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iv]의 이번 기획은 ‘지역의 음악 씬’이다. 보통 한국의 ‘인디 록’은 ‘홍대 앞’이라는 공간과 연관되어 사용되지만, 이미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음악적 실천들이 수시로 벌어졌고, 또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인디 록이란 홍대 안에 있는 게 아니라 홍대 앞으로 집중된 결과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서울 이외의 도시와 그 음악적 경험과 실천 들을 포괄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번에는 1980-1990년대에 ‘메탈의 도시’라고 불렸던 인천과 부산을 비롯해, 대전과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다. 이외의 다른 지역들도 차차 정리하도록 애쓸 것이니, 지역 음악 씬에 대한 글을 쓰고 싶거나 정보를 제공할 분들은 연락을 부탁드린다. 이를 통해 지역 씬과 음악 팬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차우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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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역

 

인천 음악 씬의 전성기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84년에 가족은 인천으로 이주했다. 처음엔 간석동 주공아파트 단지에 살다가 주안 8동으로 이사했는데, 현재 인천 터미널과 문화회관이 자리한 관교동과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관교동은 허허벌판이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1988년 즈음엔 재개발 지구로 선정되어 도로가 나기 시작했고, 근방에 원룸이나 빌라도 몇몇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관교동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길렀고 허벅지가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친구들과 ‘재미삼아’ 밴드를 결성했던 1991년에는 나도 관교동 근처에 연습실을 구했다. 기타를 맡은 친구 아버지 지인의 친척이 주인으로 있는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그때 관교동의 월세가 무척이나 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관교동에는 후에 사운드가든을 결성하는 윤병주 씨를 비롯해 클래쉬, 블랙신드롬, 제로G, 터보, 멍키헤드, 체리필터의 연습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동인천을 기점으로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은 그때는 몰랐던 일이다. 당시 나는 인천구장과 맞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걸어서 20여 분 걸리는 동인천으로 놀러다니던 고등학생이었을 뿐이니까. 사하라의 멤버들이 운영하던 ‘휠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친구들과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기타와 앰프를 사고, 수업을 빼먹고 음악감상실 ‘심지’에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죽돌이’를 자처하던 그때, 합주실에서 마주친 해당화라는 이름의 ‘여성 메탈 그룹’을 남몰래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그 멤버들 모두 우리보다 두 살에서  세 살이 많았는데, 언젠가 [핫뮤직]에 와일드로즈와 함께 거론되는 걸 보면서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의 인천은 동인천과 제물포 역 부근의 소극장들과 월미도의 라이브 카페들과 오픈 무대들을 비롯해 주안 네거리에 있던(지금은 사라진) 인천 시민회관에서 거의 매주 스쿨밴드들을 비롯해 크고 작은 ‘헤비메탈 밴드’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고등학교에는 학교마다 록 밴드가 최소한 세 개 정도씩은 있었고, 공연이 열리는 주에는 동인천 역 부근에서 ‘팬클럽’의 여고생들이 500원, 1000원 짜리 티켓을 팔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던 때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인천의 음악 씬을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다가 최근 우연히 트위터로 인천밴드협회가 재결성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인천 신포동에 위치한 ‘글래스톤베리’라는 펍을 운영하는 이진우 씨를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듣게 되었고, 이후 이 글을 쓸 기회도 얻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인천을 대표하는 메탈 밴드’ 사하라의 멤버 우정주, 그리고 1997년 즈음 ‘인천 형님들’의 소문을 듣고 기대에 부풀어 서울에서 이주했다가 눌러앉은 이유로 ‘졸지에’ 인천 대표 밴드가 된 휘모리의 멤버들(박지범, 이재욱, 이재무, 조지훈, 김용휘)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1950년대 인천의 음악가들에 대해서는 인천문화재단이 발행하는 [플랫폼]에 음악평론가 최지선이 쓴 “1950년대 미군 부대 형성과 대중문화”를 거의 그대로 인용, 요약했다.

(위) 1985년부터 동인천에서 영업 중인 음악다방 [들국화]의 외부 (인천삼치 2층)
(아래) 계단 입구에 붙은 낡은 포스터들. 주로 김광석과 김현식에 대한 것들이다.

