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중음악 비평이 아니지만 비평인 척 하는 글, 혹은 비평이라고 하기 민망한 글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감을 느끼거나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비평’에 대해 그것이 왜 비평이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은 많지 않았다. 전대한 에디터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기획, <이것은 비평이 아니다>는 그러한 부재를 메우기 위한 시도다. 이 시도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은 왜 비평이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비평은 무엇인지, 혹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단초가 되길 희망한다. | weiv

 

미셸 푸코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하기로 한다. “(비판은) 권위가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진실로서 받아들이지 않거나, 적어도 권위가 그것을 진실이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을 진실이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진실하다고 받아들이는 이유들이 자기에게 타당하다고 간주될 때에만 수용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 경우 비판의 적용 지점은 권위에 맞선 확신의 문제에 있습니다.”1

비평(批評)은 한자를 풀이해보면 치고(批) 평가(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비평의 가장 쉬운 정의는 ‘어떤 대상이나 작품 혹은 현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그것의 좋고 나쁨을 특정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행위’ 정도일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언급했듯이, 이는 비평의 아주 ‘쉬운’ 정의일 뿐이다. 내용의 측면에서 어떤 비평은 비판에 집중할 것이며, 반대로 평가에만 집중하는 비평도 존재할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비평은 다양한 가능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는 텍스트 기반의 비평이 주를 이루지만, 영상이나 음성으로 비평을 실천하는 메타-텍스트 비평 또한 존재한다. 한편 비평이 주로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에 문학의 일부로 규정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동시에 비평을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비평을 정의하는 방식과 그 내용은 정말 다양하다.

다원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심지어 필연적으로 주관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비판과 평가로부터 출발하는 비평에 관하여, 어떤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을 둘러싼 모든 정의와 규정은 옳은 동시에 그르다. 어떠한 것도 비평인 동시에, 또 어떠한 것도 비평의 본질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비평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는, 솜씨 좋은 사기꾼이거나 허울뿐인 기만자일 확률이 높다. 물론 나 또한 비평에 대한 정답을 갈구하고 언젠가 그 답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확신에 가까운 마음으로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비평과 (더) 나쁜 비평은 분명 존재한다. 비평이라는 행위에 대해 큰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비평적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보다 좋은 비평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적확하게 정의할 수 없더라도, 그리고 (차우진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더듬거릴 뿐이더라도, 우리는 보다 더 나은 비평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어쩌면 그것이 비평을 정의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비평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좋은 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고민할수록 오히려 그 답은 멀어졌다. 그래서 아주 단순해지기로 했다. 비평이 아닌 어떤 것들을 지워나가다 보면, 질문의 답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비평이 아닌 것들을, 혹은 좋은 비평이 아닌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사실 이조차도 쉽지 않다. 그래서 조금 더 좁혀서, 최근 몇 년 동안의 대중음악 비평 내의 산물들 중에서 좋은 비평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다시 말해 나쁜 대중음악 비평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앞서 툭 던져놓은 푸코의 문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푸코에 따르면, 비판이란 ‘권위에 맞서는 것’이다. 비평은 언급했듯이 평가와 함께 비판에도 기반을 두는 행위이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권위에 맞서야 한다. 하지만 권위에 (잘) 맞서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에 의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을 뒷받침할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평은 비로소 견고히 자리 잡은 권위를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할 수 있다.

문제는 많은 비평가가 이 지점에 대해서 오해한다는 것이다. 권위에 맞서기 위해서는 분명 권위와 대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비평 스스로(혹은 비평가 스스로)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비평이, 가장 경계해야 할 ‘권위’를 스스로 재생산해낸다면, 그것은 분명 실패한 비평이고 더 나아가 비평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오해의 산물을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앞으로 다루게 될 비평들은 이러한 오해의 산물들이다. 그것들은 권위에 맞서고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의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권위에 맞서 진실을 의심하는 이들을 (대체로 검열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을 하나의 권위로 작동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비평이 무엇인지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더라도, 비평이 아닌 것을 찾아내기는 쉬웠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쓰기로 한다. “이것은 비평이 아니다.”라고.

 

 

 

비평과 비난은 고작 한 글자 차이 뿐이기에, 얼핏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차이가 가져오는 엄청난 간극으로 인해, 어떤 것은 나쁜 비평이 되고 더 나아가 비평 아닌 것이 된다. 지금부터 다루게 될 한동윤 평론가의 두 글이 그렇다. 그의 두 글, <버벌진트에게><약자를 희롱하는 왕, 스윙스>는 비평이 아니라 비난일 뿐이다.

