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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0년대의 포스트록 (下)

1996년에서 시작해 2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왔다. 기다면 긴 시간 동안 국내의 포스트록은 꾸준히 성장해왔고 중요한 순간들을 여럿 맞아왔다. 주로 그 내외적인 성장이 드러나는 훌륭한 음반들이 한꺼번에 나온 해가 거기에 해당하는데 개인적으로는 2006년과 2009년 전후가 그러한 시기라고 본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찾아온 중요한 순간은 2014년 전후다. 이 글에서 소개할 음반들뿐 아니라 이미 소개했던 로로스의 [W.A.N.D.Y]와 할로우 잰의 [Day Off], 글리터링 블랙니스, 폴의 [Untitled] 등의 작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2006년이 1996년부터 쌓아올린 포스트록 10년의 성과고, 2009년 전후가 그 10년의 성과를 발판 삼아 본격적으로 시작된 포스트록의 출사라면 2014년은 국내의 포스트록이 더욱 넓고 깊게 만개하고 있다는 증거다. 특히 이 때 나오는 음반들은 여러 방향으로 ‘록 이후’를 추구하는 ‘포스트’의 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담으며 포스트록이 가장 처음에 지녔던 가능성을 다시금 펼쳐나간다. 그 빛나는 2014년과 2015년의 음반들까지 우리의 포스트록의 현재를 소개한다.

 

 

 

 

로만티카 [Revenge] (2014)

 

 

로만티카의 데뷔 정규 음반 [Revenge]에 담긴 포스트록은 클래식 록, 특히 싸이키델릭 록과 하드 록의 여러 요소들과 포스트록을 결합하며 장르 결합의 시도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옐로우키친의 전자음악이나 불싸조의 샘플링처럼 선배 포스트록 밴드들이 록의 바깥에서 새로운 장르들을 끌어왔다면, 아폴로18이나 모즈다이브, 로만티카처럼 록의 내부에서 다른 장르들을 끌어오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Revenge]에 담긴 싸이키델릭-포스트록은 다른 모든 장르 결합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걸 증명한다. “This Isn’t Revenge”를 비롯한 초반부의 곡들에서 이를 잡아낼 수 있는데, 주 기타의 이펙터가 걸린 싸이키델릭한 리프는 부기타와 리듬 파트가 만들어내는 꽉 찬 공간감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은 더 나아가 일종의 묵직한 헤비 싸이키(Heavy Psych)의 감각으로 진행되는 동시에 포스트록적인 서사와 광활함을 부여하면서 형식적으로도 완성된다.

당장에 “Cold Night”의 강렬한 후반부에서 짙은 기타 노이즈와 묵직한 리듬 파트의 구성이 포스트록 특유의 공간감과 만났을 때 만드는 로만티카만의 고유한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 이는 특히 “Small Words, Big News”와 같이 서정적이고 웅장한 순간과 무겁고 강렬한 순간이 교차하는 곡에서 최고의 효과를 낸다. 특히나 이 곡은 드럼이 잘게 쪼개 만들어낸 매쓰록적인 긴장감을 훌륭하게 이용하며 장르적인 한계들을 깔끔하게 넘어서기도 한다. 이 결합에서 하드록적인 성향을 최대로 늘려 제목과 딱 맞게 ‘텐션’을 키운 두 곡을 지나 음반의 중앙에서 분위기를 확실히 잡는 “Play What’s Not There”은 변칙적인 박자와 주술적인 리프로 싸이키델릭적인 분위기를 짙게 조성한다. 여기에 묵직한 포스트록적인 접근으로 한 번 더 장르적인 경계를 넓힌다. 몇 개의 짧고 굵은 곡들을 지난 후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Boris Aurorialris”와 “Only One Slight Eternity”는 로만티카의 장르결합적인 스타일을 가장 다양하게 들려주는 곡들로 포스트록의 서사적인 구성과 공간감, 싸이키델릭한 분위기와 리프, 하드록적인 연주, 매쓰록적인 박자, “Only One Slight Eternity”에서는 심지어 스크리모까지 모든 요소들을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용광로처럼 섞어내 그들만의 포스트록을 만들어낸다. 곧 로만티카의 포스트록, 그리고 [Revenge]는 록 내부에서의 창조적인 결합으로 안쪽을 허물며 나아가는 포스트록이다.

