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같은 윤상의 다른 반복

“Destiny”가 공개된 이후 여러 말이 오갔다. 듣자마자 윤상의 과거, 90년대의 마이너 댄스 가요 따위가 떠오르는 곡이었다. 윤상을 오래 들어온 이들은 이 기시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곳곳에서 윤상 세계의 조각들을 꺼내 들었다. 88년 윤상이 작곡한 황치훈의 “추억 속의 그대”나 강수지의 곡들을 말한 이들도 있었고, 스트링에 주목해 2000년 윤상 3집에 수록된 “Back To The Real Life”를 꼽은 이들도 있었다.

퍼즐 놀이에는 비판적인 반응도 함께했다. 소속사에선 굳이 뉴 잭 스윙이란 장르 이름까지 소개하며 이 익숙함이 복고로 읽히길 의도했지만, 재탕이라는 불만은 금세 새어 나왔다. 90년대 주류 댄스에 가까워졌단 점에선 고상했던 과거의 윤상보다 후퇴했단 말까지 나왔다. 컴백 쇼케이스에서 윤상은 ‘마이너 풍의 음악이 나오면 하나의 부류로 묶어서 보는 경향이 있는 걸 20년 전부터’ 느낀다며 ‘과거의 곡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풍경마저 익숙하다. “영원 속에”를 비롯한 여러 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청자들은 이번에도 비슷하다 말하고 윤상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답한다.

“Destiny”가 반복이라는 진단에는 얼마간 동의한다. 특히 벌스(Verse)의 작법은 2002년 윤상 4집에 수록된 “재회”와 닮았다. 16마디인 벌스 중 뒤의 8마디는 앞과 비슷하게 전개되는 듯하다 달라진다. 앞에서는 내려가던 멜로디를 올라가게 하면서 화성까지 바꾼다. “재회”에서는 ‘반가워 참 오랜만이야’에 해당하는 이 멜로디부터 이후 4마디는 두 키만 내리면 “Destiny” 1절의 ‘그댈 비춰주는 내가 있는데’ 이후와 겹쳐진다. “재회”가 끝의 4마디를 다시 변주해 코러스로 삼는다면 “Destiny”는 이를 프리 코러스로 삼는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Destiny”가 반복에만 그쳤다는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Destiny”는 윤상 세계의 같은 조각을 다르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장르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Destiny”는 도드라진 신스 베이스를 중심으로 리듬을 끊임없이 조절해 절박한 정서를 몰아붙인다. 예컨대 벌스의 앞부분에선 베이스의 노트도 줄고 얹힌 신스의 지속도 짧아져 약간의 여백이 생긴다. ‘왜 자꾸 그녀만 맴도나요’ 같은 아쉬움이 담긴 곳도 여기다. 그러나 ‘오늘도 그녀 꿈을 꾸나요’에서 아쉬움이 원망으로 변하면 늘어난 베이스, 박인영의 스트링, 윤상 특유의 리버브 섞인 신스가 여백을 메워간다. ‘그렇게 그대의 하룬 또 끝나죠’에 이르면 가쁘게 몰아치는 베이스와 기타 솔로가 원망을 고조시킨다. 곡은 잠깐 긴장을 푸나 싶더니 곧장 후렴으로 달려가고, 후렴에서는 반짝이는 신스 아르페지오까지 리듬 조절에 가세한다. 이처럼 밀고 당기는 리듬으로 구축한 긴장감이 “Destiny” 전체를 감싼다. 분명 “재회”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윤상의 세계는 “Destiny”에서 또 한 번 외투를 갈아입었다.

 

2. 윤상이 아닌 주어들: 원피스, 러블리즈

“Destiny”를 둘러싼 여러 주어를 더 생각한다. 윤상만의 곡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듀싱의 주어만 해도 윤상이 아닌 프로듀싱 팀 원피스다. 팀에서 주로 리듬을 맡아온 스페이스카우보이는 그간 일본을 경유한 라틴 하우스를 가요에 접목해왔다. 특히 장혜진과 작업한 “불어라 바람아”, “Luv Party” 같은 곡에선 가요 특유의 ‘뽕끼’마저 보였다. 다빈크는 솔로에서부터 윤상의 영향을 숨기지 않았다. “소심한 물고기”를 비롯한 윤상 6집의 영향이 곳곳에 비치는 “Candlelight”의 편곡만 봐도 그렇다. 이런 취향의 합산이 원피스의 결과물을 만든다. “Destiny”가 ‘윤상스러움’을 강화하는 한편 가요의 기운을 더 끌어안은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진정 주어로 삼아야 할 것은 러블리즈, 이제껏 쌓아온 러블리즈의 화자다. “Destiny”는 보도자료에서 말한 ‘성숙’을 섹시가 아닌 애절함으로 구현한다. “그대에게”를 빼면 시종일관 짝사랑만 하던 러블리즈의 화자는 짝사랑을 집어치우는 대신 짝사랑을 더 정확한 언어로 직시하는 방향으로 성장했다. “Destiny”는 나-짝사랑-짝사랑의 짝사랑이라는 구도를 달-지구-태양의 관계에 유비해 속내를 쏟아낸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계절이 불러온 온도차’ 같은 과학 지식이 화자의 상태로 번역된다. 아이돌 가요의 미덕이 3분 안에 여러 소리를 농축시키는 것이라면, “Destiny”는 정보량 많은 가사로도 그 미덕을 실현한다.

러블리즈는 절실하고 과감해졌다. “Ah-Choo”의 짝사랑이 ‘밤새 쓰다 만 편지와 말하지 못 한 내 사랑’이었다면 “Destiny”의 화자는 ‘잔잔한 그대 그 마음에 파도가 치길’ 기도한다. 표현조차 못 하던 사랑은 달라질 수 없는 구도를 거부하려는 몸짓으로 변했다. 화자는 드물게 찾아드는 일식처럼 그녀를 잠깐이라도 가려 ‘빛의 반지를 주고 싶’어한다. 희박한 확률에 온 마음을 건다. 이런 간절함이 아이 같은 목소리를 줄이고 비음을 더한 가창과도 조응한다. “Destiny”는 곡으로, 가사로, 가창으로 러블리즈의 성장 서사를 작동시킨다.

“Destiny”에는 지금껏 원피스와 러블리즈가 만든 세계의 대부분이 담겨있다. “Candy Jelly Love”가 채색하듯 골라놓은 소리의 팔레트, “안녕 (Hi~)”에서도 박인영이 맡았던 화사한 스트링, “Ah-Choo”부터 도드라진 베이스까지 모두 담겼다. 섬세한 콜라주가 점차 격렬해져가는 모종의 흐름도 읽힌다. 그러므로 과거형이라는 몇몇의 진단에 맞서 러블리즈의 미래를 기대한다. 러블리즈가 ‘대중음악 프로듀서로서 완성도 높은 신스팝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오브젝트’라는 윤상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면, 러블리즈에게서 윤상과 신스팝과 대중음악의 다른 반복을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김세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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