 

비평이라는 탈을 쓴 비난

그가 2016년 6월에 쓴 글, <버벌진트에게>는 한 장의 사진과 함께 게재되어 있다. 버벌진트가 2010년에 쓴 트윗을 캡쳐한 이미지로, “올해의 쓰레기평론가상도 한동윤에겤ㅋㅋㅋizm한동윤ㅋㅋㅋ”라는 원색적인 비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2008년 8월에 한동윤 평론가가 대중음악웹진 IZM에 게재한, 버벌진트의 앨범 『누명』에 대한 글이 많은 지적을 담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인신공격적으로 반박한 트윗이다. <버벌진트에게>는 그러므로 반박에 대한 반박, 일종의 재반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한동윤 평론가의 재반박 또한 인신공격성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버벌진트는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고, 한동윤 평론가는 글에서 이러한 사실을 계속 언급한다. “그런 내가 음주운전을 한 범죄자이자 잠재적 살인마에게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찌질이 주제에 진실한 척 구느라 애썼다. 술 조심하고, 운전 조심하고, 부디 입도 조심해라.”와 같은 문장들이 대표적이다. 버벌진트는 음주운전을 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결코 음악비평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음악비평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다시 읽어보자. 버벌진트의 음악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다. 물론 버벌진트는 음악가이고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에 음악비평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음악가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쓰레기”나 “찌질이”와 같은 표현으로 모욕할 수 있는 음악비평가는 아무도 없다. 적어도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조롱이나 모욕을 결코 비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대신 비난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이 글의 더 큰 문제점은 창작자와 비평가 사이에 임의로 설정된 윤리적 위계를 전제 삼는다는 것이다. 한동윤 평론가는 버벌진트의 음주운전을 근거 삼아, ‘버벌진트 같은 범죄자가 범죄를 짓지 않은 나를 비판/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 논리를 토대로 버벌진트와 자신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구별 지으려고 시도한다. 한동윤 평론가는 버벌진트보다 윤리적이기에 둘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암시한다. 이는 창작자(버벌진트)와 비평가(한동윤)라는 두 정체성과 결합하며, 창작자에 대한 비평가의 권위를 암묵적으로 형성한다. 형성된 권위는 “쓰레기”나 “찌질이” 같은 모욕과 조롱마저 비평의 일부로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비평의 탈을 쓴 비난일 뿐이다.

 

약자를 희롱하는 왕을 희롱하기 위해 또 다른 약자를 희롱한다는 것

2017년 4월의 글, <약자를 희롱하는 왕, 스윙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의 초반부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뇌의 기능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뇌가 생각 전반을 담당하며 인간의 말이나 행동을 절제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스윙스가 “불편한 진실”이라는 곡에서 故 최진실 씨와 그녀의 자녀들을 소재로 쓴 일은 무절제한 일이고, 이는 뇌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식의 논리로 글을 전개해나간다. 스윙스의 가사는 명백히 한동윤 평론가의 말처럼 불편하고 역겨운 가사이다. 그러나 가사가 고인을 모욕하고 있고 그녀의 자녀들까지도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이나 “인간말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 “정신 나간 폭군”과 같은 원색적인 표현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스윙스가 약자를 희롱했기에, 한동윤 평론가 또한 그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잘못된 지점을 비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또 다른 타자를 조롱하고 희화화한다는 점이다. 한동윤 평론가는 글에서 “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이나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등의 표현을 스윙스를 조롱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한다. 정신 장애가 있거나 뇌에 장애가 있는 상태를 누군가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장애인 혐오다. 스윙스의 가사는 분명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비판이 아닌 조롱을 받을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 조롱은 결코 혐오로 가득 찬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버벌진트에게>와 마찬가지로, 이 글 <약자를 희롱하는 왕, 스윙스> 또한 비평가의 권위를 재생산한다. 다만 그 방식이 조금 다른데, 이 글에서는 비평가를 창작자보다 지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내세워 권위를 도출한다. 한동윤 평론가에 의하면, 스윙스는 “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 사람이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반면, 한동윤 평론가 본인은 스윙스의 비윤리적인 가사를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르게 말하자면, 뇌가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권력 구조를 가져와서 창작자(스윙스)와 비평가(한동윤)의 관계에 대입함으로써,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암시하고 이를 토대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토르발트 니스(Thorvald Niss), “익사한 유령이 새로운 희생자를 바다로 끌고 가다”

 