 

 

루흐 [Escape From Reality] (2014)

 

 

루흐의 포스트록은 전형성을 깔끔하게 담은 모범생 같은 포스트록이다. 혹자는 그 전형성 자체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장르 팬에 입장에서는 이렇게 전형적으로 잘 만든 음반은 언제나 환영이다. 특히나 [Escape From Reality]는 무척이나 안정적인 음반이다.

서로 이어지는 6분가량의 첫 두 곡에서 분위기를 설정한 다음 이어지는 상대적으로 긴 길이의 “Crush”와 “엉겅퀴”에서는 서사적인 구성을 더욱 담대하게 이어나가 웅장한 전개를 들려준다. 특히 긴장감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Crush”와 서정성와 포스트록적인 ‘폭발’을 극대화시킨 “엉겅퀴”를 대비적으로 놓아 루흐의 포스트록을 좀 더 깊숙이 전개한다. 이후 상대적으로 짧은 두 곡을 지나며 고조된 분위기를 조금은 가라앉힌 뒤 (물론 이 두 곡도 3분 안에 훌륭한 전개를 펼쳐내는 곡들이며 특히 “Shaman Fire”의 변칙적인 박자는 전형적인 포스트록을 새롭게 변주해냈다.) “A Stranded Ship”에서 “엉겅퀴”의 극적인 구성을 더욱 넓히며 10분 동안 음반의 절정부로써의 그 역할을 수행해낸다. 묵직해진 리듬 파트와 극적인 멜로디, 절정 이후의 여운까지 포스트록 특유의 어법들을 깔끔하게 활용한 좋은 예시라고 본다.

이렇게 장르의 전형성을 파고들어가 일정한 서사성까지 획득하는 루흐의 태도는 두 파트로 나뉜 마지막 곡 “The Gate Behind The Wall”에서 빛난다. 서정적인 기타 리프를 반복해 긴장감을 쌓은 파트 1과 반대로 파트2는 묵직한 리듬 파트로 시작해 이를 서정성과 합쳐낸 군더더기 없는 연주로 이어가 담백하지만 확실한 여운을 남기며 음반을 마친다. 이렇게 [Escape From Reality]에서 루흐는 포스트록의 익숙한 공식과 도식을 적절하게 담아낸다.

 

 

아이러닉 휴 [For Melting Steel] (2014)

 

 

아이러닉 휴는 포스트록과 모던 록, 싸이키델릭 록 사이에서 격정적으로 절충점을 찾은 밴드다. 세 장르를 삼각형 같이 꼭짓점으로 삼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있는 다른 밴드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일찍 데뷔한 아이러닉 휴는 2007년의 첫 정규 음반 [Into The Mirror]에서 모던 록에 포스트록적인 접근을 일부 추가했고, [For Melting Steel]은 이를 좀 더 정제하고 발전시키며 본격적으로 장르의 경계를 탐구한다. “물과 태양”이나 “Fantasy” 등 음반의 전반부에서 이전처럼 모던 록과 더불어 영국/아일랜드적인 포크 록 스타일이 강한 음악을 함께 담아 들려주지만, 후반부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모던 록과 포크 록에 싸이키델릭과 포스트록을 섞어내며, 군데군데 프로그레시브 록의 느낌까지 동원해 이전까지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무언가를 들려준다. 음반의 중앙에서 앞과 뒤를 잇는 짧은 “For Melting Steal”의 이국적인 느낌을 지나간 뒤 시작되는 “거짓말”은 강렬한 이펙트의 기타와 격렬하게 소리 지르는 보컬의 후렴구로 싸이키델릭한 성향을 극한으로 끌어간다. 이 지점에서부터 아이러닉 휴는 조금 더 대담하게 다양한 장르들을 섞어나간다. “문”은 포크 록적으로 시작되지만, 처음부터 후방에 깔린 기타 노이즈 한 줄이 복선처럼 그 부피를 키워 이를 모던 록적인 분위기로 발전시키고, 종래에는 이를 완전히 폭발시키며 강렬한 기타 연주가 깔린 이국적이고 싸이키델릭한 후반부를 만들어낸다.

