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의 크로스오버(crossover)라고 하면 익숙한 장면들이 많이 떠오른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Let It Be”라든지, 록의 악기와 문법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하는 식으로- 보통 둘 이상의 장르나 스타일 등을 엮어내는 음악들에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이 붙는다. 특히 국악/국악기와 이외의 음악을 엮어내는 시도들에 ‘국악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며 ‘크로스오버’라고 하면 그러한 음악들이 많이 연상된다. 상당히 애매한 정의지만, 작년에 나온 [Mask Dance]나 [판소리 춘향가], [Communion] 등 인상적인 순간들은 항상 나타났다. 다만 이번에는, ‘크로스오버’하면 익히 느껴지는 장면들을 잠시 유보해두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크로스오버를 다시 한 번, 정말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서로 다른 복수의 세계들이 하나로 합쳐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받아들여진 크로스오버에서는 복수의 ‘세계’들은 보통 장르적인 영역에서 이야기되었다.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처럼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자면 이 세계는 장르나 스타일 등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음악인들의 세계일 수도 있고, 더 넓게 보자면 음악이 있는 시공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모든 요소들이 대규모로 크로스오버할 수도 있다. (작년의 중요한 국악 크로스오버 음반들도 거대한 세계들 간의 ‘대규모’ 크로스오버일지도 모르겠다)

또 생각해보면, 크로스오버라는 단어 자체를 파고들면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크로스오버는 cross와 over로 나뉜다. 각각의 의미를 ‘교차’와 ‘넘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이러한 단어의 뜻에서만 보자면 크로스오버는 교차와 넘기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합쳐진 crossover은 ‘교차하고 넘기’일까, 아니면 ‘교차해서 넘기’일까, 아니면 ‘교차하거나 넘기’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까? 확답은 없다. 교차와 넘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고, 조금은 이분법적이지만 거칠게 나누자면 cross에 초점이 있는 크로스오버와 over에 초점이 있는 크로스오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크로스오버는 곧 다른 세계들의 만남이자 관계의 형성이다. 세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과정과 순간 속에서 이 다양한 ‘크로스오버’가 일어난다. 지난 봄에 나온 주목할 만한 근작들인 데카당의 [ㅔ], 라이프 앤 타임의 [CHART], 그리고 파라솔과 실리카겔의 “Space Angel”에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을 붙여보며 조금 새롭게 생각해보았다.

 

1. 교차 : 데카당 [ㅔ]

 

 

다양한 방식의 크로스오버 중에서도 ‘교차’에 조금 더 초점을 둔 크로스오버의 예시로 데카당의 [ㅔ]를 골랐다. 사실, 정말로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만 교차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작년의 작품들을 예시로 들자면, 키라라의 [moves]는 전자음악의 넒은 장 안에서 하우스, 칩튠, 빅비트 등 각각의 작은 세계들을 교차해 ‘강하고 예쁜’ 키라라 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줄리아 드림도 마찬가지로 록의 넓은 장에서 프로그레시브와 싸이키델릭을 바탕으로 삼아 검붉은 [불안의 세계]를 만들었다.

데카당도 마찬가지로 첫 EP [ㅔ]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크로스오버한다. 키라라가 전자음악 내의 하위 장르들을, 줄리아드림이 프로그레시브와 싸이키델릭을 엮었다면, 데카당은 펑크와 소울이라는 두 세계를 엮는다. 앞부분에 실린 “봄”과 “빈”은 변칙적으로 튀는 기타 연주와 주절거리듯 내뱉는 방식의 보컬을 주된 요소로 삼아 일종의 분열적인(?) 펑크가 된다. 특히나 “빈”에서의 특징적인 기타 리프는 노웨이브로도 이어질 뉴욕산 포스트 펑크의 색채와 일부 겹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뒷부분에 실린 “금붕어”와 “A”로 가면, 포스트/뉴욕 펑크적인 색을 만들던 요소인 분열적인 기타 연주와 내뱉는 스타일의 보컬은 자연스럽게 소울의 구성 요소가 된다. 지글거리는 연주의 박자를 조금 밀고 당기며 속도를 줄이고, 혼란스럽게 내뱉는 보컬도 느리게 정제했을 뿐인데, 변화무쌍한 펑크는 어느새 어려움 없이 진한 소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어쩌면 데카당만의 크로스오버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겠다.

