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데이빗 보위(David Bowie)를 논하면서 그의 페르소나의 역사를 언급한다. 이 언급은 주로 “보위는 매번 음악 활동에서 자신이 취하는 음악 장르와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교체하길 반복했으며, 그것이 보위의 특이성이다”라는 식의 설명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장르의 교체와 페르소나의 교체라는 두 선이 어떻게 교차해 어떤 담론을 생산하는지, 즉 그것이 어떻게 특이성으로 성립되는 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다들 그건 특이해, 라고 말하는 데서 그쳐버리는 것이다. 데이빗 보위를 논함에 있어 페르소나란 필수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음악가로서의 데이빗 보위의 핵심에 대해선 내재적이지 않다는 걸까.

 

데이비드 보위, 그의 영향 | 사이먼 크리츨리, 조동섭 역 | 클레마지크, 2017

 

아마도, 본문에서 다룰 책 [데이비드 보위: 그의 영향]의 저자인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라면 이런 상황을 문제적이라 생각하리라. 이는 비단 그가 보위의 열렬한 팬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보위에 대한 사유란 보위의 궤적을 각각의 영역에서 개별적인 목적을 갖고 치뤄진 각개전투가 아닌,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총체적인 단일 전투로 인식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츨리는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보위와 매 노래에서 창법을 바꾸는 보위와 매 활동에서 장르를 바꾸는 보위 등을 분리시키는 대신(‘Can’t tell them apart at all’) 전부 데이빗 보위라는 하나의 신체, 하나의 장 위에서 분석하려 한다.

보위에 대한 크리츨리의 사유는 단어 ‘nothing’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보위의 가사에 자주 사용되는 ‘nothing’이 형성하는 맥락이 보위의 작업에서 지속되는 면을 강조하며 보위의 사상의 핵심에 가닿는다 주장하는데, 여기서 ‘nothing’은 그것의 보편적인 의미인 ‘아무것도(아닌 것)’이 아닌 (번역에 따르면) ‘무(無)’의 의미로 작동한다. 예컨대 “Heroes”의 한 구절 ‘We’re nothing, and nothing will help us’가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우릴 도울 건 아무것도 없어’가 아닌 ‘우리는 무, 우리를 도울 것은 무’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무’란 ‘아무것도’의 부정적 공백의 ‘무’가 아니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두려운 병으로 빚어진, 거대하게 들썩이는 무’이다. 여기서의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보위의 디스토피아적 비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Five Years”의 종말 직전의 멜랑콜리와 절규, “Drive-In Saturday”의 종말 이후의 세계, [Diamond Dogs]의 그로테스티컬한 거리, “Heroes”의 베를린 등, 보위는 종종 파괴된 세계로 돌아가 그 삭막하고 부조리한 풍경을 노래한다. 보위의 두려움은 이런 풍경의 부정성을 직시하고 그것이 우리 앞의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생성되는 절망의 감정이다. 허나 노래는 그 풍경을 재현하고 두려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초월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간다. 아니, ‘나아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엔 ‘탄생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그 이후에 대한 갈망이 탄생한다. 그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Where Are We Now?”)고 질문할 수 있게 되며, 그 다음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변화를 가능케하기 위해 이 자리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기. 그것이 갈망이며 곧 ‘무’이다.

 

 

보위가 취하는 이런 ‘무’는 비단 가사의 모티프에 그치지 않고 보위의 음악 작업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페르소나의 가차없는 폐기와 또 다른 페르소나의 생산(그리고 이 구도의 반복), 창법의 변이, 새로운 장르에의 시도, 서사적 정체성 대신 컷업 테크닉의 가사, 환영을 인지하는 메타-환영, 자유주의적 비판 대신 장 자체에 대한 부정 – “이건 게임이 아니야(It’s No Game)” – … 자, 이제 이렇게 말해야겠다. 보위가 곧 ‘무’다. 데이빗 보위의 작업들은 변화를 가능케하는 총체적인 ‘무’라는 선을 형성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간다.

크리츨리는 진정성이란 저주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우리가 부조리한 세상을 온전히 납득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단일한 현실/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현실을 찾는 투쟁은 갈수록 무용과 무의미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투쟁이란 무엇인가? 그는 데이빗 보위를 이에 대한 전범으로 묘사한다. 보위가 다양한 ‘가짜’의 자의식을 생산하고 파기하고 교체하길 반복하며 자신을 단일성 없는 무로 지운 채 복수의 정체성을 수행 – 이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수행과는 다른 말이다 – 할 때, 거기엔 진정성의 논리를 답파하는 탈정체화가 작동한다. 진짜란, 본질이란, 단일성이란 없다. 오직 선택되는 환영들만이 여기에 있을 뿐이며, 그 환영들은 실재에 실재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그 환영은 더 이상 ‘환영’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보위의 투쟁이란 끊임없이 생성되는 (더 이상 ‘환영’이 아닌) 환영들을 통해 진정성을 부정하고 단일성을 해체하는 데에 그 궁극적 목표가 있다. “보위의 진실은 가짜이며, 철저히 자의식에서 나오며, 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옳다.” 왜냐하면 거기엔 ”새 얼굴들을 취하고 새 환영들을 만들고 새 형식들을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탈영토화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고 이를 존재 기반으로 삼는 ‘존재’가 아닌, 매 순간마다 변화하는 주체성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이게 진정한 나라고,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하더라도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알리바이를 구성하면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넘어서버리는 것이 곧 인간의 잠재성임을, 데이빗 보위는 온 몸으로 우리에게 역설했던 것이라고 크리츨리는 본다.

 

 

하지만 [데이비드 보위: 그의 영향]이 그 자체로 보위에 대한 작가론으로 서기에는 무리가 있다. 크리츨리는 여기서 음악가에 대해 할 수 있는 범용한 비평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책을 읽은 [weiv]의 독자들 역시 같은 기시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그가 보위의 음악 작업을 대함에 있어 시를 대하는 방식과 같은 것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노래란 멜로디와 화성과 리듬과 보컬-가사의 총체적 화학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에도, 그의 주 분석 대상은 가사와 그것의 의미에 한정되며 가끔 언급되는 다른 음악적 요소들은 기껏해야 부차적인 수사에 사용될 뿐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시어를 뒷받침하고 장식하는 요소에 불과한 것일까. “보위는 시인이다”라는 크리츨리의 단언은 그런 점에서 문제적이다. 물론 전문 비평가가 아닌 철학자에게 그런 엄밀함을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보위에 대한 사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있는 게 [데이비드 보위: 그의 영향]이고, 그런 만큼 이에 대해 아쉬움을 지우기는 어렵다.

사실 이 이전에도, 책의 구성은 다소 통일성이 떨어진다. 이는 이 책이 회고록과 미학론과 철학 에세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려 해서가 아니라, 논의의 구성이 지나치게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각 장이 지나치게 짧고 하나의 장 안에서도 거의 문장마다 진행중이던 논의가 중단되고 다른 논의가 제시되다보니 독자로선 문제 파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양의 문제가 아닌, 한정된 양 안에서 얼마나 세심한 논리를 펼쳐냈느냐의 문제다. 책의 한 장의 이름을 차용하자면, [데이비드 보위: 그의 영향]은 “깜빡이는 단편적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이먼 크리츨리의 보위 결산의 한 방향이겠으나, 어디까지나 보위의 철학적 독해를 위한 입문으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 아랑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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