어딘가 익숙한 이 서사적인 전개 방식은 14분의 대곡 “작은 사람”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싸이키델릭한 기타 리프와 이국적인 멜로디를 병치한 3분 정도의 초반부는 사이렌부터 도시 소음까지 여러 사운드에 실려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다. 초반에 쌓은 감각은 조금 더 프로그레시브한 분위기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색채가 짙은 기타 리프와 함께 색다른 곳으로 진행된다. 두근거리는 드럼에 맞춰 지글거리는 기타와 서정적인 허밍은 차분하고 느리게 진행되어 긴장을 착착 쌓아가고, 노랫말과 함께 진행되는 다음 부분은 이 프로그레시브함을 최대한으로 키우며 이어지는 부분을 위한 훌륭한 발판이 된다. 대곡의 절정부에 놓인 연주 파트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분위기들을 연주의 형태로 승화시켜 확실한 서사적 쾌감을 주며 변칙적인 박자가 돋보이는 클라이막스로, 그리고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Dummy”로 이어진다. “Dummy”는 이때까지의 싸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 성향에 포스트록적인 전개를 더해 음반이 진행되는 내내 쌓아올린 감각을 웅장하게 폭발시키며 음반을 마무리한다.

조금 더 넓은 범위의 포스트록 안에는 항상 경계 사이에서 이리저리 넘나드는 음악인들과 그 경계들의 중심에 서서 전혀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음악인들이 있다. 아이러닉 휴가 [For Melting Steel]에서 들려준 음악도 그런 의미에서 장르적으로는 엄연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포스트록이라고 칭할 수 있지 않을까.

 

 

해오 [Structure] (2014)

 

 

로만티카와 아이러닉 휴가 록의 내부에서 장르적인 결합을 이뤘다면, 해오는 록의 바깥에서 장르적인 결합을 이룬 경우로 어떻게 보면 1990년대의 옐로우 키친에 대한 2010대만의 화답이라고 볼 수도 있다. 1집에서는 포크 중심의 드림 팝, 3집에서는 완연한 전자음악을 들려주지만, 그 사이 과도기를 담당하는 [Structure]는 오히려 그렇기에 해오의 포스트록적인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전자음악을 단초로 삼은 해오는 이를 다른 장르와 섞으며 “Luna”와 “Reckless”의 드림 팝, “All The Things Are Passing By” “In Sight Of Light”의 포크트로니카 등을 중심으로 음반을 전개하지만 [Structure]의 다른 축에는 “Word of Silence”와 “Ride The Wave”, 그리고 “Hard To Keep”의 짙은 포스트록이 있다. 먼저 “Word of Silence”는 훅에서 전자음이 만들어낸 노이즈와 공간감을 반복하며 넓고 웅장한 소리의 공간을 조성하며, 여기에 기타를 비롯한 악기들이 그 빈 사이로 들어가 곡의 긴장감을 지속시킨다. 전자음이 강한 후렴구와 실물 악기를 폭넓게 사용한 훅을 차례차례 반복하는 것으로 “Word of Silence”는 구조적인 완결성을 띤다. 이는 “Ride The Wave”에서도 무척 비슷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짙은 겹으로 빽빽이 조성된 기타 노이즈가 훅의 주된 소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곡은 전통적인 포스트록의 문법에 훨씬 더 가깝지만 반대로 브릿지의 역할을 하는 부분에 전자음을 배치해 “Word of Silence”와는 비슷한 듯 다른 효과를 내는 동시에 역시나 서사적인 완성도를 확실히 가져간다.

