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컨셉과 벨벳 컨셉으로 나눠 활동하겠다는 기획을 들었을 때의 의심을 기억한다. 댄스와 발라드를 번갈아 내놓던 과거의 가요와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그런 의심을 기획력과 매력으로 지워간 3년이었다. 레드벨벳은 레드 축으로 댄스 장르의 여러 갈래를, 벨벳 축으로 알앤비와 발라드를 말끔하게 오갔다. 안정적인 선택으로 신뢰를 쌓아왔다.

 

1. 음악: 준수하고 안전한

그런 믿음 속에 신곡이 나왔다. 이번에도 흠잡을 데 없이 말끔했지만 반응은 엇갈렸다. 꾸준히 들었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바뀌었다. 처음엔 좋았고 다음엔 아쉬웠고 지금은 아쉬움을 이유로 곡을 탓할 순 없겠다고 판단한다. 갈팡질팡한 이유를 순서대로 옮긴다.

1-1. 좋았다가: 입맛에만 맞는다면 단숨에 사로잡힐 곡이다. SM이 요새 하던 대로 런던 노이즈(LDN Noise)를 데려와 동크 베이스 입힌 퓨처 하우스를 선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러시안 룰렛”은 예상보다도 달콤했다. 곡은 처음부터 보컬 샘플을 짧게 잘라 가쁘게 쏟아내고 그 위에 반짝이는 칩튠 사운드를 얹는다. 벌스에서 잠깐 숨을 골라 후렴에 이르면 리듬이 빚는 상쾌함을 만난다. 특히 ‘남은/순간/까지/점점/다가/오지/Cra/zy’에서 두 음씩 끊어 불러 만든 긴장이 ‘러시안 룰렛’에서 해소될 때, 그 뒤에 곧바로 ‘Ah/Ah/Ah/Ah Yeah’를 붙여 처음 들은 보컬 샘플로 돌아갈 때가 그렇다. 곡이 끝나기 30초 전은 특히 빛난다. 후렴에 깔려 있던 딜레이 걸린 신스 위에 리드 신스를 얹은 마무리는 달콤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절정을 구현한다. 좋아할 요소를 눌러 담은 준수한 곡이다.

1-2. 아쉬웠다가: 그런데도 아쉬웠다. 너무 안전한 선택 같았다. 과거의 레드 컨셉 곡들과 견주면 더 그렇다. 시종일관 변화무쌍한 “행복”과 비교하자니 벌스와 후렴의 멜로디가 비슷하게 들리고, “Dumb Dumb”과 비교하자니 고음과 큰 낙차가 주는 가창의 짜릿함이 줄었다. 강렬했던 브릿지는 숨고르기가 되었고 랩도 빠졌다. 전보다는 심심해졌다는 뜻이다. 더 의미심장한 건 짧고 굵은 킥과 함께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던 “Ice Cream Cake”의 뮤직박스를 마냥 천진한 칩튠으로 대체한 선택이다. 발랄한 레드 컨셉의 뒷면에 뭔가가 숨겨져 있으리란 상상, 레드벨벳의 무표정이 부추겼던 그 상상이 “러시안 룰렛”에서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1-3. 탓할 수는 없다가: 개인적인 결론을 묻는다면 아쉬움에 방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이 아쉬움을 흠결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뒤집어 말하자면 정신없이 질주하던 전작들을 담백하게 정리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구조 안에서 의도한 만큼의 달콤함을 정확히 구현하는 시도를 얕잡아 볼 수도 없다. 탓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 영상: 키치와 무표정의 효과

곡보다도 말이 많았던 건 영상이었다. 파스텔 색조로 덮인 화면, 서로를 죽이려는 설정에 대해 반응이 갈렸다. 더 논쟁적인 지점도 있었다. 수동적이고 무해한 소녀 이미지를 관음하는 경향이 비판받는 때에 굳이 체육복과 테니스 스커트를 골랐어야 했냐는 지적이 있었고, 그런 지적이 과하다는 입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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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파스텔 키치: 의도가 궁금했다. 정답은 만든 이들만 알 일이겠지만, 의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키치하다’는 슬기의 언급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나 태도 따위를 가리키는 수식어로 잘못 쓰이기도 하지만, 키치는 문화산업의 산물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다. 시중에 떠도는 예술의 외피를 그러모아 적당히 흉내 낸 상품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면 “러시안 룰렛”의 작법이 꼭 그렇다. 차고 넘치는 걸그룹이 이미 소비한 체육복과 테니스 스커트를 구태여 가져왔으며, “행복”에서 이미 소비한 소녀 이미지에 파스텔 색조까지 끼얹었다. 뻔한 것들을 모아 기웠으니 뻔한 결과물이 되었다는 비판이 나올 법하다. 그 뻔한 것들에 잘못된 사회적 풍토가 묻어 있었다면 작품 역시 잘못되었으리란 비판도 가능하다.

2-2. 무표정: 그런 키치가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하는 건 뻔한 것들을 모아 전에 없던 효과를 산출할 때다. 키치에 취하지 않고 키치의 효과를 스스로 조망하고 뻔뻔하게 써먹을 때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해석할 떡밥이라도 던져 줘야 한다. 레드벨벳에게서 그런 역할을 해온 장치는 특유의 무표정이었다. 즐거움을 줘야 할 “Dumb Dumb”의 ‘마네킹 인형’들이 좀처럼 웃지 않을 때, 무표정은 불편한 섬뜩함을 일으켰다. 과장을 좀 많이 보태자면 인형이길 요구받는 아이돌의 처지마저 슬쩍 드러내는 듯했다. 그렇다면 종종 무표정한 “러시안 룰렛” 속 소녀들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자신이 걸친 키치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걸까? 해석은 자유겠지만 이번엔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이 기운다. 뮤직박스의 스산함이 천진한 칩튠이 되었듯, 파스텔 색조로 옅어진 영상이 섬뜩함의 자리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키치의 힘이 무표정보다 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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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걱정: 키치가 무표정을 이겨 먹는 상황은 아쉬울 뿐만 아니라 걱정스럽다. 물론 SM은 남들이 하던 걸 가져와도 더 세련되게 만들 능력이 있는 회사지만, 이대로라면 새로운 걸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획이 변별력을 잃으면 남는 건 멤버 각자의 매력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팀이지만, 레드벨벳이라면 그 이상을 기대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 김세철 [email protected]

 

2 Responses

  1. Kim, Y.C.

    기사 잘 읽었어요 노래와 뮤직비디오 영상에 대한 분석력이 정말 뛰어나신것 같아요 ㅎ 게다가 요즘 제일 즐겨듣는 노래, 호감가는 그룹의 기사를 써주셔서 관심있게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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