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늘색이라니

하늘색이라니. ‘신상품(New Product)’이라는 제목을 달고 신문에 실렸다는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새 EP 광고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파스텔 톤이라니. 팬톤 컬러로 뒤덮인 케이팝 음반이나 여느 누 디스코 음반 사이에 끼워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말쑥함이라니. 하필 에이펙스 트윈이라 더 낯설었다. 이름을 몇 번이나 바꿔 달면서도 괴팍한 인상만은 버린 적 없던 이의 상냥함이 낯설었다.

인상은 곡으로도 이어졌다. “CIRKLON3 [Колхозная mix]”은 여전히 에이펙스 트윈다운 곡이지만, 그의 가장 친절한 순간을 담았다. 게임 배경음악으로도 어울릴 빈티지 신스 베이스가 곡을 열면 곧이어 앰비언스가 얹혀 서로 주도권을 주고받는다. 돌출하지 않는 비트까지 더한 곡은 8분간 차분하게 멜로디를 갈아 끼운다. 가벼운 시작부터 어둑한 끝맺음까지, 에이펙스 트윈은 느릿한 흥겨움을 모난 데 없지만 지루하지도 않게 밀어간다. 거친 소리보다 유려한 멜로디에 집중했던 [Syro]의 기획을 밀어붙였다고 봐도 좋겠고, 그러니 이 곡을 에이펙스 트윈 입문 곡으로 삼아도 좋겠다. 파격을 기대했다면 아쉽겠지만, 생각해보면 에이펙스 트윈의 강점은 언제나 멜로디였다. 이번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

2. 클라우드 프로듀싱

“CIRKLON3 [Колхозная mix]”는 신곡이 아니다. 발매도 안 된 EP의 선공개 곡이지만 들은 적이 있다. 에이펙스 트윈이 사운드클라우드에 풀었던 데모 중 “Cheetah3 Teac”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Cheetah EP]라는 제목으로 짐작건대 음반의 한 곡쯤은 “Cheetah7 Teac”과도 닮았을지 모른다. 이쯤 되면 [Cheetah EP]를 하나의 목표로 쌓아 올린 음반으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에이펙스 트윈은 그저 미완성의 소리를 빚어낼 뿐이고, 음반은 때가 되어 선별된 그럴싸한 묶음에 불과하다. 그는 이번에도 음반 단위의 완결성에 관심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드 디스크에나 묵혀 있었을 데모들이 이번엔 미리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수백 곡의 소리 조각들은 에이펙스 트윈에게도, 워프 레코드의 관계자에게도, 청자들에게도 동등하게 뿌려져 있었다. 무수한 자료들이 임의로 묶여 정보가 되듯, 어떻게든 조합될 수 있었던 조각들이 이번엔 [Cheetah EP]의 모양을 했을 따름이다.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가 [Garden of Delete]에서 딥 웹 놀이를 했다면, 에이펙스 트윈의 작법은 네트워크 시대의 정보 생산 자체를 은유하는 듯하다. 의미에 늘 초연했던 에이펙스 트윈은 클라우드의 시대에 이르러 음반의 진정성을 완전히 폐기한다. 하늘색의 커버 같은 가벼움을 자처한다.

3. 싸우지 않는 아이들

그러니 이 음악에서 또렷한 메시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소리는 청각적 쾌감만을 노려 만들어져 의도 없이 묶였다. 이번엔 제목마저 시퀀서(Cirklon)나 신시사이저(Cheetah)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나마 의미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영상이다. 17년 만이라는 이번 영상은 크리스 커닝햄(Chris Cunningham)이 아닌 12살 소년이 감독을 맡았다. 피치포크(Pitchfork)는 이를 두고 ‘다음 세대에게 카메라를 넘겨줬다(handing them the camera)’고 평하기도 했다.

나이만으로 세대교체를 말하기는 어렵다. 에이펙스 트윈의 가면을 쓴 아이들, 한껏 열화된 영상의 정서는 기존 작업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만으로 천진함을 읽기에는 지나치게 조숙한 영상이다. 그러나 “Come To Daddy”와 비교하면 차이도 읽힌다. 에이펙스 트윈의 얼굴을 하거나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은 이제 싸우지 않는다. “Come To Daddy”에서 노인과 어른을 위협하던 아이들, TV를 뚫고 나온 디지털 괴물을 목도하며 모두와 불화하던 아이들은 이제 집 앞에 나와 춤을 춘다. 여기에는 세기말의 비장함이 자리하지 않는다. 기계 문명도, 잠깐 들어 올린 총기의 불안함도 이 세대에겐 공기처럼 익숙하다.

이것을 새 세대의 감성이라고 예단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에이펙스 트윈의 무의미가 무의미 이상을 담으리란 기대만은 잠깐 하게 된다. 그런 기대로 [Cheeatah EP]의 나머지를 기다린다. | 김세철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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