이 두 곡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웅장한 깊이와 빠른 속도로 채워진 것에 비해 “Hard To Keep”은 11분의 긴 길이를 캔버스 삼아 자유로운 장르 결합을 시도한다. 미니멀하고 차분한 구성의 도입부는 비트와 노이즈가 들어오는 순간 그 긴장을 천천히 끌어올린다. 이 위에 곧바로 드럼과 개러지한 연주를 투입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다음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조금 성글긴 하지만, 맑은 기타 리프에서 몽환적인 전자음 비트로, 그리고 서정적인 피아노로 흘러가는 부분은 다시금 그 긴장감을 충분히 쌓아올려 이전보다는 더 확실한 후렴구로 나아간다. [Structure]라는 제목을 생각해 보면, 해오의 포스트록이 전자음악 등 다른 장르와의 결합 속에서 어떤 ‘구조’로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썸머 네버 컴즈 [Black Out] (2015)

 

 

2013년 [이누이트 EP]로 훌륭하게 데뷔한 썸머 네버 컴즈는 첫 번째 정규작 [Black Out]에서 ‘사후세계’라는 컨셉에 맞춘 포스트록을 들려주며, 이는 하나의 장엄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Post World”에서 Dark Side Moon”까지 사후세계에서의 갈등과 고민을 담았다는 1부에서는 데뷔 때부터 들려줬던 기타 중심의 포스트록 사운드의 합을 조금 더 발전시키며 밴드 내부에서의 기술적인 진화를 들려주며, 특히 기타 연주와 이를 둘러싼 악기들의 구성의 점진적인 변화만으로도 영화적인 전개를 이끄는 대곡 “Dark Side Moon”으로 훌륭하게 1부를 마무리한다.

그 마무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Dance of Death”부터 “Curtain Call”까지의 2부는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만큼 1부의 속도를 훨씬 더 늘이고 악기들을 더욱 빽빽하게 배치하며 긴장감을 키운다. 재미있게도 3곡으로 구성된 2부는 빠르고 직설적인 첫 곡과 마지막 곡의 사이에 상대적으로 느리고 서정적인 “Behind The Scene”을 집어넣었고, 이는 한 곡처럼 이어져 나가는 일종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Curtain Call”은 청량함과 웅장함을 오가는 분위기에서 속도를 최고조로 끌고 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3부로 이야기를 넘기며, “Trigger Point”에서 “Reboot”까지의 3부는 희망이 주제인 만큼 훨씬 더 밝은 분위기에서 이어진다. 3부의 중앙에 놓여 음반의 서사적인 절정이 되는 “Canna”는 초반에는 탄탄하고 밀도 높은 리듬 파트의 구성으로 깔끔한 긴장감을 만들어 서정적인 후반부의 전개를 받치고, 음반을 닫는 “Defibrillation”-“Reboot”는 부활의 의미에 맞게 가장 서사적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며 사후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을 완결 짓는다.

[Black Out]에는 이렇게 ‘이야기’의 지극히 기본적인 3단 구성인 처음-중간-끝이 가득하다. 썸머 네버 컴즈는 이 3단 구성을 음반 전체/각 파트/곡 내부 등 다양한 범위에서 음악적으로 담아내 마치 모든 소리와 구성에서 ‘서사’에 탐닉하는 듯한 음반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장르적 구성은 물론 음반 구성 자체에서도 서사를 탐구하는 썸머 네버 컴즈의 시도는 [Incomplete Autobiography]에서도 계속되는 중이다.

 

 

이사히 [Thanatos] (2015)

 

 

1인 포스트록 밴드로써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는 이사히는 여러 측면에서 전례가 없는 포스트록 음악인이다. [Nisahilism]를 비롯한 2016년의 근작들에서는 훨씬 더 어두운 색채의 블랙 메탈까지 도입하며 포스트 메탈 혹은 블랙게이즈(Blackgaze)까지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Thanatos]는 2014년의 비교적 따스한 성향과 2016년의 어두운 성향의 중간 지대에 있는 음반으로써 이사히의 다양한 포스트록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는 음반이다.