인천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가장 먼저 미군부대가 주둔한 지역이었고 특히 그로부터 가시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 도시는 서울과 근접한 까닭에 서울의 여러 현상들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기도 했다. 수용자가 직접 서울에 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특징이 인천을 독특한 기운, 일종의 박탈감과 낭패감이 흐르는 도시로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한편 침울하면서도 안락한 기운과도 유사하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인천에서는 애나 어른이나 모두 서울의 문화를 향유하거나 부동산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인천에 있어 서울은, 지척에 있으나 거주할 수 없는 도시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더 큰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꼈을 법하다. 아무튼 이런 특징으로 인해 인천의 지역성은 외견상으로는 서울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런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지선이 쓴 “1950년대 미군 부대 형성과 대중문화”를 보면, 인천은 미군의 첫 ‘점령지’로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군의 영향에 있던 도시였다. 특히 부평은 최초의 미군 기지촌이 형성된 곳으로, 해방 직후 부평에 주둔한 주한미육군병참본부(Army Supply Command Korea) 또는 미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의 약칭인 애스컴(ASCOM)을 따 ‘애스컴 시티’라 불리기도 했다. 부평의 미군부대는 1970년대 초반까지 부평을 기점으로 인천에 사회, 경제, 문화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대중음악이 한국에 전파된 경로는 주로 공연과 방송을 통했는데, 특히 댄스홀이나 음악다방/음악감상실의 역할이 컸다. 인천의 경우는 당시 다방이 한 집 건너, 혹은 연달아 있을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는데 당시 신문 기사는 ‘시간 허비, 물자 낭비’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 외에 1957년 9월에 개국한 AFKN-TV도 미국 문화 보급에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한국내 미군들을 위한 특수 목적의 방송이었으므로 청취율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대중음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이 미국을 비롯한 동시대의 외국 대중음악을 동시적으로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건 분명하다. 특히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오락프로그램들을 한데 모아서 방송했기 때문에 한국의 미군 방송이 “미국의 방송보다도 더 오락적인 방송”이었을 것이다.

시기가 지날수록 대중음악 씬에서 인천은 중요한 지역이 된다. 김대환(1933~2004)의 경우는 동산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며 음악을 시작한 1950년대 악극단, 미8군 무대의 빅 밴드에서부터, 한국 최초의 그룹으로 평가되는 애드포 등에서 신중현과 함께 활동했고, 또한 (조용필․최이철과 함께) 김트리오에서 활동하는 등 1960~70년대 한국 ‘그룹사운드’의 형성에 혁혁한 공을 남긴 인물이다. 김대환과 함께 음악을 많이 했던, 프리재즈 음악인 강태환(1944~ )도 인천 출생으로 신흥초등학교 시절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음악을 시작했다. 초창기 한국 그룹사운드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김홍탁(현 서울재즈아카데미 원장, 1944~ ) 역시 인천에서 태어나 동산고등학교 시절 인천과 부평을 오가며 미군 클럽에서 하우스 밴드로 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해 키보이스를 결성했으며 이후 히화이브, 히식스 등의 활동을으로 역시 한국 그룹사운드 역사에 큰 흐름을 만들었다. 영화 [고고70]의 소재가 되었던 데블스의 리더이자, 이은하의 “밤차”와 “아리송해”의 편곡자로도 잘 알려진 김명길(1947~ )도 인천에서 출생하여 인천공고를 다녔는데, 신포동에 있는 미군 클럽 ‘캘리포니아 클럽’ 같은 기지촌에서 음악을 하며 앞날을 예비했다고 한다. 김명길과 데블스를 함께 했고 이후에 작편곡가로 활동한 연석원(1949~ )도 황해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포크 음악인 송창식(1947~ )도 인천 출신으로, 중학 시절 성악을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가수 정훈희의 남편이자 라스트찬스 같은 그룹사운드를 거친 김태화(1950~ ) 또한 인천 출신이며, 사랑과 평화의 이철호(1951~ )는 인천 송도학교와 동산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인천 애관극장, 1990년 당시 5층에 ‘뮤직라인’이라는 녹음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인천의 음악가들은 1980년대 헤비메탈 씬의 형성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것은 시대적, 장르적 거리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인천의 지리적 특성, 즉 서울과 ‘너무 가까웠던’ 까닭도 작용했다고 짐작한다. 앞서 언급한 인천 출신의 음악가들이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는 점 역시 이런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인천의 헤비메탈 씬은 오히려 자생적으로 형성,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하라의 우정주는 1985년에 처음으로 인천 시민회관에서 헤비메탈 공연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인천 씬에서 오래 활동한 기타리스트 이명권을 필두로 보컬의 양범석과 현재 부활의 드러머인 채제민 등이 속한 제3세대의 꿈과 지금 이승철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박창곤, 그리고 로다운30, 김창완 밴드의 드러머인 이민우가 속했던 아웃사이더스의 공연이 인천 최초의 헤비메탈 공연이었다는 얘기다. 그 몇 달 뒤 사하라의 공연이 열렸고 이듬해인 1986년에는 작은하늘이 출연한 공연도 개최되었다. 당시만 해도 1350석(1, 2층 합산)인 인천 시민회관이 가득 찰 정도로 그룹사운드 공연은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인하공전의 티삼스가 “매일 매일 기다려”로 동상을 수상했다. 가요제 당시 티삼스에는 “매일 매일 기다려”를 작곡한 최창환(기타)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1988년 1집 앨범을 녹음할 때에는 신승호로 교체되었다. 스쿨밴드라는 한계상 앨범을 녹음할 정도로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앨범 녹음에는 김화수(보컬), 신승호(기타), 조성욱(베이스), 안정모(키보드), 채제민(드럼)이 참여했다. 이 중에서 김화수는 당시 비너스라는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다가 티삼스에 합류한 상태였고, 채제민은 제3세대의 꿈 드러머였으니, 요컨대 앨범을 발표한 티삼스는 인하공전의 스쿨밴드이기에 앞서 인천을 대표하는 그룹사운드 멤버들로 구성된 ‘드림팀’이기도 했다. 이들 중 김화수는 후에 솔로 1집을 발표했으나 큰 반향은 얻지 못했고, 채제민은 현재 부활의 드러머로 활동 중이고, 안정모는 악기 유통업체인 스쿨뮤직의 대표를 맡고 있다.

