 실험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여린 여성의 목소리에 폭발력을 부여할 기술적 장치들을 실험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M3LL155X EP]는 잘 활용한 보컬을 무기로 남성 프로듀서들이 득세하던 장르에 인상적인 깃발을 꽂았다. 비욕(Björk) 이후로 이 장르에서 이토록 치열하게 여성성을 실험한 음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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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더 지독하게

음악만으로도 [M3LL155X EP]는 전작보다 독해졌다. 물론 속삭이는 보컬, 여백 속에서 돌출하는 전자음은 전작 [LP1]에도 있었다. 그러나 [M3LL155X EP]는 더 빨라졌고 더 자주 폭발한다. 여백을 남기기보단 소리를 가득 메운다. [LP1]이 808 드럼머신을 주로 활용해 트랩이나 피비알앤비(PBR&B)와도 연관될 수 있었다면 [M3LL155X EP]는 기계의 소음을 비트로 활용하는 글리치(Glitch)에 가깝다. 소리를 빠르게 쪼개는 대목에선 드릴 앤 베이스(Drill N Bass)마저 연상시킨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유행에서 살짝 벗어나 더 지독한 음악을 선택한 것만은 분명하다. 작정하고 힘을 더 실으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런 선택이 여성적 에너지를 담겠다는 포부와 조응한다. 뮤직비디오 속 여성은 힘없는 약자가 아니다. 그녀는 여성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고 긍정한다. 그 정점에 출산 장면들이 있다. 만삭의 몸으로 춤을 추다 출산인지 유산인지 모르게 색색의 잉크를 쏟아낼 때, 그녀는 고통에 신음하는 대신 발을 구르며 잉크를 튀긴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남성은 불만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섹스돌이 되었다가 끝내 터져버리는 장면에는 번들거리는 남성의 눈빛도 담겼다. 영상 속에서 남성들은 예상치 못한 여성의 강인함에 당황하고, 여성을 섹스돌처럼 다루려던 마음엔 일말의 불편함이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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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A 트윅스는 여성이란 문제를 질리도록 물고 늘어져 기어이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치 영상 속 남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앞서 언급한 댓글을 달았던 사람의 심정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M3LL155X EP]는 성공한 음반이다. 그런 반응이야말로 이 음반이 지닌 힘, 불편함을 일으키려는 음반의 수행적 역량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저 작품 안에서 여성을 다룬 것이 전부였다면 이 음반은 지금처럼 각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M3LL155X EP]는 작품 밖에서 여성 문제에 관한 사회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혐오에 맞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식을 제시했단 점에서 진정으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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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기에 (더해)

오해를 피하고자 덧붙인다. FKA 트윅스의 역량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음반의 모든 성취가 오롯이 그녀만의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걸 직접 해내는 천재라는 환상은 접어둘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FKA 트윅스만 해도 여러 조력자와 함께였다. 비욘세(Beyoncé)가 여성 문제를 다룰 때 함께했던 공동 프로듀서 부츠(Boots)가 있었고, 전작에서 협업한 알카(Arca)의 영향도 눈에 띈다. 요컨대 이만한 음반이 나오려면 개인의 천재적 역량 못지않게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건강함이 필요하다. 더 속되게 말하자면, FKA 트윅스 혼자 잘나선 이런 걸 할 수 없다. 같이 할 동료가 있고, 영 턱스(Young Turks) 같은 레이블이 있고, 무엇보다도 이런 음악을 해도 제법 유명해져서 먹고 살 수 있는 판이 있어야만 이런 음반도 나올 수 있다.

비슷한 시도를 저마다의 모국어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어의 사정을 생각해본다. 열악하지만 전혀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가령 케이팝에서 여성과 성을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는지 실험하는 중인 가인과 김이나의 가사가 있다. 종종 이 팀과 협업했던 여성 전자 음악가 하임도 있고, 최근의 여성 혐오 사태를 향해 “Go Wild”란 곡을 쓴 미묘도 있다. 전자음악만 생각하자면 얼마 전 3주년 기념 음반을 낸 영기획이 있고, 여성 문제만 생각하자면 위안부 문제로 모여 두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낸 [이야기해주세요]가 있다. 이들의 행보가 잘 엮인다면 ‘날 위해 그 자세를 유지하라(Hold that pose for me)’ 같은 가사를(“Glass & Patron”) 모국어로 노래하는 여성 음악가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소망을 담아 [M3LL155X EP]에도 그에 걸맞은 점수를 매긴다. | 김세철 [email protected]

 

Rating : 9/10

 

수록곡
1. Figure 8
2. I’m Your Doll
3. In Time
4. Glass & Patron
5. Mothercreep

[M3LL155X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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