1인 포스트록 밴드인지라 리듬 파트 등에서 가상 악기를 사용해 실물 악기의 소리와는 차이가 있지만, 이사히는 포스트록적인 구성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이를 보완한다. 첫 두 곡 “Narcissism of Self-Animosity”와 “Bleached Black”에서 그 활용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데, 짙은 기타 트레몰로를 중심으로 한 확실한 서사 구조다. 이사히의 포스트록은 어둡고 강한 부분과 서정적이고 차분한 부분 사이의 거리를 훨씬 더 넓히고, 각 지점에서 극단을 향해가는 성향이 강하다. 이 두 곡은 그러한 형태에서 나오는 극적인 긴장감으로 악기에서의 빈약함을 보강한다. 특히나 “Bleached Black”의 중반부는 파괴적인 블랙 메탈 바로 뒤에 서정적인 연주를 넣고 이 둘을 합쳐낸 일종의 정반합적인 구성으로 두 세계 사이의 훌륭한 다리가 된다. 분위기를 환기하는 섬세한 피아노 연주곡에 이어 전작의 서정적인 구성을 환기시키는 “Plastic Love”는 후반에 강렬한 노이즈를 배치하고, “Merry Orange”는 박자를 잘게 쪼개는 것으로 음반에 다양성을 더한다. 겹겹이 쌓인 기타 노이즈만으로도 묵직한 감각을 전해주는 동시에 후반부의 지옥도 같은 샘플링을 통해 이후의 성향들을 예고하는 “Self-Annihilation”, 그리고 가장 긴 곡임에도 거칠고 폭발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상대적으로 훨씬 차분하고 정적으로 분위기를 유지하는 “The Drowning”이 다시 한 번 이사히의 스타일을 변주하며 음반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로파이한 기타 연주로 마무리되는 [Thanatos]는 폭발할 때는 확실히 폭발하고 가라앉을 때는 확실히 가라앉는 미학을 선보인다. 무엇보다도 악기의 한계를 다양한 변주를 통해 견뎌내는 곡들과 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구성이 돋보이며, 이 점을 통해 1인 포스트록 밴드의 가능성까지 유감없이 드러내는 음반이라고 본다.

 

 

포프X포프 [The Divinity And The Flames of Furious Desires] (2015)

 

 

2011년, 더 히치하이커라는 이름으로 [Insatiable Curiosity]에서 음악의 가장 어두운 지평을 탐구하러 나아간 이들은 2015년 포프X포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목적지를 향해 몇 발자국은 더 다가갔다. 이미 전작에서도 다크 앰비언트나 드론을 비롯한 수많은 어두운 장르를 섞어내 맨 정신으로 듣기는 꽤 벅찬 사운드를 선보였지만 포프 엑스 포프는 거기서도 가장 어둡고 기이했던 구간들을 배로 확장시키고 배로 늘려 무려 2시간이 넘는 2CD의 [The Divinity And The Flames of Furious Desires]를 구성했다. 크툴루 뿐만 아니라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나오는 모든 그레이트 올드 원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셈이다.