장르로써 펑크와 소울의 거리는 제법 멀다고 본다. 하지만 데카당은 그들의 소리를 조금씩 변주하는 것으로 손쉽게 두 세계를 교차해냈고, 그 결과가 곧 [ㅔ]의 네 곡들이다. 물론 이 교차가 펑크와 소울 자체를 넘어서는 결과가 되었다 할 수는 없다. 펑크적인 성향이 가장 강한 “빈”을 EP의 다른 곡들과 따로 떼어놓을 수도 있겠고, 펑크와 소울이 교차해 새로운 뭔가를 만들었기보다는 꽤 이질적인 세계들을 함께 담아냈다- 정도로 말하는 게 좀 더 적절하다. 하지만 두 세계의 교차점에 있을 “금붕어”에 담긴 소울에서 어느 순간 “빈”에서의 펑크적 분위기를 느낄 때, 반대로 “빈”의 보컬에서 “A”의 소울풀함을 느낄 때, [ㅔ]에 담긴 크로스오버의 순간을 느낀 게 아닐까- 하고 싶다. 이러한 장르 사이의 이색적인 교차를 훌륭히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데카당의 크로스오버는 인상적이다.

 

2. 넘기 : 라이프 앤 타임 [CHART]

 

 

하지만 단순히 장르나 세계의 교차만으로 “크로스오버”라 하기에는 무리가 많을 지도 모르겠다. 각기 다른 세계가 교차되어 이어졌고 하나의 관계를 만들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다시 cross와 over로 돌아간다. 세계가 이어지고 관계가 만들어지면 항상 넘는 거리들이 있다. 서로 다른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것처럼 말이다. 데카당이 펑크와 소울의 거리를 넘은 것도 괜찮은 예시지만, 교차가 두드러진 [ㅔ]를 크로스오버에 둔다면 당연히 넘기가 두드러지는 크로스오버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펑크-소울 같은 장르적인 거리들은 메탈과 J-POP 아이돌만큼 멀어질 수도 있으며, 실제로 현실화되어 어느 날 메탈리카 내한 공연 오프닝에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르나 스타일이 아니라 시공간의 넓고 깊은 거리들을 훌쩍 넘어 세계들이 이어질 수도 있다.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크로스오버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50년 전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50년 후인 지금에 다시 듣는 것부터 시작해 그 50년 전의 “A Day In A Life”를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것처럼 시간의 거리를 넘을 수 있다. 아니면 남미에서 울려 퍼지는 케이팝, 반대로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남미 음악같이 공간의 거리를 넘을 수도 있다. 또 아니면 2007년 소녀시대 콘서트장이 아니라 2016년 이화여대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다시 만난 세계” 같은 경우, 아니면 “아름다운 강산”이 2016년 말 종로의 이곳저곳에서 각기 다른 의미와 이야기를 가진 채 울려 퍼지는 경우- 이 모든 시공간적 거리를 넘어서고 잇는 것도 크로스오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라이프 앤 타임의 [CHART]는 시간의 간격을 넘는 크로스오버다. EP에서 라이프 앤 타임은 스스로를 하나의 매개로 삼아 한국 록의 각기 다른 시간들을 죽 이으며 그 거리를 넘는 과정을 담았다. 과거의 산울림 / 송골매 / 크라잉넛 / 롤러코스터는 현재의 라이프 앤 타임을 타고 불러와진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교차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리메이크’의 측면에서는 옛 곡을 단순히 현재에 전시해놓아 누가 어떻게 부르든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부류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음악 예능’이 많아짐에 따라 무분별하게 많아졌지만, 라이프 앤 타임은 기꺼이 시간의 매개체가 되어 다른 세계들을 시간의 한계를 넘어 현재로 불러 그와 동시에 그들의 세계도 확연하게 담아낸다. 산울림의 로우파이하고 퍼지한 싸이키델릭은 훨씬 더 정제된 사운드와 철저한 합으로 새로운 힘을 얻었고, 송골매의 80년대식 캠퍼스 록은 라이프 앤 타임식의, 어쩌면 2010년대식의 청량함을 얻었다. 크라잉넛의 조선 펑크는 “하나님 아버지”의 폭발적인 기운을 유지한 채 스카 펑크로 변주되었고, 롤러코스터의 2000년대 초반식 ‘모던 록’은 코드쿤스트의 프로듀싱과도 만나 세련된 기타 팝이 되었다. 시간의 격차를 넘어 크로스오버한 세계들은 라이프 앤 타임이 부여한 현재성을 담아 다시 나타난다.