동인천 역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의 뮤직바 [하드록 바 인천]의 전경

인천 메탈 씬의 전성기는 1985년부터 1993년 사이였다. 1985년 인천 시민회관의 공연이 성황리에 열리자 이후 그룹사운드 멤버들이 자체 기획한 내용으로 대관 공연이 자주 열렸고, 이것은 1986년 ‘인천 그룹사운드 연합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3세대의 꿈 보컬 양범석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1997년까지 유지되다가 자연스럽게 해산했는데, 2011년에 이르러 ‘인천밴드협회’란 이름으로 재결성되기도 했다. 2011년 11월 13일에 열린 재결성 기념 공연에는 아웃사이더스와 제3세대의 꿈을 비롯해 사하라, 금시조, 휘모리 등이 참여했다. 현재 인천밴드협회의 회장은 안정모 스쿨뮤직 대표가 맡고 있다.

인천 메탈 씬의 쇠락은 1993년 이후에 찾아왔다. 이 변화는 내부와 외부에서 함께 찾아왔는데 너바나로 대변되는 시애틀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의 유행이 외부의 흐름이었다면, 크라잉 넛과 드럭으로 대변되는 홍대 앞 인디 씬의 부흥은 내부의 변화였다. 당시 메탈 밴드들은 대부분 얼터너티브 록의 ‘쓰리 코드 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태도는 홍대 앞의 펑크 밴드들에게도 고스란히, 혹은 보다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사하라의 우정주를 비롯해 휘모리의 보컬인 박지범과 글래스톤베리의 이진우 사장이 모두 동의하는 바는 1990년대 중반 당시 카피곡에서 자작곡으로 넘어가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천 씬이 쇠락했다는 점이다. 물론 홍대 앞에 등장했던 밴드들의 음악을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것은, 기술의 연마를 우선적인 가치로 두던 헤비메탈의 장르적인 특징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천의 메탈 씬은 인천 그룹사운드 연합회가 해산하고 데스메탈 밴드 사두(Sadhu)의 데뷔앨범 [The Trend Of Public Opinion]이 발매된 1997년 이후 급속하게 식어갔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음악 유행의 변화 뿐만 아니라 IMF 체제 돌입으로 인한 음악 소비의 전반적인 감소, 인천 시청 이전과 관교동 인천 터미널 개통으로 인한 상권의 이동, 인천 송도 지구의 재개발 등이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치는 동안, 동인천의 상권은 주안역 앞으로 잠시 이동했다가 송도로 완전히 옮겨갔다.