장르의 경계는 이미 시꺼멓게 지워졌지만 포프X포프는 더 히치하이커의 음악에 클래시컬한 편곡과 더욱 강한 드론 노이즈, 그리고 프리/아방가르드한 연주를 더해, 음반에는 온갖 악기들이 무거운 노이즈를 토해내고 그 노이즈들이 쌓이고 쌓이다 못해 두꺼운 층의 드론이 쌓인다. 이와 연계되어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종교적인 암시와 비유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음반에는 “The Eternal”이나 “Black Tower”처럼 록적인 경향을 띠는 곡도 있고 “Ugoliono”같이 드론 메탈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곡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실험적인 성향의 곡이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Entombment of Ancestors-Celestial Pole”의 종교적인 챈트(chant)나 각각 피아노/오르간 곡인 “Funeral Possesion”, “Intermezzo” 등은 여기에 나름의 멜로디를 부과하지만, ‘Satan’으로 시작하는 두 곡과 심연의 내장을 뚫고 나오는 마지막 곡인 “Metamorphosis”의 경우에는 그 실험성을 최대한으로 키워내 기이한 드론 노이즈/다크 앰비언트만으로 곡들을 채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포스트록은 물론 록의 영역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지만, 더 히치하이커와 [Insatiable Curiosity]이 그랬던 것처럼 ‘포스트’적인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포프X포프는 아무도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해일 [세계관] (2015)

 

 

최근의 포스트록 중에서 정통에 가장 가까우며 그럼에도 특출한 개성으로 독보적인 자리에 둘 수 있는 밴드는 역시 해일일 것이다. 이름처럼 그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세계관]은 여태껏 소개한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맑고 고운 기운의 포스트록을 들려준다. 물론 그 맑고 고운 기운을 들려주는 소리는 지글거리는 노이즈를 뿜는 기타와 두근거리는 리듬 파트지만, 해일은 그러한 접근에서도 충분히 맑고 고운 색깔을 들려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이는 그대로 해일의 포스트록을 이루는 개성이 된다. 이러한 개성은 여타의 밴드와 다르게 맑은 보컬이 들려주는 노랫말을 연주와는 차별화되는 소리로 지정한 덕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정교하고 세밀하게 짜인 연주, 특히나 특유의 트레몰로 덕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제 일어났다”에서 밴드는 지글거리는 기타 트레몰로 하나를 점점 고조되는 식으로 변주하며 그 기운을 크게 부풀린다. 3분의 짧은 길이임에도 곡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그 온도를 끓어 올린다. 프렌지의 정밀한 구성과 아폴로18의 넘치는 열기를 사려 깊게 섞어놓은 듯한 해일만의 연주는 이어지는 “Santa Fe”의 탁월한 구성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특유의 맑고 단단한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훅을 맨 처음에 배치한 다음 차분한 분위기에서 노랫말을 전개하는 것으로 초반의 긴장감을 죽 끌어간다.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중반부 이후 변칙적인 박자의 연주로 곡은 다시 긴장감을 얻고 격정적인 동시에 정갈하기도 한 트레몰로를 통해 서정적으로 해소된다. 긴장과 해소를 반복하는 이 안정적인 구성은 연주곡인 “Fwd:”에서 매쓰록적인 드럼과 함께 더욱 깔끔하게 드러난다. 맑은 바닷물에도 약한 파도가 있고 거센 해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밴드는 조이고 푸는 순간들을 확실하게 배치해 명료한 서사 구조를 만들어냈다. 해일은 이를 제대로 활용해내 다른 웅장하고 거대한 밴드 못지않은 공간감과 분위기를 만든다.

이어지는 “세계관”은 해일만의 맑은 트레몰로를 한 곡의 길이로 늘려 지글대는 노이즈의 강도를 올리고 내리며 ‘청명한 노이즈’를 만든다. 아니, 노이즈가 청명할 수도 있을까? 하지만 해일의 연주는 맑게 지글거리는 리프와 짙게 깔리는 노이즈를 함께 두고 이 밑에 두근거리는 리듬 파트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으로 이를 실현시킨다. 곡의 후반부에서 1분 반 정도 짙게 이어지는 노이즈는 자연스럽게 “어딘가 여기에”로 이어지는데, 여태까지의 음악에 비해 훨씬 더 짙고 어두운 노이즈가 분위기를 조금 바꾸지만, 이 위로 맑은 기타와 보컬이 차근차근 올라오면서 다시 원래의 청명함을 복구시킨다. 이 곡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조되는 분위기를 받아넘기는 건 맑고 짙은 트레몰로다. 이렇게 곡은 포스트록적인 기승전결을 충실한 따르며 넓은 공간에서 뻗어나가듯이 소리들을 전개한다.