[CHART] 속의 이 네 곡들은 수많은 리메이크 곡들의 숙명적인 질문(‘원곡’을 존중했는가, ‘재해석’이 심한가 등등)들을 피할 수는 없겠고, 또 누군가에겐 라이프 앤 타임의 크로스오버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면 [CHART]의 시도로 라이프 앤 타임은 한국 록의 분절된 역사를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엮어냈다는 점이다. 각각 자신만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던 세계들은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다시 재편되었다. 이 ‘다시 부르는’ 과정으로 연결의 작업을 멋지게 해낸 라이프 앤 타임은 영리하게도 엮어진 흐름의 다음으로 그들의 노래(“차가운 물”)를 놓으며 일종의 포부(?)까지도 들려준다.

사실, 이러한 크로스오버들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90년대의 [77 99 22], [A Tribute To 들국화], [A Tribute To 신중현] 같이 시간을 넘는 크로스오버 작업들은 현재에도 이어져 [REBORN 산울림]이나 [2011 들국화 리메이크], 튠업의 [행진]과 [미인/생각해/저 여인/설레임] 등 훌륭한 작업물들을 낳았다. 하나의 밴드가 스스로를 매개로 삼아 다른 시대의 음악들을 가져오는 작업은 윤도현 밴드가 거의 20년 전에 [한국 ROCK 다시 부르기]에서 해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CHART]에 라이프 앤 타임 만의 크로스오버가 있다면 2017년의 시점에서 이전의 작업들이 담지 못했던 시간들까지 담으려고 하는 점이다.

앞에 열거한 작업들이 멀리는 60년대 말의 신중현, 가깝게는 80년대 말의 캠퍼스 록을 불러온다. 팝과 댄스 등 다른 장르에서 90년대와 그 이후가 활발히 불러와지는 것에 비해, 록에서는 아직까지도 90년대 이후의 시간에 대한 탐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이프 앤 타임은 크라잉넛과 롤러코스터를 그들의 ‘차트’ 속에 넣으며 90년대 이후의 한국 록 또한 그들이 만든 큰 자장 속에 집어넣는다. 작년에 이디오테잎이 [RE]에서 조금 더 시간을 현재로 끌고와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진짜 너를 원해”와 텔레파시의 “Techno Shoes”를 리메이크/크로스오버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세계를 다른 세계와 교차시키는 작업은 그 시대를 업데이트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 또한 그 시대의 가장 앞선 시간대로 보내고 있다.

 

3. 교차-넘기 : 파라솔X실리카겔 “Space Angel”

 

 

사실, 넘는 것만으로도 한참 부족할 것이다. 교차의 크로스오버와 넘기의 크로스오버를 보고 왔으니, 따로 떼어놓았던 cross와 over을 다시 붙일 때가 왔다. 교차와 넘기가 함께 일어나는 순간, 서로 다른 세계들이 교차되고 사이의 거리를 넘어 원래의 세계들마저 가뿐히 넘어서는 순간, 교차-넘기의 이 순간을 정말 말 그대로 크로스오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Mask Dance]와 [판소리 춘향가]와 [Communion]도 결국엔 이러한 ‘대규모’ 크로스오버의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세계들이 서로 섞이고 버무려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굳이 국악 크로스오버, 재즈 크로스오버 등이 아니더라도 무척이나 가득하다.

근작 중에서는 파라솔과 실리카겔이 함께 낸 곡 “Space Angel”이 그 중심에 있다. 애니메이션 <스페이스 엔젤>을 영감으로 (그리고 뮤직비디오의 재료로) 삼아 서로 다른 두 밴드들이 한 부분씩, 나중에는 다 함께 마지막 부분을 만드는 이 거대한 과정 자체가 수많은 교차-넘기가, 크로스오버가 일어나는 장이다. 실리카겔의 세계 자체도 시각적인 VJ잉과 록 내외의 수많은 장르들이 교차된 세계이며, 애니메이션 <스페이스 엔젤>과 노래 “Space Angel”의 교차는 곧 시각과 청각 사이의 교차이며, 파라솔과 실리카겔이라는 독립적인 두 세계도 곡의 후반부로 가면 황홀하게 교차된다. 파라솔 특유의 나른하고 맑은 기타 팝이 먼저, 실리카겔의 역동적인 ‘브레이브 뉴 사운드’가 다음에. 이 두 세계는 나름의 비슷한 톤을 진행되되 서로의 특수한 영역을 지키지만, 마지막 순간으로 가면 그 장벽은 해체되고 세계들이 물밀려오듯 섞이기 시작한다. 격하게 부딪치는 두 세계의 두 소리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어쩌면 이 멋진 과정을 교차하는 선(X)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파라솔X실리카겔로 말이다. 작은 값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곱하기의 순간, 세계들이 교차해 스스로를 넘어서는 교차-넘기, 크로스오버의 탄생이다.