이런 여파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거의 매주 밴드 공연이 열리던 인천 시민회관과 수봉공원 문화소극장, 간석동 희망쇼핑(백화점) 아트홀, 송도해수욕장(1985년 여름에는 이곳에서 일주일 간 ‘해변 음악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을 비롯해 [심지]와 [유진] 같은 음악감상실의 영업 부진과 공연 감소를 야기했다. 도시 정책과 시장의 요구로 발생한 이 공간의 전면적이고 동시적인 변화는, 특히 음악 유행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메탈 밴드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고, 이후 씬 자체의 토대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공연을 보지 않거나, 공연을 할 밴드가 아예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정주와 박지범은 모두 “선후배 간의 교류가 없었다”고 말한다. 우정주의 경우는 1997년 이후 홍대 앞에서 사하라의 멤버가 아닌, 앨범 엔지니어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는데, 씬을 이끌었던 선배가 떠나고, 그룹사운드 연합회마저 사라진 이후엔 음악가들끼리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동인천(신포동)에 위치한 글래스톤베리 전경

하지만 최근 인천 씬은 새롭게 움직이려 하고 있다. 최근 재결성된 인천밴드협회는 올 6월에 2차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뮤직 펍 글래스톤베리는 홍대 앞에서 기획공연으로 입지를 굳힌 카페와 바 등을 벤치마킹하며 인천 씬 부흥에 앞장서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5월 19일부터 6월 16일까지 매 주 토요일마다 릴레이 공연이 열리는 이곳은 인천밴드협회의 정모나 회의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홍대 앞은 음악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중요한 공간이다. 상징적 의미 뿐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다양한 음악적, 문화적 실천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대 바깥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실천이 동시적으로 벌어질 때에야 비로소 생산적인 변화와 기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인천 씬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의 고민과 실천은 더없이 소중하다. 바로 거기서부터 뭔가 의미심장한 일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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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1. Jason Hwang

    중학생 시절 심지와, 유진, 유진2를 즐겨다녔으며, 수봉공원에서 스쿨밴드 공연을 하고 인천출신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베이시스트 입니다 . 인천 락 음악씬에 락캠프를 빼놓고 말하신다면 상당히 섭섭합니다 96년말 백운역에서 시작한 락캠프로 인천 대표 클럽입니다.  그 당시 엄청난 활동을 했던 홍대의 밴드들이 서로 내려와서 공연을 할 정도로 뜨거웠던 클럽입니다  수많은 블루스 기타리스트들과 인디밴드들 배출해낸 락캠프, 댓글다는 저도 락캠프을 베이스로 리디안이라는 밴드 활동을 하였고 세션베이시스트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락캠프는에서  주말마다 이어지는 폭풍 블루스 잼은 우리나라 어딜가도 보기드문 광경입니다. 지금 인천에서 활동하는 모든 밴드들은 락캠프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천 락음악의 진정한 심장은 바로 락캠프 입니다.
    인천 음악씬은 취재하시고 포스팅하셨다면 락캠프 스페셜을 한번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답
    • weiv

      댓글을 썼는데 왠일인지 기사 밑에서 보이지 않네요… (웬 버그가.. ㅠ.ㅠ) 다시 적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기획을 맡았던 차우진입니다. 저도 90년부터 93년, 그리고 94년 이후로는 띠엄띠엄이지만 인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심지, 유진, 유진2, 수봉공원의 문화소극장 공연도 익숙하고 그립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리디안 멤버셨군요. 옛날 생각나네요. ㅎㅎ )
      아무튼, 그래서 락캠프가 빠진 점에 대해서 많이 섭섭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몰랐습니다. 백운역은 동인천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저도 잘 가보지 못한 동네였거든요) 이 기사의 경우는 인천 메탈 씬의 초창기를 정리하는데 더 중점을 두기도 했고, 또 취재원으로 만난 분들이 모두 96년 이후에는 인천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않은 분들이라 언급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보완하거나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연락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매월 말에 편집회의를 합니다. 그때 어떻게 정리할 지 논의해보겠습니다. (사실, 요즘 제가 다른 일들로 바빠져서 웨이브에 글을 거의 못쓰고 있는 상황이라…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가능하다면, 한번 만나뵙고 96년 이후의 인천 씬에 대해 얘기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번거로우실지 모르지만,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mail protected]

      응답
  2. 백록화

    옛날 생각 나네요.. ㅋ 추억이 새록새록… 90년대 후반기부터 인천 씬의 중심에 있었던 락캠프 스페셜도 기대해봅니다. xD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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