이어지는 음반의 가장 긴 트랙 “Hazy Drive”는 한 곡 안에서 해일이 들려줄 수 있는 다양한 사운드들을 어색함 없이 연결한다. 맑은 리프가 울리는 부분이 있고, 짙은 기타 노이즈가 득세하는 부분이 있고, 리듬 파트의 밀도와 속도 모두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고, 강하고 고운 트레몰로 연주가 사방을 가득 채운 부분도 있다. 해일은 퍼즐을 맞추듯이 각 부분들을 다른 부분과 잇고 자연스럽게 곡의 구조 또한 다른 곡들보다 대담하게 짜인다. 맑고 고운 기타 트레몰로라는 고유한 사운드를 축으로, 해일은 짙게 깔린 노이즈를 더하거나, 세심한 매쓰록 박자를 더하거나, 서정적인 보컬과 노랫말을 더하거나 하는 식으로 변주하며 그 세계관을 확실히 드러낸다. 이는 “소실점”에서 제목처럼 하나의 아름다운 지점으로 모이며 맺어진다. 가장 기본적인 기승전결 구성에서 트레몰로를 자유롭고 서정적으로 이용해내 음반을 따스하게 정리하는 방식이다.

해일의 포스트록이 동시대의 포스트록 중에서 가장 빛나는 건 장르의 전형과 도식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도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 덕택이다. 기승전결의 서사, 크고 넓은 공간감, 정교한 연주, (부차적이지만) 서정적인 노랫말 등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여기에 ‘맑음’이라는 특징을 뽑아내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동시대의 포스트록 중에서도 해일은 가장 주목할 밴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언젠가 한국의 포스트록도 이러한 플로우차트를 가질 수 있을까? 출처 reddit

 

자세하지도, 전문적이지도 않지만 가장 처음에 말했듯, 오직 덕심으로 1996년의 옐로우 키친에서 2015년의 해일까지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 20년의 시간들을 갈팡질팡 둘러보았다. 그 시간들에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던 순간이 있었고, 조그마한 시도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탄탄한 판이 된 2006년 전후가 있었고, 이를 발판 삼아 깊이와 넓이를 키워낸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이 있었다. 그리고 2014년 전후로는 이것이 매우 동시대적인 결과로 나타나며 피어났다. 그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이름들이, 음반들이, 노래들이, 연주들이, 음악들이 있었다. 그리고 물론, 지금-여기의 포스트록도 있다. 록의 귀퉁이이고 대중음악의 변두리인 이곳에서도, 역사가 있고 시간이 있고 계보가 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국내 대중음악에서의 포스트록은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왔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음악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더욱 많은 밴드들이 ‘포스트’한 태도를 보여주거나 ‘포스트록’이란 장르를 탐구하고 있으며, 비평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상의날개의 [의식의흐름]이 출중한 완성도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이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 록 음반 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잠비나이가 벨라 유니온에서 [은서]를 내는 것과 더불어 국경을 넘어 다양한 반응들을 얻는 것은 물론 국내의 다른 포스트록 밴드들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되었으며, 팬덤의 시각에서 보자면 매우 적긴 하지만 ‘답은 포스트록이다’하며 장르에 애정을 쏟는 팬들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은 단편적이긴 해도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현상들과 더불어 20년간의 여러 장면들을 살펴봤을 때, 국내의 포스트록이 확실히 자랐다고, 그것도 무지하게 멋있게 자랐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당장에 올해 2017년만 보더라도,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의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 팎(PAKK)의 [곡소리], 체온의 [정적의 춤], 도재명의 [토성의 영향 아래]… 포스트록은 지금도 계속된다.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있다. 연주하는 사람들, 듣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사람들. 확실하다. 우리의 포스트록은 진행 중이다.