물론, 파라솔X실리카겔의 작업이 크로스오버의 명확한 예시는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세계의 교차-넘기는 이미 상상을 넘는 다양한 방식으로 퍼졌다. 곱셈 기호로 연결된 김사월X김해원이나 김간지X하헌진은 어떤가. 그게 아니더라도 방준석과 백현진이 합쳐진 방백은 어떤가. 신중현과 엽전들부터 전범선과 양반들까지 연결어로 이어진 수많은 밴드들은 또 어떤가. 세계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충돌해 초신성 폭발과 같은 결과를 만드는 이 수많은 교차-결합들, 이 수많은 탄생들을 크로스오버라고 부르면 안 될까. 장르들이 다양하게 교차할 때, 시간을 뛰어넘는 리메이크가 나올 때, 거대한 시공간 안에서 다른 세계들이 만나 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 자체가 새로운 세계가 될 때- 이 모든 때들을 크로스오버의 순간이라 부를 수는 없을까.

 

 

 

익히 아는 의미들을 잠시 치워두고, 크로스오버, 교차-넘기, 세계들의 관계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되는 이 모든 순간들은 음악에서도, 그 바깥에서도 항상 있어왔다. 그래, 굳이 특정한 이름들이나 주목할 만한 근작들을 대지 않아도, 예시들은 넘쳐난다. “토성의 영향 아래”에서 도재명의 시 같은 노랫말이 이자람의 한 서린 목소리와 만난다. 스물 다섯 살 이지은은 아이유라는 이름으로 선우정아부터 이병우, 오혁 등의 사람들과 교차한다. 혁오는 또 스스로의 정규 음반에서 훵크부터 개러지, 로큰롤까지 다양한 록의 세계를 합친다. 신해경은 드림팝과 슈게이징을, 이그니토는 13스텝스의 도쿄13(TOKYO13)과 함께 하드코어 랩과 하드코어 펑크를 섞고, 쿠마파크와 김오키, 재지팩트는 각자의 방법으로 재즈의 문법과 힙합의 문법을 섞고,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은 재즈의 연주와 록의 연주를 섞는다. 이스턴 사이드 킥의 오주환과 프롬 디 에어포트의 지(Zee) 등이 만나 어도이(ADOY)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시와와 황푸하와 김목인은 2014년의 4월과 2017년의 4월을 잇는다. 파울로시티는 조동희의 목소리와 함께 시간을 잇는다. 그래, 교차-넘기의 순간은 다양한 모습으로 온 주위에 드러난다.

어쩌면 장르의 결합, 리메이크 혹은 트리뷰트, 콜라보, 다양한 단어들이 이런 음악들을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그렇게 부를 것이지, 왜 하필 ‘크로스오버’일까. 굳이 이 모든 연결들을 ‘크로스오버’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솔직히, 없다. 데카당을 장르 결합의 훌륭한 예시로, 라이프 앤 타임의 작업을 깔끔하고 독창적인 리메이크로, 파라솔과 실리카겔의 만남을 꿈의 콜라보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의 관계, 세계와 세계의 ‘사이’ 자체에서 새로운 게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음악에 교차-넘기의 방법은 조금씩은 들어가 있고, 이 작품들은 이를 더욱 특별하고 새롭게 해냈다. 각 세계들은 그들 전체로 남아 있으면서도, 새로 태어난 세계들의 부분이 된다. 내가 되고 네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악들을 제대로 된 의미의 크로스오버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만의 크로스오버를 성취한 음악이라고 하고 싶다. 서로 다른 것들이 교차하고 넘어설 때,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것을 크로스오버라고 하고 싶고, 그렇기에 이 음악들에는 훌륭한 ‘크로스오버’의 순간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면, 음악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선 모든 것들의 사이에서 교차-넘기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ㅔ]와 [CHART]와 “Space Angel”과 이 수많은 크로스오버의 순간들을 접하며,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관계의 세계들을 상상해본다. | 나원영 [email protected]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