권위라는 이름의 유령

이렇듯, 나는 두 글에서 ‘권위’라는 케케묵은 유령을 마주한다.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비평가의 권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어쩌면 이제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유령이 실재하는지 그 여부조차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것의 흔적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러나 서문에서 인용한 푸코의 말처럼, 권위는 비평이 최우선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비평가는 쉽게 길을 잃는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권위가 되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한동윤 평론가의 경우, 윤리라는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창작자와의 수직적인 위계를 성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획득하려고 한다. 물론 그가 지적한 가사들이 비윤리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사를 만들어낸 음악가들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판단 또한 합리적이다. 그러나 좋은 비평이라면, 음악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이를 비난하기보다는, 혐오를 생산하는 구조에 대한 성찰이나 혐오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소비하는 상황에 대해 지적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글이 지적한 가사와 음악가가 기반을 두고 있는 혐오라는 권위 자체에 맞섰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음악가의 비윤리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비난하며, 자신의 윤리를 증명할 뿐이다. 그렇게 증명한 ‘윤리성’을 통해서 그는 음악가와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끝내 이를 통해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도출해낸다. 이렇게 도출된 권위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권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비평가와 그의 비평(이라고 오해되는 것)만이 남는다. 요컨대, 그는 ‘권위’라는 유령에게 홀려, 그 스스로 ‘권위’라는 유령이 되고 만다.

 

대중음악 비평 웹진’ IZM에 대한 의문

마지막으로, <버벌진트에게>를 살펴보며 유추할 수 있는 다른 맥락의 문제점을 언급하려고 한다. <버벌진트에게>의 중간부에는 “저번 리뷰와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웹진의 편집 방향과 무관하다.”라는 문장이 있다. 해당 글은 대중음악웹진 IZM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매체 내에 존재하는 편집 기조와 관계없이 게재된 글이라는 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유추할 수 있게끔 한다.

첫 번째로는 IZM 내에 데스크가 부재한 경우이다. 많은 매체는 개별 필자의 글을 공개하기 전, 교정/교열과 같은 과정과 더불어 해당 매체의 전반적인 편집 방향과 글의 방향성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데스크는 매체가 게재하는 글들 사이의 통일성과 매체의 색깔을 확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그러나 웹진의 편집 방향과 무관한 글이 게재되었고 심지어 웹의 메인 페이지에도 노출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IZM에는 그러한 기본적인 구조가 부재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현재 정민재 편집장이 존재함을 고려했을 때 이 경우는 아닐 확률이 높다.

사실 그렇다면 더 큰 문제를 갖는다. 글이 공개되기 전 데스크나 에디터가 존재하고 이를 검토한 후에 게재했음에도, 해당 글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대중음악웹진 IZM은 비평가 집단이다. 앞서 푸코를 인용하며 말했듯이, 비평은 비판과 평가에 기반을 두는 행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권위에 맞서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한 두 글은 IZM에 끝내 게재되었는데, 이는 ‘권위에 맞서는 것’인 비평의 기본을 IZM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게 한다.

 

몰락하는 것들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기

“비평은 몰락하는 것들의 질긴 미련을 마지막 한 자락까지 지켜보는 최후의 파수꾼이다.”2 문학평론가 소영현의 문장을 옮겨 적는다. 이 문장을 읽으며 계속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몰락하는 것들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파수꾼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였다. 그 순간 비평의 표정은 아주 냉철하게 감정을 숨긴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연민과 동정이 가득 담긴 아주 따뜻한 표정으로 몰락하는 것들의 최후를 바라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비장하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정한 단 하나의 표정만을 비평의 표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 파수꾼은 몰락하는 것들을 조롱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몰락하는 것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순간, 그것은 비난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것은 비평이 아니다. | 전대한 jeondaehan @naver.com

 

  1.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동녘, 2017, pg 46~47
  2. 소영현, 『올빼미의 숲 – 사회비평 선언』, 문학과지성사, 2017, pg 7.

2 Responses

  1. yjh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전대한 평론가님과 다른 의견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ㅎㅅㅎ! 일단 짚어주고 계신 이즘 글은 누가 봐도 비평글은 아니였어요. 한동윤 평론가도 비평으로 쓸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구요. 그 누구도 그 글을 비평으로 보지않았는데, 그리고 애초에 이즘에서도 비평의 목적으로 올린 것 같지 않은데 이건 비평이 아닌 저급한 조롱이라는 말씀은 다소 허수아비 때리기 혹은 쉐도우 복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비평답지 않은 글이 이즘에 올라왔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시스템 혹은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추론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콕 찝어서 글 링크를 걸기는 힘들지만 빌보드, 피치포크, 롤링스톤 같은 해외 여러 비평 매체도 뻘소리에 가까운 가십성 아티클도 충분히 많이 올라온다고 보이거든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시는건 아닌가 감히 반기를 들어봅니다ㅎㅎ 아 물론 저 개인적으로도 한동윤 평론가님께서 더 쿨하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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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년의 노래

    잘 읽었습니다. 이즘의 경우 진행하고 있는 팟캐를 아주 재밌게 듣고 있고 특히 진행자이신 정민재 편집장님을 참 좋아했는데, 이 글이 사실이라면 어느 정도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보네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최근 아이돌 음악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면서 아이돌 음악을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요. 근데 이 부분에서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와 사소한 장점 하나에도 과찬을 늘어놓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이 조금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회가 되시면 이것도 한 번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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