수많은 음악인과 밴드의 시도가 쌓이고 쌓여 이렇게까지 높이 닿았다. 이제 여기에서 어떻게 될지는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음반이, 어떤 밴드가, 어떤 포스트록이, 어떤 음악이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그것이 씬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아무도 모른다. 한국의 포스트록이 세계의 포스트록에서 어떤 위치에 오르거나 어떤 특징을 가질 지도 모르는 일이며, 사실 전 세계의 포스트록이 나중에 어찌될 지도 솔직히 누가 알까. 3세대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4세대 포스트록이 나와버릴 지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 서툴게나마 넓고 깊은 세계를 여기저기 둘러본 입장에서, 지금-여기-우리의 포스트록에 역사가, 깊이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또 그 역사와 깊이는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이고, 아직 펼쳐지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계속될 것이라는 것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단지 포스트록 뿐만 아니라 록이, 대중음악이, 예술이, 그리고 모든 말과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왔던 것처럼.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으며,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비평의 영역이든, 덕질의 영역이든, 창작의 영역이든, 분명히 끊임없이 이어지며 계속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항상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록의 종말과 음악의 종말, 예술의 종말을 말해왔다. 줄기차게, 끝도 없이, 오랫동안. 이제 이건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소진되었다고. 종말해버렸다고. 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록 앞에 감히 그 이후를 상상하며 ‘포스트’를 붙인 장르가 하나 있고, 그 장르는 생각보다 ‘종말’하지 않으며 이어져왔고, 심지어 록의 변두리, 포스트록의 귀퉁이인 지금-여기에서도 이렇게 환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비단 포스트록 뿐만이 아니라고도 말이다.

사실, 포스트록이, 록이, 대중음악이, 음악이, 예술이, 끝났다면 진작에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만 년 전에 말이다. ‘예술’이라는 게 시작된 지는 저 까마득한 몇 만 년 전이다. 그 몇 만 년 전의 시간부터, 그 때의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도 참 까마득한 시간부터 음악이, 예술이 있었다. 그 기나긴 시간동안 그 모든 음악과 예술은 수많은 ‘종말’의 위기를 견뎌왔다. 사실 그 정도까지 되면 ‘위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예술의 거대한 시간 앞에서, 포스트록이 고작 30년 되었다고 해서, 록이 고작 60년 되었다고 해서 끝나버린다는 말은 너무 이르다. 한참 이르다. 종말은 없고, 음악은 길다. 포스트록 곡들의 무진장 긴 연주 시간처럼, 이 시간은 끝없이 이어진다. 영원으로. 지금-여기의 예술은 과거로 가지만, 또 다른 지금-여기의 예술이 나타났고, 나타날 것이다. 나타난다. 반드시.

우리의 포스트록은 지금-여기에 있다. 지금-여기에 우리의 포스트록이 있다. 포스트록은 우리와 지금-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찾은 건 끝나지 않을 시간들이며, 영원히 이어질 순간들이다. 어느 유명한 포스트록 음반 제목처럼, 우리는 천국을 향한 안테나처럼 야윈 두 주먹을 들어올리고, 지금-여기의 포스트록을, 지금-여기의 음악들을, 예술들을 맞이한다. 그렇게 맞이한 모든 것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여기의 우리들에게 끝난 건 아무것도 없고, 실로 아직 많은 것들이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 우리의 포스트록과 그 많은 음악과 예술이 지금-여기에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라고. 찾는 건 계속 되고,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고 이야기한다. 찾았고, 이야기했고, 찾을 것이고, 이야기할 것이다. 끝나지 않는 지금-여기에서, 함께 이야기하는 우리들과 같이. | 나원영 [email protected]

 

One Response

  1. 사차원

    이렇게 시리즈가 길어질줄은 몰랐는데 끝이군요.
    평소 포스트락 즐겨 듣는데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모르는 밴드가 많은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좋은 음악들 많이 알게되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특히 좋아하는 헤일이 나오디 좋네요.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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